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드 49화 이후 ~ 브이시네 크로즈 이전 시점

* 토끼용 A to Z 챌린지는 별것은 아니고 아래 트윗을 참고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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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드 폰에 설정된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요란한 소리에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센토는 저만치 날아가 있는 이불을 보고 착잡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어쩐지 자는 데 좀 춥더라. 틈만 나면 이불을 걷어차기 일쑤인 파트너의 새우튀김 꼬리 같은 머리 꽁지를 잡아당겼다. 악,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깬 반죠가 눈을 사납게 떴다가 센토가 가리킨 홑이불을 보고 눈매가 둥글어졌다. 척척 걸어가서 이불을 가져온 반죠가 곱게 갰다. 제대로 된 커버도 씌우지 못한 매트리스 위로 곱게 갠 이불이 덩그라니 올라갔다.

아침부터 정신없는 하루의 시작이지만, 대부분 루틴은 비슷했다. 일어나면 가벽을 세운 화장실로 들어간다. 세면대 위에는 똑같은 모양의 빨간 칫솔꽂이와 파란 칫솔꽂이가 있다. 역시나 모양은 같은 빨간 칫솔은 센토가, 파란 칫솔은 반죠가 치약을 쭉 짜서 이를 닦는다. 양치 컵도 색으로 구분했다.

아침은 주로 챙기는 편이었는데,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다. 시리얼이나 달걀, 고구마 같은 배를 채울 수 있지만 간단한 식사를 했다. 처음엔 컵라면만 줄곧 먹었는데, 센토가 몸에 안 좋다고 금지했다. 먹어봤자 해저드 레벨 7의 몸에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죠가 잠시 항의했으나, 센토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고 컵라면 먹을 수 있는 날을 정해두었다. 반죠는 자꾸 까먹는 건지 아니면 까먹고 싶은 건지 정해진 날짜가 아닌 날에 슬그머니 컵라면을 꺼내서 센토에게 종종 혼이 났다.

파란 머그잔에 반죠의 우유를 따라주고, 센토는 자신의 빨간 머그잔에 우유를 따른 후 커피를 섞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빨간색은 센토, 파란색은 반죠 것으로 정해둔 것처럼 둘은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 물건으로 창고를 채웠다. 구분하기 쉽다는 이유로 시작한 일인데 둘은 재미를 붙여서 같은 디자인에 빨간색, 파란색이 있으면 눈독 들였다가 급료가 들어오면 구매하기도 했다. 빠듯한 살림인지라 꼭 필요한지 따져보는 건 센토의 몫이었지만.

오늘은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비슷해서 센토가 반죠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센토의 바이크 뒷자리에 탄 반죠에게서 익숙한 향이 났다. 마트에서 할인하는 비누 향. 센토와 반죠는 이 비누로 머리도 감고 샤워도 했다. 바로 뒤에서 나는 진한 비누 향이 바람에 실려 올 때마다 센토는 못내 뿌듯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갈색 머리 반죠에게서 자신과 같은 향이 날 때의 이 심경을. 센토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마음에 품고 반죠에게서 느껴지는 고동을 온전히 느꼈다.

보통 퇴근은 반죠가 센토보다 빨랐다. 센토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물까지 설렁설렁 30분 정도 걸어오면 센토가 나올 즈음이다. 워커의 바닥을 바닥에 직직 그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센토가 털레털레 걸어 나왔다. 신분 때문에 영 흥미 없는 분야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센토는 시든 풀처럼 굴 때가 있었다. 그러다 건물 앞에서 서성이는 반죠를 보고 금세 눈을 반짝이며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본 옆의 동료가 눈을 크게 떴다.


“키류 씨 그렇게 표정 밝은 거 처음 봐요.”

“어, 그런가요?”


센토는 동료의 말에 고개를 한 번 갸웃한 뒤 바이크에 반죠를 태웠다. 센토는 동료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대부분 나는 이런 표정인데. 반죠에게 헬멧을 씌우며 물었다. 반죠, 내 표정 말이야. 지금 어때? 반죠는 무슨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이다.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별 쓸데없는 걸 다 묻는다는 표정. 어떠냐니, 평소랑 같지. 센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그렇지?

둘이 도착한 곳은 저렴한 가격에 생활용품을 파는 잡화점이었다. 센토가 만들 수 있는 건 만들겠지만, 만들기에 재료가 더 비싸거나 복잡한 것, 혹은 만들 수 없는 것은 이 잡화점에서 자주 사는 편이었다. 반죠가 아령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이-참고로 이미 창고, 아니 집에 있다.- 센토는 신중하게 매트리스 커버를 고심했다. 이런 곳에서 사는 매트리스 커버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을 하고 싶었다. 이것저것 물건을 건드리고 있는 반죠를 끌고 와 커버를 만지게 했다. 이건 어때, 저건 어때, 늘어나는 선택지에 반죠가 진지하게 만지다가 결국 포기했다. 난 다 똑같은 거 같다고! 센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쓸 수 있는 예산과 매트리스 커버의 질을 고려하다가 결국 만지작거리던 커버를 손에서 놓았다. 아쉬운 마음에 커버 쪽으로 눈이 흘끗 가는데 순간 센토의 시선을 잡아 끈 게 있었다.


“반죠, 이것 좀 봐.”

“이게 뭔데?”

“너 닮았어.”


센토가 시바견이 그려진 코스터를 가리켰다. 반죠가 그걸 보더니 그런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다가 옆에 걸린 같은 디자인에 패턴만 다른 코스터를 덥썩 잡았다.


“야, 센토. 이건 너 같다.”

“토끼?”

“엉.”


어디가 닮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반죠의 미감을 의심하던 센토가 장바구니에 코스터 두 개를 담았다.


“예산 뭐시기 때문에 안 된다며?”

“이 정도는 괜찮아.”


반죠가 내미는 물건마다 족족 반려 당하기 일쑤였던지라, 그 작고 별 것 아닌 듯한 코스터를 보고 잠시 툴툴거렸다. 그래도 그 코스터는 결국 센토와 반죠의 빨간색, 파란색 머그잔 아래 당당히 자리 잡았다. 분홍색 바탕에 하얀 토끼가 그려진 코스터와 보라색 바탕에 노란 시바견이 그려진 코스터는 센토가 어디에선가 재료를 주워와서 뚝딱뚝딱 만든 좌식 테이블 위에 놓여 제 자리를 찾았다.

빨간색과 파란색 칫솔꽂이는 세면대 바로 위에, 역시 같은 색의 양치 컵도 세면대 위에. 샤워기 옆에 놓인 비누. 싱크대 옆 올려진 밥그릇,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 좌식 테이블 위 색만 다른 머그잔, 그 아래 깔린 토끼와 시바견 코스터. 아무것도 없던, 텅 빈 창고를 하나둘 센토와 반죠의 물건이 흔적을 남기며 채우고 있었다. 제법 생활감이 느껴지는 창고는 이제 정말로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어떤 날처럼 ‘다녀왔어.’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걸 위해서는 차곡차곡 채워 나갈 수 있는 쌍쌍의 물건도 중요할 테지만,


“센토, 밥 안 먹어?”


이곳을 집으로 만드는 반죠가 아마 가장 중요할 것이다. 센토는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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