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날 누가 태어났던 모양이다. 아니라도 상관없고. 딘 자린은 막 식기 시작한 총구를 홀스터에 처박았다. 정말로, 아무 상관없다. 여태 기념일을 기념해본 역사가 없었다. 기념일에 일을 하면 했지. 애초에 날이 가는지 날이 오는지 세어본 적도 없었으니 무슨 무슨 이름 붙은 날이라고 알 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 홈리스 만달로리안의 성탄절은 올해 역시 망망대해 우주, 적의 순양함 한복판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것이다. 재미없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복도는 총탄의 가스와 피비린내로 매캐했다. 창고에는 사람 수십은 거뜬히 날려버릴 중화기가 가득. 딘은 물건을 확인하고는 조종실로 걸음을 옮겼다. 성탄절이라. 오래전에 죽은 누구 생일을 구실로 전 은하 어린이들 손에 뭔가가 쥐어진다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축하받고 선물 받는 유년기 따위 기억에 없기도 했고 또, 선물을 주고 싶다면 아무 때고 주면 되는 것 아닌가. 아직 미지근한 시체를 조종석에서 밀어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내일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지.

손꼽아 기다려 온 것은 아니었지만 딘은 지금이 성탄절의 전야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몇몇이 그를 기다린다는 것도.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레이저 크레스트가 존재의 미약한 흔적만 남기고 세상에 작별을 고한 이후, 딘은 쭉 적당한 대체품을 찾으려 무수히 발품을 팔았다. 여태 좋은 결과는 없지만 과정은 주로 야빈 IV와 우주를 오가며 이루어졌다. 야빈 IV, 신설된 제다이 사원, 그리고 홈리스 만달로리안. 어째 석연찮은 조합이지 않은가?
    그 사연을 읊어보자면 우선 딘은 한동안 크리즈의 편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사실 의탁하고 있다기보다는 싼값에 부려지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위대한 만달로리안의 부흥이니 뭐니 일을 하다보면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삭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지냈다. 보카탄 크리즈가 그를 야빈 IV에 내동댕이치기 전까지는.
    뜬금없이 동료 만달로리안을 제다이 사원 입구에 버려놓다니 이유마저 황당한데 들어본즉 긴축 재정에 들어가며 식비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먹는 것보단 많이 벌어오고 있다고 생각했고, 또 최근 입맛이 없어서 그런가 체중이 제법 줄은 것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기에 딘은 많이 억울했다.
    하지만 억울함은 잠깐. 떨어져 있었던 아들을 다시 보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실제로 감사할 생각 X). 다행히 사원의 주인 격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흔쾌히 허락해주어 한구석 차지하고 머무를 수는 있게 되었지만 영영 거기 뭉개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에다 조금 불편하기도 했기 때문에 딘은 새로운 집을 찾아 우주를 왔다갔다 하게 되었다. 살아온 경험에 따르면 집에는 일단 날개가 있어야 한다. 좋은 엔진도 있어야 하고, 얼린 사람을 보관할 적당한 공간도, 그리고 아이가 잠들만한 요람도.

불편하다고는 했으나 사실 제다이 사원은 그가 묵어본 그 모든 숙소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가격, 청결, 서비스, 인테리어, 식사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봤을 때 확실히 그랬다. 그로구가 이런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니 아버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 사실, 흡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역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걸 견딜 수가 없다. 딘은 방금 막 탈취한 낯선 배의 조종석에 앉아 창 너머 우주를 바라보았다. 별과 행성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만큼 갈 곳도 많은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그는 종일 신경 쓰고 있던 종이 조각 하나를 품속에서 꺼내어 들었다.







그로구가 그려준 그림이다. 아직 50살일 뿐인 어린아이답게 썩 잘 그리지는 못했으나 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이에 반박하는 누구라도 그는 싸늘하게 만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아무튼 정말 정말 소중하긴 하지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걸리는 점이 하나 있다. 잘못된 원근법은 아니다. 딘이 마음 쓰는 부분은 그로구가 제다이 선생의 품에 안겨 집 안에 있고 아버지인 딘은 바깥에 작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이 사람을 슬프게 한다.


아무래도 유치하지. 딘은 울적한 기분으로 그림 속 제다이 선생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홈리스에게 방 한 칸을 내어준 인정 넘치는 루크 스카이워커에 대해서. 아마도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원흉에 대해.





아이의 교육자가 훌륭한 위인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학부모를 기쁘게 한다. 스카이워커 씨는 쾌활하고 친절하며 조금 푼수같긴 하지만 아이들을 잘 돌보는 좋은 선생이었다. 말하자면 그로구를 보내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간의 빈 둥지 증후군을 보상받는 기분에 아버지는 무척 들떠버렸고 따라서 이 기한 없는 템플 스테이의 초기 시점에서 딘은 친절한 스카이워커 씨에 대한 압도적 감사, 그로구와의 재회로 말미암은 눈물 젖은 행복과 곧 새 집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희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 나흘, 한 주, 한 달, 한 계절이 지나자 간사하게도 마음이 달라졌다. 딘은 그동안 거의 매일 아침 보카탄이 보낸 우주선에 올라타 일종의 출근을 했다. 만달로리안 중흥 사업은 나름 순조로웠고 원만한 가내 분위기 때문인지 딘의 실적 또한 나날이 상승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득 그는 느낀 것이다.


 "그로구,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

 "하하... 그로구? 포스로 선생님 내동댕이치기 놀이는 조금 이따 하고 아빠한테 인사해줄까?"


아이는 어느새 아버지인 딘 보다 선생님 루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언제부터인가 자린 부자의 오붓한 시간에 스카이워커가 끼어들며 이리된 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을 바깥일 하며 보내기는 하지만 일단 사원에 돌아오면 딘은 그로구와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그런가 어쩌다보니 방에 박혀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얼마간의 해후를 즐기고 나서는 아이에게 바깥 활동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함께 레이저 크레스트를 타고 돌아다닐 때에는 하루의 반을 이것저것 들쑤시며 쏘다녔던 애니까. 아무래도 실내에만 머무르면 심심하기도 할 거고 운동량도 부족할 것이었다.

그래서 딘은 나름의 시간을 정해두고 그로구와 함께 사원 주변을 슬슬 돌아다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산책 도중 숲 속에서 루크를 맞닥뜨린 것이다. 

나무 기둥 뒤에서 튀어나온 제다이는 놀란 표정은 했지만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하하하하. 안녕하세요. 하하하."

 "네. 좋은 저녁입니다, 루크."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산책 중이세요?"

 "네. 혹시 제가 뭔가 방해했습니까?"

 "아아, 아니요 아니요... 전혀요. 오히려 제가 뭔가 방해한 건 아닌가요?"


사실 그랬지만 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루크는 다행이라며 웃더니 그로구와도 조금 대화를 하는듯했다. 그러고는 제안하는 것이다.


 "제가 좋은 데를 좀 아는데, 가보실래요?"


딘은 잠시 망설였다. 루크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덧붙였다.


 "그로구도 좋아할 걸요."

 "좋습니다."


그렇게 품에 반쯤 졸고 있는 그로구를 안고 루크의 뒤를 따랐다. 사실 평소의 산책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밤 산책은, 아무래도 아이를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루크같은 제다이가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딘은 아직도 그 원리를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로구의 신호를 받고 멀리서부터 찾아온 스카이워커의 능력에 대해 꽤나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노을은 어느새 땅 밑으로 녹아들고 사방은 어스름하니 푸르스름하다. 나무 둥치에 자라난 이상한 모양의 버섯들을 지나치며 딘은 아이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글쎄. 루크 스카이워커라는 사람은 일정 부분 특이한 구석이 있다. 세상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마법사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입을 떼면 영락없는 어린애로 느껴지기도 하고, 웃는 얼굴을 보면 티 한 점 없는듯하다가도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말은 부드러워도 눈빛은 단호하다. 딱 잘라 감상을 말할 순 없지만 조금 애늙은이 같다고 해야 하나. 느끼기에 본질이 소년 같다는 것이다. 어쩌다 빨리 철이 들어버린 어린애. 하긴 저렇게 어린 얼굴로 전쟁 영웅이라니 그럴 법도 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빽빽하게 들어선 보랏빛 나무 사이로 요리조리 나아가다 보니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바닥에는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있고 동그랗게 뚫린 하늘로 별무리가 가득하다. 삭막한 감성의 아우터 림 현상금 사냥꾼은 탄성 대신 숨을 들이켰다.


 "멋지죠?"


벌써부터 신이 난 걸까. 아이가 내려달라고 보채는 것을 달래며 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대로 바닥에 발을 디딘 그로구는 두껍게 쌓인 나뭇잎 더미에 허리까지 푹 빠져버렸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조금 걱정되지만 당사자는 다행히 그게 마음에 든 것 같다.


 "하하... "


작게 퍼지는 웃음소리에 만달로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제다이 청년은 참 맑게 웃는다. 

그로구는 바스락거리며 공터를 한 바퀴 돌았고, 마음에 드는 잎사귀를 주웠다 버렸다 반복하며 나름의 소꿉장난도 했다. 딘은 아이가 낙엽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자 조금 불안해졌다.


 "그로구. 그건 먹으면 안 돼."

 "안 그럴 거예요. 그렇지, 그로구?"


지켜보던 제다이는 눈이 휘어져라 웃으며 허공의 낙엽을 일렬로 모아다 아이의 주변으로 흐르게 하였다. 그로구는 바로 열중하여 팔을 휘저었는데 고작 작은 나뭇잎 두어 개를 손에 쥘 수 있을 뿐이었다.

딘은 헬멧 아래서 따라 웃음 지었다. 어디로 발을 두어도 밑에서 바스락 부서지는 낙엽 때문인가 마음이 녹녹해져 옛 생각도 난다. 네바로의 지하굴 어딘가 빛이 드는 곳에서 그와 이마를 맞대던 아버지의 목소리 같은 것. Ad'ika, 이 작은 녀석...


상념에 빠져있던 만달로리안의 눈앞으로 검게 마른 보랏빛 잎사귀 하나가 날아들었다. 딘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장갑 안에서 낙엽이 조금 바스러졌다. 그렇게 금이 간 잎새 사이로 제다이의 얼굴이 보였는데 그는 웃고 있었다. 작은 등불의 노란색과 별의 은빛을 받아 병아리 솜털처럼 푸슬푸슬한 금발이 오묘하게 물결치고 밤 그림자에 두 눈은 평소보다 짙은 파란색이다. 이쪽을 향해 내민 손은 무언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처럼 허공을 힘 있게 짚고 있고, 이어지는 단단한 손등의 뼈와 살짝 드러난 손목까지가 시선을 끈다. 생각보다 크구나, 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딘?"

 "당신 생각을요."

 "네...?"


허공에 떠있던 낙엽들이 순간 우수수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로구는 꺄아 꺄아 소리를 내며 작은 보폭으로 뜀박질 비슷한 것을 했는데 딘은 스스로 깜짝 놀라 아이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나뭇잎을 잔뜩 묻히고 서있는 루크는 잔뜩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놀랄 건 없지 않나. 딘은 당황하여 마찬가지로 얼어붙어버렸다.


 "그... 손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네! 좀 그렇죠 제가! 한 번 재보실래요?"

 "아니요."


빠르게 내뱉은 뒤 딘은 아차 싶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네... "


제다이 청년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아하니 그것만으론 부족한 것 같았다. 딘은 허둥지둥 말을 좀 더 생각해냈다.


 "그게, 예쁩니다. 마음에 들어요."

 "네...?"

 "여기 말입니다."

 "네... "

 "자주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로구도 좋아하고."

 "그래요? 제가 의자라도 가져다 둘게요 그럼!"

 "예, 예... "


그건 뭐였을까. 한동안 공간을 지배하던 어색함과 기쁨의 기류를 떠올리며 만달로리안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튼 그 뒤로 루크는 정말 의자 세 개(큰 것 두 개, 작은 것 하나)와 땔감을 공터에 가져다 두었고 세 명은 저녁때가 되면 슬슬 모여 산책과 소박한 캠프 파이어를 즐겼다.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어보였다. 딘 자린은 소방법을 신경쓰는 그런 만달로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크 스카이워커도 소방법을 그렇게까지 신경쓰는 그런 제다이는 아니었다. 물론 그로구도 소방법 따위 알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사실 정말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문제다.


 "그로구, 마스터랑 가위 바위 보 해서 이기면 마시멜로 먹는 걸로 할까? 대신 지면 낮잠 자는 거야."

 "헹."


딘은 그로구가 내는 소리가 불만임을 알았다. 하지만 진정 말이 통하는 것은 루크이고, 루크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저가 틀린 건가 싶어 아버지 만달로리안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무튼 가위 바위 보 하는 거야?"

 "흥."

 "가위 바위 보."

 "헹."

 "안내면 진다 가위 바위 보."

 "크윽, 빠뚜!"


그로구는 머리 위의 솜털을 부들부들 떨며 손을 내밀었다. 루크는 펼쳐진 세 개의 손가락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고 웃었다.


 "마스터가 이겼네. 그로구는 낮잠을 잘 시간이에요."

 "크윽, 뽀압!"

 "아니지, 그로구. 마스터가 보를 냈고 그로구는 가위를 냈으니까 마스터가 이긴 거예요."

 "크윽...!"

 "그래 그래, 하지만 제다이는 어떤 결과라도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단다."


과연. 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너는 셀 수 없이 많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할 거야. 그리고 승패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울 거란다."


그로구는 안색이 무척 나빴다. 딘은 그 녹색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가 눈을 좁히고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동작이다.


 "... 하지만 오늘은 그 위대한 여로의 첫걸음이니까 마시멜로 하나 먹고 자는 걸로 하자."

 "크윽... 무왁... "

 "그래 그래. 여기 마시멜로가 구워지고 있네."

 "저, 루크."

 "네?"

 "낮잠이라면 그로구는 아까 충분히 잤습니다."


제다이 마스터는 진중하고도 근엄한 표정으로 손을 마주 모았다. 학부모 딘 자린은 선생의 권위에 조금 압도되어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흘끔 댔다. 그로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마시멜로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어쩐지 딘에게 짜증어린 재촉의 눈길을 보내는 듯했다. 착각이겠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다이 파다완이 될 아이는 탁월하게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해요. 그래야만 진정한 제다이 기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

 "그것이 제다이의 방식입니다. 포스가 함께하기를... "

 "아... 예, 포, 포스가 함께하기를."


제다이에 관련한 일이라면 아이와 공유하지 못하는 어떤 유대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딘은 그걸 확인할 때마다 조금 속이 상한다. 더욱이 그로구는 요즘 포스 수련에 많은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지난번에 멀리서 반갑게 달려오는 루크를 넘어뜨렸을 때는 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제다이 선생의 교육 방침에 따르면 그로구는 이 휴식 시간 중에 꼭 낮잠을 자야 했다. 그럼 모닥불이 타오르는 아늑한 공터에는 만달로리안 하나와 제다이 하나가 멀뚱이며 남게 되는데 저쪽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만달로리안 입장에선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좀 우스운 일이긴 했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낯선 이를 옆에 두고 낮잠도 자던 사람이 선량하고 신의 있는 제다이 기사 때문에 안절부절이라니. 그러나 마음 속 무언가가 끊임없이 루크 스카이워커를 의식하게 만든다. 전혀 위험하지 않은데도 딘은 묘한 긴장과 위기감을 느끼며 장작만 들쑤셨다.


 "그러고 보면 다음 달에 성탄절이 있네요."

 "... 네?"

 "성탄절이요."


딘은 장작 파편을 거의 가루 내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루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 하더니 약간의 정적 뒤에 간략하게 설명했다.


 "은하를 빛낸 백한 명의 위인들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에요. 사실 그거보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건, 성탄절엔 산타 클로스라는 빨간 옷을 입고 수염이 난 할아버지가 일 년 간 울지 않고 착하게 지낸 아이들에게 몰래 선물을 주고 가요.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성운과 소행성대를 돌파하면서요."

 "네?"

 "산타 클로스는 주로 굴뚝으로 침입하는데 쿠키와 우유를 좋아한다고 해요. 그래서 성탄절이 되면 예쁜 장식으로 나무를 꾸미고 옆에다 쿠키랑 우유를 가져다 놓습니다. 일종의 수고비 같은 거죠."

 "괜찮은 겁니까 그런 걸로."


만달로리안은 위험천만한 소행성대를 아공간 비행으로 헤쳐나갈 만한 우주선(썰매? 설마)과 그에 필요한 연료, 선물의 값을 대략 추정하며 같은 값의 베스카 무게로 치환해보았다.

루크는 대답은 않고 의뭉스럽게 웃기만 하였다. 그의 눈이 유독 반짝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타오르던 장작이 따닥 소리를 내며 쪼개져서 딘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산타란 건 말이죠. 고도로 발달한 비밀 요원 같은 거예요."

 "역시... "

 "아이들에게 절대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

 "과연... "

 "할 수 있겠어요?"

 "예?"


산타 클로스란 제다이 비밀 요원이란 말인가? 그리고 제다이 선생이 내게 제다이 비밀 요원직을 권유하고? 딘 자린은 위대한 만달로리안의 부흥에 대한 굳건하다기엔 좀 빈약한 의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루크는 코를 찡긋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 산타 클로스라는 건 그냥 옛날 동화 같은 거예요. 실제로는 아이 보호자가 애들이 잘 때 머리맡에 몰래 선물을 두는 거죠."

 "아."

 "딘은 그로구의 아버지니까, 그로구의 산타가 되어줄 거죠?"


만달로리안의 고개가 기울어진 각도에 맞추어, 제다이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기울였다. 금발이 낙엽처럼 사부작 소리를 내며 미소 짓는 뺨을 스친다. 딘은 잠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 네."

 "좋아요. 그로구가 엄청 좋아할 거예요."

 "네... "

 "같이 나무도 꾸며요. 어떤 장식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빨간 줄무늬 지팡이를 좋아하거든요."


그게 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만달로리안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끄덕, 청년의 웃는 얼굴만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며칠 뒤. 보카탄은 휴가를 내겠다는 딘에게 무척이나 짜증을 내었지만 아이 선생님과 약속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 순순히 보내주었다. 이 기회에 정말 잘해보라는 말에 딘은 성탄절 나무 꾸미기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가 싶어 조금 진지해졌다. 그리고 다른 만달로리안들이 민족 간 대화합이니 뭐니 수군거리는 것은 한 자락도 신경 쓰지 않고 루크가 말했던 리본이나 동그란 금속 공 따위를 두 상자 사서 사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빨간 줄무늬 지팡이도 샀다.

제다이와 그의 어린 제자는 이미 사원 중앙의 커다란 나무 앞에 있었다. 멀리서 그들에게 다가가며 딘은 루크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헬멧 아래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로구, 선생님이 네 가족이 되면 어떨 것 같아?"


그 말에 만달로리안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답을 기다린다.

가족?

그로구는 언제나와 같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옹알이만 하고, 그리고 루크만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문득 마음에 걸렸다. 아이가 무어라고 대답할까? 장갑 안에 땀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사원에 머무르게 된 지 몇 달이 지났지?


 "캬아악!"

 "쉿, 그로구. 복도에선 정숙...! 그리고 너희 아빠가 듣기라도 하면... "


딘은 곧바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다시 갔다. 사실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발길이 닿는 곳으로 걸은 것이다. 박스 안의 장식물들이 흔들리는 걸음을 따라 잘그락 소리를 내었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것...

루크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니 아마 누군가가 들으면 상처 받을 만한 말은 숨기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로구는...


루크가 아빠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 일 이후로 딘은 루크와 그로구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무척이나 심란했다. 스승과 제자 간이니 친밀하게 지내는 게 맞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알싸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트리 꾸미는 것은 도와야 했다. 그래서 만달로리안은 루크와 그로구가 사이좋게 포스로 나무 위쪽을 꾸미는 걸 바라보며 침울하게 아래쪽 가지에 빨간 공을 매달았다.

그런 와중에 스카이워커의 다른 반쪽 쌍둥이가 찾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역시나 작은 키에도 위풍당당하게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루크!"

 "레아?"

 "사이 좋아 보이네."


제다이는 마흔여덟 번째 반짝이 나비 리본 만드는 것(상당히 절도 있는 손놀림이었다)을 그만두고 간만의 손님을 맞았다. 딘은 일전에 오르가나와 솔로 부부를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간단히 목례를 하였다. 새삼스럽게 헬멧이 심란한 표정을 가려주어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안녕하세요, 자린 씨. 루크, 지난번에 부탁한 거 받으러 왔어."

 "바쁠 텐데 직접 온 거야? 한은?"

 "네 얼굴 좀 보러 왔지. 네 사업이... "


레아는 이쪽을 흘긋 댔다. 딘은 금색 공 옆에 하얀 공을 매달려다 그 때문에 확신 없이 빨간 공을 집어 들었다.


 "... 잘 풀리고 있나 구경도 할 겸."

 "... 흠, 흠. 레아? 물건 갖고 올게. 딘, 잠시만 수고해주세요."


만달로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예 이쪽으로 옮겨온 레아의 시선에 결국 빨간 공을 매달았다.


 "장식이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역시 빨간 공이 맞는 선택이었나.


 "겨우살이 가지는 어디 걸어둘 건가요?"

 "겨우살이 가지요."

 "네."


역시 쌍둥이라면 닮는 건가 싶었다. 레아는 루크와 비슷한 모양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딘지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탄절에는, 겨우살이 가지 아래에 있는 사람한테는 허락 없이 키스해도 돼요."

 "그렇군요." 

 "아마 루크가 이미 준비해뒀을 거예요. 잘 되어볼 만한 사람이 있으면... 아시겠죠?"


아니요. 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쌍둥이는 닮을 수밖에 없나, 사람 당황하게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걸 보면 루크와 레아는 상당히 비슷하다. 저 의미심장한 웃음도.

이런 처지에 잘 되어볼 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허락 없이 키스라니, 그런 건...


 "좋아요. 기대할게요."

 "뭘?"


기척도 없이 불쑥 소리부터 들린다. 딘은 깜짝 놀라 두어 발짝 뒷걸음질치고 고개를 홱 돌렸다. 루크는 세련된 디자인의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레아가 순식간에 받아 들기 전까지는.


 "별 거 아니야. 고마워, 루크. 이게 없으면 분위기가 안 난다니까."


딘은 의문을 담아 제다이를 쳐다보았다. 루크는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와인이에요. 제다이 농장 특산 포도로 만든 건데 이게 사원의 주 수입원이에요. 숙성 과정에서 포스를 써야 해서 소량 판매하고 있지만요."

 "원래 종교 단체는 특산품 하나 정도 있어야 돼."

 "레아. 제다이는 종교 단체가 아니라니까."

 "그래."


만달로리안은 제다이들이 세속이란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오르가나 의원은 함께 식사하며 딘에게 연휴와 와인의 중요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파하였다. 성탄절에는 맛있는 음식과 와인, 그리고 로맨스가 있어야 한다나. 그로구는 저녁 시간 내내 그런 그녀의 동그란 도넛 머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레아가 떠나기 전까지 아이의 보호자들은 약간의 소란을 거쳐야 했다.

조금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은 아이를 재우고 침상 위에 적당히 걸터앉아 허공을 보았다.


 "그로구가 건강해서 정말 좋네요."

 "네."

 "그래도 트리도 거의 다 꾸몄고... 이제 선물만 준비하면 되겠어요. 생각해둔 건 있으세요?"


딘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야 많이 해봤지만 뭘 주어야 아이가 기뻐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 케이크 어떨까요? 그로구가 저번에 그랬거든요, 먹고 싶다고."

 "... 그로구가요?"

 "네. 뭐였더라 지난번에 통나무 모양 케이크를 봤다고, "

 "저도 그로구가 하는 말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부럽습니다, 뒷말을 삼키며 만달로리안은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딘은 조금 지쳐있었고 어색한 침묵이 차라리 편안하였다. 일부러 의식하여 저쪽을 보지 않았지만 차분하고 맑은 그 목소리만은 어쩔 수 없이 귓가에 흘러든다.


 "... 아빠가 사줬던 그 케이크가 다시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기억나세요?"


그로구가 먹어치우는 음식의 종류는 무척 다양했고 그래서 딘은 그 목록을 전부 기억하진 못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했던 건 기억난다.


 "아마도 그때가 좋았었나 봐요, 그로구는. 아빠랑 다니던 그때 먹었던 음식들, 봤던 사람들, 들었던 이야기들을 자주 말해주거든요. 딘이 옆에 없을 때도, 있을 때도요."

 "......"

 "성탄절이 지나고 나면 아마 한동안 아빠한테 받은 선물 자랑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케이크. 오르가나가 말했었지 연휴의 완성은 가족을 위한 맛있는 음식과 와인이라고. 그리고 로맨스도. 딘은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헬멧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도 그걸 아는 걸까, 루크 역시 부드럽게 웃었다.


 "혹시 딘은 받고 싶은 선물이 있나요?"

 "저 말입니까."

 "네. 음... 친구나... 연, 아니 가족들끼리도 선물을 주고받고 하거든요... "


제다이는 슬쩍 눈치를 보다 상대가 반응이 없자 우물우물 말을 흐렸다.


 "뭐, 없다면 한 번 생각은 해보세요... 저는 사원 꾸밀 장식을 좀 더 가져와야... "


딘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겨우살이 가지도... 달아둘 겁니까?"

 "네?"

 "... 아닙니다."


루크의 뺨은 천천히 그러나 명백히 붉어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겨우살이 가지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 들렸을까? 이상하게 들렸겠지 젠장. 설마 나를 아무 하고나 입 맞추고 싶어 하는 파렴치한으로 생각하려나. 아니면 더 나쁘게는 내가 감히... 딘은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발끝에 뒀다.

엄청난 무게의 정적이 떨어졌다. 딘은 참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이제 씻어야겠습니다."

 "아, 앗... 네... 지금요?"

 "네. 지금 잔당, 아니 단장, 당장요."


딘은 무작정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 아래에 뻣뻣하게 서서 물을 틀었다.

탕 타당 탕 텅 통 탕


몇 초 지나지 않아 제다이는 흙먼지가 씻겨나가 반질반질해진 베스카 헬멧을 볼 수 있었다. 딘은 오갈 데 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지며 헬멧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옷은 당연히 입은 채였고 슬프게도 잔뜩 젖어있다.


 "... 괜찮으세요?"

 "네."

 "네... "


루크는 잠깐 사이에 더욱 빨개져있었다.


 "저... 저는 가볼 테니 쉬세요."

 "... 예."

 "겨우살이 가지는... 문 아래 달아둘게요."


용맹한 전사 만달로리안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빠르게 끄덕인 후 또다시 욕실로 후퇴하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그는 제다이의 붉어진 볼과 목덜미, 잘게 떨리던 속눈썹을 떠올렸다.

 

갔을까? 그 여부를 확인해야겠다는 거대한 욕구가 만달로리안을 재촉한다. 갔을까? 이제 갔을까?


딘은 문을 살짝 열었다. 정확히는 아주 작은 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쪽의 빛이 저쪽과 완전히 섞여 들어가기 전에, 만달로리안은 제다이가 그의 헬멧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을 발견하곤 덜컥 멈춰 섰다.
    불빛이 주홍빛이라 그런가 그 아래 시선마저 따듯했다. 루크는 아주 다정한 눈으로 헬멧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길어진 금발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입술은 살짝 떨리며 호선을 그린다. 제다이는 헬멧을 어루만지다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무얼 읽는 건지 장난스레 웃다가, 이마를 마주 대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행동일까? 딘은 귓가에 울려 퍼지는 심장 소리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 일련의 행위를 보여주는 작은 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만달로리안은 천천히 제 입술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탄식한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좋은 사람이야. 그로구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야. 좋은 가족이...

어쩌면 내게도.


차마 문을 닫지는 못하였다. 딘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제다이의 아름다운 금발을 떠올린다. 머리칼과 이어지는 단정한 목선과 어깨, 곧은 허리까지. 그가 생각하기에 루크는 옷을 너무 딱 맞게 입는다. 그러니 정직하고도 단단한 몸 선이 그대로 드러나서 그래서 이런 순간에 자꾸만 눈에 밟히는...

만달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어던졌다. 아무렇게나 버려둔 허물이 젖든 말든 괘념치 않고 다시 세차게 내리는 물줄기 아래에 섰다. 어쩌면 그도 제다이처럼 명상을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루크에게 배운다면,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제발. 등을 타고 오르는 화끈한 열기에 딘은 레버를 파란 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하며 또 제다이의 눈을 떠올린다. 루크 스카이워커, 예쁜 파란색. 예쁜, 파란색. 루크. 가족.


젠장.






딘 자린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걸 부끄럽게 여기진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번 것은 경우가 달랐다. 분명 아이를 구해달라는 요청과 아이 아버지의 적합성을 구해달라는 요청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이다. 굳이 여러 번 숙고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헬멧을 꼭꼭 뒤집어쓰고 혼자 볼을 붉히다 그는 주변에서 그나마... 가정이라는 것을 이뤄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이에게 찾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방문한 코렐리아의 어느 시끌벅적한 술집, 악단이 흥겨운 박자로 반주하지만 가수는 무명인지 반응이 시시하다. 사람들은 대체로 느슨히 긴장을 풀은 채 낄낄거리고 블라스터는 저마다 주인들의 바지춤이나 홀스터 안에 얌전히 꽂혀있다. 그리고 저 구석에 제일 일 없어 보이는 한량.
    한 솔로는 시건방진 자세로 자리에 기대앉아 크레딧을 굴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어이 하고 인사를 하는데 그 손동작마저 교양이 없어서 딘은 편안함을 느꼈다.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한 모습이 이 만도가 겪어온 인간 군상의 표본이었는지라 익숙하다는 것이다.

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맞은편에 착석했다. 하던 대로 본론부터 꺼내야 할지 아니면 간단한 안부라도 물어야 할지 잠깐 고민이 되었다.


 "뭐야, 딘. 여기까지는 또 무슨 일이야?"

 "벤은 잘 지내고 있다."

 "뭐?"


너무 비장하게 말한 걸까, 한은 잠깐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 하하... 알지, 그거야. 내 아들인데."

 "......"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이봐 만도, 일 때문이야? 밀수업은 그만뒀는데."


밀수? 밀레니엄 팔콘 듀오의 악명은, 특히 한 솔로의 악명은 현상금 사냥꾼들 사이에서 제법 널리 퍼져있다. 그 악명이란 자잘하게는 여러 개, 크게는 두 가지로 당사자의 자신감 대비 애매한 임무 성사율과 과거 제국에서 내렸던 수배령인데 딘은 후자보다는 전자를 인상 깊게 받아들였다.

아무튼 전직 밀수꾼의 자부심 넘치는 착각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딘은 입안에서 말을 뱅뱅 돌리다 어렵사리 운을 뗐다.


 "결혼 생활은... 어떻지?"

 "... 뭐?"


이번에는 얼이 빠져서 되묻는다. 물어놓고도 어색해서 딘은 시선을 흘끗 다른 곳으로 옮겼다. 눈을 피하는 건 여전히 고치지 못한 버릇이다. 지금은 물론 쓰고 있지만, 헬멧을 벗고 사람을 대하는 건 그의 인생에서 어린 시절 몇 년 그리고 최근 고작 몇 달째 고려되고 있는 사항이라 많은 부분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루크가 매번 그렇게도 이쪽 좀 봐달라고 푸념을 했는데. 내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또 엉뚱한 사람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 만달로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질문자가 도통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한은 멍청한 얼굴로 몇 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뭔가 알겠다는 듯 실실 웃으며 바텐더에게 손짓하는 것이다.


 "이봐! 드래곤 주스 두 잔 달라고!"


그러고는 이쪽으로 몸을 쭉 빼며 은밀하고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연애 소식도 없는데... 결혼부터 생각한 거야?"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드디어 고백이라도 받은 건가?"

 "뭘 고백한다는 거지?"

 "설마 상대가 루크가 아닌 건 아니겠지?"

 "아니다."


잠시 멈칫하고는, 딘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루크에 대한 게 아니라는... "

 "아, 그래?"

 "그래. 전혀 결혼에 대한 생각 따위 하고 있지 않아. 그로구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 줄 것 같지만, 그래도 고백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비록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그대로 그것 비슷한 걸 하는 건 어쩌다 보긴 했다. 그러니까, 내 헬멧에. 뭐 어쩌면 그냥 헬멧이 마음에 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 그래, 설마 알고 그랬을 리도 없고 오해할까 봐 말해두자면 괜히 거기에 내가 심란해져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루크는 가족으로서, 그러니까 나 말고 그로구의 가족으로서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다곤 해도 나랑은 나이 차이가 꽤 있으니까, 그런 순수한 사람이랑 어린애들 옆에 있기엔 아무래도 나는 자격 미달인 것 같고... 역시 이대로 마음을 접고 떠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렇게 된 거구나."

 "? 뭐가 말이지?"

 "고생길이 훤하군."


한 솔로는 꼬맹아 너는 좆됐어, 중얼거리고 잔의 3분의 1을 비웠다. 어쩐지 따라서 목이 타서 딘 자린 역시 헬멧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잔의 2분의 1을 비웠다. 강렬한 맛!

한은 잠시간 알코올을 흘려보내는 데에 집중한 뒤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될 거라는 느낌은 드는군. 난 원래 감이 좋거든."


딘은 대꾸하지 않고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대신 뒤편에서 츄바카가 다가와 한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간단히 손을 들어 인사하였다.


 "안 그래, 츄이?"

 "아앙?"


쉬리우크를 할 줄 몰라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부정의 어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이 투덜거리는 것을 보니 더 확실했다.


 "젠장... 아무튼 걱정 마. 무슨 이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건 대충 알겠는데,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고. 루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걘 마냥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야. 그리고 너네 깡통 문화에 하늘 아래 두 아버지는 있을 수 없다는, 뭐 그런 전통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

 "... 설마 있어?"

 "없어. 하지만 그로구는 제다이로 살아가는 게 맞다."

 "뭔 소리야. 그게 결혼이랑 무슨 상관인데?"


딘은 새로운 잔을 주문했다. 더 많은 강렬함이 필요하다. 한이 인내심 있게 바텐더를 재촉하는 동안 만달로리안은 뚱하니 테이블 모서리를 노려보았고 술이 나오자 벌컥 들이키고는 그제서야 답을 했다.


 "그로구는... 나보다 루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뭐?"

 "요즘 나와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루크와 노는 데에 관심이 많다."

 "사람들은 목조르기를 보통 노는 거라고 하지 않아."

 "집도 차도 없는 나보다는 루크가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해줄 수 있겠지. 좋은 가족이 되어줄 거다."


딘은 깊은 시름과 우울에 젖어 또 한 모금을 들이켰다. 한이 무어라 욕을 읊조리는 것 같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깡통을 뒤집어써서 시야가 좁은 건가 한 치 앞도 못 보네."

 "흐아앙."


딘은 츄바카를 흘끔 쳐다보았다.


 "이봐, 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너는 지금 너, 그로구, 루크 셋이서 가족이 되고 싶은 거야."

 "네가 뭘 알아."

 "결혼 생각부터 먼저 드는 거면, 그럼 청혼부터 해! 네가 청혼을 하든 냅다 혼인신고를 하든 그 녀석은 뭐라도 좋아서 뒤집어질걸?"

 "꾸워어엉. 하앙."

 "헬멧만 벗으면 지능이 반토막 나는데 얘가 그런 걸 할 수 있겠어? 유혹은 무슨. 어차피 깡통에다가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루크는."

 "어?"

 "신경 쓰지 마."


한은 만달로리안을 위해 새로운 잔을 하나 더 주문했다.


 "아무튼 정신 차리지 말고 똑바로 들어. 결혼 해!"

 "어? 어어... "

 "결혼 생활이란 건 말이야, 확실히 쉽지는 않지. 레아를 사랑하긴 하지만 결혼은 사랑 보단 더 많은 걸 해야 하거든. 레아는 정말 멋진 여자야... "

 "여기 조개 수프 하나."

 "어쨌든 한 가족이 돼서 아이를 돌본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딘은 헬멧 위로 조개 수프를 문지르려다 고개를 들었다.


 "넌 모르겠지만, 신공화국 의원이랑 슬리퍼 한 짝 가지고 싸우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데." 


한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황홀한 애정에 젖어있었다. 입맛이 떨어져서 딘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츄이를 트리로 꾸미려고 눈 돌아간 아들내미 달래는 것도. 근데 애가 왜 이렇게 빨간색에 집착을 하지? 뭐 어쨌든 그거보다 중요한 건, 좀 있으면 성탄절이잖아. 벤은 곧 여섯 살이 될 거고 그런데 아직 내가 산타 클로스라는 걸 안 들켰단 말이지. 다 레아 덕분이야. 나도 알아, 레아는 정말... 멋진 여자야. 와인 고르는 안목도 좋지."

 "아앙?"

 "그래, 너도. 넌 좋은 삼촌이야, 츄바카. 아무튼 결혼 해. 결혼 좋아. 곧 성탄절이잖아. 나는 명절이니 뭐니 해도 별로 감흥 없지만 아내랑 애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주는 건 그건 또 다르단 말이야. 보람 있다고. 그러니까 루크 머리에 별을 달든 걔를 벗겨서 양말에 집어넣든 연휴 즐겁게 보내고 가족으로 지내."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개수의 잔이 쌓였다. 딘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정리됐어?"

 "루크에 양말을 넣으라고?"

 "좋아, 잘 됐네. 역시 술은 많은 걸 해결해주지. 가서 루크랑도 한 잔 하라고. 정 뭐하면 학부모 면담 같은 걸 구실 삼으란 말이야. 요즘 그런 게 유행이라던데."


아마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츄바카는 자신이 마신 잔의 개수를 세어보더니 이쪽을 돌아보며 뭐라 소리를 질렀다. 만달로리안은 우키의 작고 까만 눈에서 어떤 요구를 읽어내고 한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술 내기로 팔씨름할 생각 없냐는데 그냥 하지 마. 그로구도 아빠들 손 개수가 더 줄어드는 건 안 좋아할 걸."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 솔로의 영양가 없는 상담과 처방에 따라 딘은 루크에게 술잔을 건넸다. 하늘에는 붉고 거대한 야빈 프라임이 시선을 사로잡고, 묵묵히 서 있는 만달로리안에게서 잔을 받아 들며 제다이는 영문을 모르고 일단 웃었다. 둘 사이에는 작은 화톳불이 탁 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둘만 있는 건."

 "... 네."

 "조금 놀랐어요. 둘이서만... 보자고 해서."


나무는 이제 완전히 앙상해져 바짝 마르고 어젯밤인가 도톰하게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다. 딘은 문득 의자에 눈은커녕 녹은 물 한 방울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 개 모두.

루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다. 딘은 헬멧 안에서 또 눈을 피했다. 보일 리가 없는데도 어쩐지 뜨끔해서 다시 시선을 맞춘 다. 제다이들은 원래 다 그런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어떨는지. 말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덥석덥석 그래 그렇구나 해서 손해 본 적도 많은데 어쩐지 이 사람은 도통 믿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런 생각도 든다. 사실은 남한테 관심이 없어서 의문도 없고 그래서 의심이 없는 거 아닐까. 그런데 이 사람한테는 자꾸 관심이 가니까 의문도 들고 그래서 의심도 가는 거지.

딘은 헬멧을 벗을까 망설이다 대신 입가만 드러날 정도로 들어 올리고 목을 축였다. 그는 잔을 내리며 제다이의 얼굴을 흘긋 확인했는데, 얼핏 실망스러운 눈빛을 본 것도 같아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루크는 따라서 시원스레 잔을 기울이더니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제트 주스네요."

 "네."

 "이거 반군 시절 많이 마셨던 건데. 여전히 독하네."


과연 코끝이 아찔해질 정도로 독했는데, 루크는 말하는 것치곤 의외로 잘도 마셨다. 딘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반란군이요."

 "네. 사실 그때 제트 주스는 반입 금지였어요. 이게 부작용이 좀 있잖아요."

 "취하는 것 말고 따로 부작용이 있습니까?"

 "네? 모르셨어요?"


금시초문이다. 그저 주인장에게 취할 만한 걸로 하나, 짧게 주문하고 받아왔을 뿐이다. 애초에 딘은 딱히 음주를 즐기지도 않았다. 주는 술을 거절하지도 않지만. 루크는 딘의 손에 들린 잔의 내용물이 독극물로 변하기라도 한 듯 눈살을 확 찌푸렸다.


 "제트 주스는... 체질 따라 다른데 가끔 앞이 안 보일 수도 있거든요. 워낙 독해서... 모르고 있던 거라면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루크는 괜찮은 겁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한에게선가 들은 것도 같다. 제다이들은 주당이라고. 걱정스러운 눈빛에 그만 오기가 들어 딘은 고개를 젓고 또 한 모금을 마셨다. 강렬했다. 술과 시선 둘 다.


 "한창 전쟁 때에도 많이들 마셨던 거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음... 사실 괜찮아서 그랬던 건 아니고, 사기 진작 때문에 모른 척했던 것도 있어요 그때는. 항상 불리했었으니까요."


그만 마시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것 같았지만 딘은 고개를 기울이며 딴청을 했다. 빠르게 취기가 오른다. 그게 조금 필요하다.


 "모른 척해주는 쪽이었군요, 루크는."

 "어음,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일선에서 지휘를 주로 맡다 보니... "

 "반군 최고의 파일럿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하하... 한이 그러던가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그런 것치곤 다들 당신 이름을 잘 알던 걸. 야빈의 영웅이라며. 정말 저만 몰랐던 건가 싶어서 딘은 사원에 머무르기 시작한 이후 가끔 조간신문을 들여다봤다. 어제 자의 1면은 자자 빙크스의 파국으로 치달은 연애 소식이었다. 물론 딘은 그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반절 남은 액체를 찰랑찰랑 뒤흔들며 딘은 물었다.


 "루크는 좋은 지휘관이었을 것 같습니다."

 "음, 글쎄요. 다들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제가 나이가 나이기도 하고 야빈 전투 이전엔 딱히 전장 경험도 없었어서 베테랑들은 제가 상관으로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호스 때 가서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말했지만, 모른 척을 좀 해줬거든요."


루크는 술잔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헬멧 안에서 눈을 피했다. 대신 그는 루크의 잔에 자신의 것을 부딪히곤 남은 걸 마저 들이켰다. 그리고 헛손질을 한 번 하고, 술병을 집어 들었다. 추운 날씨에 장갑 너머로도 병은 깨질 듯이 차가웠으며 그 안에 든 술 역시 딱 좋은 온도로 찼다.


 "딘."


루크는 거의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만면에 걱정 두 글자를 띄우고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이쪽을 바라본다. 딘은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헛기침을 했다. 얼굴이 화끈한 건 술 때문인가. 그리고 이상하게 솟아나는 용기도.


 "모른 척해주시지 말입니다, 사령관님."


그러면서 제다이의 잔에도 새 술을 따랐다. 루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추위에 살짝 발긋해진 볼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이번만이네, 병사."


만달로리안은 어색하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웃는 얼굴과 달리 루크의 목소리는 훈련받은 군인의 그것이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딱딱한 말투와 어조에 딘은 새삼스레 청년의 나이를 셈해보았다. 그러고 보면 곧 서른이구나. 사령관 치고는 젊을 수 있지만 어쨌거나 어리기만 한 애송이는 아니다. 속으로 곱씹어본다. 전쟁 영웅. 루크 스카이워커.

루크는 술잔을 들여다보며 아마 과거를 되짚는 듯 진중한 모습이었고 딘은 알코올이 몸을 한 바퀴 돌아 심장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점점 가팔라지는 박동을 세며 어느 순간 청년의 밝은 금발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새파랗게 예쁜 눈도, 단정한 어깨도, 다부진 손도. 딘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졌다.


그렇구나, 이런 거구나. 부작용이란 게.

만달로리안은 천천히 헬멧에 손을 뻗었다.


 "... 딘?"


한 박자 느리게 그는 대답한다.


 "... 네."


몇 번 눈을 깜박인 뒤 그는 쌓인 눈이 다져지는 소리를 듣는다. 조심스러운 몇 발짝이 가까워지고 사부작 사부작 가벼운 얼음 결정이 흩어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맥박과 함께 울렸다. 남들보다 조금 높은 듯했던 체온도, 바라는 것보다 더 멀리서 느껴지는 숨결도. 온통 검은 세상 속에서 그는 파란색을 본다. 예쁜 파란색, 루크. 가족.

아, 켈다베여. 딘 자린은 홀로 입술을 더듬었던 그때의 일을 기억한다. 차가운 온도에도 그를 따듯하게 어쩌면 뜨겁게 달구었던 예쁜 파란색을.


온기가 닿았을 때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가로 미끄러진 손끝은 첫눈이 나리듯 부드럽게 뺨을 감싸고,


 "딘."


그리고 딘 자린은 눈을 떴다. 공기가 시린 만큼 더 파랗게 보이는 눈동자에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는... "

 "......"

 "미안합니다."


만달로리안은 헬멧을 챙겨 달아나버렸다. 눈은 다시 내리지 않아 그가 밟은 자리는 검게 녹아 비어버렸고 제다이는 그 흔적을 시선으로만 좇았다. 그가 내 시선을 느꼈을까?

딘 자린은 피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였다.





그래도 역시 그런 일이 있었으니 피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하다. 무언가 이야기해야 할 당위를 느끼면서도 딘은 제다이의 금발이 보일라 치면 도망하듯 자리를 떠버렸다.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 말문을 트는 걸 보면 루크는 분명 뭔가 해결을 보고 싶은 것 같았지만 딘은 그 주제가 그냥 산타 클로스나 나무를 꾸밀 장식에 대한 것이기만을 바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로구는 산책을 조르지만 아버지 만달로리안은 미안하다는 말로 타이를 뿐 두문불출하였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사흘이 흐르고, 나흘이, 한 주가...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케이크와 와인 생각을 한다. 겨우살이 가지도.


결국 선택한 건 더 먼 곳으로의 도피. 딘은 건조한 표정으로 점심 식사를 씹고 있는 보카탄을 바라보았다. 헬멧 너머로도 시선은 확실히 느껴지는 건지 그녀는 눈을 굴려 이쪽을 보았다. 루크도 줄곧 내 시선을 읽을 수 있었을까?


 "왜."

 "일이 필요해."

 "하고 있잖아."

 "돌아오는 휴일에."

 "뭐?"


그제서야 제대로 쳐다보는데 여전히 자세는 삐딱했다. 상관은 부하 직원의 지나친 충직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애는?"

 "... 봐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애 말이야. 신경 쓰여서 총질 제대로 할 수나 있겠니?"

 "일이 필요해. 큰 건으로."


보카탄은 눈썹을 한 번 까딱여보였다. 딘은 뒤를 돌아보았고 저마다 무구를 손질하던 만달로리안들은 신속하게 딴청을 피웠다.


 "싸웠어?"


딘은 다시 뒷통수에 우르르 와서 꽂히는 눈길을 느낀다. 저들은 딘의 출근식을 구경하는 데에 매번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는데 아마도 우주 희귀종인 제다이를 구경하기 위함일 거라고 생각 중이다.
    출근식이라 거창하게 이름이 붙은 이유는, 루크가 아침마다 그로구를 데리고 딘을 배웅하러 행차하기 때문이다. 괜찮대도 한사코 그러는 게 처음에는 고마웠지만 요즘은 끈질기게 얼굴을 비추는 게 야속하기만 했다. 숲에서 그런 일이 있고 딘은 루크에게 꼭 필요한 짧은 답 외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루크는 묵묵히 배웅과 마중을 계속했다. 그러니 더 미안하지. 차라리 화를 내면 좋을 텐데.


 "아니."

 "그럼 왜? 원래 연휴는 연인과 함께, "

 "아니다."

 "원래 연휴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하는 거야."

 "가족." 

 "그래."


딘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일이나 줘." 

 "일이야 많지.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라고."


함선의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딘은 반쯤 모른 척했다. 왜냐하면 반절 정도는 정말 이 탄식들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보카탄은 선실을 넌지시 둘러보더니 다시 선언했다.


 "오늘 저녁 회식. 위대한 만달로리안 전사들은 잔을 마다하지 않는다 알지?"


함선의 방방곡곡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딘은 모른 척했다. 어쨌든 늦게 돌아갈 구실이 있다면야 그걸로 한숨 또 돌릴 수 있다. 많이 마신다면, 아예 여기서 자고 다음날 돌아가거나 아니면 연장 근무를 해도 될 것이다. 딘 자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는 게 아니라 자루를 쥔 사람이 내리찍으니 발등이 작살나는 것이라고, 딘은 야빈 IV의 제다이 사원 앞에 또다시 버려졌다. 담요 한 장이 나이를 이상한 곳으로 먹은 빨간 머리 독재자의 마지막 인정이었다. 그리하여 눈을 딱 뜨니 무척 화가 나 보이는 제다이 마스터 루크 스카이워커가 보였다.

딘은 거꾸로 보아도 예쁜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뵙습니다."


루크는 눈썹에 잔뜩 힘을 주고 무언가 대꾸하려다 돌연 의기소침해졌다. 그러고는 사원 입구에 드러누워 일어날 줄을 모르는 만달로리안 남성에게 아들내미를 안겨주었는데,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모양이 꼭 누가 깨어나기를 불편한 자세로 오래 기다렸던 사람처럼 보였다.

제다이는 말없이 뒤 돌아 저쪽 복도 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단호하다기엔 조금 느린 걸음으로.

딘은 당혹감을 느낀다. 술이 깨는 것도 같았다. 아이의 작은 손이 헬멧을 두드렸다. 작게 톡톡. 그 소리에서 낙엽이 부스러지던 잔 소음과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 유독 파랗게 보이던 눈동자와 눈송이처럼 내려앉던 손길이 떠올랐다. 케이크와 와인. 성탄절. 가족. 로맨스.

왜일까. 여태껏 피해왔는데 어쩐지 이제 와서 저 뒤를 따라야 할 것만 같다. 루크가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작아지는 동안 딘은 그의 이름을 부를까 망설인다. 그리고 저 사람이 작은 점이 되고, 마침내 사라지고 나서야 입속으로 작게 불러본다.


 "루크... "


루크 스카이워커.

딘은 고개를 돌려 사원 중앙의 거대한 나무를 쳐다보았다. 빨갛고 하얀색, 초록색과 파란색. 누군가가 연상되는 금빛. 반짝반짝 빛나는 알갱이 전구들. 그로구를 품에 안고 정상에 별을 매달던 루크 스카이워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의 유년기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산타 클로스는 가장 곤란한 시기에 불쑥 찾아와 인수인계를 시도하고 있다.

딘 자린은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렇게 보관실에 잘 숨겨둔 케이크를 쳐다만 보다가 여기 망망대해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 부유하게 된 것이다. 성탄절의 전야에.

딘은 멍하니 계기판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올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어쩌면 네바로나 혹은, 그래, 저 멀리 코렐리아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눈이 보고 싶다면 호스로 가버려도 좋고. 하지만 어딜 가도 그가 원하는 푸름은 없을 것이다.

성인의 축일에 총질을 해대서 그런가. 그런 것 따위 하등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어째서 마음이 이리도 불편한 걸까. 정말 돌아가지 않아도 좋은가? 나는 그래도 좋은 걸까.

그로구는 산타 클로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빨간색을 두른다면 알맹이가 어떻든 괜찮지 않겠어.

하지만...


마악 좌표를 몇 자 입력하는데 문득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움직이지 마!"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서 그런가 놓친 부분이 있었나 보다. 여태 그런 적이 없었는데. 딘은 먹먹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양 팔을 늘어뜨렸다. 그렇다고 영영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다. 케이크와 와인 생각이 났다. 나무 아래 쌓인 선물 상자도, 어쩌면 잠들어있을 아이도,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

어쩌면 가족이 될 수도 있었던...

아직 기다리고 있을까?


 "개자식... 손 들고 천천히 일어나.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 크헉!"


만달로리안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리고 제다이의 푸른 눈을 볼 수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딴판인 웃음기 없는 얼굴, 고요한 분노와 결의. 허공에 매달린 사람이 목을 긁으며 발버둥 치는 것도 모르고 그 파란색만을 보았다.


딘 자린은 도저히 제다이들이 부리는 마법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마법을 부리길래 모든 게 결국 당신 생각으로 귀결되는 건지. 살아온 경험에 따르면 집에는 모름지기 날개가 있어야 하고 얼린 사람을 놓을 공간도, 아이가 잠들 요람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지도 못하고 얼린 사람을 보관할 냉동고가 없어도 아이가 잠들 안락한 요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알록달록 꾸며놓은 커다란 나무와 케이크 그리고 와인. 가족을 따듯하게 해 줄 꺼지지 않을 화톳불. 거기에 더해서, 


 "딘."


그리고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딘 자린은 현실로 돌아온다. 그는 홀스터에서 빠르게 총을 꺼내 적의 머리를 쏘았다.


 "여긴 어떻게... "

 "빨간 머리 산타가 알려줬어요."

 "예?"


루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루크 스카이워커, 금발이 예쁜 제다이 청년, 어느새 그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불쑥불쑥 나타나 놀랄 만한 일을 벌이는, 조용하지만 잘 웃고 쾌활한 사람. 그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당신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사실... 크리즈의 이름으로 홀로 메시지가 왔더라고요. 당신이 누구랑 식을 올리고 끝내주는 웨딩카를 타고 떠나려고 한다고... "


황당함에 만달로리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명색이 제다이 마스터가 그런 일말의 근본도 없는 헛소리에 속았다니 어쩌면 성탄절 특집 기사에 실릴만한 우스운 일이다. 그는 벌써 내일 아침 받아볼 조간신문의 헤드 라인을 상상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보카탄은 왜 그런 거짓말을 루크에게...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왜 신문을 받아보기로 했었나 최초의 이유를 떠올리고 상념을 털어냈다. 날짜를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았던 야빈의 영웅 루크 스카이워커에 대한 기사를 기억한다. 누군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건, 어쩌면 그게 바로 시작이었던 걸까. 모른 척해버린 걸까 아니면 이제야 깨달은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지만 딘 자린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은 성탄절의 전야이기 때문이다.

내일 그는 산타 클로스가 되어야 하니까.


제다이는 길어지는 침묵에 더욱 짙고 머쓱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다가 돌연 진중한 눈빛을 하는데,


 "상황이 적절치 못하다는 건 알지만, 지금이라도 말해야겠어요. 딘, 저는, "

 "미안합니다."


겨우 한마디에 모든 결의가 무너진 듯 곧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는 것이다. 그 표정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지만 딘 자린은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당신이 좋습니다. 집은 없지만 결혼해주세요."

 "네! 어...?"

 "감사합니다."

 "네...?"


딘은 좌표를 마저 입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지: 야빈의 네 번째 달, 신 제다이 사원. 자동 운항.

그리고 넋이 나가 서 있는 제다이에게로 다가간다.


 "그래도 그로구의 산타는 제가 해야겠습니다. 루크는 빨간색이 안 어울립니다."

 "네에... "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루크는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제가 빨간색이 안 어울린단 걸요?"

 "아니요, 당신과 결혼하는 걸요."

 "포스여... "


딘, 정말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중얼거리는 루크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아마 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며 만달로리안은 헬멧의 금속 표면을 더듬었다.


 "그로구는... 아마 지금 자고 있을 거예요. 아빠 기다린다고 안 잔다는 걸 제가 재워두고 온 거예요."


제다이는 시선을 피하며 횡설수설 설명을 늘어놓더니 계기판으로 다가섰다. 좌표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쉰다. 청년은 모종의 희망이 담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무해요, 딘."

 "... 미안합니다."

 "청혼부터 받을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아, 아니 아니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요! 돌아가면 선물 같이 풀어봐요. 당신 것도 있고... "

 "저도 줄 선물 있습니다."

 "네? 정말요?"


제다이는 더 그럴 수 없이 빨갛게 되어버렸다. 이런 빨간색이라면 어쩜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 걸. 딘은 낮게 소리 내어 웃었고, 루크는 투덜거리며 품 안에서 녹색 무언가를 꺼내 머리 위로 올렸다.


 "딘. 어쨌든 우리 사이에 로맨스가 좀 부족한 건 알고 있죠? 가족이 되는 건 기쁘지만, 그래도 연인 대접도 받아야겠어요."

 "당신이 원한다면요, cyar'ika."


무엇이든, 얼마든지, 당신 뜻대로. 내일이 성탄절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냥, 아무래도 나는 서툴고 또한 당신을 사랑하니까.

아이는 요람에 잠들고 딘 자린은 겨우살이 아래 헬멧을 벗어던졌다.


메리 해피 홀리 데이, 그들의 길에 축복 있기를.
















안녕하세요 사이버 세상 사람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즐겁고 따듯한 연휴 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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