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흐릿했다. 짙은 안개가 낀 듯,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녹음으로 숲일까, 추측만 겨우 할 수 있었다.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분명히 언젠가 보았던……. 멈춰 서서 더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군가 제 손을 꽉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크고, 뜨거운 손이었다. 좋게라도 부드럽다거나, 감촉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손. 분명 어디서 잡아본 적 있는데. 생각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폐가 아파올 정도로 달리면서도 배세진은 생각했다. 내가 이걸 어디서 봤지? 왜 뛰고 있는 거지? 이 사람은 누구지?

누군지 보면 되잖아. 우습게도 뒤늦게 든 생각에 그제야 옆을 돌아보았다. 제 손을 붙잡은 큰 손 위로 쭉 뻗은 팔이 보였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정작 가장 중요한 얼굴 위로는 새까맣게 칠이 되어 흐릿하게라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뭐라 말을 하는데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뭔가 들리기는 했다. 옆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라 위에서 들려와서 그렇지.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졌다. 어렴풋한 숲도, 정체 모를 사람도 온데간데없었다. 새하얀 천장과 그 아래의 두 사람이 전부였다. 마치 누워있는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선아현과 박문대가 있었다.

 

- 오, 오래 주무시네……. 많이 다, 다치신 거야?

- 현장에 나간 것도 아닌데 다칠 게 뭐가 있겠어. 이세진 말로는 부작용이 심하게 왔었다고 하더라. 더 쉬어야겠지. 가자.

- 으, 응…… 헉, 이, 일어나셨는데…? 세, 세진 형…!

- ……진짜네. 사람부터 부르자. 누워 계세요, 형.

- 부, 부작용, 시, 심하게 오셨다면서요. 이, 일어나시면 안 돼요……!

 

말을 해보려고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숲에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과 같은 느낌이다. 답답함에 몸부림치며 소리라도 질러보려던 순간, 배세진은 눈을 번쩍 떴다.

 

“헉, 이, 일어나셨는데…? 세, 세진 형…!”

 

눈을 떴는데도 선아현과 박문대가 있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탓에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아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배세진은 눈을 깜빡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꿈이었고, 현실이구나. 파악은 빨랐다.

 

“……진짜네. 사람부터 부르자. 누워 계세요, 형.”

 

조금 전에 꾼 꿈이 제법 일치도 높은 예지몽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그야 같은 얼굴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들렸던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 완전히 미래를 봤다. 왜 쓸데없는 능력에 ‘예지’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단순히 상대와 같은 말을 동시에 내뱉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그야말로 예지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힘.

 

“부, 부작용, 시, 심하게,”

“부작용 심하게 오셨다면서요. 일어나시면 안 돼요. ……라고 말할 거지?”

 

선아현은 충격 받은 얼굴을 했고, 박문대는 미묘하게 놀란 얼굴을 했다. 박문대가 이렇게까지 반응한다는 건 정말 놀랐다는 거라 배세진은 괜히 멋쩍어졌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쓰러지기 전에 봤던 선아현의 어마어마한 능력에 비하면 제 것은 그저 하찮기만 해 보였다.

 

“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일어나기 직전에 꿈을 꿨어. 너희 둘이 나와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대화하는 꿈.”

“엄청 발전하셨네요. 대단하세요.”

“크흠, 아, 아니, 뭐, 그냥, 어쩌다 보니까……. 내가 꿈꾸겠다고 연습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이 겹치고 흐름이 맞아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노력을 안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공부를 하면 성적이 오르고, 운동을 하면 체력이 증가하는 것과 같은 명확한 인과관계가 아닌 것을 두고 노력을 했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배세진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자 박문대가 만류했지만 배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진짜 멀쩡해. 시간을 보니 못해도 열 시간은 잔 듯하다. 멀쩡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세진은 뭐 하고 있을까. ……당연히 자고 있겠지.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야, 새벽 세 시를 넘긴 시간에. 하지만 생각이 미칠 법도 했다. 배세진이 그렇게 우는 내내 이세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옆에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울음이 조금 잦아들 무렵에서야 할일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배세진의 옆을 떠나갔다. 잠들어있는 동안 왔었을까?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타입이니까, 보러 왔다가 아직도 자고 있는 걸 보고는 상태 확인만 하고 돌아갔을까.

고작 이런 게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아마도, 평소의 이세진과는 달라서. 배세진이 아는 이세진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안온했던 삶을 떠올리며 미안하다 하는 건 기만이고, 모욕이라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애초에 이세진 앞에서 사과의 말을 꺼내려던 계획은 없었다. 그저 모든 게 순간적으로 북받친 감정 탓이었고, 계획 밖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말을 줄줄 뱉어내면서도 지금 자신의 행동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것도 이미 배세진을 잔뜩 아니꼽게 보고 있었던 이세진이니 더더욱. 그러니 그냥, 순수한 감정이었다. 툭하고 터져 나온 순수한 감정.

 

“자, 자, 잠깐만!”

“네?”

“서, 선아현, 너 왜 벌써 나와 있어……!”

 

배세진이 작게 소리를 지르자 박문대가 먼저 반응했고, 이어진 말에는 선아현이 얼굴을 붉히고 머쓱하게 웃었다.

 

“거, 걱정하셨죠…… 죄송해요……. 처, 처음으로 견학하셨다고 드, 들었는데, 많이 놀라셨겠어요. 보, 보시는 줄 아, 알았다면 더…… 조심했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아…… 그, 그게 그, 새, 생각보다 회복 속도가 엄청 빠, 빨랐대요……! 지금은 진짜 아, 아무렇지도 않,”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내 걱정을 하고 있어. 다친 건 넌데. 박문대도 놀랐을 거고…… 아, 아니 물론 너희는 자주 봤다고는 하지만…….”

 

점점 뒤가 흐려지는 배세진의 목소리에 선아현과 박문대가 서로 짧게 눈을 맞췄다. 박문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배세진을 바라본다.

 

“더 심한 부상은 며칠은 물론이고 몇 주는 누워있기도 해요. 많이 놀라셨겠지만 진짜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되는 상태 맞아요. 내일 당장 또 출동 떨어지면 나가도 전혀 지장 없을 정도니까요. 아주 흔한 부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 괜찮아요, 형.”

 

박문대의 침착한 말에 배세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서 선아현이 목이 빠지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지만…… 미처 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웅얼웅얼 맴돌았다. 뱉어내지 못한 이유라면 딱 하나였다. 박문대가 훨씬 잘 알 테니까. 하지만 저렇게 태연하게 대답하는 게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흐릿한 기억 속의 박문대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작용 때문에 잘못 기억하는 거라 하면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물 뿐이다. 처음 보는 날것의 표정. 소중한 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감히 배세진은 정의했다.

 

“애초에 이렇게 큰 전투가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에요. 특급 상황이었잖아요.”

“……알겠어.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가, 감사해요, 세진 형…….”

“근데 형. 통제실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이세진 완전 빡쳐 있던데.”

 

박문대의 물음에 배세진이 머리를 굴려 기억을 되짚어나갔다. 안타깝게도 쓰러지기 전이 마지막 기억이다. 정확히는 선아현, 박문대에게 복귀를 명령하는 목소리가 마지막이다. 그 후에 잠깐 보았던 선아현의 처참한 몰골이…… 그만 떠올리자. 배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쓰러지고 나서는 기억이 없어서 모르겠어.”

“아무래도 보통 그렇죠. 가벼운 부작용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세진이 바로 가이딩해서 다행이었죠.”

 

……생각해보니 그 기억도 없었다. 이세진이 왔을 때 아무 말도 못 듣기도 했고,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거하게 쓰러졌으니 당연히 누군가가 조치를 취했을 거고, 당연히 근처에 있던 파트너 이세진이 했겠지.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뭔가 이세진이 소리를 질렀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은 이세진이랑 잘 지내시나 봐요.”

“……그래 보여?”

“별 큰 말이 없으니까요.”

 

특별히 좋은 건 없었지만 특별히 나쁠 것도 없었다. 큰 말다툼은 첫날 이세진이 몰아붙였던 게 전부고, 그 후로는 가끔씩 이세진이 빈정댔을 뿐 첫날만큼의 다툼은 없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어쨌든 간단하게나마 전투하는 법도 잘 가르쳐 주고 있고…… 훈련할 때는 좀 많이 엄하긴 하지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실전에서 죽지 않으려면.”

“네. 걔가 좀 말은 짜증나게 해도 지 일은 잘 해요.”

“세, 세진이 차, 착해, 문대야…….”

 

옆에서 선아현이 눈치를 보며 작게 내뱉는 말에 웃음이 났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착하다고는…… 그렇지 않나 싶은데, 또 말하는 사람이 선아현이라 이해가 됐다.

 

“아무튼 요즘은 괜찮아. 잘 지내고 있고…… 잘 지내고 싶어.”

“자, 잘 지내시잖아요…… 앞으로도 더, 더 잘 지, 지내실 수 있어요…!”

 

화, 화이팅……! 선아현이 작은 목소리로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쥔다. ……고마워. 배세진이 작게 대답했다.

 

“그럼 지금 연락해볼게요.”

“어, 어? 뭐, 뭘?”

“이세진한테 형 일어났다고 말 해야죠. 아까 자정쯤에도 형 보고 가던데. 겸사겸사 연구원도 불러서 건강 체크 한 번 하고요.”

 

이세진이…… 왔었다. 의외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생각 못한 일이라 배세진은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특이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세진은 배세진의 가이드이고, 특히 배세진은 상층부에서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깨어날 때까지 죽치고 앉아있지 않았던 게 오히려 놀라울지도 모른다.

배세진이 눈만 깜빡이는 사이 박문대는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는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 잤냐. 배세진 형 일어나셨어. 연구원? 이제 불러야지. 그래. 지금 와라. 난 간다.

 

“그럼 형.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푹 쉬세요.”

“쉬, 쉬세요…….”

“으응…… 신경 써줘서 고마워. 너희도 푹 쉬어.”

 

박문대와 선아현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잠기운이 얼굴에 가득한 연구원이 들어왔다.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기계를 가져와 배세진의 옷을 걷어 올리고 맨 가슴에 전극 몇 개를 턱턱 붙인다. 차가운 금속이 닿는 감촉에 소름이 돋아 잠깐 몸을 떨었다.

 

“형.”

 

그때 문이 열렸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돌아본 연구원은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고는 그냥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어라 한마디 하려다 만 기색이었다.

 

“어휴, 하도 푹 주무시길래 아침에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일찍 일어나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누가 봐도 자다 깨서 뛰어온 모양새라 조금 미안해졌다. 딱히 큰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편으로는 처음 보는 모습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대충 걸쳐 입은 트레이닝복이야 그렇다 쳐도,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라든가 부은 눈 같은 건…… 모습이 웃겨 웃음이 나오려다가도 저놈의 말 때문에 쏙 들어갔다.

 

“……그래, 좋은 아침이다.”

“맨날 6시에 일어나니까 피곤하셨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파트너 혼자 두시는 게 어딨어요~”

 

옆에 연구원이 있어서인지 유난히도 말이 많고 유난히도 능청스럽다. 없었던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에 배세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체온 정상, 혈압 정상, 심전도 정상. 간호사 불러서 채혈 한 번 할게요. 바로 나가셔도 돼요.”

 

무미건조한 연구원의 음성에 배세진이 작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연구원은 또 고개만 꾸벅 하고는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쟤들한테 하나하나 인사할 게 뭐 있어요. 그냥 웃으면서 ‘네~’ 하면 되지.”

“그래도 나 때문에 이 시간에 깬 거잖아.”

“그게 쟤들 일인데요. 내가 해 달라 했나, 결국 다 지들이 감시해 먹겠다고 하는 거지.”

 

묘하게 삐딱하다. 원래 저렇게 말하는 건 알았지만…… 자다 깨서 더 그런가. 배세진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곧 간호사가 들어왔다. 움찔, 팔을 내밀고 고개를 돌렸다. 그걸 보는 이세진이 입술을 씰룩거린다. 보나 마나 놀리려는 게 뻔해 배세진은 인상을 쓰고 이세진을 노려보았다.

 

“웃지 마.”

“네? 뭐가요?”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웃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 바늘이 살갗을 뚫고 혈관에 꽂히는 순간 본능적으로 파득 몸을 떨었다. 으.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러다가도 이세진이 ‘형님~ 그게 아프십니까?’ 할 것처럼 웃고 있는 걸 보자 바로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5분 동안 꾹 눌러주세요. 이제 나가셔도 돼요, 고생하셨어요. 간호사가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나간다. 팔에 테이프로 붙여진 소독솜을 꾹 누르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세진이 급히 몸을 받칠 것처럼 굴다 떨어졌다.

 

“나 괜찮아.”

“그래 보이시네요. 얼른 가서 조금이라도 더 주무세요. 얼마 못 주무시겠지만요.”

 

벌써 네 시가 넘었나. 그래도 많이 자서 그런지 별로 피곤하지도 않다. 회복실을 나오니 컴컴한 복도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두 명의 발소리만 울려 퍼진다.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문득 할말이 생각났다. 지금 말하기엔 시간이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는데. 이세진이 카드를 찍고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서 31층을 누를 때야 배세진은 입을 열었다.

 

“그, 이세진.”

“네?”

“할말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 능력에 관련된 걸지도 몰라.”

 

그 말에 이세진이 고개를 느리게 돌려 배세진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검지를 들어 제 입술 위로 가져다 댄다. 뭐야, 말하지 말라고? 예상 못한 반응에 배세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배세진이 입이라도 열려는 기색을 보이자 이세진이 바로 배세진의 손목을 잡았다. ……진짜 뭐야? 그렇게 31층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이 흐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도 이세진은 배세진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자 이세진은 그대로 배세진을 끌고 배세진의 방으로 갔다. 배세진을 침대 위에 앉혀놓고 본인은 의자를 끌고 와 앉는다. 그때까지도 배세진은 영문을 몰라 불쾌한 얼굴이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세진은 태연하게 팔짱을 낀다.

 

“혹시 몰라서요. 아무리 사람이 없다지만. 자, 그래서 뭔데요?”

 

아니, 그렇게까지 할 얘기는 아니었는데. 배세진은 괜히 머쓱해졌다.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할말을 정리하느라 애먼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연다.

 

“그, 진짜 별건 아니야. 예전에 꿈을 꿨거든. 여기 들어오고 바로 다음 날이었나 그랬을 거야. 그런데 오늘… 그러니까 조금 전에 그 꿈을 또 꿨어.”

“무슨 꿈이었는데요?”

“명확하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누가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는 거야. 도망치는 것처럼…… 처음 꿨을 때는 그게 다였는데 어제 꾼 꿈은 조금 바뀌었더라고. 배경이 숲인 것 같기도 하고, 전에 꿨을 때는 손 하나만 보였는데 이번에는 팔까지 보였고…… 여전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게 다야.”

 

막상 말로 하고 나니 더욱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 배세진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아니, 그치만 이세진이 이렇게 오버해서 반응만 안 했더라도……. 이세진한테 책임을 떠넘기기도 하고. 이세진은 천천히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같은 꿈을 두 번 꿨는데 내용이 조금 더 늘었다는 거죠?”

“으응,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지.”

“뭐~ 그 정도야 다들 한 번쯤 경험해보잖아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도 그런 적 있지 않아요? 전 있었는데. 물론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요.”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긴 하지. 바로 이어서 꾼 선아현과 박문대의 대화 장면처럼 아주 생생한 것도 아니고. 혹시나 싶어 말을 꺼냈던 거였기도 해서 배세진은 떨떠름하지만 순순히 수긍했다.

 

“진짜로 형 능력이랑 관계있는 꿈이라면 몇 번 더 꾸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 아무튼! 그, 그냥, 진짜 혹시나 말해본 거야.”

 

변명하듯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고, 다 사실이긴 하니까.

 

“그래요, 잘 하셨어요. 사소한 거 하나라도 다 알고 있어야죠~ 제가 형 가이든데.”

 

그럼 이만 쉬세요, 형. 이세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 스치기라도 할까 배세진은 유심히 이세진을 관찰했지만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자, 잠깐만!”

 

급하게 떠오른 생각에 급하게 이세진을 붙잡는다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덥석 손을 잡았다. 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문 모를 갈색 눈동자에 뒤늦게 깨닫고 손을 바로 놓으려 했지만, 그건 그거대로 이상할 것 같아 그냥 어정쩡하게 붙든 꼴이 됐다. 크흠, 흠. 괜히 한 번 목을 가다듬고.

 

“나…… 쓰러지고 나서 기억이 하나도 없거든. 근데 멀쩡히 잘 깨어난 거 보면 ㄴ, 네가 가이딩 해준 거 맞지?”

“……우와. 제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하나도 기억을 못 하신다고요? 이거 너무 서운한데.”

“어, 어쩔 수 없잖아……! 박문대도 가벼운 부작용이 아니라 기억 없는 건 아무래도 그럴 거라고 하던데…… ……아냐?”

 

눈치를 보며 뒷말을 덧붙이자 이세진이 웃는다.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지려는 걸 꾹 참았다. 쟤는 원래 저러니까. 몇 번을 또 되뇌고.

 

“그렇긴 하죠. 근데 진짜 아무것도 기억 못하세요?”

“……응. 아무것도. 아, 박문대가 통제실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봤어. 너 완전 빡, 큼, 열 받아 있었다고.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요. 형님 쓰러지고 그냥 그랬던 거지. 선아현은 그렇게 돼, 내 센티넬은 부작용으로 정신을 못 차려, 예민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 그런가. 그렇겠지…….”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이세진이 묻는다. 할말 더 없으시면 저 나갈까요? 하고는 잡힌 손을 들어 올려 보이자 배세진의 얼굴이 벌게졌다. 황급히 손을 홱 놓는다.

 

“아, 그, 어, 고맙다고…… 그게 다야.”

“하하, 형님. 가이딩 한 번 할 때마다 그러실 거예요~? 형님이야 워낙 평소에는 별 이상 없다가 한 번씩 크게 터져서 그런 거고, 다른 센티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이딩 받아요. 그때마다 고맙다고 하시게요?”

“……너는 사람이 고맙다고 하는데 왜 말을,”

“너무 여기저기 숙이고 다니지 마시라고요. 얕잡아 보여요. 저한테야 그렇다 쳐도~ 선아현이야 S급 달았으니까 저자세로 다녀도 누가 뭐라 못 하는데요. 형은 C급이잖아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그래도 생판 모를 놈들한테는 그러지 마세요. 유명인이라 신기해하다가도 본인보다 못하다 싶으면 바로 낮잡아 볼 놈들이 차고 넘쳤어요.”

 

배세진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짜증나는데 틀린 말도 아니었다. 왜 저렇게 밖에 생각을 못하나 싶은데 틀린 말이 아니니까, 말은 못하고 짜증만 나는 거다. 그걸 이세진도 아는지 모르는지, 배세진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고는 ‘그럼 쉬세요.’ 하고 나간다. 지금 결국 꼬우면 S급 달라는 말이지. 그게 어디 쉽나……. 배세진은 한숨을 쉬고 어깨를 주무르며 제 침대 위에 누웠다. 하루가 한 달처럼 긴 날이었다.

문득, 조금 전 얼결에 잡았던 이세진의 손의 감촉이 머릿속을 떠돈다. 물론 처음 잡아본 건 아니지만, 왜 이렇게까지 낯이 익은 기분인지 모르겠다. 크고, 뜨겁고, 좋게라도 부드럽다거나 감촉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손……. 배세진은 제 손을 쫙 펼쳐 들고는 괜히 뚫어져라 쳐다보다 도로 내려놓았다. 됐다, 조금이라도 더 자기나 하자.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해보기로 했다.

 

 

 

 

오늘 새벽 세 시 경 완벽하게 깨어났습니다. 체온 등 검사 결과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대부분 큰 부작용이 왔을 때 그렇듯 쓰러진 후 상황은 기억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별건 아니지만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같은 꿈을 두 번째 꿨는데, 두 번째 꿈에서는 미세하게 내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꿈 내용은 그냥 누군지 모를 사람과 함께 도망치듯 뛰었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네. 저도 별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꿈 두 번 꾸는 건 누구나 있는 일 아닙니까. 혹시 몰라서 보고 드렸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쉬십시오.

 

문을 닫고 나온 이세진이 넥타이를 매만지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거 아니긴 했지만,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보고하는 게 제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배세진의 얼굴이 스친다. 하지만 진짜 어쩔 수 없잖아. 이게 내 일인데. 그래도 별거 아니니까 괜찮겠지. 만약 정말 배세진한테 해가 될 일이었으면 나도 보고 안 했지. 아무리 내 출셋길이 달려있다지만 그게 사람 목숨 팔아서 오를 길은 아니고.

 

“문대 그 자식은 왜 괜히 그런 말을 해 가지고.”

 

배세진에게 감출 일은 아니었지만 알릴 일도 아닌데. 가이드 하나를 시험해보겠다고 부작용이 온 센티넬을 방치한 걸 배세진에게 알려서 뭐 좋을 게 있을까. 화만 돋울 뿐이다. 이세진은 작게 투덜거리며 결국 목을 꽉 죄어 맨 넥타이를 풀러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대체 연구실에서 배세진을 데리고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매일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도 썩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당장 어느 쪽에도 해가 될 일이 아닌 것 같으니 하기는 하는데 이게 나중에 쌓이고 쌓여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면 어쩌나 싶기도 하다.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나는 후회를 할까? 답 모를 의문이 함께 든다.

 

“먹고 살기 힘들다…….”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길 끝에 한창 배세진이 있을 연구실이 보인다. 이세진은 슬쩍 까치발을 들어 안이 보일 리 없을 창문을 들여다보고는 마저 걸어갔다. ……내가 무려 키스까지 했는데도 기억을 못한다는 거지. 억지에 가까운 괜한 심통을 허공에 대고 부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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