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년의 기억(츠키히토/CV.하세가와 다이스케)

너무하잖아! 전에 내 방해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지?
손가락 걸고 약속, 거짓말하면 노크 1,000번 때리기! (붕)
라고. 하하하하하하! 뭘 꾸미는 건진 모르겠지만, 다른 신사를 탈취해서까지 신자를 모아야 해?
신앙심은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래도 뭐,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어.
나는 그럼 참배하러 오는 녀석들을 지우면 되지?


어느 저널리스트의 기억(쿠에 토비히코/CV.토비타 노부오)

'쿠에는 아는 게 참 많지'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은 자주 들었지만, '척척박사'보단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멍하니 있던 소년이었기에,
멍청히 서 있는 모습을 비유해 자주 허수아비라 불리기도 했다.
그것도…라고 해야 하나, 아무도 '머리 좋지-'란 말을 해주진 않았지만,
뭔가 모르는 일이 있으면 친구들은 신기하게도 그 '허수아비'를 찾아왔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이야기다.
당시의 척척박사 소년 쿠엑사(Kuexa)*는 여러 가지로 편리했던 거겠지.
역사 연표부터 유행하는 게임의 공략까지 알고 있는 내용은 뭐든지 답했지만,
제일 좋아했던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잡학이었던 거 같다.
쿠키와 비스킷의 차이, 샤벨과 스콥의 차이,
물건에는 이름이 있고, 반드시 그 어원과 유래가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처음으로 그 사실을 인식했을 때, 내 영혼이 감동으로 떨렸던 것을 기억한다.
오하기와 보타모치의 차이.
드미글라스 소스와 데미글라스 소스의 차이.
본질적으로는 같더라도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면, 그 나름의 이유나 일화가 있다.
거기에는 역사나 문화가 있고, 정보를 분류하고 차별하려는 자세에서도
사람의 번영의 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의 이름 하나로도 그렇듯, 이 세계는 정보의 집합체였다.
안다, 는 것은 재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신기한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꿈속의 나는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다양한 장소에 찾아가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여행은 견문을 넓힌다고 하지만, 이걸 꿈에서 볼 정도로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가?
장래에는 막연하게 뭔가 학자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던 내게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도 또한 재밌다고 강하게 느낀 계기가 찾아왔다.
당시 담임이 추천하여 맡게 된, 변변찮은 학급신문에 실린 작은 연재 코너가 불러온 반향 때문이었다.
서투른 포리(岡っ引)의 일러스트가 함께 실린 그 연재는 '오용(고요우)으로 볼일(고요우)이다!'란 제목으로,
아키츠 어의 여러 오용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진짜 중시했던 점은 내가 가진 잡학의 피로가 아니라,
'여러분도 찾아보지 않겠나요?'라고 동급생들에게 투고를 권유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두통이 아프다'라거나, '말에서 낙마'라거나, 그런 오소독스한 단어부터 시작한 연재는 언제부턴가
'아침 조례가 존나 긴 학교 교장!' 같은 파워 워드를 낳고, 최종적으로는 다른 반에서도 투고가 모이는 등,
학급신문을 뛰어넘은 몬스터 콘텐츠로 자라났다.

어릴 적의 나는 지식이라는 보석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자칫하면 자기 혼자로만 완결나는 그 기쁨은,
다른 사람과의 공유를 통해 연마되고, 때로는 몇 배로 빛날 수도 있다고 깨달았다.
그런 내가 보도와 관련된 직업을 선택한 건, 아니, 보도의 길에 전력으로 힘을 쏟는 선택을 한 건,
하늘의 천명이었겠지.
대형 신문사를 나온 나는, 그 신기한 꿈은 전혀 꾸지 않게 되었지만,
그건 현실의 내가 꿈속의 나를 따라잡은 증거로 느껴졌다.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다.
꿈 속의 나는 여행자(투어리스트)가 아니라 저널리스트였던 거다.
기대받는 장애인 운동선수의 취재,
어느 야구선수와 범죄조직과의 어두운 관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는 방화범의 심리,
사람과 동물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뇌 손상,
여성 수형자의 증언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가면의 남자,
신출귀몰의 골동품점,
감자를 내던지는 수수께끼의 유령,
강림하는 여신과 쿠제산의 분화에 관련된 전승.
일부만 열거해도 상당히 카오스한 안건이 줄줄이 나오지만,
나는, 내 사명을 끝까지 해내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우선 다음 주에는 어떤 의혹에 휩싸인 신사의 잠입 취재를 성공시켜야 하지만,
설마 몇 번이고 꿈에서 봤던 그 신사는 아니겠지…?
그럴 리 없나. 하하하…

*쿠엑사(쿠에쿠사): 아마존의 AI 알렉사(아레쿠사)의 패러디.


어느 소녀의 고백(무나카타 사요리/CV.쿠로자와 토모요)

나는 공주님이 좋아.
귀엽고, 불쌍하고, 그래도 마지막에는 왕자님에게 선택받는 여자아이.
말괄량이라도 좋고, 소심해도 좋아.
순진해도 좋고, 새침해도, 그건 그거대로 괜찮아.
그런 옵션은 취향에 따라 커스터마이즈 가능하다구?
어쨌든, 사랑받는 것.
그것만큼은 기본 스펙에 들어있어야 해. 공주님의 절대조건.
후후.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나도 사실은 조금씩 깨닫고 있지만 말이야.
뭐를 하든 사랑받는다거나, 그런 두루뭉술한 형편 좋은 이야기.
현실적이지 않단 말이지-.

무조건적인 사랑은 환상이야.
매우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피어 있지 않은 꽃이야.
특히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서는 신기루보다 더한 말이지.
아무리 좇아도 거기 있는 건 허상뿐이잖아?
'무상의 사랑'이라는, 울림만 아름다운 아키츠 어도 있지만.
부모의 사랑도 평등하진 않아.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땐 반드시 타산과 흥정이 생겨나.
에? 틀리지 않아? 그렇다고 별로 사람이 싫은 건 아냐.
나는 이 세계를 그런 것이라고 이해한다…는 것뿐인 이야기.
그렇다면 그걸로 좋잖아?
사랑에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는 소녀. 무나카타 사요리.
이건, 내가 공주님이 되는 이야기야.
그 룰을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이용해서 말이야.

에? 가족에게 뭔가 프로블럼이 투게더한 거냐고?
에, 아하하하! 당신 어디 사람이야? 정말, 특이한 노가쿠관계자도 있구나.
뭐 쉽게 말하자면 3자매 중 차녀는 변변찮지 않다는 얘기.
첫 번째 아이라는 이유로 장녀는 과도한 애정을 받아, 다음은 내 차례다-라고 생각했더니
분위기도 모르는 타이밍에 태어난 셋째가 막내 특유의 어리광 특권을 전부 가져갔다-는 이야기야.
그렇다고 해서 사요는 네, 그렇습니까라며 손가락만 빠는 무능한 차녀는 아니지만 말이야?
역시 장녀는 견실해야지- 라던가, 셋째니까 역시 어리광 부리는 게 익숙하네- 라거나,
여러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구- 웃기지? 무슨 일인지 알겠어?
그 사람들이 바보인 게 아니라, 뭐 바보지만, 그 사람이 원하는 이미지에 따라 사요가 구별해 연기했다는 이야기!
연기에 재능이 있었던 걸까?
어릴 때 했던 백설공주 연극도 정말 대 절찬을 받았어!
하지만 그런 사요가 고른 선택지는 연극의 길이 아니라, 아이돌이었어.
그것도 뭐어, 말하자면 연기의 길이긴 하지만… 사요는 생각했어.
지금. 이. 현대 아키츠에서 공주님에 가장 가까운 일은 아이돌이라고!
모두가 원하는 아이돌을 다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마구 칭찬해줬으면 좋겠어, 사요를 공주님으로 만들어주면 좋겠어, 라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필요 없어.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사요는 사요의 힘으로 얻겠어.
어쨌건 사랑받는 존재라는 환상의 꽃을.
혹시 그걸 방해하는 녀석이 있다면 봐주지 않고 때려 부술 거야.

라고, 평소에는 속마음 따윈 밝히지 않지만, 신기하게 당신에겐 뭐든 말하고 싶어지는 분위기가 있네.
어떤 세뇌술이야~?
으음? 말하기 싫으면 됐어.
이쪽도 신생 SAKURA☆HiME의 구상, 안 가르쳐 줄~래~
하지만, 그, 저기, 당신이 제발 들려달라고 하면… 조, 조금만 가르쳐 줄게!

흠!
먼저, 지금 멤버는 나가줘야겠습니다! 어떻게 그만두게 할지… 그건 멋없으니까 말 안 하지만,
사요를 절대적인 센터로 돋보이게 해주는,
캐릭터가 겹치지 않지만 제각각의 캐릭터는 가지고 있는 아이를 넣습니다.
그리고 좀 더 세계관을 깊게 구축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의 그룹을 하나의 국가로 보고, 팬을 국민이라고 부른다… 같은 녀석으로.
아, 또, 그러네, 좀 더 독특한 자기만의 네이밍을 원해.
사실은 이번 LEOM MALL이 주재하는 대형 이벤트가 있는데, 그게 굉장히 특이해서 좋아!
아키츠 전 섬 지방 특산물에 전통공예 크래프트 체험, 지방 아이돌의 라이브 따위를 조합한
새로운 형태의 지역진흥 페스티벌이래! 그치? 재밌어 보이지 않아?
사쿠라새우, 팔고 팔아서 엄청 팔아주겠어!
이건 이제, 사요가 전국의 공주님이 되라고 신이 말하고 있단 이야기!
당신도 절대로 보러 오라구! 뭐랄까, 흐음…

반드시 참근교대参勤交代하시도록!

어때? 지금 세계관에 꽤 어울리지 않아? 공주고. 우후후!


어느 소녀의 고백(스도 세리/CV.사와시로 미유키)

나는 공주님이 싫어.
아니, 전 세계의 프린세스를 적으로 돌린다는 말은 아냐.
동화에 나오는, 소위 공주님이 싫을 뿐.
애초에 태생이 고귀하거나, 절세 미녀라거나? 그 시점에서 이야기의 신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잖아.
당연히 도중에는 비참한 꼴을 당하거나, 불행한 처지에 울거나 하지.
하지만 그건 이야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스파이스잖아?
예정조화인 불행이라니 진실한 불행이 아냐.
뭘 말하고 싶은지 잘 와닿지 않으려나?
그녀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행복이 약속되어있단 소리.
먼저 그 결론이 정해진 후의 얘기라는 거지.
그걸 전제로 형편 좋은 불행이 배치될 뿐.
공주님 자신의 노력은 공주님들의 행복과 대부분 상관없잖아.

이제 알겠지?
왜 내가 공주님을 싫어하는지.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냐.
운동신경이 나쁜 건 아니지만, 어떤 스포츠를 잘하는 것도 아냐.
그 외에 뭔가 특별한 재능이 있지도 않고, 특별히 미인? 도 아냐.
에? 아니라니깐~ 후후, 고마워. 자주 들어.
그치만 미안. 방금 그건 '귀여워~'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은 아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내가 듣는 '귀여워'는 이야기의 신이 내려준 '귀여움'이 아닌 거야.
그렇게 되고 싶다고 원한 내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손에 넣은 '귀여움'이야.
그 노력마저 신이 정한 거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말도 요점이 벗어난 이야기라 웃기겠지만.
거기까진 고려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런 인생은 재미없잖아.
'귀여움'이 약속된 공주님이 아니었던 여자아이.
스도 세리의 인생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었다는 예시.

이야기를 계속할게?
원래 난 어릴 적에는 뚱뚱했었어.
우리 아빠가 말이야, 으음… 뭐라고 할까, 호쾌한 사람이라.
'팍팍 먹어먹어 안 그러면 키 안 큰다!'란 느낌.
날 여성 프로레슬러로라도 만들고 싶었던 거?
하지만 그게 아빠의 사랑이라고 지금은 알고 있으니까, 별로 원망하고 싶진 않아.
어쨌든 철들었을 때 난 생각했어.
'이대로는 위험해'라고.
당시 유행했던 말인데,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라고.
우리 집, 밥을 굶는 건 허락하지 않으니까 치밀하게 칼로리 계산을 하면서,
엄마의 협력도 받고, 필사적으로 열심히 운동도 했지-
과자가 먹고 싶은 전성기 시절에 말이야, 웃기지?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깨달았어.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다고.

그때부터 운동은 계속하고 있고, 지금은 스킨케어나 유행인 화장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머리모양이나 복장도 내 소중한 일부라고 생각하니까 대충 하진 않아.
솔직히 난 거기까진 안 하지만, 필요하다면 미용 성형이든 뭐든 하면 된다고 생각해.
이러면 루키즘의 노예니 뭐니 야유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자아이가 귀여워지면 뭐가 나빠?
확실히 말할게.
이 사회는 '귀여운' 여자아이 쪽이 이득이야.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하하, 누가 만든 지는 몰라. 하지만 그게 싫다면 혁명이라도 일으키면 어때?

내가 싫어하는 공주님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남자아이가 원하는 여자.
만약 자신이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해도, 동정을 사려는 연출을 하는 여자는 싫어.
한 가지 더하자면, 여자라는 사실을 포기한 여자도 싫어.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게 아냐. 하지만 그렇다고 제모도 안 하는 여자는 같은 여자로는 보지 않아.
라고 할까. 난 생각한 걸 바로 말한단 말이지-
좀 심한 성격이란 말을 들어.
또, 내가 말하는 것도 뭐하지만 질투가 심한 거 같아서, 남친이랑도 오래 안 간단 말이지…
어찌 된 노릇일까.

하하, 근데. 처음에는 조금 수상한 노가쿠관계자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신기하게 뭐든 말하고 싶어지는 분위기가 있네.
당신은 뭐야?
…뭐, 됐어. 하지만 오오쿠니 군은 그런 나를 마음 넓게 받아주고 있어.
토끼를 정말 좋아해서 수의사를 노리는, 상냥한 지금의 남친이야.
운명의 사람은 역시 이런 느낌일까?
이번에 아빠랑 같이 만나볼까나.
또 이상하고 무리한 조건을 들이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후후.

*どげんかせんといかん: 2007년 미야자키현 지사가 연설에서 쓴 걸 계기로 유행어 대상까지 받은 켄세이 지역 방언. 「どげんか=どうにか」+「せんと=しないと」+「いかん=いけない」


어떤 수의사의 기억(스쿠나 타카히코/CV.모리쿠보 쇼타로)

나는 그다지 고양이를 좋아하진 않았다.
애초에 동물 전반, 아니 생물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아이가 캣 클리닉 따위를 경영하고 있을까.
거기에는 어떤 여성이 크게 관련되어 있다.

내가 태어난 스쿠나 가는 황국의 의료를 잇는 일족으로서 아키츠의 역사에 이름을 남겨왔다.
그런 엘리트들 안에선 우리 집의 형제자매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는 집에서 유일한 낙오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을 어떤 방식으로 떨어뜨리고 위로 갈 것인가! 스쿠나 가의 사람으로서, 언제나 강자의 얼굴로 살아라!'
항상 그런 소릴 들으면서 자라면, 반발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내 아버지는 어린애의 말대답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타입으로, 나는 자주 추운 하늘 아래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정해진 듯 숨겨준 사람이 옆집의 상냥한 누나, 오리베 카야노였다.
카야 쨩은 뭐라고 할까, 굉장히 신비한 사람으로 소위 '천연'이라고 불리는 성격이었다.
무지한 동생이었던 내 시선으로도 어긋난 발언이 많았지만… 
어쩌면 어긋난 건 그녀가 아니라 이 세상 쪽이 아닐까.
불가사의하게 그런 느낌이 드는, 수수께끼의 안심감과 안정감이 있었다.

가드닝의 달인이기도 했던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식물을 돌보았지만 
언젠가부터 다친 고양이나 미아가 된 고양이를 보호하기 시작했고, 나도 미력하게나마 그 활동을 돕고 있었다.
카야 쨩은 타인의 아픔에 민감한 사람으로, 그 점은 사람이 아닌 상대라도 변하지 않았다.
'아프지, 괴롭지.'
가끔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양이의 응급치료를 하는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수의사인 나의 원점. 생명을 대하는 시선은 그녀에게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적어도 스쿠나 가에서 배운 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그녀는 츠키히토의 처지에도 자기 일처럼 마음 아파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굉장히 후회하는 모습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안식 있는 소년이라고 해도 타인의 불행을 하나하나 정면으로 받아들이면,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순 없겠지.
우리들은 크든 작든 그 부분에 선을 긋고 살아간다.
그래도 카야 쨩이란 사람은 그런 어긋난 사람이었던 거다.

사카바야시 츠키히토.
보통은 제일 친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소꿉친구 소년은, 내 아버지의 여동생의 아들, 이었지만.
철이 들 무렵에는 '어울리지 마라'라고 엄하게 주의받았다.
츠키히토의 아버지는 그 키지히코를 키운 유명한 야구 코치였는데,
지나친 열혈 지도에 이어진 체벌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배트 휘두르기 횟수를 다 못 채운 학생을 아침까지 잡아놨다던가, 
특종 기사는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 싶은 내용의 온퍼레이드로, 
세간으로부터 조리돌림당한 아저씨는 그 후 훈련 일과를 임시로 변경한 후에도 
제자를 상대로 계속 배트 휘두르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츠키히토는 어릴 적부터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솔직하게 말해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혹시 다시 이 마을에 돌아올 일이 있다면, 나 혼자라도 따뜻하게 맞아주자. 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수의학을 배우기 위해 나도 이 마을을 나왔지만, 
수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면 고향에 돌아와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와중 카야 쨩이 돌연 신사의 아저씨에게 시집가 버렸다.
쇼크였다.
솔직히 드러누웠다.
쇼크로 인해 멍하니 자기 방에서 지내는 중에도 제트코스터처럼 그녀는 임신하고, 떠나 버렸던 것이다.
내가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말은 이렇다.

'다녀왔니, 타-군. 아니, 고양이 씨 패트롤 대원 2호 스쿠나 타카히코님. 
이 마을의 고양이 씨는 앞으로 안심하고 그대에게 맡기겠습니다.'

어이어이. 웃기지 마. 나는 그다지 고양이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구. 흑… 네가, 네가 있었으니까. 
아니. 
나는 세끼 밥보다 고양이가 좋아히코. 스쿠나 타카히코다.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어제 세계가 멸망했다고 해도, 
오늘 나는 냥이를 진찰한다.

스쿠~나~♪ 캣~♪ 클리닉~♪ 

흐. 하…



어느 영능소녀의 고백(아마테루 미카/CV.유우키 아오이)

(나인 소리)(나인 소리)(나인 소리)그만해…! 
당신이지, 그렇지? 
또 마에세츠를 의뢰하려고? …뭔가 다른 모양이네.
모습도 목소리도 닿지 않지만 알고 있는 영력이 개입하는 파동이 느껴져.
뭐일까, 거긴… 청명한 듯한, 그러면서도 불길한 듯한…
신사의 경내? 의자의 이미지가 보여.
흐르는 물이 변천하는 사람들의 기억이라고 한다면, 그 흐름 속에서 작위적으로 고여 썩어버린 한 조각의… 
잃어버린 것?
말하자면 기억의 잔재를 보고 있는 거네.
당신 악취미야. 누구한테든 보이고 싶지 않은 과거 하나둘쯤은 있잖아?

막 이러고. 나도 큰소리할 만한 위치는 아니지만.
뭐 됐어. 기억 자체는 보여주지 않을 거지만,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와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 줄게요.

아마테루 미카… 란 이름은 알고 있지?
본명도 알고 싶어? 그치만 본명을 말해 주지 않는 분에게는 이쪽도 가르쳐주지 않을래요.
처음부터 영능관계자란 이름이라도 댈 걸 그랬어.
가족 구성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몇몇 형제자매 중에서도 이런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은 저뿐입니다.
보이지 않을 것이 보인다.
들리지 않을 목소리가 들린다.
그건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특별함'을 동경하는 분은 이 능력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저는 모르는 사실은 모르는 채, 사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평범하게 웃고, 평범하게 울고, 평범하게 사는 게
사람에게 있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뭐 저도 두루뭉술한 얘기를 해버렸단 자각이 있으니 미리 변호해두지만,  
'평범'이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게 저의 꾸미지 않은 본심이야.
거기 더해 세계가 원래 있어야 할 모습이 보인다거나,
신이라 불리는, 사람의 상위에 있는 존재로부터 뻗어 나오는 신탁(탁선)을
노래의 형태로 수신할 수 있다거나,
지평 위에서 시간의 건너편까지 평행하게 뻗어나가는 무수한 선 같은 게 보인다거나,
그런 말을 하면 어이없어 하려나?

후훗, 지나친 농담을 해 버렸네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태연하겠지?
당신도 상당히 기기괴괴한 존재니까요.
영문을 모르겠어. 
애초에 그 가면은 뭔가요? 지나치게 불길해 보이는데요.
의식의 주체는 어느 쪽인가요? 안의 사람은 원래라면 지금…
(나인 소리)윽!…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그 파동은 그만둬. 
이제 탐색은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걸로 쌤쌤이지? 나도 상당히 악취미랍니다. 후훗.
이런 무서운 여자, 시집도 못 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죠?
미안하게 되었네요, 나는 정혼자가 있어요.
그렇다곤 해도 저쪽은 소꿉친구로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뭐어, 집안끼리 정한 곰팡내 나는 약속이니까.
좀 더 멋진 남성분이 반해 주신다면 쾌히 파기할 생각도 있네요.

라고는 하지만, 별로 결혼에 고집하진 않지만요.
그런 건 될 대로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될 대로 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의 운명을 엄청나게 봐 놓고, 자신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다니…
정말 불편한 능력이네.
뭐어, 최악의 경우 혼자서도 살 수 있고, 단 한 명이지만 소중한 친구도 있으니, 
사이좋게 할머니가 되어서, 즐거운 실버 라이프를 지내도록 할까요.
방금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런가?
그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에 달린 거겠죠.
이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건 뭔가 사명이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있어.

사명이라고 하니… 
당신이야말로 어느 지평으로부터 천궁*遷宮해온 건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무리했네.
사람 한 명이라면 몰라도, 신사를 통째로 움직이다니 가능한 거야?

그쪽의 식년**式年은 몇 년 주기야?
15년? 18년이 적당? 20년…도 간당하게 될 거 같기도하고아닐거같기도하고?
어라운드 시스템을 채용했으니까 다소 퓨처오차는 OK?
헛소리 하지 마! 그런 대충 하는 신사가 어딨어!
하지만 영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방대하네. 
신사 시스템이라면 상당히 많은 사람의 신앙심이 필요하지 않아?
프롤로그 에디션? 신사부터 다시 시작? 대사? 신궁? 뭐라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 그만큼 신앙심을 모으려면 나름대로 기간이 필요하지. 그래도 너무 무리했어.
실패해서 지평의 어둠에 떨어져도 난 몰라.
어차피 당신은 자기가 사라져도 상관없는 거잖아?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게 있는 거지?
(나인 소리)기다려! 괜찮아. 더 이상 탐색은 하지 않아. 
확실히 말해 당신은 사악하지만, 그 가면 안에는 굉장히 청명한 존재가 느껴져요.
어머니의 소원과도 닮은…
아기의 울음소리와도 닮은… 순진무구한 무언가.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그쪽 신사에는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당신도 나한테 그만 간섭해 줘.
에?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win-win이 안돼? 
너의 SNS로 당 신사의 홍보를 해라? 
에? 누구랑 누구의 win이야 그건? 내 메리트는 어디 갔어?
당신 말이야… 도대체 뭐야? 후훗. 역시, 청명한 건지, 욕망투성이인지, 전혀 모르겠어.
혹시, 우연히, 하는 김에, 기적적으로 할 마음이 생기면. 기대하지 마. 그럼, 안녕히.

*천궁 : 신사 등을 고쳐 지을 때 신령을 옮기는 의식 
**식년 : 식년천궁.  정해진 일정 주기마다 신사를 정비, 고쳐 짓고 신체(신령)를 옮기는 것


어느 소년의 기억(키세 미코토/CV.카지 유우키)

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다.
검을 높이 쳐든 자세로 그렇게 말해 버리면,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냉혹한 인간이라고 훤전하는 느낌이라,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굉장히 거북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거나, 인격이나 개성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
주변에 존경하는 사람이 적었던 건 사실이지만.
좋아한 적이 없다는 건 아주 한정적인 의미에 있어, 그래, 흔히 말하는 연애란 의미에서 그렇다.

나는 인기가 많았다. 
이렇게말하면 지나치게 노골적이나 철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인기가 많았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이라, 
어린 마음에 여성은 친족 외의 남성에게는 항상 그렇게 대한다고 믿고 있었기도 하다.
물론 그건 빗나간 고찰이긴 했지만, 나는 그 사실에 우월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열등감으로 이어지는 요인이었기에, 나는 연애 관련에는 서툴러진 것이다.

모두가 이해하는 걸 나 혼자만 모른다.
그래도 되는 건가? 
아니, 될 리가 없다. 
나에게 서투른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사람보다 우수한 것이 내 존재의의이자 긍지였다.
우수한 사람은 자연스레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
누구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생은 괴롭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해도 누군가의 스페어로만 살아가는 인생 따윈
제대로 된 소년의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는 채 떠안지 못하는 어둠으로 변했겠지.
그 어둠으로부터 나를 구해준 건,
지금은 유일무이한 친우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남자.
카시마 타케루였다고 생각한다.

타케는 창술이나 궁술, 체술 분야에 있어 타인을 압도할 만큼의 무술가였지만 검술에서는 한 번도 나를 이긴 적이 없었다.

'뭐든지 1등이 될 필요가 있냐?'

처음에는 단순히 분한 마음에 억지를 쓴다고 생각하던 타케의 말을 듣고,
어느 날 나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네가 검과 창을 동시에 들 수 있다면야 이야기는 다르지만 말이야.
서투른 것만 세고 있어 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것보다 서로 잘하는 걸 키워서,
최강끼리 편을 먹는 게 더 최강 아냐?'

아아, 그런 생각도 있구나.
타케의 말 대로다.
그런 인재를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이야말로 위의 서는 자에게 필요한 식견이라고 깨달았다.
그 남자는 거칠게 행동하는 버릇이 있지만 결코 본래 머리가 나쁜 건 아니고,
가끔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다.

그런 타케의 집이 화재로 소멸했을 때, 재빠르게 나타나 손을 뻗어준 것이 타이잔 선생님이었다.
당시 쇠퇴한 신사의 궁사宮司라 인식했던 그 인물은 머지않아 동급생의 부친이 되고,
친우의 은인이 되고, 그리고 내 자신의 은사도 되었다.
사람의 연이란 정말로 재미있다.

내가 진학한 배움의 장, 아키츠 타카마노인 학원은 문무 양도를 내세워
정치, 경제, 군사에 이르기까지 황국의 중핵이 될 인재를 배출하는 양성기관이기도 했다.
철저하게 실리를 중시하는 학원에 있어 선생님이 담당하는 고문古文의 세계는 발 둘 곳이 좁은 분야였지만,
신이 다스리던 시대로부터 바뀌지 않은 사람의 정서를 섬세하게 풀어내려는 이 학문이 
나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고 지껄이는 어리석은 자들의 야유는 틀린 말에도 정도가 있다.
언젠가 이 나라를 다스리려는 마음가짐을 지닌 자라면 익혀둬야 할 학문 중 하나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나에게는 여러 식견이 부족하다는 것을 배웠지만 역시,
특히 사랑의 시에 대한 해상도가 낮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리하게 부탁하여 선생님을 고문으로 삼아 와카和歌연구회를 발족하기도 했지만,
와카의 역사를 풀어내는 것은 아키츠의 마음, 그 역사를 풀어내는 것과 같다.

나는 흔히 말하는 무성애자인 걸까.
아니면, 아직 그런 운명의 상대와 만나지 못했을 뿐일까.
그건 모르겠지만, 언젠가 나도 와카를, 사랑의 시를, 읊고 싶구나. 후후…


어느 소년의 기억(카시마 타케루/CV.오카모토 노부히코)

우리집이 불탔다*.
요즘 유행하는 SNS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내가 태어나서 자란 집이, 진짜로, 리얼로, 불탔다.
다행히 가족은 전원 무사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은 추운 하늘 아래 살 집을 잃었다.
화재 원인을 알 수가 없어 방화일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결국 범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아직 소학생이었을 때다.

카시마 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을 정도로 시리어스한 가족회의가 열렸으나 나온 결론을 요약하자면,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황도 아유노미야. 
단신 부임하여 경시청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 밑에서 지내는 길.
또 하나는, 북쪽 섬의 요새 아오바.
대학교수를 맡고 있던 할아버지 밑에서 지내는 길.
솔직히 어딜 골라도 나는 나중에 후회할 듯한 기분이 들었어.

생각해 봐.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너의 인생은 둘 중 하나로 결정.
그런 거 간단하게 고를 수 있겠냐고.
본인한텐 죽어도 말 안 할 거지만, 이런 식으로 친한 미코랑 헤어지기도 싫었고.
정말 제3의 길은 없는가.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해, 어린애 나름대로 진지하게 가족을 설득했어.
그런 상황에 그야말로 천계(하늘의 계시)가 내려왔지.
나는 소꿉친구인 모모코에게 들은 어느 이야기가 기억났어.

사람이 자신의 선택을 망설일 때, 산도参道의 정중앙에 멈추어 선다.
보이지 않는 걸 보려고 하고 듣지 못하는 걸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만 천계의 종소리는 울려 퍼진다.
혹시, 각오한 수만큼 천계의 종소리가 울린다면…
나는 몇 번이고 울릴 수 있을만한 기세였다고 생각해.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제3의 길이 열렸어.
떠나기 싫은 고향, 쿠제 산을 업은 나기오카.
아버지의 옛 친구 집에 객식구로 들어간다는 길.
그 때 신세를 진 게 내 평생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과묵하지만 마음은 뜨거운 아키츠 남자, 사쿠야 타이잔. 그 사람이었다.
타이잔에겐 히메코라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뭐랄까, 솔직히 말하자면 학교에선 꽤나 붕 떠 있었단 말이지. 
은인의 딸을 도와주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걸 빼놓고 봐도 그 녀석은 어쩐지 내버려 둘 수 없는 느낌이 있었어.
그 녀석은 자기 인생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듯 보였어.
뿐만 아니라, 행복을 느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는 듯한 부분마저 있었어.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있냐!
행복해선 안 되는 사람이 있겠냐고!
기본적으로 그 녀석은 사람 눈을 보지 않고, 틈만 나면 눈을 앞머리로 가리려고 들었지만
솔직히 엄청 귀여운 눈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자주 웃진 않지만, 웃으면 진짜… 그… 뭐라 하지… 으음… 천사! 라고 할까… 으음… 

역시… 좋아해.

당시부터 그 녀석을 보면 웃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말주변이 없는 나는 그걸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어.
한심해… 
모모코 말로는, 나한테는 두 개의 미래가 겹쳐 있어서, 고양이를 얻을 때까진 뚜껑이 어쩌고… 
뭔가 어렵다고 해.
하나는 쿠제에 남는 미래. 
주종관계가 된다는 미코의 한쪽 팔로서, 뇌신?이라고 불리며 모두가 두려워하는 군인이 된다나 뭐라나.
또 하나는 아유노미야로 넘어간 미래.
빨간 머리의 웃기는 녀석과 버디를 맺어 국제적인 범죄 조직의 보스를 좇는다나 뭐라나.
뭐, 어떤 미래라도 그 녀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생각이야.
그 녀석은 그걸 알 필요도 없고 감사할 필요도 없어.
그 녀석의 왕자님이 내가 아니었단 것뿐이다.

그 녀석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진심으로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해.
한 번 반한 여자의 행복을 바라지 않다니 아키츠의 남자가 할 짓이 아니니까.

랄까! 너무 폼 잡았나? 하하하…

*염상炎上 : 불타는 것.
                    또는 인터넷에서 사건이 터졌을 경우 악플 등 부정적인 의견이 쇄도하는 것. 


어느 소년의 기억(아메노 치카라/CV.이토 켄토)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그게 내가 태어나 자란 집의 교육방침이었다.
그런 고풍스러운… 아니, 지금이야 '다양성'이란 말을 높게 외치며 사회가 마이너리티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집은 당시엔 드물지 않았다.
사 주는 장난감은 로봇이나 자동차뿐이었지만, 그 사실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고 
'남자아이는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체격이 좋아, 여기에 무도를 배우니 나를 이길 사람이 없었다.
동년대 남자아이를 내던지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아키츠 남자의 모범'이라 부르며 모두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러던 도중 여동생의 인형 놀이에 같이 어울려 준 후, 전율했다.
나는 깨달아버렸다.
사실은 나도 그쪽에서 놀고 싶었던 거다.

분가라고는 해도, 아메노 가의 후계자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나는 
어른들이 놓은 레일에서 벗어나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아메노 일족은 아키츠에서 가장 수가 많은 씨족이기에
가까운 친척만 쳐도 여러 면에서 튀는 녀석들이 있었다. 
같은 소학교 친구들보다 눈에 띄고 싶다고 갑자기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녀석,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호수에 빠질 때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녀석,
그런 걸 어릴 때부터 봐 왔으면 자연스레 
'내가 제대로 살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후후…

문무 양도를 목표로 수련하던 나를 처음 무술로 패배시킨 사람은  
사정이 있어 보이는 전교생 남자아이였다.
당시 모두가 내 독무대라고 생각하던 소년 스모 대회, 
결승전의 씨름판에서 본 하늘은 파랬다.
그와 맞붙은 순간 짜리릿! 전기가 흘렀달까, 
어쩐지 몸에 힘이 빠졌단 말이지.
그런 감각을 느낀 사람은 과거든 미래든 그 뿐이었다.

키세 미코토.
나의 왕자님.
그는 특별했다.

그날 이후로 스모는 은퇴했지만, 유도라면 아직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무술 자체는 타성으로 계속했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진 것이다.
불특정 다수인 남자아이들과 반라 차림으로 맞붙는 자신이.

아마 나는 이 마음을 고백하지는 않겠지.
나는 그 아이와 다르게 용기가 없다.
누구든지 거절당하는 건 두렵다.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0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는 오오카미의 해석에 따라, 어떤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하게 바뀔 수 있다.'
라고, 그 아이는 말했다.
'나는 이젠 무녀니까 무리겠지만 어떻게든 이루고 싶을 때는 우리 신사에 에마를 걸어.'
라고도 말했다.
미안한데 나는 그 신님을 전면적으로 믿지 않아.
그치만 에마를 걸러 오는 사람들의 절실한 소망을 부정할 생각도 없어.

이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걸 정하는 자는 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나에게 있어서도, 내 사랑이 결실을 볼지 아닐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단지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신들이, 아니 그가 바라는 이 나라의 미래를.
우리들의 역사를, 지금과 미래를 잇는 건 아이를 낳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원하는 게 모두 이루어지는 세계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걸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사람의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먼저 나 자신이 변해야 하려나…
(웃음)이러고. 이래 보여도 나, 사실은 기본이 성실한 사람인 걸까~
어울리지 않지? 후훗… 아하하하


어느 조모의 기억(오리베 미시에/CV.후카미 리카)

(종소리 2번)
당신이 떠나고 벌써 몇 년이 흘렀을까.

아가씨 시절에는 그렇게 인물이 좋단 말을 들으며 많은 남성 분의 인생을 망쳤던 저도, 
지금 와서는 완전히 주름투성이 할머니가 되어버렸습니다.

예? 거짓말하지 말라고?
우후후… 당신과 만나기 전의 진실은 상상에 맡기도록 할게요.
설령 다른 남성분이 얼마나 많이 구애했더라도, 
제 선택은 변하지 않았겠죠.
저는 절대로 당신에게 시집간 사실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래도 여자 손 하나로 카야노를 기르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병약한 아이여서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어른이 되기는 힘들다고…
후후, 엄청난 돌팔이 의사였네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몸이, 아니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던걸요.
부처님이 지켜주셨던 걸까요?
아뇨, 분명 당신이었겠죠.
'아직 여기로는 오지 마'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돌려 보내주셨겠죠. 그렇죠?
그런 그 아이가 어른이 되고, 자기 자신이 정한 남성 분에게 시집가서,
귀여운 손자를 낳게 되다니.
당시의 제가 알았더라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저의 생가인 핫쇼 가와 이와나가 가는 폐불훼석*으로 인한 서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살던 시대에는 양가 사이의 혼인은 절대 용서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장본인들이 얼마나 절실히 혼인을 바라더라도.

저도 그 아이의 결혼은 반대했습니다.
정말로 그 아이를 걱정한다는 듯 기염을 토하며 말렸습니다,
사실은 저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 아이는 저의 전부였습니다.
확실히, 여러 응어리가 얽혀 있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생각해 보면 결국 제가 싫었던 겁니다.
그 아이가 제 옆을 떠나는 게.

하… 이런 이야기를 해도,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니 그냥 생각해 봐도 언제든지 보러 가면 될 일이지만요.
저는 자식과 떨어질 적절한 시기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히메코를 낳을 적에도 반대했습니다.
굉장히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으나 그 아이는 마지막까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문득 눈치채니,
저의 그 손이 많이 가는 작은 여자아이는,
자신의 신념을 가진 강한 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외고집을 부리며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8가지 고통이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집착에 붙잡혀 있는 거겠지요.
애초부터 원하는 게 모두 이루어지는 세계는 아닙니다.
살면서 너무 많은 소원을 가지면, 번뇌에 붙잡혀 열반적정涅槃寂靜과는 멀어지기만 한다고 합니다.
사랑을 몰랐더라면 괴로운 일도 하나 사라졌겠지만,
사랑의 괴로움을 모르는 자가 자비를 깨달을 수는 없겠지요.
중도中道의 가르침은 훌륭하지만, 실전하는 건 상당히 어렵네요.

양가의 응어리는 아직 해소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관계성이 변하는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초경을 맞이해 곤혹했던 그 아이가 울면서 제게로 온 것입니다.
딸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 소녀로 자란, 아키츠 인형 같은 그 아이를 껴안았을 때,
제 안에서 뭔가가 시원하게 끊어져 나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그날 저녁에는 아무 말 없이 고봉으로 담은 팥찰밥이 나왔다고 합니다.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 사람은 예전부터 여자의 마음을…
아니, 그런 부분에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니까.
사춘기 여자아이가 보면, 그쵸?
그런 일도 있었고, 지금도 그 아이와의 교류는 느슨하게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그 일로 타박받는 일은 없는 거 같네요.

우리들 사이에는 아직 장년의 많은 응어리가 남아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고 서로 알고는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부터 먼저 가보세요!'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하려나요?
…그러네요.
예를 들면 히메 쨩이 임신했을 때, 
그 상대방이나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찾아갈 거라 생각해.

사실 나는 후회하고 있어요.
사람에게는 제각각 이번 생에서 이뤄야 할 사명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령 부모자식 관계라도, 본인이 아닌 타인이 강요할 일은 아닙니다.
그 아이가 혹시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매게 된다면.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싶고, 가능하다면 등을 밀어주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의… 아니, 하다못해 우리 아이가 바란 손자의 의지를 믿고 존중할 수 있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그 아이의 어머니인 저에게 남겨진 사명이겠지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직 그쪽에 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종소리 2번)


어느 부친의 기억(타이잔/CV.오오츠카 아키오)

(환자감시장치 소리)
'나랑 엄마, 사실은 어느 쪽이 살았으면 했어?'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예, 이쪽입니다'하고 즉답할 수 있는 상황은 훨씬 적다.
그러니 어른은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들은 사람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커다란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더없이 무례한 질문이라면 더욱.
어린아이 같은 질문.
…하지만 뒤집어 보면 무구한 아이기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거기도 하겠지.
원래 본질이란 단순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말이 막혀버렸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둘 다 살아줬으면 하는 게 당연하잖아.'
이것이 모범답안이라고는 알고 있다.
'아빠한테는 히메코도 엄마도 특별한 존재야. 어느 한쪽을 고를 순 없어.'
대충 이런 말이 뒤따르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최선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어린애나 속일 겉태도로는 이 문제를 상대할 수 없다고 느낀 것이다.

아내의 병약함은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걸 각오하고 결혼한 이유는 남은 인생을 그녀를 지탱하며 살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기에.
그런 아내가 아이를 얻었을 때,
넘쳐오르는 기쁨의 깊은 안쪽에서 지그시 여기를 바라보고 있는,
차가운 감정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나는 망설이게 되었다.
아내의 몸은 과연 쌍둥이의 가혹한 출산을 견딜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그날 한 번 선택했다.
태어날 예정이었던 히메코와 다른 아이를 죽이고 아내의 목숨을 살린다는 선택을.
특별한 존재?
어느 한쪽을 고를 순 없어?
하.
나는 어떤 표정으로 말해야 했나?
그날의 여자아이에게, 그 무구한 눈동자에 대고!
결국 나의 선택이, 그 제안이 현실이 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내 무른 신념보다 아내의 결의가 더 단단했던 것이다.
아내의 목숨을 지키겠다는 결단은, 아내의 영혼을 부정하는 일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인가.
나는 어슴푸레한 윤곽을 붙잡으려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낙관주의자는 될 수 없는 성격이었지만, 
오지도 않을 미래를 두려워하는 건 우둔한 자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선택을 잘못한 거겠지.
오지도 않을 미래는 와 버린 과거가 되고, 
천진했던 딸은 말수가 줄고, 그다지 웃지 않는 소녀로 자랐다. 

남자 손 하나로 돌보기에는 모자랐던 면도 많았겠지.
그래도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육아에 힘을 쏟았다고는 생각한다.
우유는 사람 체온으로, 등을 톡톡, 보고 흉내 낸 자장가, 이유식에서 유아식으로.
익숙하진 않지만, 그래도 애정을 담아서.
멋진 케이크와 귀여운 옷, 
뭐가 좋은지도 잘 모르는 속옷 고르기, 
겪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못하니까? 손재주가 없으니까?
같은 변명은 어떤 면죄부도 되지 못한다.

그런 생각으로 해 왔지만,
죽고 싶어, 괴로워,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딸은 가끔 그런 말을 했다.
'엄마 몫까지 살아야 해!' '언니 몫까지 살아야 해!'
'아빠보다 먼저 죽어선 안 돼!'
가는 말에 오는 말.
말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그 아이가 오늘도 살아 있다.
나는 자기 자신에게, 그 사실만을 마음의 지주로 삼아 살아갈 수 있다고 계속 타이른 것이다.
그 말이 저주가 되어 그 아이를 무리하게 생에 묶어놨다 하더라도.

하아…
뭔가, 나는 이제 지쳤어.
카야노.
너를 만나고 싶어.
유품의 정리를 하면 마음도 정리가 된다고 들은 적이 있지만,
나는 네가 죽은 것을, 네가 없는 세계를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
네 방은 전부 그대로, 그때와 다름없이 남겨뒀어.
카야노…… 
한 번 더 너를 만나고 싶어.
후… 
아니, 이대로는 너를 볼 낯이 없나.
설령 부모자식이라고 해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는 목적이나 의미를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사는 건 정말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생존전략을 선으로 보는 생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나는 좀 더 그 아이와 마주 봐야 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해.
정답 따윈 모른 채 고민만 했던 삶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이기에 대화 상대가 될 수도 있겠지.
그 아이의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니까.
하…
아직…
죽고 싶지 않구나…
(환자감시장치 소리)


어느 모친의 기억(오리베 카야노/CV.카야노 아이)


(페이지 넘기는 소리)
텐레이天黎 4년. 나가츠키(9월) 9일.
오늘은 어쩐지 몸 상태가 좋아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이쪽 공원은 금목서가 피었구나~'라거나, 
'모서리쪽 귀여운 집에 보조바퀴가 있는 자전거가 늘었구나~'라거나,
'카와자이네 빵집엔 고구마를 쓴 신상품이 나왔구나~'라거나, 
여러 새로운 발견이 있어 즐겁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아는 우리 마을이지만, 하루라도 항상 똑같은 날은 없는 것이다.

(페이지 넘기는 소리)
텐레이天黎 5년. 키사라기(2월) 7일.
상처입은 고양이 씨를 발견해서, 충동적으로 집에 데려간다.
간단한 처치는 했지만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목걸이는 없었으니까 길고양이 씨였던 걸까?
괜찮으려나-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페이지 넘기는 소리)
텐레이天黎 5년. 후미즈키(7월) 5일. 
어느샌가 내 산책은 고양이 씨 패트롤이 되어 있었다.
오늘의 환자분은 화상을 입었으므로, 
정원의 알로에를 으깨 발라주거나 했다.
예전부터 식물학자가 꿈이었지만 수의사도 좋을지도, 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옆집의 타-군이 오늘도 도와주었다.

(페이지 넘기는 소리)
텐레이天黎 5년. 하즈키(8월) 4일.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평화로운 우리 마을에서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한 슬픈 일이.
홀로 남겨진 남자아이는 타-군의 친척인 모양이지만 
더 먼 마을로 옮겨가는 듯 하다.
이 마을에서 지내기는 여러 가지로, 말이지.
괴롭겠지…

(페이지 넘기는 소리)
텐레이天黎 5년. 하즈키(8월) 10일. 
패트롤 중 몇 번 본적 있었던 남자아이였다.
여름인데도 긴 소매, 긴 바지. 
덥수룩한 곱슬머리에 야구 배트.
야구는 단체 경기일텐데 왜인지 항상 혼자 다니는 남자아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화감만 가득하다.
평화로운 마을? 
나는 뭘 보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걸까.
분명 이 세계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 옆에서 무신경하게 살아갈 뿐인 거다.
다음에는 슬픔이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릴지도 모르는데. 
뭔가 분하다.
자신이 한심하다.
내가 눈치챘다면, 무언가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무력한 아이의 주제넘은 말인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이 기분을 평생 잊지 말자.
그 결의를 담아 오늘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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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레이天黎 6년. 사츠키(5월) 1일. 
신기한 연으로 친구가 된 신사관계자 상의 신사를 방문한 나.
뭔가 여러가지가 이러저러해서, 굉장히 신기한 대단한 신사로, 
처음으로 보는 기재에 흥미만만!
고슈인쵸를 내 준 무녀 여자아이도 굉장히 귀여웠어!
나랑 비슷한 나이일까?
히메코 쨩. 아주 좋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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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레이天黎 6년. 미나즈키(6월) 15일. 
모르는 아저씨가 말을 걸어와, 당황하는 나.|
아저씨는 놀랍게도 히야마 상의 궁사님이시라고!
아, 전언철회.
아는 아저씨였습니다. 실례.
아저씨는 조금 무서운 인상이지만, 꽃을 사랑하는 상냥한 사람.
예전부터 우리 정원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눈이 높으시군요!
이 정원의 멋진 부분을, 내가 특히 힘 쓴 부분을 정확히 알아보셨다.
아, 위험해.
뭔가 두근두근거려.
내가 칭찬받는 것보다 정원을 칭찬받는 게 더 기쁠지도!
최근 묘하게 신사랑 연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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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레이天黎 14년. 무츠키(1월) 30일. 
타이 쨩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이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연약한 여자를 받아줄 기특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나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내 몸의 문제나, 나이 차이라던가, 신토와 불교의 역사가 어떻던가, 
엄마는 여러 자료를 늘어놓고 완고하게 반대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엄마, 항상 걱정끼쳐서 미안.
하지만 나는 이제 작은 어린애가 아냐.
엄마가 모르는 나의 세계를 좀 더 보여주고 싶어.
내가 받은 걸 이번엔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고마워.
당신의 딸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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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레이天黎 15년. 키사라기(2월) 10일. 
오늘은 오랫만에 일기를 쓴다.
얼마 전 쓰러진 후로 한동안 기억이 사라졌던 모양이다.
이런 건 처음이지만… 
점점 이 일기의 중요성이 커진 느낌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나의 역사다.
부디 바라기를, 계속 일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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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레이天黎 15년. 키사라기(2월) 22일. 
오늘은 좋은 뉴스와… 좋은 뉴스가 있었다!
내 배에… 따단딴다딴!
후후, 새로운 생명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건 놀랍게도… 따단딴다딴! 
후후, 쌍둥이였던 것이다!
꺄~~~~

(페이지 넘기는 소리) 
텐레이天黎 15년. 야요이(3월) 15일. 
나쁜 뉴스가 있었다.
배 속의 생명이… 하나 사라져버렸다.
배니싱 트윈 현상이라고 한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
그저, 단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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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레이天黎 15년. 우즈키(4월) 13일.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슬픔만이 인생은 아니다.
나는 모친이 되는 거야.
사라져 버린 당신에게 지금 맹세할게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낳겠어.
어머니가 힘낼께!

(페이지 넘기는 소리) 
텐레이天黎 15년. 미나즈키(6월) 3일. 
나의 귀여운 공주님.
무사히 태어나준다면, 세상에서 제일 응석을 받아줄 테니까.
자, 빨리 나오렴…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확실히 이 세계는 슬픔이나 괴로움이 넘쳐 흐르고 있어.
그래도 나는 이 세계를,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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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레이天黎 15년. 칸나즈키(10월) 23일. 
내일이 드디어 입원날이다.
이 일기는, 누가 보면 죽을 정도로 부끄러우니까, 장롱의 맨 밑 서랍에 숨겨둬야지.
입으로는 반대한 주제에,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보내온 혼수품.
나 알고 있어.
엄마가 얼마나 이 오동나무 장롱을 소중히 여겼는지.
정말 솔직하지 않다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할머니.
라고… 후후후.


어느 방화범의 기억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고, 누군가가 속삭인다.
이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리는 것 같다.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고,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래, 나는 태워야만 한다.
'불타라, 불타라, 불타라' 고 목소리는 부채질한다.
그건 누군가의 분노인 것 같기도, 
슬픔인 것 같기도 했다.
증오인 것 같기도, 
사랑인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나를 끝내줬으면 해.
나는… 살아있으니까,
태워야만 해.
(라이터 소리와 불타는 소리)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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