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은 차도와 인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 2층의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방구석에 고인 그늘에서 금방이라도 환각이 튀어나올 듯, 펄럭이며 부유하는 잔상들에 집중력을 죄 빼앗긴 날이었다. 불을 다 켜놓아도 컴컴하고 조용한 집에서 벗어나려 무작정 노트북을 들고 나왔으나 막상 카페에 오니 집중하기가 더 힘들었다. 이미 카페에 들어온 이상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최신 가요를 탓할 입장은 아니지만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후렴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후크송이 정신 사납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를 그만둔 무영이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옷소매와 붕대에 가려진 왼팔로 끌어내렸다.

독에 쓰러졌다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주변 지인들에게 흉터를 내보였음을 알게 된 뒤, 무영은 왼팔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독으로 발작할 때 보았던 과거의 잔여물이나 갑작스레 함께 살게 된 쌍둥이 형제에 관한 생각이 얽히면 그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기억하지 못하는 흉터의 기원. 그 자신도 어린 시절의 자신을 잘 모른다지만, 아무 의미 없이 제 몸을 이리 난도질하진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그렇다면 내 자해는 어디서 기원하는가. 답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붕대만 끄트머리가 다 닳도록 만지작거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내다본 의미가 없을 정도로 평범한 풍경이었다. 차들은 대체로 규정 속도를 준수했고 성급한 마을버스 몇 대가 신호를 어기고 택시 한 대가 불법 유턴을 한 것만 빼면 전부 무탈했다. 차들은 흘러가는 물에 띄운 나뭇잎처럼 유유히 오갔다. 시원스레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있자면 그 차의 탑승자들도 아무 걱정근심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렇지 않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누군들 개인적인 비극 하나 없겠는가. 개인적인 슬픔 하나 없겠는가. 다들 저만의 상실 하나, 흉터 하나쯤은 달고 사는 것을.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따라 차도에서 인도로 건너오던 시선은 도로변의 가로수에 잠시 가로막힌다. 건물 3층까지는 족히 닿을 법한 키 큰 나무였다. 진한 녹색의 잎사귀마다 태양 빛을 가득 끌어안은 플라타너스가 2열 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잠시 가로수를 응시하는 동안 무영은 나뭇가지가 부자연스럽게 잘려 나간 부분을 전부 찾아냈다. 봄철 가지치기를 할 때 길가 한쪽에 쌓여있던 가지들이 기억난다. 그는 다시 흉터에 대해 생각한다. 몇 번을 더듬어도 잡히지 않는 유년기의 기억은 새하얀 공백이다. 무영은 그의 자해가 어디서 기원하는지, 그의 흉터가 무엇에 대한 기록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가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왼팔에 깊이깊이 새겨진 그것은 어린 랑을 위한 흉터였다. 신상명세서나 호적은커녕 출생증명서도 사망신고서도 없이 존재하던 아이가, 제 이름과 기억을 스스로 도려낼 때 대신 새겨놓은,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삶의 파편을 위한 기록이었다. 더 흐려지기 전에, 완전히 달라지기 전에, 혼자뿐인 세상에 익숙해지기 전에. 동굴에 그린 벽화였다. 잘린 나뭇가지의 흔적이었다. 그러니 호를 제대로 모르는 지금의 신무영이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An Effigy of the Cut Platanus

잘린 플라타너스의 초상


w. Serinos





"랑아, 이 책 다 읽었는데 어디에...."

"야! 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래!!"

아침부터 분노에 찬 무영의 목소리가 집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은율과 게임을 하거나 셰이드와 산책을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 무료해 보이는 쌍둥이 형에게 소설 한 권을 던져준 게 화근이었다. 즐겁게 독서를 마친 이그나지오는 별다른 고민 없이 용마를 통해 무영의 방에 들어갔고, 옷을 갈아입느라 상의를 벗어젖힌 무영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그나지오는 성정이 무례하지는 않았으나 비각 수하의 살벌한 공간에서 차차웅 여럿과 대충 부대끼며 살아온 탓에 사생활이라는 개념에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영의 방문 앞에 설치된, 삼엄하지만 저나 백정탈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방범 장치들이 정말 그들을 막으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공간에 침범하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형제의 내력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무영은 자꾸만 치솟는 화를 억누르며 이그나지오를 방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를 꾹꾹 밀어냈다. 그러나 이그나지오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랑아."

"왜."

"팔, 왜 그래?"

무영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졌다. 방은 어두웠지만 왼팔에 빼곡히 자리한 흉터가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눈이 징그럽게 좋은 쌍둥이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걱정과 분노가 절묘하게 뒤섞인 이그나지오의 표정을 보며 무영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질문을 받았으나 설명하고 싶지 않았고, 함부로 제 방에 들어와 멋대로 흉터를 보아버린 그에게 화가 났지만, 동시에 그는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는 신무영은 모르지만 호는 알고 있는, 어린 랑을 위한 흉터였으므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대로라도 이그나지오가 종종 언급하는 어린 그들의 이야기와, 꿈이나 환각에 빈번히 나타나는 유년 시절의 파편을 적당히 이어붙이면 그가 어린 시절 무엇을 잃었는지, 어린 랑이 어째서 눈에 보이는 흉터로 그 상실을 기록하고자 했는지 어렴풋이 예상은 갔다. 쓸데없이 이런 추론은 빠르지. 호를 제대로 모르는 지금 추론만으로 닿을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지만. 굳이 그 한계를 넓히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 짧게 조소하며 깨달음을 곱씹다 보면 유독 왼팔이 욱신거렸다.

"누가, 언제 이런 거야?"

"하아....내가 한 거야. 어렸을 때. 지금은 안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어렸을 때 언제 그런 건데? 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몰라. 그러니까 더 묻지 말고 나가."

또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집에서 내쫓을 줄 알고. 물음을 싹둑 끊으며 무영이 부러 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자기가 데려와놓고 쫓아낸다 으름장 놓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협박이다. 조금도 웃기진 않았지만. 그가 재차 문밖으로 밀어내자 이번에는 이그나지오도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울적한 얼굴로 몇 번이고 돌아보는 것이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무영은 이 이상의 대화를 이끌어갈 자신이 없었다. 이그나지오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침대에 무너지듯 앉은 그가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왼팔에 깊이깊이 새겨진 그것은 어린 랑을 위한 흉터였다. 신상명세서나 호적은커녕 출생증명서도 사망신고서도 없이 존재하던 아이가, 제 이름과 기억을 스스로 도려낼 때 대신 새겨놓은,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삶의 파편을 위한 기록이었다. 더 흐려지기 전에, 완전히 달라지기 전에, 혼자뿐인 세상에 익숙해지기 전에. 동굴에 그린 벽화였다. 잘린 나뭇가지의 흔적이었다. 신무영은 그 흉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두려웠다.

내 자해는 어디서 기원하는가. 상실이다. 원망이나 분노, 자기혐오와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오롯이 상실로부터 기원한 버릇이었다. 무언가를 잃고, 그 잃었다는 기억조차 잃을 것이기에, '상처'를 해독할 수 없는 문자 삼아 상실의 흔적을 새겨놓은 것이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기억을 아무도 모르게 기록하기 위한 너절한 처절한 행위였다.

한동안 무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제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원래도 일 때문에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 많긴 했지만, 온종일 밖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밥을 먹거나 회사를 가는 등 방에서 꼭 나와야 할 때는 용마를 이용했다. 쉐도우는 그럴 때마다 짧은 불만을 표현했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주인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무영의 두문불출이 이어진 지 일주일째 되던 날, 결국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살아있냐, 검은 것?"

"......."

"아주머니가 오늘 저녁 불고기래."

"......."

"디저트로 레몬 타르트 만들어주기로 하셨고."

"......."

"저녁 먹어라."

안 나오면 네 몫까지 내가 전부 먹어 치우는 수가 있어. 은율이 말을 다 잇기 전에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무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평한 은율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슬슬 마음이 정리되던 차에 뻔뻔스럽게 저녁을 들먹이는 은율의 목소리가 더해지자 고민하던 시간이 무색하도록 갑작스레 나와버리게 됐다. 백정탈의 칭호를 달고 있는 남자는 무영보다 더 오래 산 만큼 더 많은 일을 겪었을 텐데도 아무 걱정근심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렇지 않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누군들 개인적인 비극 하나 없겠는가. 개인적인 슬픔 하나 없겠는가. 다들 저만의 상실 하나, 흉터 하나쯤은 달고 사는 것을.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 흉터가 남으면 뭐 어떤가. 결국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건데. 지나간 일로 끙끙 앓는 나만 등신이지.

"이그나지오는?"

"네놈이 방에서 안 나오니까 계속 축 쳐져 있더라."

"....그러냐."

"왜. 뭐 물어볼 거 있어?"

"아니."

너는 상실을 어떻게 다루냐. 턱 끝까지 차오른 질문을 억지로 잡아 누르고 걸음을 옮겼다.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상실은 그것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 혹자는 그것을 추억하고 애도하는 반면 혹자는 그것을 원망하거나 망각의 강에 처박는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상실이 남기는 흔적을 피해갈 순 없다. 때로는 몸에 때로는 마음에,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적나라하게, 상실은 씻을 수 없는 흉터를 남긴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무영은 자신이 그 흉터에 다소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반응에 개인차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잃으며 잊으며 복잡하게 얽혀버린 유년의 영향으로 무영은 자신이 바라는 것 이상으로 상실과 상실이 남긴 흉터에 과민했다. 그러니 호가 흉터를 보았다는 이유로 일주일이나 방에 은거했겠지. 은율에게 상실을 다루는 방식을 묻고 대답을 들어봤자 변하는 건 없을 터였다.

멍하니 부엌 의자에 앉아 있던 이그나지오는 무영을 보자마자 눈에 생기를 띄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를 보며 다시 작은 한숨을 내쉰 무영은 정말로 무언가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로부터 사흘 정도가 지난 뒤 무영은 평소와 조금 다른 이유로 유진의 집을 찾았다. 아끼지 마지않는 동생은 학생의 본분에 따라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이매와 아라는 유진의 호위를 위해 함께 학교에 가 있고 새하와 천량은 각자 일이 있다며 집을 비워서, 평소 그렇게 북적거리던 유진의 집도 드물게 조용했다. 혼자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 연속극을 보던 하나린은 무영이 들어오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TV를 끄고 탁자 앞에 앉았다.

"네 능력, 사람의 과거나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했지?"

"공짜로는 안 봐줘."

"복채도 안 내고 남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짓은 안 해."

"맞다, 너 재력가랬지. 좋아. 뭐가 궁금한데?"

무영은 잠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면 좋을까 궁리했으나 곧 저가 어떻게 말하든 눈앞의 차차웅은 제 속내를 간파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신왕神王 다음으로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차차웅의 깊은 보라색 눈은 모든 것을 파악하는 듯해, 무영은 자신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평소 행실을 떠올려보면 다소 억울한 일이다.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나는 어릴 적의 기억이 별로 없어. 이그나지오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전혀 기억 못 해. 이제 와서 빈 시간이 궁금해진 건 아니지만.....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하나린은 그가 신경 쓰인다는 대상이 이그나지오라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들 형제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진 몰라도, 하나린이 보기에도 퍽 예민하고 모순적이던 어린놈이 변화를 원한다니 좋은 일이었다. 아무리 아라 외의 다른 차차웅에겐 관심이 없다지만 눈앞에서 삽질하는 걸 계속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질지도 모르니까.

"너희는 오류니까 과거를 확실히 읽어낼 수 있다고 보장은 못 해."

"상관없어. 내 문제는 과거 자체에 달린 게 아니라.....그 과거가 나한테 끼친 영향하고 관련이 있어서."

그러나 튀어나온 건 예상 외의 말이었다. 오랜 연륜에 뛰어난 통찰력을 겸비한 할미탈은 이번에도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그렇기에 곧바로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점집이 아니라 상담소에 가야 하는 문제잖아. 네 능력 밖이라는 거야? 분야가 다르다고, 분야가! 오랜만에 복채 넉넉히 받아 아라와 원없이 쇼핑을 하려던 계획에 머릿속으로 빨간 줄을 좍좍 그으며 하나린이 무영에게 한마디 했다.

"왜 상처가 나으면 흉터가 생기냐고 물어봐도 나는 답을 못 줘."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흉터가 생기지는 않잖아. 이그나지오만 해도....."

"흉터가 생기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른 건 당연하고! 이미 생긴 흉터를 다루는 법은 너한테 달려 있으니까 괜히 지나간 일 들쑤시지 마."

큰맘 먹고 갔다가 구박만 듣고 나온 무영이 미약하게 남은 아쉬움에 유진의 집 대문을 돌아다봤지만 결국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길가에는 가로수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다. 하얗게 버짐이 일어난 것처럼 얼룩덜룩한 나무껍질을 한번 보고, 그림자 대신 햇살이 무지갯빛으로 고이는 푸릇한 나뭇잎을 한번 보고, 잘린 나뭇가지 끄트머리를 한번 보았다. 플라타너스는 가지치기를 해도 잘 자란다고 했던가.

흉터가 남으면 뭐 어떤가. 이미 생긴 걸 어쩌겠는가.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나도 익숙해지면 되겠지. 전에는 이그나지오가 제 흉터에 관해 물었을 때 일주일을 꼬박 방에 있었으니 다음에는 사흘로 끝내고. 그다음에는 하루로 끝내고. 종국에는 별일 아닌 것처럼 내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겠지. 과거의 내가, 어린 랑이,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은 기억을, 상실을, 흉터로 남긴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다소 홀가분해져서, 무영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을 옮겼다.

그날, 그는, 이미 생긴 흉터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생각했지만, 새로운 상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폭풍이 들이닥친 뒤, 연이어 닥쳐온 두 번의 상실로 무너진 마음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을 신무영은 조금 긴 시간을 들여 배워야 했다. 살아야 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아무것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10년을 쏟아부은 노력은 결실을 얻었으나 희생은 컸고 성취감은 미약했다. 엉망진창이었다. 무영은 차단된 오른쪽 시야가 낯설어 종종 무언가에 부딪히거나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꿈은 죄다 악몽이었다. 자윤은 죽었고, 비각은 완전히 다른 인종이 되었고, 고타야는 잠적했다. 푸름이는 혼란스러워 보였고, 이그나지오는 심하게 다쳤고, 처용은 오랜만에 보아도 짜증 났다. 그 엉망진창 속에서 무영은 머리카락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노을은 따스한 오렌지색을 사물 위에 덧입혔다. 제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다른 환자들까지 보느라 고생한 선비탈은 며칠을 꼬박 앓았고, 소파 위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가 진찰한 마지막 환자였던 푸름이는 드러누운 의사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심하게 무리를 한 탓에 맨 처음 진찰을 받고도 여태 회복하지 못한 쌍둥이를 살피고 나오던 무영은 거실 발코니에 서 있는 푸름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무영은 오른쪽 눈에 흰 안대를 하고 있었고, 푸름이는 윤과 싸우다 넘어질 때 뼈를 잘못 부딪쳐 왼쪽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물어보는 게 많이 늦었네. 괜찮니."

"....괜찮아요."

걱정 끼치지 않으려 애써 무덤덤한 척해도 중학생은 중학생이다. 보호해주지는 못할 망정 너무 많은 일을 겪게 했구나. 씁쓸한 기분으로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너는 내가 모르는 사이 너만의 상실을 겪었을 테고, 내가 모르는 사이 너만의 상처를 입었겠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흉터가 되어 기억될 테고. 못 보던 목걸이를 세 개나 걸고, 그 목걸이 군데군데에 묻은 피를 일부러 닦지 않은 듯한 푸름이를 보며 무영은 생각했다.

우리는 전부 크고 작은 상실을 머리나 몸에 기록한 채로 살아가지. 서로의 흉터를 때로는 눈치채고, 때로는 눈치채지 못하면서.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와 양부모님을 만나던 날, 인간불신에 시달리던 한때의 끝에 유진과 만나던 날, 이제 상실의 옛터가 된 집에서 푸름이와 아름이를 만나던 날이 차례로 떠올랐다. 간헐적으로 은율과 호에 대한 기억도 끼어들었다. 무심코 목을 긁적이는 무영을 보는 푸름이도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들은 전부 잃어버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아이는 갑작스레 그의 흉터에 관해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수영장에서 보았던, 상반신 전체에 번져 있던 오싹한 흉터들과, 비각을 싫어하느냐 묻자 피가 나도록 긁는 바람에 상처가 났던 목에 대해서. 다만 그가 물어도 무영은 답해주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아직은. 호를 만나기 전의 신무영이 왼팔의 흉터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새로 생긴 상실과 그 흉터에 대해 답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스물다섯의 신무영을 위한 흉터였다. 그날 무엇을 잃었는지 잊지 않기 위한 흉터였다. 유진과, 은율과, 지금은 전생처럼 아득한 10년 전의 자신. 어렴풋이 이해는 하지만 더 자세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을 터이다. 무영은 푸름이에게 더 말을 거는 대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까닭에 그의 거처는 대로변과 좀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의 시력으로는 멀찍이서 분주히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을 충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

언제인가 지금과 비슷하게 창가에 앉아 흉터를 내려다보고, 다시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상념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고 무영은 흐릿하게 기억해낸다. 그러나 워낙 까마득한 옛날인지라, 막연한 기시감에서 그쳤다. 무영은 그것을 괜히 다시 떠올려보려 애쓰는 대신 조용히 가로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진에 대해 생각했다. 은율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잃은 것들, 상실에 대해. 아득히 먼 곳을 더듬는 듯한 눈빛에, 푸름이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그의 옆자리를 지켰다.

플라타너스는 가지치기를 해도 잘 자란다고 들었다. 그러나 사십 미터까지 쑥쑥 자란다고 한들 가지가 뚝 잘려 나간 흉터를 그가 잊겠는가. 몸이나 마음 어딘가에는 사라진 가지를 사라진 삶의 조각을 흉터로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큰 가뭄과 큰 홍수가 있던 해를 나이테 속에 기록하듯이. 기록하지 않은 기억은 어디로 갈까. 글로 머리로 기록하지 않아도 상실은 흔적으로 흉터로 기록된다. 블록 끝에 자리한, 과도하게 가지치기를 당하여 유독 쓸쓸하고 강파른 인상을 주는 가로수 하나를 무영은 오래도록 바라본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와 그 나무는 물론이고 도로변의 온 가로수가 다 알고 있다. 그 잘린 나무가 상실의 흉터를 오래오래 간직하리란 사실을, 내년 봄에 또 가지치기를 하더라도 모든 흉터를 하나도 빼놓지 않으리란 사실을, 그리고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그 흉터를 안고 다시금 살아가리란 사실을.







190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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