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집... 이었던 것인데 백업을 까먹었습니다 ^^....


위는 짱짱 프로젝트 올림포스 



전쟁의 사 년차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해변가의 누런 모래를 하얗게 덮은 눈은 세찬 파도 속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녹아 내렸다. 마치 무너지지 않는 성벽에 부딪히는 우리 같지 않은가? 자조하며 농담을 던진 오디세우스의 말에 디오메데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술관들은 눈으로 병장기가 녹슬까 휘하의 보급병들을 시켜 창고를 추가로 설치하도록 했다. 


따개비가 너무 많이 붙어 항해를 할 수 없게 된 배들이 해체되어 창고가 되었다. 추가적인 보급품이 추워지기 직전에 도착했지만 동상에 걸리는 사람이 많았다. 고민하던 중, 아킬레우스가 꾀를 내어 여인네들이 규방에서 하듯 화로에 돌을 구워 들고 있는 것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사람들도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 되자 하나 둘 화로에 조약돌을 던져 넣었다. 바다의 소금기를 머금은 돌은 가끔 탁탁 소리를 내며 불똥을 튀었다.


첫 해 하반기 보급품과 함께 도착한 징집병인 페테오스는 오랜 항해의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전쟁에 뛰어들어, 삼 년 간의 끝나지 않는 싸움과 계속된 타지 생활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지친 사람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는 의견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가장 먼저 화로에 돌덩이를 넣은 이들 중 하나였다. 망토 안쪽에 손수건을 덧대어 기우고 돌을 넣어두면 점호를 할 때도 조금 견딜 만했다. 


그는 아티카의 변두리촌에서 농사를 짓던 무지렁이의 셋째 아들로, 동네에서 가장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것을 높이 산 촌장의 추천으로 왕의 군인이 되어 이 곳에 왔다. 머나먼 고향 땅에서 온 병사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오디세우스는 이제 가정교사를 고용해 학문을 배우고 있다는 자신의 아들 소식을 가져온 한 장교에게 술과 말린 과일을 하사했다. 페테오스는 그 때 자신이 모셔야 할 왕을 처음 보았다. 알량한 충성심 보다는, 배곯는 일 없겠지 하는 마음에 지원한 그 군인은, 가장 뒷줄에 선 채 추위에 떨며 왕의 치하가 끝나기 만을 기다렸다. 


 배에 함께 실려 있던 술, 말린 과일 등은 자신 같은 말단 군인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늙은 창병들과 같은 분대에 들어간 페테오스는 대부분의 끼니를 무엇이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는 개죽으로 배를 채우고, 운이 좋으면 말린 고기나 생선을 받아 그 개죽에 넣어 먹었다. 다행히 분대원 중 하나가 낚시에 일가견이 있어, 큰 물고기는 보급창에 넘기고 작은 것들을 가져와 나눠먹게 해주었다. 그는 젊다는 이유로 더 자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가끔 배가 고팠고, 몸살이 오자 굶주림과 추위를 느끼던 몸은 더더욱 힘들어졌다. 어부였다던 그 늙은 창병이 눈먼 화살에 맞아 죽고 난 뒤, 그는 조금 더 힘들어졌다. 


 포기하지 않는 트로이인이 미웠다. 동료를 죽이고, 언젠가는 자신 역시 머나먼 타지 땅에서 죽게 만들 저들이 증오스러웠다. 공주 하나 돌려받겠다고 트로이까지 온 그리스 연합군과, 굳이 이 곳에 참여한 고국의 왕까지도 원망스러웠다.  가끔은 정찰 순번이 되었을 때 높은 언덕에 올라 성화가 피어오르는 트로이 성들을 노려보곤 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벼락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신들은 전쟁을 부추기고, 집에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미물뿐이었다. 무력감이 온몸을 잠식해 간다. 페테우스는 침울해지고, 음울해진다. 


 어느날 점호를 위해 모인 아침에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술관은 큰 목소리로 내일 또 한 번의 전투가 있을 것이라 공지했다. 페테우스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분대원 중 하나가 그의 허리를 쿡 찔러 속삭였다. 



“몸이 안좋나?”


“몸이야 항상 안좋습니다.”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그는 개구지게 웃음짓는다. 그는 페테우스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노련한 방패병이었는데, 젊을 때 소치기를 했다고 한다. 소가 난동을 피우면 소를 번쩍 들어 올렸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만, 흰 머리가 희끗희끗 올라오는 와중에도 힘 하나는 장사였다. 장난스러운 태도에도 페테우스는 입술을 이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내일이 축일인데 참 너무합니다.”


“자네의 나라에서도 태양께 감사를 전하나?”


“당연합니다. 나는 농사꾼의 아들입니다.”



한 해 농사가 마무리 지어지고, 새로운 농사를 시작하기 전,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제단에 불을 피우고 해가 뜰 시간에 일어나 태양과 대지에게 제를 올리는 축일이 있었다. 바로 교전이 있을 내일이 그 날이다. 별자리를 읽는 양치기 출신의 분대원이 말한 것이니 틀림없었다. 그 날은 일도 하지 않고 푹 쉬는 날이었다. 그 날은 사이가 좋지 않는 이웃에게도 먹을 것을 나누고, 집을 떠나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도 가족에게 돌아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런 날 전쟁이라니. 툴툴거리는 페데우스를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방패병이 위로하듯 등을 두드린다. 그는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잇는다.



“자네는 내일 할 일이 없을 걸세.”


“예? 창병이 무엇하러 전쟁에 빠진단 말입니까?”


“내일 싸울 언덕은 구덩이가 많고 발이 푹푹 파여 보병이 활약하기에는 좋지 않아. 우리 들은 투척 용 창이나 좀 던지고, 자네는 나 같은 방패병 뒤에 엎드리면 궁사들끼리 화살이나 좀 날리다 말 걸세.”



그럴 듯한 방패병의 말에 페데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아침부터 시작된 가벼운 교전은 양측 군단의 함성과 함께 시작한다. 함성은 일종의 기싸움이었다. 방패병들이 자신의 방패를 두드리며 소리를 내면, 페데우스와 같은 창병들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땅을 발로 굴렀다. 청동 부딪히는 소리에 귀가 울렸다. 그나마 어제 저녁부터 내리는 눈 덕에 흙먼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목 또한 아팠을 것이다.


날씨는 추웠다.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는 건 힘들었지만 어쨌든 사람을 찌르는 것 보다는 나았고, 가만히 서서 추위에 떠는 것보다는 더더욱 좋았다. 그러나 기세 싸움은 금방 끝이 났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말 위에서 보병들을 장려하던 깃발병 중 하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페데우스는 숨을 들이킨다. 추위에 굳은 근육이 한계까지 수축한다. 익숙한 명령이 들린다.



“방패를 들어라!”


“하!”



방패병들이 하늘 위로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 직후 하늘이 화살로 뒤덮였다. 새된 비명과 함께 가죽 방패에 화살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 직후 등 뒤에서도 화살이 적진으로 쏟아졌다.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렇게 원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창병은 할일이 없어진다. 페데우스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몸을 웅크렸다. 몸집이 작은 통신병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독려하고 장군들의 말을 소리 높여 전했다. 전진하지 않고 방패를 교대로 들고 있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든 자신의 늙은 분대원을 툭 쳐 방패를 교환했다. 평소에는 익살스러운 그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방패를 건넸다. 이윽고 지지부진한 교전이 이루어졌다. 


화살이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방패병들이 워낙 촘촘히 선 탓에 화살을 잃기만 할 뿐임을 트로이 측의 똑똑한 누군가가 알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대치 상황이 한참을 이어진다. 하늘에서는 다시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이라도 피웠다가는 좁은 방패들 사이에서 어떤 사단이 날 지 몰라 군인들은 그대로 추위에 떨었다. 가죽도 꽁꽁 얼어 딱딱해질 만큼 추운 날씨였다. 천으로 두 겹, 세겹 감아둔 발도 감각이 둔해져, 그는 괜시리 무릎을 배까지 들어올렸다 내렸다.


페테우스는 그 와중에도 축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추수가 끝난 고향의 들판은 눈 닿는 가장 먼 곳 까지도 까치머리를 하고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감추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지친 방패병의 방패를 교대하며 들면서도 생각을 끊지 못했다. 가족들은 협탁에 둘러 모여 있을 터였다. 방패에 화살이 하나 날아와 꽂혔다. 한 해 농사를 짓도록 땅을 축복하신 데메테르께 기도를 드리고 나면, 아버지는 빵조각을 조금 떼어 한 조각은 화로에, 한 조각은 창 밖으로 던지고 식사를 시작했다. 툭툭, 화살 두 어대가 꽂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가 충격으로 고통을 호소한다. 올 여름 까지만 해도 밀 농사가 제법 괜찮았다. 가을까지 호조가 이어졌다면 가족들은 밀죽과, 계란으로 꽤 괜찮은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방패는 무거웠다. 발에 이어 손에도 감각이 떨어졌다. 그래도 페테우스는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촛불을 든 어린 누이가 자꾸만 생각났다. 낡은 침대보를 찢어 만든 옷을 만든 누이는 페데우스에게 돌아오는 길에 새 옷을 하나 사다 달라 하였다. 돌아오는 축일에 새옷을 입으면 누이는 이리스의 무지개 날개보다 아름다울 터였다. 


그때, 저 멀리서 시디아의 자장가가 들려왔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시디아 사람들은 연합군의 대부분 국가에 머물다 가곤 했고, 그들의 자장가는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이었다. 처음에는 작게 드문드문 들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 따라 다 같이 자장가를 따라 불렀다. 음도 단조롭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따라하기 쉬웠다. 고요한 밤에 아이가 자니 신들의 여왕도 어여쁘게 여겨 숨 죽여 가족을 축복한다는 내용이었다. 페데우스는 멍한 얼굴로 귀에 맴도는 노래를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소리가 커지고 커져, 전술관들의 경고 어린 뿔피리 소리에도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트로이 측에서 날아오던 화살이 멈추었다. 저 멀리서 자장가에 이은 아울로스(피리)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참 이상하게도, 그리스연합 군 측이 아닌, 트로이 군 측에서 들려왔다. 구슬픈 소리가 제법 그럴 듯하게 자장가와 같은 음을 내며 이어졌다. 소리를 제지하는 자가 없는지 악기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벌판 위로 눈과 자장가와 악기소리만 허공을 맴돌았다. 


어느새 방패병들이 방패를 바닥으로 내렸다.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노래소리와 악기 소리가 울리는 벌판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페테우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 말고도 서 있는 사람이 많았다. 장군들은 군인들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는다. 마치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것 마냥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페테우스는 고개를 들어 언덕 위에 선 고국의 왕을 바라보았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군대를 잠시 둘러보는 듯하다 적진 쪽을 따라 보았다. 페테우스 역시 왕의 시선을 따라 트로이 군이 있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작은 인영들만 간신히 식별되는 거리에서, 트로이 군들 역시 방패를 내리고 서서 그리스 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눈과 함께 전의가 상실된다. 그럼에도 페데우스가 느낀 것은 절망감이 아니었다. 마음에 찾아온 평화는 참으로 낯선 감정이어서, 그는 죄악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1년을 원망하고, 1년을 미워하고, 1년을 증오한 적들이었다. 눈이 내릴 때 전쟁을 치룬 것도 여러 번이었으며, 축일에 전쟁을 치룬 일도 있었다. 그러나 노래가, 날아오지 않는 화살이, 우뚝 서 바라만 보는 작금의 상황이, 맥 없이 선 상대 군이 차마, 차마. 페데우스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날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겨울의 해는 짧았으며, 하얗게 변한 언덕에는 금새 어둠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횃불을 피운 아가멤논의 군대가 먼저 뒤를 돌았다. 모든 연합군이 발길을 돌려 진지로 돌아가는데, 트로이 군에서는 추격해오지 않았다. 그저 피리소리가 바닷바람에 묻힐 때까지 돌아가는 군인들은 따라왔다. 


페데우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하늘에 하얀 눈이 내렸다. 그는 머나먼 고향 땅을 생각했다. 새 옷을 사줄 틈 없이, 아마도 시집 갔을 누이와, 문맹인 탓에, 시골에 사는 탓에 편지 하나 보내지 못해 셋째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부모님을 떠올리며. 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기릴 해는 이미 서산을 넘어 사라졌는데, 그는 신관들이 하듯 양손을 모았다. 그릇처럼 받쳐든 손바닥 위로 눈이 쌓였다. 페데우스는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


<사족>

안녕하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이쿠냑입니다. 

크리스마스특별 특집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두 가지 이야기에서 글을 따왔습니다. 

하나는 1차 세계대전 중 실제로 있었던 사건 인 크리스마스 정전입니다. 독일과 영국의 전쟁 상황에서 크리스마스 단 하루 종안 휴전을 하고 서로 노래를 부르고, 교류를 했었다고 하네요. 

둘은 크리스마스의 기원입니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겨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휴지기에 태양신께 감사를 드리며 다가올 새해에도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행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랑 무슨 상관이 있어? 라고 하신다면.. 음.. 가족과 함께하는 평화와 안녕을 기여하는 행사였다는 점..?

사실, 크리스마스의 기원인 태양신 축제는 자료를 찾아봐도 일리온 지역이 아닌 바빌론 지역의 이야기만 나오더라구요… 하지만 냅다 가져다 썼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미친 척하고 농사짓던 이야기도 그렇고, 거기도 농경문화가 있고, 다신교를 믿는 지역이었으니, 겨울에 축일 하나쯤 있겠지라는 생각으로요... 진정한 역덕, 그로신덕분들께 날조 사과 드립니다… 

어쨌든 위의 두 아이디어에서 지금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매번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망사랑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 댓글 피드백 항상 감사합니다.

이쿠냑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