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세단 위로 풍경이 반사됐다. 지나치는 가로수가 온통 분홍빛이었다. 찬도가 하루 일정을 읊었다. 말에 높낮이는 없다. 기계음인 양 도정되었다. 정국은 눈을 감은 채 찬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경제 라디오를 틀어놓은 듯 단조롭다. 오전 열한 시 회의, 정오에 오찬, 오후 두 시에 간담회, 그 후의 일정은 없다. 벚꽃잎이 나리며 차량의 후드로 떨어졌다. 하나둘 떨어져 앞 유리와 마찰했다. 운전기사가 와이퍼를 작동하며 잎을 닦아내던 그때, 상석에 앉아있던 정국이 눈을 떴다. 시선은 차창에 닿았다.

“세우세요.”

차량이 부드럽게 멈춰 섰다. 하차하는 정국을 따라 찬도가 내렸다. 구두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일곱 걸음 뒤였다. 발길을 잡은 건 전광판이었다. 하필이면 눈을 뜬 그때, 창밖으로 보이던 건물 외벽 광고판. 잿빛의 오 층짜리 건물이었다. 정국의 이목만 끈 건 아닌 듯싶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광고를 보고 멈춰 섰다. 정국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광고판을 올려보는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곧 침몰할 함선처럼 큰 각이었다. 거기에 찡긋거리는 미간이 더해졌다.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공수하고 있던 찬도가 눈치를 살폈다. 습관성이었다. 직업병이기도 하고. 정국이 턱을 살짝 당겼다. 눈은 전방에, 말은 옆으로 흘렀다.

“내 눈에만 보입니까?”

“저도 보입니다, 대표님.”

흐음. 고심하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구두 옆으론 분홍빛이 흩날렸다. 찬도가 양장 수첩을 꼭 움켜쥐었다. 의지할 때마다 쥐었더니 노트는 찬도의 손때가 묻었다.

“대표님. 불러들일까요?”

“…오늘이 만우절이었던가.”

“예. 정황은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국이 찬도를 돌아봤다. 오늘이 만우절이라고? 묻는 말끝이 올라갔다. 툭 던졌는데 예상외로 미끼를 물어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찬도는 공수한 손을 풀지 않고 답했다. 예, 대표님. 만우절입니다. 무미건조한 낯에 웃음기가 툭 떠올랐다. 구두가 다시금 길을 거슬렀다.

이번엔 전광판이 아닌 차로 향했다.

<김태형, 연하의 재벌 4세와 전격 결혼 발표!>

.

정자세는 변함없다. 회의가 시작한 열한 시부터 사십이 분이 지난 지금까지, 정국은 미동 없었다. 임원들의 구미를 당긴 건 다른 데에 있다. 상석에 앉은 대표가 시종일관 핸드폰을 들었다가 놨다. 언뜻 시계를 보는 것 같지만 틀렸다. 대표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찬도에게 물었고 회의 도중이라면 제 손목에 있는 시계를 활용했다. 회의 도중 한눈팔다가 개쪽당한 임원이 몇이던가. 지금 대표가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회의가 시작한 열한 시부터 사십이 분이 지난 지금까지. 임원들의 무례한 눈길이 날아든다는 걸 알면서. 무려 사십이 분간 조그만 손기계를 힐긋거렸다. 집중력이 분산된 정도가 아니었다. 박살이었다.

회의가 끝난 열한 시 오십 분, 정국은 제일 먼저 장을 이탈했다. 잰걸음은 회의장을 빠져나가 긴 복도를 지났다. 찬도가 부리나케 뛰었다. 정국과 보폭을 맞춰 걸으며 오찬 일정을 설명했다.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국은 연락처에서 찾아낸 김태형에게 전화했다. 전원이 꺼졌다. 한발 앞서 걷던 구두가 급제동했다. 예고 없는 브레이크에 찬도가 휘청거렸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잔뜩 굳은 얼굴 아래로 미세하게 근육이 튀었다. 찬도는 버릇처럼 양장 수첩을 움켜쥐었다.

“대표님, 찾아올까요?”

“호텔로.”

“예, 대표님.”

찬도가 정국을 두고 뛰기 시작했다. 정국은 자리에서 포털 앱을 켰다. 김태형 석 자를 논외로 치는 기사가 없다. 여기도 김태형, 저기도 김태형, 그 뒤엔 연하, 재벌 4세가 수식어처럼 따라붙었다. 주간지가 시끄러워질 예정이었다.

.

정국은 샤워가운을 걸치고 통유리 앞에 섰다. 룸 밖으로 야경이 펼쳐졌다. 종일 주물렀던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경쾌한 음과 함께 숫자가 떴다. 3%. 딱 인내심만큼 잔류했다. 잉여 인심이 없었더라면 호텔로 발을 들이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한갓지게 씻고 경치를 감상할 정신도 부재했겠지. 젖은 머리칼을 터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수건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발걸음은 차분했으나 급했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어서 옆을 돌아보니 태형이 서 있다. 검은 목 폴라 티셔츠에 검은 슬랙스, 머리는 손질하지 않아 차분했다. 벽에 기댄 자세는 제법 불량했다. 시건방진 눈으로 정국을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사람을 내려다보듯. 젖은 머리와 슬리퍼를 알뜰히 감상했다.

“뭔데 문을 그따위로 열어? 앞에 서 있다가 맞으라고?”

미간이 움찔거리며 튀었다. 핸드폰을 꺼두고 잠적한 것도 모자라 사람을 뭍에서 떠밀더니, 이젠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기막힌 숨이 터진다. 정국은 감정을 억누르며 태형을 샅샅이 뜯어봤다. 오가는 말은 없었다. 대치가 길어졌다. 문을 열어 두고 태형을 등졌다. 걸음마다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태형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익숙한 듯 문을 당겨 닫았다. 룸 내부엔 기척이 있었다. 사람이 머물렀던 기운. 언제부터 머물렀는지 정확히 몰라도 정국의 체취가 곳곳에 남았다. 태형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국이 유리 테이블 위의 신문을 집어 던졌다. 기막히게 태형의 발치로 떨어졌다. 태형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주워들었다. 기사의 헤드라인과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찍혔다. 태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치형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 보그 쓰라니까 왜 디패 컷이야?”

강생수를 들이켜던 정국이 태형을 돌아봤다. 친절하게 신문을 펼쳐준다. 보기 좋도록 정면으로 들이밀었다. 어때? B급 감성도 멋있어? 네가 선물해준 셔츠 입었는데. 찍사 있을 거 같아서. 이날 네가 사준 향수도 뿌렸거든. 근데 사진엔 냄새가 안 담기잖아? 그래도 잘 나온 사진이라 고맙네. 조잘거리며 태형이 테이블 위 와인을 땄다. 잔 가득히 따라 단숨에 마셨다. 갈증을 채우는 목젖이 보기 좋게 꿀렁거린다. 나른한 눈길이 태형의 목젖을 주시했다. 태형은 개운한 숨을 뿜었다. 하, 이래서 전문 사진사를 고용해야 하는 건데 돈이 없네. 외려 예절을 짓밟듯 꺽 트림까지 곁들였다. 얕은수였다. 결례를 범하면 정국의 심기가 비틀릴 거라 생각하니까. 이보다 더한 걸 직면하며 어째 비틀릴 수 있을까. 정국은 마시던 생수를 팽개쳤다. 물이 콸콸 쏟아지며 카펫을 적셨다. 목적지 김태형까지 걸음은 단 여섯 발, 그 길목에서 묵직함이 땅에 끌렸다. 마침내 당도한 코앞에서 정국이 숨을 깊이 내쉬었다. 체취와 보송한 냄새가 뒤엉켰다. 턱을 틀어쥐는 손엔 힘이 잔뜩 실렸다. 통증을 느낀 태형이 이맛살을 구겼다. 손가락이 살을 후벼판다. 멈출 기미가 없었다.

“성가시게 굴지 말랬지.”

아, 씨발 내일 지면 인터뷰 있다고! 꽥 고함치는 소리가 귓가에 이명을 만든다. 정국이 힘을 푸는 동시에 태형은 손을 떼어냈다. 시뻘겋게 쓸린 자국으로 얼굴이 얼룩덜룩했다. 태형이 폭발한 감정을 쏟아냈다. 화수분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씨발 사진 한 번 찍힌 게 대수야? 기사 하나 터진 게 어때서?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란 걸 하고 행동한다고, 이 씨발 새끼야! 장난도 못 쳐? 장난도 못 치냐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여전히 반성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보였다. 정국은 손을 뻗었다. 불긋한 손자국을 만지려 하자 태형이 움찔하며 고갤 틀었다.

“상대 봐가면서 치라고.”

“씨발 내 상대가 누군데.”

빈정대는 어조가 곱지 못하다. 겨냥하듯 적반하장이었다. 한마디에 백 마디를 얹으며 펄펄 뛰었다.

“네가 내 상대야? 씨발 네가 왜 내 상대야?”

“태형아.”

정국이 손목을 쥐었다. 차분하고도 고요한 음색이었다. 성난 얼굴 대신 안면엔 처연함이 들이찼다. 마치 이 상황을 다른 감정으로 해결하려는 듯 나긋했다. 태형이 눈을 치떴다. 반사적이었다. 잡힌 손목도 뿌리쳤다.

“놔, 씨발.”

“내가 결혼한 게 그렇게 화가 나?”

태형을 옥죄듯 허리춤으로 팔이 감겼다. 정국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태형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았다.

“그래서 만우절을 핑계 삼았어?”

발칙한 거짓말이었다. 만우절이기에 가능한 시나리오. 저따위 개소리로 득을 볼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 김태형이 저지른 건 그런 거였다. 누구도 이득을 취할 수 없으나 누구나 해를 입고 마는. 자충수였다. 악수이자. 고작 관심을 끌기 위해 대국민 생쇼를 펼쳐야만 한다는 현실이 태형을 더없이 서글프게 했다. 끝내 이 호텔로 불려와 이 앞에 서게 되기까지, 만감이 태형을 휩쓸었다. 개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 건 절망이었다.

정국이 휘감은 팔에 힘을 줬다. 꽉 움켜쥐고 당겼다. 코끝이 스쳤다. 두근거리기 이전에 서늘함으로 피가 싸늘해졌다. 사정거리 안은 언제나 태형을 곤욕스럽게 했다. 뒷걸음쳤다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물러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진해야만 했다. 코앞의 전정국에게. 정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선은 처연하고 말소리는 애틋했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태형아.”

“…….”

“네가 도발하면 나는 흥분한다고.”

“…….”

“내가 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주길 원해?”

수없이 맞췄던 다정한 눈. 숱하게 속삭이던 자상한 말투. 속에 든 말은 거칠고 형편없다. 여러 해를 지나며 학습한 건 속았다는 감정이었다. 연습과 훈련을 거듭해 만들어진 듯 한순간도 이질적이지 않았다. 전정국은 이런 새끼였다. 나쁜 말도 좋게 말하면 좋게 들릴 거라고 착각하는 인간. 우습게도 절반은 먹혀들었다. 용서하고 싶어졌다. 다정함과 자상함을 무기로 좋은 남자인 척 구니까.

“응? 자기야.”

장 폴 사르트르가 그랬던가. 삶은 절망의 다른 면에서 시작한다고. 누군가 묻는다면 태형은 답할 것이다. 이면이 없다고. 애석하게도 더 시작하고 싶은 삶이 없다. 이미 지옥인 생. 그래서 더없이 심플하고 찬란한 삶.

“…이 씨발… 개,”

새끼야.

이어질 말이 정국의 입으로 먹혔다.

산산이 조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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