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제약회사의 사장 부부는 범죄를 저지르고 아동학대 한 혐의로 10년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치고 적은 형량이라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지금까지 사회에 일으킨 이로운 영향도 있었고 높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뒷배가 그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10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왔으나 놀랍게도 일주일 후, 그 부부의 사망 소식이 다시 매체로 전파되었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되며 높은 산 절벽에서 뛰어내려 동반 자살했다고 한다.


전문가는 사고나 타살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으며 유서나 다른 흔적을 볼 때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한 게 아닌가 라는 의견이 뉴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다원은 딸기잼을 바른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그런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에 나오는 저 부부가 은하의 친부모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은하는 즐거운 듯 콧소리를 내며 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접시에 가득 올려 식탁 위에 내놓았다.



“다원아 빵 더 먹을래?”



은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원은 쌓여있는 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하야, 나 이렇게나 못 먹는데.”


“하하 그래? 그래도 이 정도는 먹어야지. 다원이는 먹는 양이 너무 적으니까 더 먹도록 해.”



은하는 다원과 마주 보고 앉아서 빵을 하나 집고 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 그런가. 아무튼 고마워. 잘 먹을게.”



다원은 빵을 하나 더 집어서 한 입을 먹고 두 입째 먹었다.



“그런데 은하야 요즘 무슨 일 있어?”


“응?”



은하는 눈이 굳었지만, 입가에 떠나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다원을 바라봤다.



“왜?”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지?”



다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좋은 일이 아니라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은하는 할 수 있는 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요즘은 좋은 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아 저번에 모의고사 때 국어 주관식 문제 틀린 거로 처리된 일은 좀 짜증 나긴 했어.”


“그랬구나.”


“아 그리고 얼마 전에 우리 이불을 폭신한 거로 바꿨잖아. 덕분에 잠도 잘 오고...”



다원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은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오붓하게 아침을 먹고 은하는 다원에게 빗질을 받았다. 매일 아침 다원은 은하의 머리를 관리해주는 것은 이제 버릇이 들었다.


은하는 오늘 주번이기 때문에 다원보다 먼저 집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가면서 뽀뽀는 빼놓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없는 모습을 어필하듯.


은하가 나가고 다원은 먹은 접시를 치우고 설거지하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은하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구나.


2학년이 되면 선택과목이 생기니까 같은 과목을 고르면 같은 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은하는 이과고 자신은 문과니까 역시 안 되겠지 싶어 한숨이 나왔다.


최근에 은하에 대해 돌이켜보았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은하는 혼자 다니는 일이 많았다. 중학생 때와 인상이 확연히 달랐다. 중학생 때는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학생들의 중심이었다고 하면 지금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생 시절보다 적응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공부에만 집중할 생각인 건지 현재 다원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은하가 요즘 무리해서 억지로 웃으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 심해졌다. 언제 은하와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해볼 필요를 느꼈다.



‘그래. 선물을 주면서 조금씩 대화해보자.’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잠그고 손을 닦은 후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 안에 숨겨둔 상자를 확인했다. 안에는 은하수가 연상되는 무수한 별 문양 자수가 들어간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물론 손수 만든 것이다.


요즘 날도 추워졌고 다원은 얼른 우리의 첫 만남 기념일이 다가오길 기대했다. 이걸로 은하가 기운을 차릴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한편, 은하는 이른 시간에 등교하여 인적이 드문 길을 걸었다. 현기증이 난 것처럼 휘청거리더니 골목 전봇대에 선 채로 기대고 말았다.


표정 관리가 안 돼서 험악한 표정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잘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지친 숨소리를 내며 땀을 흘렸다. 잠시 기분이 진정될 때까지 이대로 기대기로 했다.


은하는 감옥에서 나온 부모를 계획적으로 죽였다.


자기 손으로 한 건 아니었고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어떤 범죄조직과 접촉하여 조직이 원하는 정보를 해킹하고 전달하는 식으로 단기알바 같은 조력자 역할을 자처하여 돈을 벌어왔다. 해킹은 독학으로 익혔고 노트북은 직접 개조해서 사용했다.


조직은 은하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으며 마음에 들었는지 은하의 부탁에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할 수 있게 도와줬다.


살인청부업자라고 해도 영화에 나온 것처럼 저격수가 목표물을 명중하는 방식은 아니었고 교묘하게 우연을 가장하여 사고를 일으키게 하거나 자살로 꾸며내서 죽이는 전문가였다. 치안이 좋은 나라는 장비를 갖춘 암살을 시도하면 어떻게든 증거가 남아 까다롭기 때문에 부패한 경찰을 이용하거나 사고로 위장 시켜 죽이는 것이 안전하다고 한다.


은하의 부모가 감옥에 있는 동안 은하에 대한 살의로 가득 차 있다면 은하에게 어떤 방법이든 써서 복수해올지 몰랐다. 당시 은하는 한참 어렸기 때문에 방심했겠지만, 지금은 은하의 본성을 잘 알고 있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기에 어떤 수를 써서든, 은하에게 접근해 올 게 뻔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부자연스럽다고 하더라도 빠르게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는 게 은하의 생각이었다. 은하의 계획대로 살인청부업자는 약속한 날에 동반 자살로 위장하여 부부를 처리했다.


오랫동안 응어리진 목숨을 위협해올지도 몰랐던 존재를 이렇게 쉽게 죽여버렸다. 긴장한 마음은 완전히 풀어져서 참으로 허무했다. 마음이 공허해졌다. 그다지 좋은 기분도 아니고 딱히 즐겁지도 않았다. 그냥 속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은하는 더욱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다원은 은하의 억지웃음을 알아본 모양이다.



‘아직 멀었네, 나.’



은하는 복잡한 마음을 바로잡고 전봇대의 기댄 몸을 일으키고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표정을 다시 부드럽게 만들었다.


큰 고비를 넘어선 건 다행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뒷세계의 인간들과 많은 접촉을 해버린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발을 들여버린 이상 손 떼기가 쉽지 않은 게 이 업계다. 일단은 그들에게 내 정체나 위치가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은하를 원한다는 낌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예전처럼 눈에 띄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고 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지만 그 사태까지는 가지 않길 바랐다.


은하는 살아남기 위해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며칠 뒤, 은하의 예상대로 조직은 은하를 집요하게 추적하기 시작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수상한 외국인들이 가끔 눈에 띄곤 했다. 그들이 예상보다 빨리 은하가 사는 동네까지 도달했다.


은하는 긴장 상태 속에서 평소처럼 생활하며 아무렇지 않은 연기를 했다.


그날은 은하와 다원이 장을 보던 날이었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은하는 슬슬 속에서 불안감이 덮쳐오고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납치당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섰다.



“은하야, 괜찮아?”


“어?”



다원이 은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을 걸었다.



“땀이 나는 것 같아서...”



다원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땀이 나는 건 부자연스러워서 어디 아픈 게 아닐까하고 걱정스럽게 은하를 바라보았다. 은하에게 이런 모습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고마워.”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은하는 갑자기 다원을 와락 껴안았다. 다원은 깜짝 놀라서 장 봐온 짐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으, 은하야 왜 그래?”


“다원아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거 알지?”


“...응 당연하지. 나도야.”



다원은 은하의 포옹을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사실 밖에서 너무 눈에 띄는 스킨쉽은 하지 않기로 서로 정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케이스로 치기로 했다.



“은하야 왜 그래? 역시 어디 아파?”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은하가 아무 말 않자 다원은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있지. 나 요즘 은하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



은하는 아무 감정 없이 다원을 쳐다보기만 했다. 다원은 은하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도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한 일투성이일 거야. 나도 불안한 게 많아서 우리 서로 담아둔 얘기를 나누고 싶어. 말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겠지만 조금은 응어리가 풀릴지도 모르잖아.”


“...그러네. 다원이 말이 맞을지도 몰라.”


“응.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은하가 자신의 말을 이해해준 것 같아서 다원은 환하게 웃었다. 은하는 다원과 마주 보며 미소로 답해주었지만, 눈에 힘이 없었다. 은하는 그런 표정을 숨기려고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다원아 먼저 집에 가 있을래?”


“어?”


“나 깜빡하고 사지 못한 게 있었는데 그게 지금 생각났어.”


“아아 그랬구나.”


“응. 돌아가면 전부 얘기하자, 걱정거리들.”



이번에는 완벽한 미소를 연기했고 다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러면.”


“응... 이따가 보자.”



손을 흔들어 보이고 둘은 나뉘어가 각자의 길을 갔다.


다원은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은하가 돌아오면 바로 목도리를 선물할 생각이었다.


은하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골목을 돌아가서 마트가 아닌 다른 길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간 다원은 기념일 준비를 마치고 은하가 올 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부터— 다시는 그 집으로 은하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은하가 사라지고 1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다원은 홀로 고등학생 2학년이 되었다.


다원은 선생님에게 불려서 교무실에 와 있었다.



“...다원아 괜찮니?”


“네.”



선생님은 다원의 상태를 살피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원은 그런 질문은 이제 익숙해서 바로 대답했다. 다원의 표정은 생기가 없었고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급식비는 학교에서 지원해주기로 했단다. 신청서 꼭 제출해주렴.”


“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거지? 잠은 잘 자고?”


“...네.”



다원은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밤이 늘어만 갔다. 선생님도 다원의 사정을 알고 점점 생활이 엉망진창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럼...”



다원은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4층 건물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죽고 싶다.’



그날 은하가 사라지고 갖은 노력을 다 해왔지만, 은하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은하를 찾느라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다니던 알바에서 잘렸다. 생활고는 점점 힘들어졌고 집주인은 밀린 월세를 달라고 재촉해왔다. 이제 곧 길바닥으로 나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무엇보다 힘든 건 은하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다원은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은하를 찾는 포스터만이 방에 난장판으로 널려있었다.


어째서 나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은 전부 눈앞에서 없어져 버리는 걸까.


부모님도, 보육원의 친구들과 선생님, 이제는 한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던 은하 너마저...


다원은 은하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던 목도리를 손에 쥐고 괴로워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물을 흘려왔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은하와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떨어져서 지내면 힘들었고 보고 싶어서 슬퍼지고 만다. 이렇게 오랜 기간 떨어져 본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다원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예전에 은하가 한 질문이 떠올랐다.



‘다원아 너는 내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어?’


“없어! 할 수 없어! 네가 없으면 나 이제 더 이상 사는 게 아니야!”



다원은 마치 누군가에게 분노를 표출하듯이 허공에 외쳤다. 다원의 주변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다원의 마음은 텅 비어서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다원은 또다시 무작정 은하를 찾기 위해 밖을 나섰다.


은하야 어디에 있는 거야? 살아 있는 거야? 아픈 경험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 테니까 무사하다고 대답해 줘. 나 너의 얼굴이 보고 싶어. 목소리가 듣고 싶어. 너의 냄새가 그리워.


후회와 미련, 걱정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서 다원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걸어가다가 다원은 강가의 다리 위에 섰다. 최근에는 여기서 괴로운 나머지 몇 번이나 뛰어내렸다. 다원의 손목에도 여러 번 그은 자국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사라져버리면 어찌해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원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역시 사는 건 의미가 없어.’



그렇게 다원은 점점 죽음을 꿈꾸게 되었다.


곰말리입니다. 백합 작품(GL 작품)을 보는 것도 정말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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