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K패치가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가 77억명이나 되는데 고작 사람 하나 태어난 날 축하한다고 모인 사람들이 뭐 이렇게 많은 것인지, 토니는 답답함에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타이를 끌어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번 쳐다본 토니가 여차하면 파티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입구 근처를 서성이고 있을 때 여태 기다리던 얼굴이 뒤늦게야 파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내 뚱하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리며 폼이 넉넉한 정장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피터에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너 보러 온 거 아니고 어머님이랑 아버님 뵈러 온거야.”

“나 아무말도 안했는데? 아직도 화난거야?”

토니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리아와 하워드를 보러 왔다는 피터는 말과는 다르게 손엔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며칠 전 말다툼을 한 뒤로 자신을 모른척하던 피터가 파티에 와준 것 만으로도 토니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리차드 파커와 하워드 스타크는 꽤나 말이 잘 통하는 사이였고 그들의 부인이었던 메리 파커와 마리아 스타크는 친자매 마냥 죽이 척척 맞는 사이였다. 그러다보니 토니와 피터는 태어나서부터 함께 지낸 이른바 소꿉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8살이 돼서야 처음 안 약혼자이기도 했다. 3개월의 텀을 두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진 두 여성은 임신증세가 정 반대였더랜다. 얼마나 심하게 입덧을 했던지 4개월 무렵부터야 음식다운 음식을 넘길 수 있었던 마리아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 무색하게 메리는 입덧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함께 태교 음악을 듣고, 일주일에 2번 임산부 요가 교실에 다니니 두 여성의 유대감은 더욱 돈독해졌다. 이렇듯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지내던 두 여성이 생각해낸 것이 아이들을 결혼시켜 진짜 가족이 되자는 것이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토니와 피터인 것이다.

“어머님 저 왔어요.”

“우리 피터 왔구나. 잘 지냈니? 무슨 일은 없고?”

“그럼요. 다 좋아요. 엄마랑 아빠가 못 와서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토니의 앞에선 무표정으로 앞만 보던 피터가 마리아의 앞에 서니 솜사탕마냥 달큰한 웃음을 짓는 것에 토니가 입을 삐죽였다. 정작 아들은 망부석 마냥 세워두고 본체도 하지 않으니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고보니 왜 아가라고 안하세요? 옛날엔 자주 그렇게 부르셨잖아요.”

“토니!”

갑작스러운 토니의 말에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진 피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 모습이 얄미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도 그 웃음의 주인공은 마리아였다. 토니의 말에 과거의 추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결혼을 시키자고 굳게 다짐한 두 여인들이 간과한 것이 있으니 바로 아이들의 성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배가 앞으로 볼록하게 나왔으니 딸일 것이다, 배가 나온 모양이 넓대대한 것을 보니 아들일 것이다 추측만 했었지 아이들의 정확한 성별을 몰랐던 것이다. 그 와중에 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마리아의 아이가 정말 아들이자 마리아는 메리의 손을 꼭 잡으며 볼록한 배에 “건강하게만 나오렴 며늘아, 네 신랑이 네가 보고싶다고 보채는구나.”따위의 말을 했었더랜다. 물론 예상과는 다르게 태어난 아이가 남자아이였으니 마리아는 두 번 다시 피터에게 며느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 ‘아가’ 라는 호칭으로 불러 어린 피터는 자신의 이름이‘피터 벤자민 파커’와 ‘아가’두개인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토니가 오랜만에 꺼낸 호칭에 말간 얼굴로 제 어미가 시키는 대로 ‘어머님’하고 부르는 피터의 어릴적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터지고 만 것이다.

“그 호칭도 오랜만에 들어보니까 좋네. 피터는 이제 아기가 아니니까 그렇지 토니.”

“그 아기가 아니고 ‘새아가’할 때 아가였잖아요. 새삼스러워 하시긴. 저희 결혼 날짜도 두 분이 다 잡아 놓으신거 아니었어요?”

“어머? 우리아들 결혼하고 싶니? 그럼 피터랑 둘이 손잡고 와. 우리가 약속하긴 했지만 당사자 마음도 존중해 줘야지 안 그러니? 우리 아들이 꼬셔도 한번에 넘어가지마 알겠지 피터?”

능청스러운 마리아의 말에 토니는 얼굴을 구기고 피터는 웃음을 터트렸다. 마리아가 자리를 옮기고 둘만 남게 되자 바로 한시간 전 까지만 해도 얼굴도 보지 않고 싸웠던 것을 잊었는지 어렸을 때 마냥 낄낄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지금 토니는 책상에 엎드려 칠판 앞에서 다른 남자아이와 놀고 있는 피터를 노려보고 있다.

“피터! 나 이거 모르겠어. 빨리 알려줘!”

기껏해야 지어낸 핑계가 모르는 문제를 알려 달라는 거라니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피터는 아랑곳 않은 채 뻔뻔한 표정을 한 토니가 얼른 오라며 그를 닦달했다. 피터가 꾸물거리자 궁금해 죽겠다며 왁왁 소리를 지르는 토니에 폭- 한숨을 내쉰 피터가 토니의 앞인 자신의 자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뭔데 봐봐.”

“이 문제. 전혀 아무것도 모르겠어.”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일단 아무거나 펼쳐 문제를 가리키자 이를 확인한 피터가 씩씩대며 토니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아! 왜 때려!”

“너는 좀 맞아야해.”

자리에서 일어나 토니를 때리는 피터에 반 아이들이 모두 토니와 피터 쪽을 바라보았다. 토니 스타크가 거리낌 없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토니 스타크를 거리낌 없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미드타운 고교에선 몇 번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악! 피터 그만! 왜 때리는데! 이유라도 알고 맞자!”

“이유? 이 문제를 몰라서 물어 보는거야? 너 나 놀리려고 그런거지!”

토니를 때리는 일이 꽤나 힘이 들었는지 씩씩 대며 토니의 교과서를 들어 코 앞으로 들이미는 피터에 토니의 상체가 뒤로 쭉 밀려났다.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지며 자세히 책 내용을 읽어보더니 낭패라는 듯 뻘쭘한 얼굴로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이 문제는 풀라고 내준게 아니고 설명 예시잖아 바보야!”

두 사람의 근처에 있던 네드가 피터가 든 책을 슬쩍 보고는 조금 멀리 있는 아이들에게 양자역학 부분이라며 벙긋벙긋 입모양으로 알려주었다. 방금 했던 물리 수업의 교과서를 그대로 펼치고 있었던 것인지 아이들은 모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의 첫 부분만 대충 겉핥기로 배웠음에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넌 이거 이미 아는거잖아. 작년에 나한테 설명해준 사람이 너라는거 잊은거야?”

그럼 그렇지. 토니와 피터를 구경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구겨지더니 제 각각 자리를 옮겼다. 옆에 있던 네드도 토 할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곤 자리를 피했다.

“몰라 기억 안나.”

“거짓말 하지마. 너 한번 본거는 안 잊어버리잖아.”

“그러고 보니 네가 8살 때 나랑 결혼한다고 좋아했던 모습이 떠오르네. 그땐 엄청 귀여웠는데.”

“토니 스타크!”

“뭐! 그럼 네가 내 옆에 있던지! 왜 다른 애랑 노는데!”

8살 어린 아이도 아니고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다고 이렇게 유치하게 굴고 있는 것이 세기의 천재라고 떠받드는 토니 스타크가 맞는 것인가 피터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말을 잃은 피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으니 토니도 제가 한 말이 부끄럽기는 한가보다. 짙은 색의 고수머리 사이로 빼꼼히 튀어나온 붉은 귀 끝을 보고 피터가 픽 웃어버리자 토니는 큰소리로 헛기침을 하였다.

“유치하게 굴지마 스타크.”

장난스러운 피터의 말에 토니가 두 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제 얼굴을 가렸다. 킬킬대며 웃고 있는 피터를 손가락 사이로 바라본 토니가 웃지 말라고 해도 피터의 웃음소리만 더욱 커질 뿐이었다. 암만 어렸을 때부터 결혼한다만다 하는 사이였어도 두 사람은 약혼자보단 친구에 더욱 가까웠다. 부모님들이야 두 사람의 결정에 따른다고는 했지만 내심 결혼하길 원하는 터라 원치 않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맴돌았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제 갈 길을 갔던 두 사람이 16살이 되던 해, 새롭게 배정받은 교실에서 마주치곤 웃음이 터져버렸었다.

피터와 같은 반이 된 이후로 토니는 오랫동안 이름뿐이던 약혼자에게 홀딱 빠졌더랜다. 오늘처럼 다른 아이와 놀고 있는 피터를 보고 괜히 심술을 부리는 것은 기본이고 언제 어느 때고 피터와 붙어있고 싶어했다. 체육 수업을 위해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은 피터를 보고 자위를 했던 그 날. 종례 후 창문 옆 자신의 자리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졸고 있던 피터의 입술을 몰래 만져봤던 그 날부터 였다.

교실에서의 한바탕 소동 후 피터는 전보다 자주 토니와 붙어 다녔다. 아침에도 데리러 오는 토니의 차를 타고 와선 같은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가끔 네드와 함께 레고를 맞추러 간다며 따로 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하교도 둘은 늘 함께 했다. 이미 두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정혼자라는 사실은 미드타운 고교에선 꽤나 유명한 이슈였기 때문에 토니와 피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약혼자니 정혼자니 하는 말들은 영화나 로맨틱 코미디 소설 속에서 더 많이 볼 법한 말이니 토니가 피터에게 약혼 어쩌구 하는 말들을 할 때마다 영화를 보는듯 바라보는 것이다.

“안녕 피터!”

물론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며칠전부터 피터에게 알짱거리기 시작한 저 놈 때문에 토니는 지금 환장할 노릇이었다. 피터와 제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은 미드타운 고교의 학생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저 놈, 데이브는 요즘 그런게 어디있냐며 꿋꿋이 피터에게 제 마음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토니 스타크가 그리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아님에도 아니, 오히려 피터보다 존재감이 큰 토니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피터에게 치근덕거리니 토니는 목적도, 자신에 대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저이가 매우 거슬리는 것이다.

“오늘 화학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물어 봤던거 어떻게 알고 있었어? 너 진짜 대단하다 피터.”

“그거 내가 알려준건데. 궁금하면 알려줄게.”

은근슬쩍 피터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토니가 끼어들자 데이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토니가 옆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듯 놀란 얼굴이 일순간에 구겨지는 것까지 보자 토니는 피터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니 피터가 아프다며 토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피터의 행동에 데이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가 이내 울상이 되었다. 토니의 품에서 빠져나온 피터가 토니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내일 알려줘도 될까? 우리가 지금 가기로 한 곳이 있어서.”

“그럼 내일 쉬는 시간에 네 자리로 갈게.”

“응, 내일보자.”

가면서도 피터를 보며 활짝 웃는 데이브에 피터의 앞을 가로막은 토니가 그를 노려보자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데이브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재수없는 새끼..”

“응?”

“아니야 가자.”

피터의 손을 꽉 잡은 토니가 흘끔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본 것인지 피터가 다른 손으로 토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데이브 때문에 그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토니가 고개를 숙여 피터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니 피터는 익숙한 듯 토니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짜증나는 일이 생기면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곤 크게 숨을 들이쉬는 토니의 습관을 알고 있기에 피터는 토니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저 자식이 너 좋아하나봐.”

“그게 짜증난거야?”

“응. 완전.”

오리처럼 입을 쭉 내민 토니를 보며 웃던 피터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발짝 앞서 나가며 흘끔 뒤를 돌아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너랑 결혼할건데 뭐 어때.”

길을 걷던 그대로 멈춰서 입을 떡 벌린 토니를 본 피터가 웃음을 터뜨리며 뛰어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토니가 빠르게 걷는 피터의 주위를 알짱대며 아까 한 말을 다시 해달라고 졸랐다. “나 못 들었어. 나랑 뭐 한다고? 응? 피터!” 평소답지 않은 토니의 모습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피터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나랑 결혼하자 토니 스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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