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연성과 썰은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합니다.

- 오늘도 보고 싶다 if 연대기.







후회수 무선이 보고 싶다. 저보다 한참 어린 쬐깐한 남가 둘째 공자가 자꾸 제가 가는 곳마다 쫄랑쫄랑 따라오니 신기해서 무심코 '너 나 좋아하니?' 하고 물었더니 그 순간 얼굴이랑 귀 새빨개져서 덜컥 굳는 남망기... 


위무선 장난기가 어디로 갈 리 없으니 오호라? 눈 반짝해서 한 몇 달 동안 어린애 취급 해가며 잔뜩 놀렸는데 덕분에 어린 맘에 품었던 첫사랑에게 상처만 잔뜩 받고 마음 접어버리는 어린 남망기와 그 속내 꿈에도 모르고 남동생처럼 마냥 귀여워만 하는 위무선. 


그러다 사일지정 동안 여러 고초를 겪은 탓에 약 nn년 후에 다시 만났다가 어릴 적과는 퍽 변한 모양새에 두 눈 휘둥그레 뜨게 되겠지. 사실, 운몽쌍걸이 아니라 이릉노조로 불리게 된 위무선을 보고 남망기 역시 눈동자 파르르 떨 정도로 놀랐는데 위무선은 제 동요하는 마음에 치여서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함.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서 몇 마디 붙여보는데 어... 얘는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가보다... 표정변화도 없는 얼굴로 네, 네, 아닙니다, 같은 딱딱한 반응만 하는, 한때 귀여웠던 남가 둘째 공자의 모습에 머쓱해져서 터덜터덜 제 처소로 돌아가는 위무선... 


애들은 금방 큰다더니 정말 훌쩍 자랐네. 쟤가 올해로 몇 살이라고 했지? 그 긴 세월 남망기를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졸졸 따라다니며 관심 받으려 애쓰다 몇 달이 지나서야 저와 남망기가 과거와는 꼭 반대되는 모양새란 걸 깨닫게 되고... 



잠깐. 그때의 아잠은 나를 연모해서 날 따라다녔는데, 


그렇다면 나도?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 위무선은 설렘에 볼을 붉게 물들이긴커녕 창백하게 빛이 바랠 것만 같다. 이 나이 먹고 어린애한테 연심을 품다니! 아니, 이건 연심도 아냐. 욕정이지, 욕정. 급작스럽게 심신을 강타한 부끄러움에 바람 부는 정원에 한참 서 있던 위무선은 남망기를 찾아가려던 걸 멈추고 맥 빠진 발걸음을 뒤로 돌렸음. 미쳤구나, 위무선. 사도를 수련한 것도 모자라서 이젠 파렴치한 소리까지 들으려고... 


그렇게 또 며칠 고민하다 사실 저를 먼저 좋아한 것은 남망기가 아니었던가. 하고 용기내서 다시 치근덕거려 보는데 남망기가 이미 그 마음을 옛적에 접었단 걸 까맣게 모르고 치근거리다 몇 차례 크게 데이곤 이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초조해지는 위무선.. 


급기야는 남망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너 나 좋아하지 않았었냐 묻기까지 하고, 핏발 선 눈으로 분노에 차 저를 노려보는 남망기에게서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소리를 듣고 나서야 뭔가 단단히 글러먹었구나 싶어 허둥지둥 도망치겠지. 


그런데 도망치면 뭐하랴. 지금의 위무선은 사일지정 동안 크게 상한 몸을 회복시킬 겸 운심부지처로 요양을 온 상황이라 방으로 뛰어들어봤자 같은 처마 아래였으니. 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남망기의 얼굴과 한 자 한 자 딱딱하게 끊어 짓씹듯 말했던 목소리를 오래 곱씹던 위무선은 이렇게 어설프게 계속 마주쳐봐야 제 마음을 주체 못해 자꾸 나쁜 모습만 보일 것으로 판단하고 그 길로 짐을 싸서 남희신에게 그만 운몽으로 돌아가겠노라 인사를 올렸음. 


남희신이야, 정양하러 온 사람이 치료를 받지도 않고 제 동생만 신나게 따라다니다 돌연 떠나겠다고 하니 걱정스럽지. 게다가 어검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타고 발로 걸어 운몽으로 가겠다고 하니 더더욱. 그래도 위무선이 하도 완강해서 그러십시오, 하고 산문 밖까지 배웅을 했는데 위무선은 남희신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그 어깨너머만 흘끔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먼 길을 떠났어. 


이만하면 미운 정이라도 들었을 법도 한데 이제 정이란 정은 죄 주지 않을 작정인가. 떠나는 발걸음 무겁기도 하여라. 돌아보면 더 미련이 생길 것 같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위무선은 그 탓에 제 머리 위로 어검한 흰 그림자가 쌩하니 날아 운심부지처로 가는 것도 몰랐어. 앞만 보고 걸어도 그 잘난 얼굴, 어지럽도록 어른거리니 다른 곳을 쳐다볼 여력도 없었고. 






과연 금단 없는 몸으로 고소부터 운몽까지 찾아가기란 먼 길이어서 운몽 종주 강만음은 요양하라고 등 떠밀어 보냈던 대사형이 더 골골거리는 꼬라지로 돌아오자 그저 황당할 수밖에. 


거기에 뭘 또 얼마나 서둘렀는지 놔두고 온 것도 많고 받아와야 하는 것도 죄 잊었대. 문하생 하나를 고소로 보내 위무선의 남은 짐과 약재를 받아 오게 시키면서도 홧김에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냐고 위무선의 등을 퍽 때린 강만음은 위무선이 그 뻔한 장력도 버티지 못하고 픽 쓰러지자 화들짝 놀랐어. 


위무선! 크게 외치며 달려들어 부축하니 끙 앓는 소리를 낸 위무선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제 같으니' 볼멘소리를 간신히 쥐어짠 뒤 그대로 까무룩 의식을 잃었어. 강만음은, 그 당혹스런 상황에 의원을 부르면서도 '은혜는 무슨!' 하고 버럭질을 했고. 누가 운몽쌍걸 아니랄까봐. 


그로부터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남망기와 마주앉게 된 위무선은 온 세상이 짜고 저를 놀리나 싶은 심정이었어. 고소에 실력 좋은 의원을 청했단 말은 들었는데 우리 남가 둘째 공자는 수사지 의원이 아닐 텐데? 마중도 배웅도 하지 않던 냉정을 돌이켜보던 위무선은 영 내키지 않는단 목소리로 남희신이 저를 이곳으로 보냈다 하는 남망기의 말을 듣곤 재빨리 혹시? 하던 어렴풋한 희망을 눌러 꺾었어. 부끄러워하나 놀리기엔 남망기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거든. 


그런 와중에도 고소에 뛰어난 의원은 많지만 음률에도 조예가 깊은 이는 적어 제가 왔노라 부연해주는 성실함이 귀여워서 실실 웃은 위무선은 너 어릴 땐 한정없이 귀엽기만 하더니 언제 이렇게 장성했냐 물었어. 제딴엔 칭찬이었다만 남망기의 반응은 자못 냉랭해. 



- 그때의 제가 아니니까요. 



찔리는 게 많은 위무선은 가슴 속이 뜨끔해 입을 꾹 다물었어. 저 애 뭘 알고 저리 답하는 건지. 그냥 이만큼 자랐노라 피력하는 것 같기도 하고 더는 당신께 목 매던 아이가 아니니 수작질 집어치우라 경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동그맣게 잘 익은 연정이 달려있는데 모른 척 하는 것도 아주 고역 아니겠어. 의원과 환자된 입장으로 하루에 세 번은 꼬박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위무선은 그때마다 간식을 챙겨주기도 하고 어느 날은 말없이 사라졌다 연꽃을 한뭉치 따서 건네기도 하며 살금살금 남망기의 반응을 살폈어. 그런데 어릴 적의 제가 아니라 한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도무지 사방 둘러친 빙벽이 녹을 기미가 없더라고... 


저는 옛적부터 장난질에 진심이었던 사람이라 요만큼의 개구멍이라도 뚫리면 당장에 기어들어갈 재주가 넘치는데 이게 소문의 만년한설인가 싶고. 간식은 운몽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며 물리고, 연꽃은 노지의 식물이라고 함부로 꺾지 말라 잔소리만 하고 받아주지도 않았고... 


운몽에 남은 자랑거리가 또 뭐 있나 고민하던 위무선은 진찰시간에 제가 하도 반갑게 남망기를 맞이하자 남망기가 '몸이 좋지 않다는 건 핑계였습니까?' 하고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말에 기가 죽어 신나게 흔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어. 



- 아니... 정말로 아픈 건 맞는데... 피라도 토하면 믿을래? 



그로부터 하루도 채 지나기 전, 위무선은 정말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으로 남망기에게 제 미령함을 증명했어. 저를 받아 안는 품에 기대어 피에 젖은 기침을 뱉던 위무선은 가물거리는 시야에 엉망이 된 백의가 들어오자 핏자국을 문질러 닦아주며 새 옷 사줄게, 속삭이곤 그대로 기절해버렸어. 


운심부지처에서도 하라는 정양은 안 하고 남망기 뒷꽁무니나 쫓아다니기 바빴고 운몽에 와서도 둘째 공자의 환심을 살 방법이나 궁리하며 바쁘게 쏘다녔으니 몸이 버텨낼 리가. 열이 올라 며칠을 앓아눕게 된 위무선은 이럴 때면 언제나 제 곁을 지켜주던 강염리나 강만음이 아니라, 드물게 남망기가 제 곁에 앉아있는 것을 보곤 혼곤한 와중에도 손 한 번만 잡아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가 얼음장 같은 시선에 데인 듯 끄응 신음소릴 내며 돌아누웠어. 



- 싫으면, 말로 할 것이지. 

- ..... 

- 아니, 아니야. 그냥 말 하지마. 손 잡아달라고 안 할게... 



금단을 잃은 뒤론 암만 열이 펄펄 끓어도 지독한 오한에 시달려서 손을 잡아달라고 말하는 일이 잦았어. 마침 강염리가 죽을 챙겨 들어오자 위무선은 죽은 됐으니 나 손 잡아 달라 칭얼댔어. 자연스럽게 남망기와 자리를 바꿔앉은 강염리는 익숙하게 위무선의 손을 꼭 붙잡아 이마며 뺨을 쓸어주었어. 



- 우리 아선, 자꾸 이렇게 아파서 어떡해. 

- 사저가 손 잡아주시면 괜찮아요.. 

- 내 손이 약손이야? 

- 그럼, 약손이지요. 



위무선이 배시시 웃다 식사도 못하고 다시 잠들 무렵, 남망기는 강염리의 뒤에 서서 괜시리 뒤로 감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어. 아픈 걸 핑계 삼아 또 개수작을 부리나 싶어 평소보다 더욱 냉정하게 굴었는데, 보아하니 사심이 깃들었다기보단 아플 때마다 하는 버릇 같은 소리였던 모양이라. 


...환자를 그리 차갑게 대할 것까진 없었는데. 그냥 잡아줄 걸 그랬나. 


그러고도 몇 밤을 더 앓은 위무선은 눈도 뜨기 전에 손을 잡아달라며 웅얼거리다 남망기가 망설이는 사이 간신히 실눈을 떠 그 얼굴을 확인하곤 강염리나 강만음이 아니면 괜찮다며 반대로 돌아눕곤 했어. 결국 남망기의 손은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채 열이 내려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되었지. 


마음 같아선 좀 더 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은데 멋진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에 아파서 골골거리는 꼴만 보이려니 그것도 통 체면이 안 살고... 청심음을 연주하는 남망기의 얼굴만 한 이틀 죽어라 바라본 위무선은 꿈에라도 그 얼굴이 등장할 정도로 뇌에 새기고 나서야 남망기에게 넌지시 그만 돌아가도 괜찮다 일렀어. 미련을 쌓는 것도 이만하면 충분하니. 


실은 아직도 속이 쓰려 딱 죽을 것만 같았는데 미운정도 쌓기 싫단 애를 붙들어 놓고 뭘 더 하겠어. 이대로 또 몇 년 지나면 그땐 선문에 존경할 만한.. 아니다. 무튼 선문의 어른과 청년 수사 정도의 위치로나마 다시 만나겠거니. 


열여덟만 되어도 이리 훤칠하니 한 오 년만 더 지나면 연화오 복판에 들어앉아서도 아마 네 명성 짜랑하게 울려퍼질 것이라. 거기서 또다시 오 년쯤 더 지나면 사실 고소의 함광군이 어릴 적에 날 연모했단다, 짓궂게 농을 쳐도 그럭저럭 무던하게 넘어가 주진 않을까 헛꿈마저 꾸며. 


그런데 제가 오기 전과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위무선의 모습에 남망기는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니 더 있겠다 답해. 위무선은, 생각지도 못한 거절에 그만 사레가 덜컥 들렸어. 좋아라 돌아갈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이람. 남망기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등을 툭툭 쳐주자 위무선은 쿨럭거리면서도 재빨리 손을 내저어 만류했어. 


손 잡는 것도 싫어하는 애인데 내 등 두드려주는 건 얼마나 고역이겠어. 어거지로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겨우 기침을 멈춘 위무선은 저도 모르게 왜? 너 나 싫어하잖아? 하고 되물었다가 제 말에 스스로가 상처받아 이불 아래로 데굴 기어들어갔어. 



- 낫지 않으셨으니까요. 

- 나을 일 없는 일이라 그래. 

- ...큰 병입니까? 

- 병이라기보단, 체질이란 말이 옳겠지. 



한참 침묵하던 남망기는 눈을 내리깔며 어릴 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나직하게 중얼거렸어. 위무선은, 남망기가 먼저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숨만 꾹 참았고. 


남망기의 기억 속 위무선은 태양처럼 찬란하던 사람이었으니 지금 이렇게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모양새로 이불 덮어 쓰고 숨은 꼴이 어색할 만도 해. 위무선은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 입술을 잘게 우물거리다 기어이 한숨처럼 웃으며 말했어. 



- ....너도 많이 변했는데 나라고 변하지 않을 리가. 



위무선에게 금단이 없다는 사실은 강만음과 강염리, 그리고 연화오의 주치의만이 아는 일이라 남망기는 위무선이 아픈 이유조차 몰랐어. 그러니 그럼 한 달만 더 있다가 그때에도 차도가 없으면 돌아가란 위무선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겠지. 


다음날부터 위무선은 몹시 조심스럽고 착실한 태도로 남망기를 대했어. 참선을 하라면 하고, 청심음을 들으라면 듣고, 약을 먹으라면 먹고. 강만음이 미쳤냐며 이마를 짚어보는 손은 매몰차게 내쳤지마는. 이번엔 반드시 정을 떼겠노라 독하게 마음을 먹어서 시시때때로 던지던 헛소리도 대폭 줄였어. 


천성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 아주 참지는 못해서 아차하는 순간에 느물느물 수작을 걸다가도 남망기가 눈빛을 싸늘하게 만들기도 전에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후다닥 도망가기 일쑤였지. 물론, 남망기는 그렇게 도망가는 위무선을 한 번도 붙잡거나 뒤따르지 않았어.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팔자에도 없던 바른 생활을 한 덕분인지 보름 정도 창백하던 안색에 발긋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달포를 넘기지 못하고 재차 앓아누운 위무선을 바라보며 남망기는 걱정스러움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했어. 대체 왜? 왜 차도가 없는거지? 이론과 실재는 다르기 마련이라지만, 이렇게까지? 


그러다 문득,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마른 손목에 시선이 가 닿았어. 이럴 때면 언제나 손을 잡아달라며 칭얼거리는 위무선의 목소리도. 머뭇거리던 남망기는 침상 옆에 앉아 위무선의 손목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영력을 흘려넣었어. 몸이 쇠해 흐트러진 기혈을 바로잡아 줄 생각이었지만.... 


얼마 못 가 가뜩이나 희던 남망기의 얼굴은 숫제 파랗게 보일 정도로 핏기를 잃고 말았어. 



금단이, 없어..? 



남망기는, 처음으로 위무선의 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실감했어. 그와 더불어 제 등 뒤를 바짝 쫓는 상실의 이빨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가진 적도 없건만 잃는 일만 두번째라니. 








- 2020년 7월 4일에 풀었던 썰.

분명 시작은 위무선이 후회하는 이야기였는데 어쩐지 남망기가 후회하는 이야기가 되어서 컷.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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