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트 저택 앞에 난 길은 좁은 골목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로라고 할 수는 없는 정도였으므로 말과 마차와 사람들과 수레가 복작이며 늘어서자 엄청나게 혼잡해졌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정체가 되기는 했다. 

여기에서 특별히 출병식 따위를 하는 것도 아니건만 이 정도 되는 인원이 지나는 일도 흔치는 않은터라 창문을 열고 인파를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돌아올 때도 난리더니 다시 떠날 때도 난리였다.

그런 소란 속에서 릴리가 뫼니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뫼니엘은 잠시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 릴리의 손을 맞잡았다. 처음으로 하는 악수였다. 릴리는 씩 웃으며 뫼니엘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라 하시면 서운하지요. 집에 젊은 아가씨들이 있으니 활기가 도는 것 같아 좋았답니다."

"두 분도 기회가 된다면 동부에 있는 그레이스 가를 찾아 주세요. 축복받은 이안드만큼 번영한 도시는 없지만 나름의 호젓함이 있지요. 두 분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면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로렌의 딸과 함께 해 영광이었습니다. 박명을 보는 눈에 흐림이 없기를."

뫼니엘의 우아한 인사를 받은 뒤 릴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빙긋 웃으며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손을 내밀었다. 뫼니엘의 옆에 있던 리르먼도 따라서 미소짓고는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준 뒤 정중히 허리를 숙여 릴리의 손등에 닿지 않도록 입 맞추는 시늉처럼 이마를 댄 뒤 놓아주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되어 우아한 동작이었다. 

"떠나는 길에도 순풍의 축복이 함께 하길."

리르먼이 건넨 인삿말은 릴리도 아는 것이다. 우여곡절도 있었으나 돌이켜 보면 이곳도 좋은 추억이 빼곡했다. 릴리가 호의를 담아 답했다.

"망각을 잊은 기억 속에 그대들은 영원하리니."

"큰 영광이군요."

릴리가 피식 웃었다. 옆에선 로라가 뫼니엘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건강하시길."

"힘들고 고난한 일도 결국엔 지나가게 마련이니 부디 미소를 잃지 말아요."

뫼니엘은 따스한 낯빛으로 로라를 보았다. 그래도 한 집에서 오래 지내며 정이 꽤 들었나 보다. 로라는 그런 귀부인에게 미소를 보였다. 릴리가 로라를 흘끗 보았다. 원래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로라는 자신을 귀여워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 귀엽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릴리라면 어린애 취급 받는 게 싫었을 텐데 로라는 남에게 맞추는 게 우선인 것처럼 굴었다.

이해 불가능한 쪽에서 아예 신경을 끈 릴리가 다시 리르먼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어요? 저 멋쟁이랑 떨어져도 안 울고 기다릴 수 있겠어요?"

릴리와 리르먼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돌아가 저 편에서 대기중인 흑마를 향했다. 리르먼은 통 크게도 릴리에게 느와를 맡겼다. 지금 리르먼은 말을 타기 힘들기도 하고 느와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릴리와 함께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저런 말을 덜컥 남에게 줘버리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건 릴리가 제일 잘 알았다.

"그레이스 씨라면 저 멋쟁이를 저 다음으로 아껴줄 사람이니 걱정은 안 됩니다. 저만 배갯잇 좀 적시고 마는 거죠."

"그래도……."

"그런 마음으로 아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선물이 약소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거든요."

"아, 그거요."

릴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나쁜 선물은 아니지만 좀 애매한 선물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애지중지하던 애마를 보내는 건 역시 과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했던 것처럼 느와를 데리고 달리게 해준다고 생각하세요. 좀 먼 곳으로 가는 거죠."

"말인즉슨, 저한테 아주 주는 건 아니라는 뜻이죠?"

"역시 그레이스 씨, 명석하십니다."

리르먼이 손을 내밀었다. 릴리는 웃으며 그걸 잡았지만 무게는 거의 싣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로라가 마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고 문을 닫은 뒤에야 필리엔이 가족들 앞에 섰다. 릴리가 보기에 필리엔은 조금 쭈뼛거리고 있었다.

리르먼이 지팡이를 짚지 않은 손으로 필리엔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감싸고는 끌어당겼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필리엔은 말 잘 듣는 순한 짐승처럼 살짝 고개를 숙였다. 리르먼의 입술이 필리엔의 이마에 닿았다. 기원의 의미였다.

"꼭 무사히 돌아와라."

"그럴게."

막상 얼굴을 보니 감정이 복받치는지 리르먼은 목소리를 조금 떨었고 필리엔의 대답은 조금 작았다. 리르먼은 자세가 조금 틀어진 상태임에도 필리엔보다 조금 더 컸다. 어린 동생이 말 없이 올려다 보는 걸 잠시 바라본 리르먼이 필리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필리엔은 잠시 멈칫하다 결국 리르먼을 꽉 껴안았다. 마치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끌어안는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해서. 

리르먼은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한쪽 팔 대신 온몸으로 그런 필리엔을 마주 안아주었다. 리르먼으로서는 자신이 온전치 못해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을 사지로 떠미는 게 마음이 쓰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필리엔 입장에서는 참전했다 겨우 돌아온 집에서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다시 떠나야 하니 슬픔과 섭섭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필리엔에게 대현자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리르먼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데려와 겉도는 아이에게 마음을 둘 수 있는 하나 뿐인 진짜 가족이었으니까. 리르먼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끝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으리라는 걸 필리엔은 알았다.

자신과 덩치가 비슷한 동생을 한참이나 꽉 안아준 리르먼이 팔을 풀어 포옹을 끝낸 뒤 다시 한 번 필리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마를 맞대어 무사를 기원했다.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다리가 두 번 잘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비통함이 스쳤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인사를 끝냈을 때 고통의 흔적은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로 만든 옅은 미소 뒤로 숨겨 사라졌다. 

금빛 속눈썹 아래 푸른 눈동자에는 슬픔이 그득했지만 가족을 전쟁터에 보내는 사람에게 합당한 수준이었다. 그들 주위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 중에도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흔적이 눈가에 붉게 남은 이들이 있었다. 리르먼은 딱 그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했다.

마차 창문 너머로 작별인사 중인 가족들과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릴리를 흘끗 본 로라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가씨, 부탁이니까 시아주머님 되실 분을 연적처럼 노려보는 것만큼은 제발 참아주세요."

"노려보는 게 아니라 부러워 하는 거야. 필리엔이 저렇게나 의지하다니 부럽다……. 으으 느므 브릅드!"

"뭐하러 가족을 질투하시는 거예요? 그리도 부러우시다면 아가씨도 한 20년 정도 옆에서 든든하게 누님처럼 기댈 수 있게 해주시든가요."

"20년까지는 안 걸릴 걸……."

로라의 헤식은 소리에 릴리는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웅얼대듯 그렇게 말하며 필리엔이 좀 더 잘 보이는 각도를 찾아 고개를 기울였다. 로라는 조금 건방지다고 할 수 있을 법한 눈빛으로 릴리를 잠시 보았다가 그냥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가씨를 누가 말리냐는 듯한 태도였다. 

마차에 탄 두 사람이 허튼 소리를 나누는 것과 관계 없이 형제는 애틋한 이별을 감내하고 있었다. 리르먼과 인사를 나눈 뒤 필리엔의 시선이 그 뒤에 서 있는 뫼니엘에게로 향했다. 피를 나누지 않은 모자는 서로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은 채 간명한 인삿말만을 건네었다.

"이카트의 이름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고 용맹히 싸우고 돌아오렴."

"네. 믿음에 누가 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시선이 아주 조금 길게 닿았을 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나 태도와 같은 겉모습은 처음과 달라진 바 없었다. 적의 없는 타자 정도의 거리감으로 지내온 세월이 오래되어 이제 와 새삼 행동의 변화를 보이는 것도 머쓱한 일이었다. 필리엔은 마지막으로 리르먼을 보았다.

"다녀올게, 형."

리르먼은 말을 더 잇지 않고 필리엔을 바라보기만 했다. 리르먼에게 필리엔은 자신이 돌봐 주어야 하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어렸던 동생은 어느새 자라 형의 부족한 날개 아래를 떠나고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리르먼을 두고 필리엔은 몸을 돌려 단번에 말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출발한다!"

깃발과 말과 사람과 마차와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으로, 남으로. 오롯한 영광이자 하나의 태양이시며 그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전쟁터로 향하게 만들 황제가 있는 중부로, 제국의 심장인 펠메즈디예를 향해서. 

릴리는 대열을 맞추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창문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남겨진 사람들을 보았다. 리르먼은 앞으로 나아가는 필리엔을 끝까지 전송하려는지 그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뫼니엘이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아들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곧 길이 꺾여 모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릴리는 도시풍에 나부끼는 치렁치렁한 금발을 손으로 대충 정리한 뒤 자리에 바로 앉았다. 어쩐지 릴리마저 먹먹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릴리는 자신을 영원히 떠나버린 마리 이모를 떠올렸다. 이모는 릴리가 떠나보낸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사고로 갑자기 누군가를 잃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걸 아는 채로 가족을 떠나보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알 수는 없었지만 무척 쓸쓸한 느낌일 것 같았다.




행렬이 곧바로 남으로 향한 건 아니었다. 말을 탄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마차와 짐수레들은 중부를 향해 난 길에 오르기 전에 도시를 관통하는 길을 지나며 행진했다. 

허공에 꽃잎이 뿌려졌고 손수건이 던져졌다. 도시의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거나 서부의 야만인들을 박살내고 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제국의 승리를 외치는 이도 있었고 떠나는 이들을 보며 간절히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가족이나 연인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석별을 마저 나누기도 했다. 릴리는 마치 안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가씨, 저길 보세요. 도서관이에요."

릴리처럼 말똥말똥 바깥을 보던 로라가 말했다. 일반적인 도서관을 얘기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릴리는 손을 흔들고 무어라 외치기도 하며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대현자의 도서관 외관을 물끄러미 보았다. 전체적으로 흰빛으로 반짝이는 도서관은 단정하고 정숙하지만 웅장함을 잃지 않았으며 구석구석 섬세한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었다. 새침한 완벽주의자 같은 건물이었다.

도서관을 살피던 차에 문득 흰 천을 씌워둔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놓인 게 아니라 어린애 키만한 높이에 있는지라 사람들 너머로도 모습이 잘 보였다. 사실적인 묘사로 알록달록한 주위와 다르게 온통 흰빛인 조각상은 원래도 눈에 들어오는 편이긴 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이유로 시선을 끌었다. 오늘 하얀 조각상은 여름꽃을 엮은 꽃화관을 쓰고 그냥 야외에 두어 도둑맞아도 되는 물건이라기엔 귀해보이는 온갖 것들을 잔뜩 두른 채였다. 

석상의 팔에는 값져 보이는 천과 구슬을 엮은 장신구는 물론이고 머리 위 공간이 부족해 거기 걸어둔 듯한 화관까지 더해져 있었다. 발치에는 더욱 많은 물건들과 꽃으로 꾸민 정성이 담긴 작은 제단 비슷한 것들과 불을 붙인 초 따위가 옹기종기 놓여있었다. 릴리는 그게 전쟁터에 나가는 이들의 무운을 비는 사람들이 남겨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그가 고귀한 신분이기만 했거나, 오직 마법사이기만 했거나, 단지 출정을 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만 했더라면 그의 석상 주위가 저렇게까지 바뀌진 않았을 터였다. 이안드에 사는 사람들은 죽지도 통치를 중단하지도 않는 지배자 아래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번 출정에 대현자도 함께하니 그가 전쟁을 끝내주길 바라는 기대감이 더해진 거겠지. 

하지만 어쩐지 릴리는 대현자가 서남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중서부에 드리운 전쟁의 그림자를 걷어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의 기억 속에 스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일으킨 마법은 가히 이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대마법사의 힘은 사람의 상식을 뒤엎을 정도로 강대하다. 그러니 만약 대마법사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런 전쟁 같은 건 순식간에 끝나버릴 거란 지점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대현자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만약 그 정도 되는 경지의 대마법사가 진정으로 원했다면 처음 출정했을 때 이미 전쟁이 끝났을 터였다.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로. 

대현자에겐 하늘 맑은 밤 반짝이는 별처럼 많은 기회가 있었다. 지금 서남부와의 전쟁은 지지부진하다 할 정도로 오래된 일이 되었음에도 대현자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중서부 전체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정치적으로도 황제와 척을 지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음에도 그는 끝내 전쟁을 외면했다.

열광적인 평화주의자가 되었다든가 전쟁에 관여할 수 없는 거라 보기도 힘들었다. 처음에 필리엔을 데려간 것도 대현자였으며 지금 두 번째 서부행에도 대현자가 함께했으니까. 전해지는 역사 속 대현자의 과거를 보자면 참전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고 직접 마주한 바 지금 늙고 왜소해져 전쟁에 나설 수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비로운 스승께선 어째서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단 말인가. 세상을 구한 영웅들에게 여전히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어째서 평화를 선택하거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하는 제단이 된 대현자의 석상은 마차가 이동함에 따라 금방 멀어졌다. 릴리는 그만 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돌려 마차에 있는 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릴리는 대마법사의 시야를 지니지 못했다. 그러니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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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메즈디예는 인명이 아니라 지명이었습니다. 짜잔.

여기까지가 제가 처음 구상했을 때 4부 중간 정도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달라진 부분도 있으니 줄어들 거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쓰기 시작한지 1년 좀 넘었는데 앞으로 나올 내용도 많아서 이러다 제 인생과 함께하는 반려소설이 되는 게 아닐지 걱정 중입니다. 페이스 유지 중인데, 지금 같은 속도라도 쭉 가면 좋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다음 편에는 외전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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