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은 다달이 오는 고지서의 연례 버전이야. 잊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오고, 이상하게 부채감 드는 데다ㅡ생일자인 나한테도 그렇고 선물 주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특별한 것도 없지.

로건은 카일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와, 정말이지 세계 지도에서 손톱 만한 몸으로 커다란 존재감을 뽐내는 국가 출신다운 대답이다.

형편없는 기억에 의존하자면 아라비아따 파스타를 먹고 있는 도중이었을 거다. 그건 로건이 만든 밸렌타인데이용 만찬이었는데, 매운 음식에 환장하는 한국인을 위한 특별 레시피였다. 그렇다. 카일은 성의 가득하고 로맨틱한 저녁을 먹고 있는 도중에 감성이 조각난 말을 내뱉는 우를 범한다.

면을 포크로 말던 로건이 쩍 굳어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카일이야말로 그런 질문이 튀어나올 줄 몰랐다는 반응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니."

"좋은 날이잖아."

"어떻게 보면 좋은 날이고... 어떻게 보면 부모와의 원만한 합의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날이기도 하잖아."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비스듬히 천장을 보는 카일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본인 의견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중이나, 미처 도덕적 필터링은 거치지 못했다는 듯이 유감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의 만들어진 사회성이 가슴 구석에 놓여져 있던 냉담한 본심을 포착한 순간이다. 흥미로워진 로건이 손에 턱을 괴었다.

로건의 얼굴을 읽은 카일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일 커지기 전에 서둘러 덮어 놓자는 제스쳐였다.

"아,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는 표정이네. 맞아. 네가 백 번 맞아."

하지만 로건은 미소로 얼굴을 허물었다.

"이제부터 내 생각에 무조건 동의한다는 말이야? 힘들어질 텐데."

본질적으로 로건은 연인의 무심한 면에 일일이 상처받는 부류가 아니었다. 외려 그렇게 굴어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샅샅이 되짚어 돌아가야 하는 편이었다. 하고 많은 사람 중 더욱 강적인 상대를 만나 버려서 반대 상황에 처했을 뿐이다.

로건은 카일의 사카즘(Sarcasm)에 완벽히 익숙해져 있었다. 카일이 강풍 부는 바깥을 내다보며 '이러다 톰도 발코니로 날아오겠다'고 중얼거리면 '문 열어 주지 말자'면서 맞장구를 쳤고, 크리스마스 타임스퀘어 인파에 대고 '산타가 저 바닥에 밟혀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며 농담할 때는 '그럼 우리 집 트리에 달아 놓자'며 한 술 더 떴다. 그러니 순간 굳은 로건의 표정은 놀릴 멘트를 떠올리려는 고뇌의 흔적이었다.

딱! 핑거스냅을 친 로건이 말했다.

"나도 그래, 자기야."

 그러자마자 카일이 환장스럽게 눈을 굴린다.

"엄마 아빠랑 계약서 한 장 안 쓰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억울해 미치겠어."

로건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삶에서 감사한 점을 나열했다.

"코스트코 곰인형 만한 애인을 밤마다 안고 자지만, 내 명의 뉴욕 펜트하우스 2층에 트로피룸이 있지만, 통장 잔액 들여다보지도 않은 지 몇 달이나 됐지만... 그건 그거고 억울한 건 억울한 거지."

카일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로건의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노려다보듯 홉뜬 눈에 살기가 우글거린다. 이 자식을 죽여 살려. 뭐 그런 느낌.

"꺼져, 카스트로."

로건은 두 개의 손바닥으로 거리를 좁히는 척을 하면서 능청스레 말했다. 

"곧 전기세 고지서 받게 돼서 마음이 많이 심란한 거 아는데, 선샤인, 너만 괜찮으면 옆으로 가서 앉아도 될까? 이 공감대를 더 가까운 거리에서 느끼고 싶어서 그래."

하하.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받친 상태로 웃음을 터뜨린 카일이 바구니에 담긴 사과를 들어올렸다. 그 또한 미끄러운 태도로 눈썹을 까딱인다.

"가까이 오면 이 사과 왕창 먹여 줄게. 껍질채 피부로 먹어."

"때린다는 말을 그렇게 다정하게 할 수가."

"나는 너한테 늘 다정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난 로건이 부엌에서 글라스 두 개를 들고 왔다. 후식으로 치즈와 함께 먹으려던 와인 코르크를 시원하게 따 버린다. 카일이 기뻐할 로건을 떠올리며 대기 줄 긴 가게에서 사 온 것이었다. 금세 테이블 위가 향기로운 포도주 향으로 가득찼다.

잘 교육받은 서버마냥 병을 둥글게 돌려서 와인을 따라낸 로건이 말했다.

"그런데 정우."

"어."

"네가 뭐라든 이번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카일은 이번만큼은 '그거 봐, 부채감 든다니까'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의 눈은 깊고 그윽했다. 껍질 속을 파고들어 샅샅이 살피는 시선처럼 상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려 주고 싶거든."

그러나 로건은 입꼬리를 씨익 말고 글라스를 들었다.

"건배."

카일도 가느다란 글라스의 스템을 쥐었다.

"건배."

쨍, 하고 유리가 부딪힘과 동시에 로건이 말했다.

"끝내주는 섹스를 위하여."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부정에도 불구하고 로건은 맞은편 자리로 넘어왔다. 하지 말라니까. 두 손바닥을 테이블에 둔 채 상체를 등받이에 기댄 카일은 로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저 자식이 무슨 사고를 벌일지 걱정된다는 표정이다.

로건은 카일의 곁에 서서 잔을 흔들었다. 만면에 장난기와 짜릿한 흥분이 남실거린다. 헉. 비약적으로 느껴질 만큼 매력적인 로건의 생김새를 바라보던 카일은 갑자기 가슴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숨을 들이쉬었다. 밑을 내려다보자 흰 티셔츠에 빨간 와인이 흐르고 있다. 말끄러미 쳐다볼수록 극명한 색 대비 때문에 묘한 감각이 밀려왔다.

"내가 사십오 분이나 기다려서 사 온 걸."

카일이 한국어로 불평했다.

"Viva la vida loca."

못 들은 척, 모를 수 없는 스페인어를 중얼거린 로건이 잔을 완전히 기울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미련없이 내려놓더니, 카일의 식탁 의자를 거뜬하게 돌려 놓는다. 너무 거침없어서 카일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줘야 했다.

"어디 내 인생 좀 즐겨 볼까."

로건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카일은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막지 않았다.

로건은 혀를 내서 카일의 판판하고 습윤한 배를 핥았다. 면 위로 느껴지는 감촉이 참으로 이상했다. 짓궂게 가늘어진 곁눈이 카일의 안색을 살핀다. 혀가 붉은 흔적을 따라 올라온다. 고개를 살짝씩 비틀면서 섹슈얼한 신호를 보내 오는 로건의 발칙한 행각을 두고 카일이 눈가를 눌렀다. 미치겠네.

"아, 감질난다."

입맛을 다신 로건이 대뜸 티셔츠를 들췄다.

"야!"

카일은 놀라서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로건은 맨살에 얼굴을 묻은 뒤였다.


떠올려 보니 허벅지가 뜨끔거릴 정도로 달콤하기만 한 기억이다. 로건의 무의식은 늘상 한 장면을 떠올리려 할 때 다음으로 펼쳐지는 장면들까지 불러 오곤 했다. 카일과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인상적인 순간이 정말 많았다. 줄기차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커플이었다면 카메라 앨범이 스크린샷으로 도배되었을 것이다.

뭐, 아무튼... 로건은 생일을 홀대한 카일의 발언을 똑똑히 마음에 새겼다.

< 지금 1층 >

그리고 자신에게는 땅에 떨어진 생일의 가치를 쇄신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애인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평생 2월마다 저런 이야기를 듣고 살아야 할 거다. 좀 우울하잖아?

메시지를 보낸 로건이 하늘로 고개를 올렸다. 까만 하늘에서 뽀얀 눈송이가 부슬부슬 떨어지고 있다. 마치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컨페티처럼 보였다.

[ 건물 뒤 흡연 구역에서 기다려 거기 사람없으니까 ]

[ 5분만 ]

답장이 왔다. 가죽 장갑 낀 손끝으로 턱을 매만진 로건이 몸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카일이 손목을 들어서 시간을 체크했다. 로건의 연락을 받을 때 이미 자리를 정리하고 코트를 드는 중이었으므로 고지한 시간보다 덜 걸릴 것 같았다. 로건은 자신보다 추위를 타는 편이라 오래 기다리게 만들 수 없었다.

일요일에 근무를 하다니.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낮아지는 전광판 숫자를 바라보는 카일의 눈이 뻑뻑히 열고 닫혔다. 그래도 생일 당일인 내일은 휴가를 냈으니 괜찮을 것이었다. 비록 며칠 전에 '생일은 부채' 비스무리한 말을 해서 로건에게 놀림받은 전적이 있으나 통념상 생일에 뭘 해야 할지는 잘 알았다. 일단 일을 해서는 안 된다...만, 애인이 있는 경우 한정이다. 솔직히 로건의 존재가 없었다면 평소처럼 출근할 것이다.

로건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 제 목 따는 시늉 한 뒤 죽은 척할 게 분명하다. 사인은 너무 지루하고 삭막하고 믿기 싫어서.

"절대 말 못 하지."

혼자만의 비밀로 남겨두리라 결심한 카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야외 흡연 구역에 가까워질수록, 카일의 눈이 반신반의를 띠었다. 딱 한 명이 서 있는데 우산을 펼쳐든 채였다. 카일이 믿지 못하는 건 다름 아닌 그가 정장 차림이라는 점이었다.

"로기?"

카일의 물음에 남자가 등을 돌린다.

역시나 로건이 맞았다. 멋스럽게 세팅한 머리에 회색 플란넬 정장을 걸치고, 가죽 장갑까지 꼈다. 킹스맨도 아닌데 우산은 뭘까? 하지만 카일은 다른 감상을 미룬 상태로 성공한 CEO처럼 차려입은 로건이 얼마나 근사한지 깨달았다.

"베이비."

카일을 보자마자 고개를 슬쩍 젖히고 활짝 웃은 로건이 다가왔다. CEO가 아니라 7살처럼 애교스러웠다.

"못 본 지 9시간이나 돼서 말라죽을 뻔했어."

우산은 저만치 휭 던져 버리고 어깨를 둘러안는다. 카일은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조여진 가슴에서 겨우 웃음소리를 끌어냈다.

"그렇다기엔... 힘이... 너무 세다."

로건이 고개를 뗐다. 덕분에 카일은 가쁘게나마 숨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곧 로건은 카일의 양뺨을 쥐고, 두 눈을 뚫어져라 맞추는가 싶더니 슬쩍 어깨 너머를 살핀다. 그리고 푹신한 입술과 입술을 꾸욱 눌렀다.

혀가 만나지도, 입술이 움직이지도 않는 담백한 뽀뽀였다. 살을 누르는 어마무시한 힘만 느껴졌다. 카일이 참지 못하고 웃느라 입꼬리가 올라가니 앞니가 드러났는데, 로건은 개의치 않고 치아에 뽀뽀를 계속했다.

어느 정도 견뎌 준 카일이 손을 내려 로건이 엉덩이를 쥐었다. 슬슬 마무리짓는 게 어떠냐는 신호였다. 꽤나 젠틀한 의사 전달에 응한 로건이 코끝이 닿을 만큼만 거리를 두었다. 카일의 시야에는 가느다랗게 휜 눈매만 보였다. 

"너 진짜 귀엽다, 오늘."

돌연 카일이 한마디를 던졌다. 로건은 거기에 크게 맞았다.

"귀엽다고?"

"어."

"멋진 게 아니고?"

"둘 다 시켜 줄게. 나의 전능함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낄낄거렸다.

정식 출근일도 아닌 데다 밤이라, 빌딩 건물 뒤는 인적이 아예 없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생일 전야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표자는 로건이었다.

"일단 이 상태로 공원에 가서 좀 앉아 있을 거야. 너 찬바람 좋아하잖아."

카일이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렇다기에는 네 차림이 너무 얇은데."

"추우면 코트 벗어 줄래?"

"미안하다. 너한텐 작을 거야."

"아, 그러고 보니까 요즘 운동 안 하더라."

"시비 걸 거면 나 이만 갈게?"

서로 장난을 치느라 쓸데없는 시간만 늘어진다. 진짜 일어서려는 카일의 팔목을 잡아 앉힌 로건이 말을 이었다.

"눈 많이 오니까 커피 한 잔씩 사서 우산 쓰고 앉아 있는 거야. 어차피 다들 추워서 싸매고 걷느라 다른 데 신경 안 써."

"그 다음에는?"

카일은 레스토랑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로건은 전혀 다른 목적지를 꺼냈다.

"호텔."

아연해진 카일이 입을 벌리고 있다가 질색했다.

"이 변태 자식 진짜 정신 못 차리네. 섹스는 주 3회 미만이라고 했지. 밸런타인데이 때 싸지른 거 기억 안 나?"

뒤의 발언은 이를 물고 낮게 쏟아붙는다.

"바깥에다 하라니까 안에다 해서 빼는 데만 얼마나 걸렸는지 아냐? 자꾸 본능대로만 굴 거면 인간 세상에 있지 말고 사바나나 세렝게티로 가. 가 버려."

"딱 맞는 타이밍에 빼는 게 어려워...."

로건은 머쓱하게 눈썹 끝을 긁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주말이랑 평일 사이에 있는 거 알지? 몇 시간 되면 횟수 리셋돼."

"와."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한 카일이 감탄했다. 미움받을 용기와 죄책감을 느끼는 역치가 높아진 로건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 원래는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냥 예약 취소했어. 룸서비스 시키면 될 것 같아서."

레스토랑에 큰 실례군. 대단한 집념이며. 포기한 카일이 헛웃음을 뱉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자 허리에 두툼한 팔이 살살 감겨 오는 것이었다. 코트 어깨선에 턱을 얹은 로건이 음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뒤이어 귓불 솜털이 바짝 설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당장 이 꽉 끼는 정장 벗어 버리고 너랑 뒹굴고 싶어."

"......."

"내일 콘셉트는 <오만과 편견> 10번 읽은 젠틀맨이야. 약속해."

사정없이 로맨틱하게 굴겠다는 건가. 입가를 쓸어내린 카일이 툭 물었다.

"오늘은 무슨 콘셉트인데?"

"웨어울프?"

장난스레 대답한 로건이 고개를 처들고 늑대 울음 소리를 냈다. 아우우우.... 매미 붙은 고목마냥 로건을 매단 채 다리를 쭉 뻗어 앉은 카일이 킥킥 웃었다. 거기에 행복해진 로건은 매끈한 뺨에 입술을 붙였다.

"발정 난?"

"정답이야."

하지만 둘 중 아무도 몰랐다. 내일은 반드시 '젠틀맨'처럼 굴겠다던 로건이 어떤 짓을 벌일지. 카우치에 서로의 몸을 베개 삼아 드러누워 <가장 게이 같은 운동 종목>을 토론하던 중, 레슬링을 제시한 로건이 카일의 몸을 번쩍 들다가 머리로 전구를 깨게 만들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카일은 불운한 내일을 예지할 만큼 똑똑하지 않았다. 게다가 로건과 시간을 보내면 건설적인 대화는 고사하고 뇌 주름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마음이 침잠하여 앞이 어두운 밤, 로건은 맑고 현명한 말들로 카일을 일깨웠다. 네가 천조각처럼 흔들릴 때 쓰러지지 않는 깃대가 될 것이라 했다. 야음 속에서 등대가 되어 주리라 약속했다. 그보다 충만한 순간은 없었다.





정우야, (미리)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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