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죽이고 싶은가?"


길을 가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선 채로 물었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의 한자락을 베어 문 것처럼 노인의 입가는 새파랬다. 죽은 자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그저 혈색이 좋지 않은 노인처럼도 보였으나, 서원직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그저 질문, 질문뿐이다. 나머지는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사라져 버린다. 


"뭐라고요?"


어리던 서원직은 솔직히 말해 성격이 좋지 않았다. 여자는 노인 공경보다 노인 공격을 더 잘했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때의 서원직은, 노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 망치로 땅을 툭툭 건드렸다. 일종의 위협행위였다. 노인은 다시금 물었다. 


"그를 죽이고 싶겠지?"

"뭐라는 거야."


히죽.

새파란 입가가 찢어지듯 벌어졌더란다. 서원직은 한 발짝 물러서……지는 않고 그냥 노인을 노려보았다. 물러서는 건 가오가 없으니까. 어린 서원직은 가오에 죽고 가오에 살았다. 진짜로 가오 때문에 뒤진 동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 여기까지 말하겠다. 하여튼간에 그 흉흉한 눈초리에도 노인은 아랑곳않았다. 대신 서원직에게 손을 뻗었다. 

손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한 자루의 칼이다.


"이걸 받아."

"……대관절 이게 뭔데 그러는 겁니까? 이 노인네가 정신이 나갔나?"

"심장을 찔러. 심장이어야만 해."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나 한 자루의 서늘한 칼만을 남겨 놓고 노인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귀신에라도 홀렸나, 헛것을 보았나? 몸이 허한 탓에 그만 환상을 보고 말았나? 손 안에 감긴 칼만이 그것이 환상도 거짓도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서원직은 영문을 모른 채 그저 번득이는 칼을 쥐고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쨌든 칼을 버리지는 않았다. 언젠가 쓰일 것을 직감해서였을까, 아니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근원 모를 불길함 때문이었을까? 


아, 그러고보니 또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노인의 눈두덩이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눈 같은 것은 가진 적이 없던 것처럼. 


지나가는 바람처럼 노인이 속삭였던 것도 같다. 그래야 네가 살아.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다.


***


서원직은 서늘한 칼을 손가락 사이로 휙휙 돌리며 탕비실 의자에 기대 눕다시피했다. 훌륭한 한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을 안 하는 월급 도둑, 뭐 그런 말도 괜찮다. 왜냐하면 사실이니까. 칼은 녹슬지도 무뎌지지도 않은 채 그저 존재했다. 여전히 날카로웠고, 여전히 번득였고,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누구였는가? 그는 무슨 생각으로 서원직에게 칼을 쥐여 주었는가? 그는 서원직이 어떤 짓을 저지르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러나 일을 저지를 것이었다면 진작 저질렀을 것이다. 애초에 서원직이 왜 개과천선하여 책사가 되었겠는가? 그는 젊을 적 이미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전적이 있었다. 그 때조차 서원직은 이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이 칼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한 여름밤의 꿈도 아니고, 어느 여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한낮 노인이 쥐여 주고 간 칼은 기이하게도 제 존재감을 감출 줄 알았다.


"웬 칼입니까."


아, 이 새끼는 사람이 회상을 하려고 하면 꼭 방해를 하네.

서원직은 미간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거의 넘어가기 직전까지 기울어졌던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길게 토했다. 서원직의 알 바는 아니었다. 내 물건도 아닌데 망가지든 말든 존나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망가지면 기쁠 것이다. 조조놈 예산을 한 닢이라도 더 빼먹을 수 있다면야. 


"장군이 알 바입니까?"

"……웬 칼입니까. 설마 빼돌렸습니까?"

"빼돌려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고작 칼 한 자루를. 그리고 군부 재판에 회부될 일 있습니까? 가면 무조건 사형부터 때릴 걸 모를 줄 아나?"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갓이 없는데 뭘 고쳐 써, 갓이 없는데! 조조군 보급품을 빼돌릴 만큼 몰리진 않았으니까 꺼지세요. 고작 칼 한 자루가 아닙니까. 아니면 뭐."


책사가 히죽 웃으며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두렵습니까? 장군. 고작 깡마른 책사 따위가……."

"내 손에 쥐여지지 않은 책사는 두려워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고작 한 자루일 뿐이라고 해도."


장수는 위협적으로 몸을 굽혔다. 구겨진 미간이 빌어먹게 살벌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먹듯 내뱉는 것이다.


"세 치 혀로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책사이니."

"말은 청산유수군. 제 혀를 잘라 놓은 것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리고 아주 충동적으로 책사는 테이블 위에 칼을 내리꽂는다. 칼자루가 부르르 떨렸다. 여자가 짐짓 분노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혀를 자르고, 팔을 묶고, 눈을 가리고 귀를 닫았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

"유부를 잡아채는 것이 솔개나 되어야 분노하지. 솔개나 되어야 화를 내겠지. 어쩌겠습니까? 잡아당겨지다 찢어진 것을요. 아무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썩어가는 수밖에 더 있겠냐는 말입니다."


멱살이 끌어당겨졌다. 눈이 마주쳤다. 애초부터 푸름과 녹색은 동색이 될 수 없었다. 사내는 분노를 담아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한다.


"기워서 써 주겠다고 하질 않나."

"……하."

"그저 쥐여진다면 어떻게든 쓸모있게 사용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쥐여질 생각이 없는 칼이라면 부러지는 게 낫겠지."

"어디 한 번 부러뜨려 보시지. 네놈은 내게 솔개조차 아냐! 그저 바람과 먼지에 불과한 것을."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구겨진 낯은 펴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한쪽 손은 칼자루를 쥔 채였다.


"아니면 장군이 찔려 주시던가."


조롱처럼 말을 얹는다. 그저 상대방을 도발하기 위함이다. 


"찌를 곳을 찾지 못하는 칼은 주인 손으로 부러트릴지도 모르지. 왜, 그럴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저 한 번 찔려 주는 것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다면 남는 장사가 아닌가?"


커다란 손이 낄낄대는 여자의 뺨을 꽉 잡아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푸른 눈알은 차라리 무기물 같다. 저것이 생동감을 가질 때는 오직 주군을 대할 때 그뿐이다. 여자는…… 다르다. 그것은 체념에 젖어서까지도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닮았다. 그러므로 언젠가 그 자신마저 전부 태우고 난다면 잿더미, 오직 잿더미만이 남아……. 붙들린 뺨이 통증을 호소했다. 사내가 손에 힘을 주자 입이 어쩔 도리 없이 벌어졌다. 서원직은 있는 대로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그리고 나면……. 벼락처럼 입맞춤이 와 닿았다. 찌를 곳을 찾지 못해 썩어가는 칼자루를 그렇게 하면 쥘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영영 부러트리고자 하는 마음의 표출인가? 손이 칼자루에서 미끄러졌다. 사내는 눈을 감는 법이 없었고 여자는 그것이 불쾌했다. 

타오르지도 않는 눈으로 장수는 잘도 책사에게 입을 맞추곤 하는 것이다……. 


"아, 이 씨발……."

"부러질 마음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주제에."


눈 대신 목소리가 분노로 끓었다. 이는 그러니 기이한 관계다. 그토록 서로를 혐오하는 주제에 입은 왜 맞춘단 말인가? 왜 탕비실을 자꾸만 찾아온단 말인가? 그저 유부가 썩어가게 내버려두질 못한단 말인가?


"……장군."

"예."

"뭐가 그리 아까우십니까? 다 가진 주제에."

"그 재능. 선생의 그 재능이 아깝습니다."

"주제넘게 굴지 마세요."

"주군에게 쥐여진다면 천하를 넘볼 수 있는 그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 아깝습니다."


이는 충의인가, 아니면 광기란 말인가.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장수와 책사는 서로의 눈도 피하지 않고 그런 대화를 했다. 


"대체 왜?"

"……."

"대체 왜? 낭비되는 책사가 나 하나뿐인가? 아닐 텐데. 당신 주인이야말로 정상에 가장 가깝잖아. 발치에 채이는 것이 천재들이라고. 그치들에게도 이리 굽니까?"


장수는 답하지 않았고 책사는 그 끔찍한 침묵 속에서 이미 답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가 되어 흘러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확신은 가려져 있기에 눈을 돌릴 수 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한 번 보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존재했다. 뒤집혀 있기에 온전할 수 있는 패가 존재했다. 서원직은 그 패를 열어 보고 싶지 않았다. 알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그저 다시금 칼을 감아 쥔다.

노인을 생각했다. 입가가 새파랗던 노인을. 

어쩌면 그 노인, 미래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현재와 미래, 과거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


서원직은 아주 충동적으로, 검을 뽑아, 장수가 아닌 자신의 가슴을 찔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자효의 심장을 찌르고 나면 인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무엇을?

그러게.

대체 무엇을? 

찔러 보고 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서원직은 새파란 눈을 보며 생각한다. 


반드시 심장을 찔러야 했다. 심장이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랫동안 심장은 곧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금 칼자루를 쥔 손은 미끄러졌고 칼을 뽑아 누군가의 가슴을 찌르는 대신, 장수를 떠밀어 거리를 벌렸다. 조자효는 두 걸음 물러났다. 서원직은 그 거리감이야말로 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칼을 다시금 뽑는다. 누군가의 심장을 찌르는 대신, 장난이라도 치듯 겨누어 보다가, 이내 낄낄거린다. 우습다. 우습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죽이고 싶냐고?

아, 그런 노인들이 으레 그렇지. 기이한 것들이 으레 그렇지. 질문에 한 가지 의미만을 함의하는 법이 없다니까.

그를 죽이고 싶냐고?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는다고…….


그는 꼭 이런 동화를 알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원직의 다리는 조자효가 아닌 유현덕을 위해 부러졌다. 서원직 스스로 부러뜨렸다. 그러니 이야기의 결말이 다를 수밖에. 서원직은 살 것이다. 물거품은 커녕 인간으로 남아 살아갈 것이다. 걷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오늘 조자효를 찌를 필요는 없다. 그를 찌르고 나면 인정해야 한다. 


"장군."

"예."

"가세요. 정말로 찔러 버리기 전에."


그는 결국 그 칼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 채 방을 떠났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칼 따위는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서원직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책사인 이상 장수를 칼로 이길 수는 없으니까.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라는 것도 이미 조자효는 알고 있다.

차라리 잘려나간 것이 정말로 혀였어야 했다. 서원직은 잠시 칼을 노려보다 바닥에 내던졌다. 


선득하고 아름다운 그 칼은 쇳소리조차 내지 않고 물거품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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