여름은 오전 보컬 트레이닝을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여름의 폰으로 문자가 왔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랐다. 문자의 내용은 다용도룸으로 오라는 통보였다.

 

문자의 말투나 분위기로 보아 장난인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화이트로드 엔터의 내부 사람이 아니라면 다용도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여름은 문자를 보낸 사람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뒀다. 스팸 문자나 장난 문자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름은 식당을 가려는 발걸음을 돌려 다용도룸으로 향했다.

 

여름은 노크를 하고 다용도룸으로 들어섰다.

 

감각적인 여성용 세미 정장을 입은 누군가가 서서 다용도룸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포즈나 표정으로 보아 미술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일반적인 연예인과는 다른 귀티 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불렀을까?

 

여름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다용도룸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이 여자가 자신을 불렀는지, 아니면 우연히 이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름 씨. 혹시 그림 좋아해요?”

 

여자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권위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품위와 예의도 있었다.

 

여름은 본능적으로 이 여자가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네? 네? 저, 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미술에 취미는 없어요. 가끔 소설은 읽어요.”

 

여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평소에 예의가 바른 여름이었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권위 같은 것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턱을 짚으며 그림을 보던 여자는 뒤돌아서서 여름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소설요?”

“고전 소설이요. 버지니아 울프라든지, 프란츠 카프카라든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좋은 작가들이네요. 시간의 풍파를 견디고도 아직까지 작품이 널리 읽히고 있는 작가들이죠. 저도 책은 자주 읽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냉랭했다.

여름은 궁금했다. 이 여자는 원래 이런 사람일까?

 

“혹시 저를 부르신 분인가요?”

 

여름은 약간은 수줍게 물었다. 그러자 눈앞의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우리 회사에 들어온 가수 지망생 구여름 씨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여름 씨. 여름 씨는 지금 혹시 사랑을 하고 있나요?”

 

여자는 차갑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여름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솔직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제가 알고 있는 사실하고 같네요.”

 

여자는, 아니 은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여름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름 씨 덕분에 에바하고 재계약이 잘 진행될 거 같아요. 그전에는 에바가 재계약에 소극적이었는데 지금은 여름 씨 덕분에 적극적으로 변했거든요. 저희 회장님도 에바 정말 좋아하세요. 재계약은 따놓은 당상 같아요.”

“제가 원한 건 아니지만....... 고맙다면 그걸로도 다행이네요.”

 

여름은 그러면서도 궁금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이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물어볼까? 당신은 누구시죠? 죄송한데 혹시 누구십니까?

 

굉장히 낯선 상황이었기에 여름은 눈앞의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어떻게 물어봐야할지를 몰랐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여름은 눈앞의 사람에 대해서 물을 수가 있었다.

 

은영은 조금 당혹스러운 느낌이었다.

평소에 워낙 무표정한 은영이었기에 여름은 은영의 그러한 감정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은영은 뺨을 긁고 눈동자를 창밖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이 회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면서도 은영은 여름을 이해했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니까.

 

은영은 장난이나 농담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어쩐지 장난을 치고 싶고 농담을 하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구여름이라는 아이는 어쩐지 놀리면 재밌을 것 같은 타입 같았다.

 

“이 회사에서 십 년 정도 일한 사람이에요...... 영업직이고...... 재작년에 이혼한 경력도 있고요.”

 

은영은 단 하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화이트로드에서 일한지 십 년이 되었으며 정말로 재작년에 이혼을 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사업 자체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영업직이었으니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여름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광고나 협찬 따내는 외부업체 직원이시긴가 보군요? 정말 놀랐어요. 저는 회사의 높은 분이신 줄 알고. 그리고 이혼 이야기는 조금......”

 

여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아픈 기억이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는 별로 상관없는데 그런 쪽으로 아직도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게 서로에게 좋아요.”

 

여전히 은영은 무표정하게 여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영민한 머리로 구여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파악을 끝내고 있었다.

 

순진한 아이네. 선의를 내보이는데 거리낌이 없고. 사업을 할 만한 타입은 절대 아니겠네.

 

연예계에서도 버틸만한 그릇일까? 이 순진한 성격이 상품으로 잘 어필될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은영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진지한 얼굴로 변화라고 해봤자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서 여름 씨. 에바하고 친하죠? 에바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늘 여름을 만나고자 했던 궁극적인 궁금증. 은영은 팔짱을 끼고 다시 고압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여름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제가 이 회사에 들어온 게 에바 언니 덕분이라는 소문 때문에 물어보시는 거죠? 거창한 사이는 아니에요. 제가 에바 언니한테 느끼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우정이고요. 그런데 진짜 외부업체 직원 분 맞죠?”

 

여름은 뭔가 느낌이 찜찜하다 싶어 다시 물어보았다.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으니 은영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족스럽다는 표정이라고 해도 역시나 남은 눈치 챌 수 없는 표정 변화였지만.

 

“솔직하게 답변해줘서 고마워요. 식사하러 가세요.”

 

은영은 그렇게 답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영이 문을 열고 나갈 때 여름이 은영을 불러 세웠다.

 

“저기..... 그..... 아무개 씨?”

 

아무개 씨?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호칭에 은영은 조금 뚱한 표정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

 

“화이팅하세요.”

 

여름은 한쪽 손을 올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은영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다용도룸에서 나왔다.

 

뭘 화이팅하라는 거지? 이사실로 되돌아오면서 은영은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 때문에 여름이 자신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는지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사업이나 거래에 있어서 상대방의 수나 의도를 읽는데 도가 튼 은영이었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사실에 되돌아와서 편안 의자에 앉았을 때에야 은영은 그 화이팅이라는 메시지가 어떤 목적인지 알았다.

 

설마 내 이혼 경력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가?

 

은영은 무표정하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순진한 건지. 이혼이 요즘 뭔 대수라고.

 

 

***

 

헤디는 화보 촬영을 하러 잠시 지방에 다녀온 길이었다.

 

혁준이 모는 승합차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던 헤디는 연예뉴스 코너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단독] 헤디. 연수와 재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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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헤디, 연수와 재결합할까? 이태원 식당에서 데이트 모습 잇따라 보도

 

 

헤디는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아 스트레스.

그때 신중하게 행동하는 거였는데.

 

헤디는 혁준에게 말했다.

 

“오빠. 회사에 돌아가자마자 기자들한테 연락 좀 돌려.”

“무슨 일인데?”

 

머리를 짧게 깎은 혁준이 백미러로 헤디를 살펴보며 물었다.

 

“연수랑 재결합했다는 뉴스가 났어. 알지? 백프로 찌라시야.”

“너 연수 만났어? 헤어졌잖아?”

“최근에 걔가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해서 식당에서 만난 적 있어. 그 식당이 밖에서 잘 찍히는 곳이라는 걸 미처 몰랐네.”

“그러길래 왜 연수를 또 만나? 너도 그렇고 연수도 같이 있으면 눈에 띄는 거 몰라? 일단은 알았어. 찌라시다 그거지?”

“내가 조금 순진했어. 나답지 않게. 그딴 식으로 질척거린다고 관용을 베푸는 게 아니었는데.”

“연수 걔가 좀 찌질하잖아. 나도 걔 별로 맘에 안 들었어.”

 

혁준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차에 속도를 올렸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혁준이 다시 물었다.

 

“여름 씨도 알아?”

 

헤디는 아차, 싶었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지?

 

 

***

 

헤디는 집에 돌아왔다. 마침 스케줄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헤디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여름의 뒷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여름아. 저......”

 

여름은 청소기를 끄고 몸을 돌려 헤디를 바라보았다.

 

“아. 왔어요?”

 

여름은 약간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존댓말을 쓰며 헤디에게 반응했다.

 

“뉴스 봤어? 아, 그거 있잖아......”

“괜찮아.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나도 승원이 나중에 만났잖아.”

 

여름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여름아. 그게 있잖아. 옛날에 잠깐 만났던 애는 맞는데. 하두 질척거려가지고....... 별 일은 없었어. 나는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나왔고.”

“아이 돈 케어.”

 

여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청소기를 들여다 놓고 말했다.

 

“언니. 카레 좋아해?”

“응? 먹으면 먹지. 왜?”

“오늘 저녁은 못해줄 거 같아. 저기 포장용 카레 먹어.”

 

여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헤디의 재결합 루머 뉴스를 보자 여름이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때 에바한테 들었던 험담들이었다.

 

화려한 남성 편력...... 업계에서 아예 은퇴한 전 남친......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다니느라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여름의 문 앞에서 한참을 안절부절 못하던 헤디는 결국 노크도 못한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헤디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연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앞으로 한번만 더 나 아는 척 하면 팔다리 다 짤라 버릴 줄 알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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