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자친구 생일은 어떻게 챙기면 좋을까요?



HBD 지성오빠





2.



남자친구의 생일이라. 한 번도 경험 한 적 없는 큰 이벤트다. 여주는 뭐 마려운 강아지 처럼 집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민했다. 뭘 해주면 좋을까? 오빠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아, 그냥 대놓고 물어볼까? 차라리 1월 1일에 해돋이를 보러 갔을 때 가장 좋아하는 게 뭐냐고 좀 물어볼 걸. 그 때의 분위기에 취해서 당장 다음 달에 있을 남자친구의 생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냥 직접 물어보자. 제일 좋아하는 게 뭔데 오빠는?



"나?"


".....너?"



뭐지 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허, 참,나, 진짜, 뭘, 내가, 제일 좋대, 허, 웃기지두, 않아, 정말. 하여튼, 욱겨. 필요한 답은 듣지 못 했지만 원하는 답을 들은 것 같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3.


아니, 그래서,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생일에 뭘 해주냐구. 여주는 머리를 쥐어 짜며 생각했다. 오빠한테 필요한 게 뭘까.



4.


아, 찾았다.



"오빠! 왜 맨날 니트를 그렇게 헤진 것만 입구 다녀. 내가 하나 사줄까?"



오랜만에 데이트가 있던 날. 지성이 마치 골목길에서 고양이와 한 판 싸우고 온 것 같이 여기저기가 찢어진 니트를 입고 나왔다. 하여튼, 우리 오빠. 아끼는 법만 알아서 옷 살 줄도 모르구. 그래서 기회다 싶어 말했는데 어째 지성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디자인인데.."



이런 거 입으면 좀 멋있어 보이지 않나? 나름 신경써서 약간 가격대가 있는 브랜드의 니트를 구매해 데이트 날 입고 나온 지성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여주는 숭숭 구멍이 뚫린 니트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다가 말없이 그 손을 거뒀다. 망했다.



5.


지성은 니트를 형에게 줬다.



6.


각설하고. 제일 무난 하고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것 같은 선물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앞으로 만날 날이 더 많으니까 오빠의 취향에 맞는 것들은 기념일 때 주거나 내년 생일 때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건, 여주는 돈이 없었다. 재수를 할 때는 당연히 아르바이트를 할 여건이 되지 않아서 하지 못 했고 지금은 안 그래도 마땅한 곳을 찾지 못 해서 아직까지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자친구의 선물까지 부모님의 지갑에서 나오는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무슨 선물을 살 지는 모르겠지만 다이소에 가서 오천원 짜리 햄스터 인형을 사줄 것도 아니니까 일단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게 오 만원이던 십 만원이던 어쨌거나 선물을 살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여주는 선물을 고르기도 전에 아르바이트 어플에 들어가 단기 알바 자리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평일에 하거나 새벽에 하는 일은 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여주의 눈에 띈 주말 단기 알바가 있었으니.




7.



"팔찌 훼손 되면 입장 불가 하세요."



아아. 젊은이들의 열정이 느껴진다. 날씨도 좋고 리허설을 한다고 들려오는 음악소리도 좋다. 여주가 구한 알바는 아이돌 콘서트 진행 요원. 공장 알바는 곧 죽어도 하기 싫었고 몸을 쓰는 일은 더더욱 싫었다. 돈은 필요하지만 따지는 게 많았다. 그래서 이리 저리 단기 알바를 찾아보던 와중 토, 일 이틀을 모두 할 수 있는 알바를 찾았고 그게 바로 이 일이었다. 


지성에게는 오빠 나 오늘 하루종일 잘 거니까 그렇게 알아. 통보를 해놓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성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여주가 그 날이라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는 바람에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성은 멍하니 집에, 여주는 지성 몰래 아이돌 콘서트장에. 아니, 말이 이상한데, 일을 하러 온 것이다.



"죄송한데, 여기 화장실은 내부에만 있나요?"

"외부에는 저기 주차장 옆쪽에 있는데 줄이 길어서 차라리 입장 하고 가시는 게 나으실 거예요."



여주는 형광색 조끼를 입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 서서 작은 마이크를 들고 이따금씩 주의사항을 읊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한껏 설레보였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나도 얼른 오빠 만나고 싶다. 그나저나 이 돈을 받아서 뭘 사주지. 다시금 여주의 고민이 시작됐다.



8.



.....여주가 이상하다.

아무리 그 날이라고 해도 전화도 잘 받았고 가끔 초콜렛이나 약을 사다주며 집 앞이라고 하면 버선발로 뛰어 나와 제 품에 쏙 안겼었다. 그리고 본인 입으로 분명히 자기는 통증이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라고 그랬는데, 오늘은 전화를 해도 단 한 통도 받지 않았고 많이 아프면 약이라도 사다주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귀여워 진짜...."



그러면서도 사랑해 하트하트 귀여운 카톡을 보낸 여주가 사랑스럽기만 하다. 뭐, 그래. 오늘 많이 아프니까 그러겠지. 괜히 건들지 말아야겠다. 지성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운동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9.



"아, 너무 귀엽다. 그래서? 그래서 생일 선물 사겠다고 이렇게 알바 하러 온 거예요?"

"네..."



같이 알바를 하게 된 언니들과 점심을 먹으며 알바를 왜 하러 왔는지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다. 같이 밥 먹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주가 막내였다. 그들은 여주가 알바를 하게 된 계기를 듣고 너무 귀엽다며 손을 마구마구 흔들며 여주를 귀여워 했다. 아아, 좋을 때다. 스물 일곱살 언니가 기지개를 키며 말했다.



"선물은 뭐 사주려고요?"

"사실 못 정했어요."



언니들은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모여 여주의 고민을 함께 들어주었다. 에어팟? 근데 벌써부터 그렇게 비싼 거 사주면 나중에는 무슨 선물을 줘. 그건 또 그래. 끄덕끄덕. 그렇다고 너무 저렴한 걸 주기에는 가오가 상하잖아 여자가. 그것도 그래. 끄덕 끄덕. 그렇지만 이 아기는 너무 아기인 걸? 그것도 그래 끄덕 끄덕. 언니들은 본인들의 일 처럼 고민했다. 



"혹시 남자친구가 최근에 필요하다고 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

"음...."



헤진 니트가 갑자기 떠오른다. 그걸 형한테 줬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니트... 아, 근데 날씨가 이제 점점 풀리니까 니트는 좀 오바인 것 같아서요."

"아니면 그냥 후드티는 어때요? 남자친구 체격이 어떻게 되나?"

"어... 키는 180인데 좀 말랐어요. 70키로도 안 되는 것 같던데."

"세상에. 아이돌이랑 만나요?"



여주의 어깨가 은근하게 올라간다. 그치. 울 오빠가 좀 아이돌 같긴 하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 리허설 하고 있는 저 가수 보다도 우리 오빠가 훨 잘생겼다. 내 눈에는. 여주가 수줍게 미소를 짓자 언니들은 하나 같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여주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귀엽다 귀여워.




10.



그렇게 여주는 언니들에게 추천 받은 브랜드들의 후드티를 천천히 살펴봤다. 안 그래도 평소에 캐쥬얼한 스타일을 잘 입는 지성이기에 예쁜 후드티를 하나 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혔다. 우리 오빠는 아무거나 걸쳐도 괜찮은데. 지금 본인이 입고 있는 이 형광 조끼를 입혀놔도 모델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주의 콩깍지는 여전히 벗겨지지 않다 못해 단단했다.


그나저나 지성에게는 계속 자고 있다고 거짓말을 치기는 했지만 내일은 또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당장 다다음주가 지성의 생일이기에 이번주에 일을 하고 다음주에 정산을 받고 주문을 해야만 한다. 내일도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내면 되겠지. 에라 모르겠다. 위에 뜨는 지성의 메신저 알림을 일부러 지워버렸다.




11.



"수고 하셨습니다. 내일 똑같은 시간에 여기서 모이면 돼요!"

"감사합니다!"



공연이 시작 되고 선발대로 출근한 여주는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대략 일곱시 정도 될 것 같은데, 자다가 그 때 일어났다고 지성에게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집에 가면서 이번에는 내일 댈 핑계를 떠올렸다. 뭐라고 할까. 아, 우리 오빠를 좀 팔아볼까. 오빠가 본가에 와서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해서 못 만난다고. 전화를 하기도 눈치 보인다고.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여주는 손에 든 아이돌 그룹의 부채를 살살 흔들며 지하철에 올랐다.




12.




핸드폰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 마냥 운동을 하다가도, 집에 오다가도, 씻고 나와서도 핸드폰을 계속 살폈다. 그러나 여주에게 온 연락은 단! 한 통도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수가 있지. 많이 아픈가. 지성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여전히 여주를 걱정했다. 지금 전화 하면 깨겠지. 아직 자는 게 맞겠지. 그래서 자고 있어? 아파? 많이 아파? 따위의 카톡들만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 놓음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아, 뭐야."

- 전화를 받은 거야 만 거야.



여주가 아니라 동네 친구였다. 얘는 왜 갑자기 이런 타이밍에 전화를 하고 난리야.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끊어주라. 단호하게 말하니 친구가 꽤나 서운한 말투로 어떻게 친구한테 그럴 수 있냐고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아, 진짜 나 급한 일 있다고. 조금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하니 그런 일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 나 오늘 지하철에서 네 여친 봤다?

".....뭐?"

- 긴가 민가 했는데 맞더라고. 근데 공연 보고 오느라 힘드신지 꾸벅꾸벅 졸고 있길래 말을 못 걸었다. 야야, 너는 여친이 공연 보러 가는데 데리러 가지도 않고. 면허증 둬서 뭐 할래? 어?



전화를 건 친구는 지성의 친한 동네 친구로 여주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마스크를 써도 여주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친구와의 약속을 마치고 집에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는데 아이돌 그룹의 부채를 들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저 여자. 누가 봐도 지성의 여자친구였다. 가서 아는 척을 하기도 민망했지만 반갑기는 했다.


친구는 당연히 지성이 여자친구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정말 악의는 단 하나도 없이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지성의 반응이 얼떨떨했다. 설....마?


지금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13.



성찬이 잘못 봤을 거라 생각했다. 여주랑 닮은 사람이겠지. 헛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머리를 말렸다. 그러나, 지성의 머릿속에는 이미 여주가 공연장에서 신나게 놀고 집에 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니. 아니야. 여주 말이 우선이지 무슨 정성찬 말을 우선으로 생각해. 여주를 믿어야지.


하지만!

진짜라면...


그러나!

나는 여주를 믿어...


그렇지만!

정성찬이 여주의 얼굴을 기억 못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텐데.


나,

어떡하지?


그 순간 지성의 핸드폰에 🥰애기❤️ 라고 뽀짝하게 저장 된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드디어. 드디어!




14.



"오빠... 나 이제 일어났어..."

- 잘 잤어? 많이 아팠어?

"아휴... 오늘은 좀 그러네..."



완벽하다. 아픈 목소리. 아주 완벽하다. 씻지도 않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여주라고 해서 지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서 품에 폭 안겨서 충전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성은 여주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래, 정성찬이 잘못 본 거네. 우리 여주 집에서 잘 자고 있었구만. 정말 이상한 놈이야. 지성이 배시시 웃으며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꽂고 양말을 신었다.



- 먹고 싶은 거 없어? 지금 사다주려고.

"진짜?"

- 응. 보고 싶은데. 오늘 목소리도 지금 처음 듣고.

"....그러면 나 초코라떼. 아이스."

- 아이스 안 돼. 핫으로.

"그래 그럼. 그리구 미모의 20대 남성 박지성두 함께요."



여주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지성도 양말을 신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긴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 서로의 간지러운 웃음이 퍼졌다. 아,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가야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목소리가 계속 듣고 싶어서 전화를 끊지는 않았다. 응, 나 지금 나왔어. 응응. 천천히 빨리 갈게. 미모의 20대 여성 김여주씨는 따뜻하게 입고 나왔으면 좋겠다. 응. 애기 빨리 보고 싶으니까 최대한 빨리 갈게. 지성은 지금 본인이 제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애기라는 호칭,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다. 으. 오글거려. 그런데 막상 여자친구가 생기니 진짜 애기 같은 걸 어떡하라고. 그렇게 닭살 돋는 애정표현을 하는 커플들이 이해 가는 순간이었다. 핫초코를 사면서도 이어폰을 통해 계속 통화를 했다. 그렇지만 여주는 난감했다.


나 화장 지우고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오빠! 나 엄마가 밖에서 불러서 통화 잠깐만! 도착하면 전화 주라."

- 으응. 알겠어요.



5분 내로 화장 지우고 씻고 아픈 사람처럼 나가기. 여주의 미션이 시작 됐다.




15.


드디어 여주가 눈앞에 보이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멀리서 여주가 달려와 지성의 품에 폭 안겼다. 핫초코가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조심히 한 손으로만 여주의 허리를 꽉 안았다. 그러다가 혹시 허리가 아플까봐 살짝 느슨하게 팔을 풀었다.



"오늘 많이 아팠어?"

"....조금?"

"이렇게 오래 자는 거 처음 봤어. 완전. 기절한 줄 알았잖아. 진짜 기절한 건 아니지?"

"기절은 무슨....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았어."

"지금도?"

"지금은 좀 괜찮아."



지성이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여주의 얼굴을 쓸어 내렸다. 아프다는 사람 치고 얼굴이 멀쩡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괜찮아졌으면 됐지. 여주가 먼저 산책을 하자고 손을 내밀었고 지성은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등을 떠밀었지만 바로 헤어지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는 지성의 손을, 한 손으로는 핫초코를 들고 동네를 느릿느릿 거닐었다. 안 그래도 계속 서서 일을 하느라 당도 떨어지고 힘들었는데 남자친구가 사다준 핫초코를 마시며 산책을 하니 기력 충전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내일도 일찍 일어나서 가야 하는데 벌써 힘들다, 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아, 맞다. 그래서,



"오빠."

"응?"

"나 내일 오랜만에 오빠 집에 온다고 해서."

"아, 그래?"

"그래서 통화도 좀 힘들 것 같구 같이 어디 카페도 가기로 해가지고."

"그렇구나. 알겠어. 오늘 만나서 다행이다."



지성이 코를 찡긋거리며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내 손바닥만한 여주 머리통. 여전히 귀여운 여주. 여주를 보면 아직도 처음 만났던 그 때가 떠오르며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 온다. 저도 모르게 여주의 볼에 쪽 하고 입맞춤을 했다. 귀여워서 어쩔 수가 없다. 여주의 볼이 발그레 하게 달아올라 복숭아처럼 변했다. 20분 정도의 짧은 산책 후 둘은 헤어지기가 싫은지 여주의 집앞에서 손을 붙잡고 또 10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내일 전화 할 수 있을 때 하자."

"응! 내가 걸게."

"조심히 들어가고."

"오빠나 조심히 들어가. 여기 우리집 앞이거든?"



지성이 제 입술을 손으로 톡톡 치자 여주가 쪼르르 달려가 까치발을 들고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이러니까 자꾸 집에 못 들어가는 거다. 그렇게 열 번이나 또 입술을 쪽쪽 대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초코향이 진하게 나도록 아랫입술을 물고서야 보내줬다.




16.


정성찬.... 너 진짜 저주한다. 지성은 성찬에게 카톡을 보내놨다. 별안간 저주 문자를 받은 성찬은 억울했다. 아니! 맞았다니까! 진짜!




17.



"뛰지마시고 천천히 걸어가주세요!"



아, 피곤하다. 고작 하루 한 일이지만 나름 어제 계속 입으로 뱉었던 멘트라고 기계처럼 툭 치면 멘트가 튀어나왔다. 오늘은 그래도 하루 종일 잔다는 핑계는 아니니 중간 중간에 핸드폰을 만지며 지성에게 카톡을 보냈다. 물론 오빠랑 있어서 그렇다는 핑계로 텀이 좀 느리기는 했지만.



"후드티는 시켰어요?"

"저 다음주에 시키려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거 괜찮아요?"

"예쁜데?"



어제 같이 점심을 먹었던 언니들과 또 점심을 먹으며 골라 놓은 후드티를 보여주자 언니들은 본인의 애인에게 선물을 하는 것 처럼 진지하게 투표를 해줬다. 그래서 고르게 된 건 등 뒤에 프린트가 있는 회색 후드티. 이걸 입은 지성을 생각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오빠가 좋아해주면 좋겠다. 아니, 누가 주는 건데 좋아 하겠지. 자신감이 넘치는 연하였다. 그러면 후드티 사고, 케이크 사고, 손편지까지. 꺅. 벌써 기대 된다.



"후드티 훼손 되면, 아니, 팔찌 훼손 되면,"



얼마나 그 생각을 했는지 멘트가 꼬여서 나와버렸다. 그 아무도 본인에게 신경 쓰지 않지만 여주는 민망함에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18.



사랑해 하트하트. 오늘도 여주의 귀여운 카톡으로 힘을 얻은 지성은 습관처럼 헬스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지하게 가벼웠다. 그리고 헬스장에 발을 딛는 순간 저 멀리 너무나도 익숙한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여주의 오빠 도영이었다. 이상하네. 지금 같이 있다고 했는데. 잘못 본 건가 싶어 살짝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확실했다. 자꾸 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런닝머신을 뛰던 도영이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지버튼을 눌렀다. 



"어? 여주 남자친구?"

".....어, 안녕하세요."

"여기 헬스장 다녀요?"

"네. 형님은..."

"아, 나는 오늘 잠깐 일일권. 오늘 여주 만나는 거 아니예요?"

"여주... 오늘 형님 집에 오셔서 집에 있는다고..."

"얘 오늘 아침부터 나갔는데?"



도영이 수건으로 톡톡 땀을 닦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어제 새벽에 집에 도착한 도영은 아침에 우당탕 거리며 집을 나서는 여주의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이 아침부터 어딜 가나, 데이트를 하러 가는 건가 싶었는데 데이트를 해야 할 상대가 헬스장에 있으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성은 당황하지 않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오늘 약속 있다고 그러던데...."

"그렇구나. 무튼 여기서 만나니까 반갑다."



도영이 열심히 하라며 지성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지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런닝머신으로 올라가 조금은 느린 속도로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여주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오늘 분명히 집에만 있는다고, 그래서 연락을 못 한다고 그랬는데. 왜? 왜 거짓말을 했지? 게다가 지금 집에 없다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면 어제 정성찬이 본 게 정말 여주가 맞는 걸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헤집었다. 속도를 점점 올려 숨이 턱 끝까지 찰 때까지 뛰었다. 어떡해야 하지.



19.



이상하네. 지성에게 연락이 없다. 오빠 뭐해? 먼저 카톡을 보내도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나? 아니면 운동 하나. 그러기에는 텀이 좀 길었다. 그 사이 또 여주의 퇴근시간이 다가왔고 하루만에 정이 든 언니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금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 뿌듯하다. 이제 선물만 구매하면 완벽하다. 어제와 똑같이 아이돌 그룹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그려져 있는 부채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나름 하루 들었다고 익숙해진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흥얼 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 돈 벌게 해줬으니까 나도 노래 좀 들어준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을 때,



"....오빠야?"

"여주야. 너, 왜."



초조한 표정으로 제 집 앞에 서있는 지성을 발견한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걸어 오던 발걸음이 순식간에 멈춰 버린다.



20.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아파트 벤치에 앉았다. 지성은 여주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고 여주는 안절부절 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헬스장에서 도영을 마주친 지성은 운동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운동을 해서는 다칠지도 모르는 지경이었다. 땀을 얼마 흘리지도 않고 집에 와서 일단 샤워를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여주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왜, 굳이. 사귀면서 한 번도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본인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고 여주 또한 그랬을 거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성찬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함께 있다고 했던 친오빠인 도영까지 마주쳤으니 말이다.


지성은 그래도 여주를 마주치기 전 까지 성찬의 말은 백프로 믿지 않았다. 닮은 사람을 본 거겠지. 하지만 여주의 손에 들려있는 부채를 보고 그제야 확신했다. 성찬이 봤다던 그 애가 여주가 맞구나. 여주의 손에는 아이돌 그룹의 부채가 들려져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여주가 부채를 살포시 내려 놓았다.



"여주야. 왜 거짓말 했는지 알려주면 안 돼?"



말하면서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지성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고 여주는 그게 아니라며 입술을 계속 깨물었다. 그 와중에 그게 신경이 쓰여서 엄지손가락으로 여주의 입술을 살짝 쓸었다. 피 난다.



"어제 성찬이가 널 봤다고 그러더라. 지하철에서."

"......"

"저 그룹 콘서트 다녀온 거야? 어제도, 오늘도?"

"......"

".....근데 왜 거짓말까지 하고?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았어?"



만일 여주가 흔히 말하는 '덕질' 을 한다고 한들 상관 없었다. 그건 본인의 자유고 본인의 취미생활이니까. 그리고 여주 또한 그런 본인의 성향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굳이 거짓말을 하면서 까지 갔을까. 그게 너무나도 서운했다.



"나는 네가 그 곳에 갔다는 게 서운한 게 아니라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게 서운한 거야. 나는 어제 하루종일 네 걱정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오늘도 그랬어. 너는.... 내 생각이 하나도 안 났어?"

"오빠, 그게 아니라,"


".....우리 거짓말은 진짜 안 하기로 했잖아."



오빠가 화가 났다.



21.



1년 동안 사귀면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귀엽게 삐치는 수준이었지 이렇게 지성이 정색 하며 진지하게 말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단 말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졌고 애써 웃으면서 말하려고 하지만 자꾸만 굳어가는 표정이 무서웠다. 순간 왈칵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 게, 아닌데, 내가, 거짓말,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울지 말고."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다정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물론 서운하고 화도 조금은 났지만 여기서 실망 했으니까 이야기 하기 싫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이유를 들어야만 했고 납득 후 화해를 해야만 했다. 여주가 우느라 말을 하지 못하자 마음이 약해진 지성이 팔을 뻗어 품에 여주를 안았다. 내가 너무 무섭게 이야기 했나. 본인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조금 울음이 그친 여주가 엉망이 된 얼굴을 대충 닦고서 입을 열었다.



".....콘서트 간 거 아니구."

"아니고."

".....아르바이트."

"뭐?"

"콘서트 진행 아르바이트 하고 왔다고...."



엥. 지성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바이트? 알바? 일? 그걸 하고 왔다고? 여주의 모습을 대충 보니 검은색 롱패딩에 검은색 추리닝에 검은색 양말에 검은색 운동화. 시꺼멓기 그지 없었다. 이렇게 입고 아침에 나가서 일을 하고 왔다고? 근데,



"....근데 그걸 왜 거짓말을 하고 다녀 온 거야? 내가 이해가 안 돼서...."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을 하는 것도 본인의 자유니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닌 이상 말릴 생각도 없다. 본인이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자 여주가 입술을 삐쭉 거리고 발로 바닥을 콩콩 치면서 자꾸 대답을 미뤘다. 그 와중에 저 모습이 귀여워 보이면 안 되는데. 벌써 화가 풀린 것만 같다. 웃음을 꾹 참고 여주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게...."

"응. 그게."

"그게 말이야...."

"으응."



점점 애를 달래주는 행색이 되어간다.



"....오빠 생일 때문에."

"뭐, 뭐라고?"



달래주던 손짓이 멈췄다.




22.



여주의 이야기를 들은 지성은 이마를 퍽 하고 짚었다. 그러니까, 내 생일이 곧이라서 선물을 사주고 싶어서 비밀로 알바를 하러 갔다고. 아, 진짜.... 이 애기를 어떡하지. 옆에서 여주가 다, 망, 했,어, 히끅 거리더니 눈물을 퐁퐁 쏟아냈다. 나름 서프라이즈로 하려고 그런 건데. 나는 그냥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잖아.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여주야, 울지 말고,"

"망, 했어. 오빠 선물 주려고, 그래서 그런 건데, 거짓말 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깜짝 선물 해주려고,"

"아, 알겠어. 내가 미안해. 어?"

"오빠는 또 뭐가 미안한데!"



서로 미안할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지성은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응. 내가 서프라이즈를 망쳐버렸구나. 그러면서도 그걸 계획 한 여주가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아주 골때리기도 해서 우는 여자친구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왜, 웃, 는, 데, 문장이 이어지지 않고 스타카토처럼 뚝뚝 끊겼다. 저도 모르게 여주를 와락 껴안았다. 지금 나오는 웃음은 앞서 말한 감정들도 있었지만 다행이다, 라는 감정도 있었다. 


여주가 나쁜 의도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혹시라도 저를 믿지 못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걸까봐 걱정했다. 내가 너에게 믿음직스러운 남자친구가 아닐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님에 모든 걱정과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화사해진 마음에 몽글 거리는 사랑만 피어 올랐다. 여주는 여전히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코를 훌쩍 거렸다.



"나, 의심 했어?"

"어제는 정성찬이 널 봤다고 하고, 오늘은 헬스장에서 형님 마주쳤어."

"....도움 되는 게 하나두 없었네."

"여주야."

"응."

"나 뭐 생일선물 그런 거 엄청 필요하고 그러지 않아. 왜 힘들게 일 해가지구 뭘 주려고 그랬어."

".....좋은 거 주고 싶으니까."



제일 좋은 게 눈앞에 있는데. 하, 나 진짜 느끼하다. 지성은 요새 자꾸만 주접을 떠는 제 모습이 느끼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찡그렸다. 지성은 여주의 다리를 제 다리 위로 올리고 눈치를 보며 종아리를 아프지 않게 주물러줬다.



"서서 일 했어?"

"응. 다리 아팠어."

"일 하는 건 네 마음인데, 너무 힘든 일은 하지 마. 알겠어?"

"안 힘들었어."

"계속 서서 일 하면 힘들잖아."

"으응."

"그래도 재밌었어?"

"거기 만난 언니들이 되게 착했어."

"저 부채에 있는 아이돌 그룹 콘서트였어?"

"으응. 근데 오빠가 더 잘생겼어."



여주가 부은 눈으로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기 커플의 싸움은 물 베기라고. 사소한 이유로 다투고 가볍게 화해를 한다. 그저 좋아하고 사랑할 시간도 모자랐다. 둘은 그렇게 또 한 시간 동안 벤치에 앉아 다리를 주물러주고 어깨를 주물러주고 볼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면서 진한 화해를 주고 받았다.




23.



"야. 후드티 쫌 예쁘다?"

"아, 형. 보는 눈이 좀 있네요."

"정보 좀."

"싫어요."

".....뭐냐."



동혁이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지성을 바라봤다. 뭐냐 그 인스타 카페 사장 같은 대답은. 칵씨. 지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주가 사준 거라서요."



누가 사줬는지 요렇게 딱 맞을 수가. 지성이 보석을 다루듯 팔을 가볍게 툭툭 털었다. 자꾸 서프라이즈를 망쳤다고 징징 댔지만 받는 선물은 뭔지 모르니까 본인에게는 아직 서프라이즈라고 말하니 여주는 또 단순하게 그런 거냐며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서프라이즈 선물."

"어때? 완전 필요 했지?"

"응. 완전."



지성이 팔을 내밀었고 여주가 쪼르르 앞으로 와서 품에 폭 안겼다. 여태 보낸 생일 중에 제일 제일 행복해. 여자친구에게 처음 받는 손편지도 좋았고 그게 여주라서 더 좋았다. 사실 편지를 보다가 살짝 눈물을 흘렸다고는 창피해서 말하지 않았다. 지성은 옷을 아끼겠다고 잘 입지 않았지만 여주는 그러다가 똥 된다며 입을 수 있을 때 자주 입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여주가 준 후드티는 지성의 호크룩스가 된 수준이었다.



"누우가 준 건지, 아주 잘 어울리세요."

"그러게요. 아주 안목이 좋으세요."



여주는 늘 어깨를 으스대며 뿌듯해 했다.



24.


그 모습이 귀여워서 우연히 여주의 핸드폰 검색 목록을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흠.......

지성이 생일이라 뭐가 올리고는 싶고..... 근데 너무 급하게 써서 진짜 내용도, 문체도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별로인데 일단 지성이 생일이니까.... 올려 둘게요.....


소소하고 미지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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