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우리의 휴일이 겹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점심 즈음 일어났을 땐, 너는 언제나처럼 커피를 내려둔 채 소파에 앉아 조용히 TV를 보고 있었다. 커피 잔을 들고 그 옆에 앉으면 너는 가장 어울린다는 이유로 내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주고, 나와 함께 올리브가 가득 든 빵에 각종 과일로 만든 잼을 발라 먹었다. 식사가 끝날 때 즈음 너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 무의미하게 켜져 있던 TV를 꺼버리고는 항상 하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익숙한 주제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기꺼이 너의 토론에 응했다.

 무화과 쿠키와 커피 몇 잔이 더 오가고 내가 포트에 남은 커피를 컵에 따르고 있을 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모든 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을 향해 간다면 우린 언제쯤 끝이 다가오는지를 알 수 있을까?

 그 때, 마치 그 말을 실현해준다는 듯 세상이 크게 울리더니 우리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뒤흔들렸다. 원인 모를 지진에 마지막 커피가 내 옷으로 쏟아지고 너는 소파에서 굴러 떨어져 온 몸을 크게 부딪쳤다. 화상으로 빨갛게 물집이 잡힌 내 팔은 고통도 모른 채 너를 일으켜 세우고, 깨진 컵 조각들이 박힌 내 발은 천장이 갈라지고 있는 거실에서 벗어나려 뒷문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기도 전 부터, 저 멀리에서는 끔찍한 폭발음과 뿔족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알 수 없는 생명체의 기묘한 괴성도 뒤를 이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차피 집에 남아 있어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문을 열고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누군가는 땅바닥에 쓰러져 살려달라며 소리 지르고, 누군가는 검을 든 채 괴이하게 변이 된 인간을 죽이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가족을 끌어안은 채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의무를 행하기 위해 본부로 향하는 우리의 눈앞에 온 몸이 찢겨진 뿔족이 뚝 떨어졌다. 너는 곧장 그 뿔족을 구하려 팔을 뻗었고, 나는 그런 너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가지 말라는 의미로.

 그리고는 우리의 머리 위로 무너진 건물 더미들이 쏟아졌다.


 그 후에 기억하는 건 오직 이것뿐이었다. 머리가 회복되어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뿔족이었다면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였다. 모두의 시선 끝, 유달리 화창했던 4월의 푸른 하늘까지 닿은, 짙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곳.

 스트라테이아의 모든 것, 역사의 중심, 우리의 신(神).

 국가 정중앙에 있는 올리브 나무가 죽음의 비명을 외치고 잿빛 절망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걸 본 순간,

 우리는 끝나지 않을 전쟁을 하게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스트라테이아

Strateia



1. 불청객(1)



 하연은 가만히 서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높은 지대에 올라온 거였지만, 원하는 만큼 멀리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시선을 저 멀리로 뻗어본다. 흐릿한 안개와 흩뿌려진 크림색의 구름들 사이로 움직이는 것을 찾았다. 움직이고, 이동하고, 그래서 결국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무언가를. 하지만 그런 '것'을 찾기도 전에 뒤편에서 소집을 의미하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퍼졌다. 하연은 즉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군들 저 소리를 좋아하겠냐만은, 하연은 유달리 싫어했다. 귓가에 웽하고 파고드는 바늘 같은 소리가 진짜로 구석구석을 찌르기라도 하는지 온 몸이 아팠다. 

 경보음이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기지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감람색 군복을 입은 군인 한 명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대령님!!!"

 군인은 하연의 앞, 두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우뚝 멈춰 섰다. 높은 언덕길을 급히 뛰어올라왔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조금이라도 늦게 움직였다고 바로 찾으러 올 줄이야. 하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알겠어. 갈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30분 전쯤, 두르와 아텐 구역 사이에서 움직임이 발견됐습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났어요."

 언덕길을 내려가던 하연이 군인의 긴급한 설명에 멈칫했다. 

 "정확히 어딘데? 괴물인가?"

 "아텐 4-5 구역의 어떤 건물인데, 움직임이 감지되자마자 그 건물이 무너져버렸고 이후로는 신호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부대 애들 몇 명을 보내놓긴 했습니다."

 4-5구역. 하필 올리브 나무 근처다. 요즘은 그쪽에 괴물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연은 최근에 아텐에서 경계하던 일부 군인들을 마하 구역으로 이동시킨 걸 조금 후회했다. 더 이상 올리브 나무에 손상은 없을 거란 안일한 판단이 이렇게 빨리 불안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괴물도 사람도 아닌, 그래, 차라리 동물이었으면 좋겠군. 내가 직접 가볼게. 대위는 소집에 가봐."



 수도인 아텐의 동쪽에 있는 4-5구역은 고급 주택들이 많은 곳이었다. 일명, 부유한 뿔족만이 산다는 부자 동네. 하지만 3년 전 전쟁이 터지고, 아텐으로 침입하던 괴물을 간신히 막아냈을 때,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그곳에 살던 모든 뿔족들은 서쪽으로 피난간지 오래였다. 한 때는 잠시 군사기지로 쓰기도 했지만, 이젠 완전히 텅 비어버린 채 방치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못한 전쟁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 시간에 먹히며 천천히 부식되고 있는 건물들 사이, 어색할 정도로 텅 비어있는 곳이 있었다. 하연이 기억하는 바로는 분명 3층 정도의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큰 폭발이 있기라도 했는지, 완전히 무너져 그저 돌 더미만 남아있었다.

 하연이 타고 있던 군용차가 붕괴된 바로 그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대령님, 아테니케의..."

 차문을 열어주는 군인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하연은 벌써 차에서 내려 잔해들을 치우고 있는 뿔족들에게 다가갔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위해 천천히 오른손을 이마 가까이로 올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연이 말을 걸었다.

 "뭔가 발견됐나?"

 몸을 구부린 채 손에 들린 큼지막한 시멘트 덩어리를 옆으로 던진 한 뿔족이 돌 더미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하연도 그 무언가를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건 검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사람의 발목이었다. 처음엔 잘린 시체 조각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다리도 제대로 붙어있다.

 "괴물은 아니고, 사람 같습니다."

 "신발을 신고 있으니까 사람이라는 거야? 꽤 합리적인 생각인 걸..."

 그렇게 중얼거린 또 다른 뿔족이 돌 틈 사이 끼어있는 다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는 힘껏 잡아당기자, 길쭉한 무언가가 이끌려 나왔다.

 흙과 돌가루로 뒤덮여 회색 빛깔이 되어버린 그건 분명 온전한 사람의 형체를 띄고 있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에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자, 하연은 곧장이라도 검을 뽑으려 이마에 올려두었던 손을 내렸다. 대신 그 사람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워냈다.

 올리브 나무 모양은 없었다. 뿔족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번엔 손목을 살짝 들어 올려 안쪽을 확인해봤다. 아무 표식도 없다. 다시 얼굴로 돌아와 뺨을 톡톡 치자, 그 사람이 옅은 기침을 하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제야 하연은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 살아 있군. 일단 데려가 보자."





 두 팔을 들어 올려 묶여있는 머리를 다시 꽉 고정시켰다. 아래로 흐르듯 떨어진 손이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돌려버렸다.

 병실 문이 활짝 열리며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야! 죽을 뻔 했는데, 구해줘서 고마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기 상황이 안 좋더라. 너네 엄청 고생중이구나?"

 침대에서 몸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거에 비해,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활짝 웃고 있는 얼굴. 게다가 뻔뻔하게 반말로 말을 걸어오는 모습.

 분명 쓰고 있는 코레브어는 존칭이 있는 언어일 텐데. 최대한 티를 안내려고 해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연은 예의가 없는 사람을 특히나 싫어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침대 앞에 서서 상대에게 말했다.

 "어떻게 그 구역에 들어갔습니까? 그곳은 봉쇄 구역이었는데."

 "아, 그거. 내가 알고 있던 지도랑 많이 바뀌었더라. 시작점을 잘못 잡아버린 거지. 그래서 이상한 틈에 '복귀'해버린 거야. 위에서 뭔가 부서지면서 등을 강하게 부딪친 느낌 이후로는 기억이 없어! 아마 기절했었나봐.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면서? 혹시 중요한 건물이었어? 그랬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가 살긴 했으니까!"

 하연은 말할 틈을 안 줄 정도로 조잘거리는 상대를 바라봤다.

 짙은 피부와는 대비되는 상당히 밝은 진홍색의 눈동자.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엉망으로 흐트러진 짧은 생머리. 이 신(神) 세계에서, 이런 외모를 지닌 건 흑조인 뿐이었다. 흑조인인지 확신하기 위해 상대의 오른손을 확인했지만 하필 약지와 소지가 없었다.

 어쩌다가 손가락을 잃은 걸까 생각하면서 하연은 상대가 말을 끝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너네, 그러니까 스트라테이아 관광 지도 말야. 그거 언제 업데이트 된 거야? 내가 본 지도는 분명 거기에 건물이 없었다고. 새로 지은 거라면 지도도 새로 그려서 배포했어야지! 아무리 너네가 관광업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런 건 기본이라고. 시작점에 뭔가가 있으면 복귀되려는 대상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방해되는 것들은 붕괴되어버리거든."

 한참을 기다리게 생겼으니 하연은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차트를 들어 펼쳤다. 말 많은 상대를 대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언젠가 끝나기는 하니까 귀로는 들으면서 눈으로는 다른 할 일을 찾는다.

 차트에는 이 불청객에 대한 부상 상태와 신체 정보가 적혀 있었다. 키와 몸무게, 혈액형과 여러 신체적 특징 등등. 특히 손가락이 깔끔하게 잘린 채 아물어있다는 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연과 똑같은 고민을 했는지 의사가 대충 휘갈겨놓은 '흑조인 일까?' 라는 문구도 보였다.

 "물론 너네가 전쟁을 3년째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래서 나도 나름 안전한 곳을 골라서 복귀한 건데, 죽음으로 복귀할 뻔 했다니까? 내 능력으로 죽어버리면 엄청 망신이잖아!"

 그러고 보니 거슬릴 정도로 계속 들리는 '복귀'라는 단어와 '내 능력'이라는 표현. 너무 뻔한 예측 같지만 이 사람은 능력자 같다. 그것도 자신이 능력자라는 티를 내는 걸 좋아하는 능력자.

 그런 결론에 도출하자 하연은 내심 복잡해졌다. 기피할 사항을 제일 먼저 내세우는 사람치고 좋은 의도를 가진 걸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래도 섣불리 확신하기에는 이르니 정보를 더 캐보기로 한다.

 "그나저나, 네가 나를 구해준거야?"

 드디어 말할 기회를 얻은 하연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가장 원하던 주제를 꺼냈다. 

 "소속과 이름 말해주시죠."

 선명하게 반짝이던 진홍빛 눈동자에 실망이 가득 담겼다. 삐뚤어진 입가에서도 툴툴거림이 새어나왔다.

 "아~ 재미없네. 진지한 이야기나 하자 이거야? 어휴, 알겠어. KIPE 특수부서 소속 능력자 영 이야."

 역시나. 그렇게 생각하며 하연은 질문을 이어나간다.

 "KIPE 소속이면 능력자인가요?"

 "맞아. 내 능력은 '복귀'야. 시작으로 모든 것을 복귀시킬 수 있지. 스트라테이아는 능력자 데이터를 조회할 수 있는 국가니까, 대충 들어는 봤을 걸? 내가 어엄청 유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능력 정도는 꽤 알려져 있다고 자신할 수 있지."

 아무래도 이 능력자는 자기소개만 하면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안타깝게도 하연은 모든 능력자들의 신상을 외우고 다니는 뿔족은 아니었다. 자신만만한 이 사람의 세부 정보는 나중에 검색해보기로 하고, 대신 차트의 공백들을 채워 놓는다. 이름과 소속, 그리고 능력자라는 것. 국적도 물어보고 싶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하연이 그 짧은 내용을 적는 사이에 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야, 너를 만났으니 하는 이야긴데..."

 이제는 불청객의 수다를 적당히 끊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연은 일부러 소리가 날 정도로 차트를 탁 닫았다.

 "조잘조잘. 말도 참 많습니다."

 "이잉."

 "...... 제가 당신의 편의를 이 이상 봐줘야 할 이유를 말해보시죠."

 "없지. 애초부터 나는 네가 높은 직급 같아서 이러는 거야. 좀 친해지고 싶어서."

 만난지 한 시간도 안 되었건만, 하연은 이렇게까지 대화하기 싫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보다도 영이 더 싫어졌다는 건 굳이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다.

 영은 이런 하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이죽거리는 중 이었다.

 "내가 여기서 할 일이 있거든."

 "KIPE에게 전달받은 사항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님, 전달할 것이 있어서 오신 겁니까?"

 그렇게 묻긴 했어도 하연은 KIPE가 영에게 뭔가를 전달하라고 업무를 지시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영은 확실히 신뢰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었다.

 "대충 비밀 업무라고 해둘게!"

 영이 찡긋 윙크를 했다.

 대충? KIPE는 절대로 일을 '대충'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존재에 대한 입증과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이 얽혀있으니까. 소속이 있으니 탈주 능력자는 아니겠지만, 업무는 이탈한 것 같은 이 유별난 능력자에 대해 KIPE에 알려야함은 변함없는 것 같았다.

 "솔직한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일단 알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아직 몇 가지 검사가 더 남아있으니까요. 곧 의사가 올 겁니다."

 자신의 말이 끝나기 전부터 조잘거릴 준비를 하는 영 때문에 하연은 얼른 병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에게 차트를 넘기며 왼손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의 화면을 몇 번 꾹꾹 눌렀다. 본부에서 호출을 받았다는 작은 신호음이 울리자, 하연은 시계를 입 가까이로 가져가 조용히 속삭였다.

 "불법입국자, 그것도 능력자가 있다고 KIPE에 알려. 특수부서 소속 능력자, 영 이라고 하더군. 현재 아텐 2-10구역 국군 병원에서 감시 중이다."

 "잠깐! 이봐! 이러는 게 어딨어!!"

 그 와중에 이건 들을 줄이야. 하연은 영이 귀가 밝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잠시 고민하면서 뒤를 돌았다. 분명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어야 할 영은 어느 샌가 맨발로 병실 앞에 서 있다.

 "이건 아니지! 내가 할 일이 있다니까? 비밀 업무라고 했잖아!"

 "이곳은 상시 전시 상황입니다. 어떤 것도 비밀로 남겨둘 수 없죠. 특히 수상한 자가 건물까지 무너뜨리며 나타났다면 더욱이."

 영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렇다고 말하는 걸 멈추진 않았다.

 "좋아, 솔직하게 말할게. 대신 KIPE에만 알리지 말아줘. 그들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거 몰라. 하라는 일도 다 미뤄두고 온 거라고."

 "일단 듣고 나서 판단하겠습니다."

 하연은 시계에 달린 푸른 버튼을 두 번 연속으로 눌렀다. 방금 전 지시에 대해 대기 하라는 신호였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차분히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동안 영은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가 싶더니 잘근잘근 깨물던 입술을 간신히 떼어냈다. 지금까지의 거들먹거리던 모습은 마치 연기였다는 듯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그 밝은 진홍색 눈동자를 곧게 하연에게로 향한 채, 영이 말했다.

 "약속을 했어. 친구의 시작점을 찾아주기로."


언제나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어요.

두솔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