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창은 소장용입니다.








이제노는 착한 아이였다.




즐거운 나의 집

; 이제노






갓난쟁이 때 친부모에게서 버려진 이제노는 줄곧 자기가 버려진 그 보육원에서 자랐다. 이제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제 성까지 내어 준 인정 많은 원장 선생님을 이제노는 꽤 좋아했다. 원장님은 늘 이제노에게 말했다. 착한 아이가 되렴,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러면 어린 이제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착한 아이가 뭐예요?”

“성실하고, 배려하고,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란다.”



이제노는 아직 착한 아이가 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냥 원장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좋아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원장님. 전 착한 아이가 될게요!”



그날부터 이제노의 꿈은 착한 아이가 되는 거였다.

이제노는 원장님의 말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 첫 시작은 식사시간에 나온 과일 젤리를 더 달라며 조르는 한 두 살 어린 동생에게 고민 없이 제 것을 내민 거였다.



“우리 제노 착하네.”



원장님과 선생님들은 칭찬 한마디씩을 던지고 제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노는 그 손길이 너무 좋아서 그냥 배시시 웃기만 했다. 처음 받아본 온전한 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짜릿했다. 이제노는 그날 생각했다, 더 착한 아이가 되기로.

 



 


어느 날 보육원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아저씨와 긴 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린 아줌마가 찾아왔다. 어쩐지 수척해 보이는 그들은 보육원의 아이들을 샅샅이 살폈다. 제노는 왠지 그들의 눈빛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원장님은 얌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제노의 앞에 두 사람을 데려갔다. 제노를 본 그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제노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

“이제노입니다, 9살이에요.”



검은 코트를 껴입은 여자가 제노를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곧 들리는 곡소리에 제노는 잠시 당황했다가, 작은 손을 들어 여자의 등을 토닥였다.



“우리 제노는 정말 착하고 배려심도 많습니다, 공부도 참 잘해요.”

“어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우리 제호랑 이렇게 닮았을까….”



이제노는 그들이 말하는 제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이상한 날이었다. 한 살 어린 지현이는 제노에게 급식으로 나온 요구르트를 달라고 손을 뻗지도 않았고 원장님은 제 맞은편에 앉아서 기도를 해주었다. 또, 선생님은 제노의 식판에만 고기반찬을 두 배로 주었다. 제노는 마냥 주인공이 된 기분에 기뻤다.

 



 


그날 오후, 전에 왔던 그 두 사람이 새까만 외제차를 타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빨간 털옷을 입은 여자는 어쩐지 저번보다 밝아 보였다. 여자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제노에게 내밀었다. 영문을 몰라 원장님을 쳐다보고 있으면 원장님은 늘 그랬던 것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부터 제노의 부모님이 되어주신대. 제노의 엄마, 아빠야.”



나의 부모님? 두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노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에 가늘게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제노를 안아오는 여자와 남자에 제노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곧 제노의 표정이 울상이 되자 원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착한 아이, 나는 착한 아이여야 해.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누가 보면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짓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사실 이제노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있고 싶었다. 여자에게서 풍기는 짙은 화장품 냄새가 코를 쿡쿡 찔러 머리가 아팠다. 겨우 화장실에 간단 핑계를 대고 어른들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생님께라도 가서 말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난 가기 싫어요, 여기 계속 있고 싶어요, 나 버리지 마세요.'


결국 기껏 속으로 연습해둔 말은 비참하게 홀로 남아 버렸다.



“그래도 제노가 가게 되어 다행이에요, 항상 애들 먼저 챙기고 공부도 곧잘 하던 애라 너무 안쓰러웠는데.”

“그 남편 분이 의대 교수시라면서요? 제노는 거의 신분 상승한 거죠.”

“신분 상승이라뇨, 무슨 그런 말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제노가 잘 적응했으면 좋겠는데 걱정이네요….”

“그래도 제노 덕분에 기부금 두둑이 받아서 보육원 재정 문제 해결됐잖아요. 애들 고기반찬 하나 더 줄 수 있으니 다행이죠.”



보육원에 자주 오는 봉사자들이 주고받던 말들이었다. 아직 어렸지만, 제노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팔린 거구나.


제노는 얌전히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무섭지만, 이만하면 저는 충분히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버려진 건 아니었으니. 이미 홀로 자라 철이 다 들어버린 아이는 그렇게 저를 달래기로 했다.

 


◆◆◆

 


“누나, 오늘 저녁 뭐할 거야?”

“너 뭐 먹고 싶은데?”

“나 김찌.”

“넌 맨날 김찌만 먹니?”



동혁은 누나와 장을 보러 가는 걸 좋아했다. 6시, 하늘에 노을빛으로 물들 무렵 누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편안하기만 했다. 정말 소소하고 지극히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동혁의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좀 그런가?”

“집에 감자 있었나, 카레나 할까.”

“헐, 너무 좋…. 엉?”

“좋단 거야 싫단 거야.”

“아니, 저기….”



동혁이 인상을 쓰며 바로 맞은 편을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켰다. 누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



사람 하나가 차가운 길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났는지, 그 위로 뽀얀 눈까지 덮여 있었다. 분명 동혁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누나는 뭐가 그리 급한지 손에 든 장바구니도 내팽개친 채 한달음에 달려가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소년을 잡아챘다. 동혁은 당황한 듯 짐을 주섬주섬 챙겨 누나의 뒤를 따랐다.



“서, 설마 죽은 거야?”

“아니, 그냥 쓰러진 것 같아. 너 그 짐 나 주고 얘 좀 업어.”

“어, 어….”



동혁은 누나의 결정에 토 한 번 달지 않고 곧장 달려가 소년을 들쳐 멨다. 깡마른 애가 영 가볍지는 않네, 작게 중얼거렸다. 누나의 결정에 뭐라 말을 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누나의 그 오지랖에 가장 덕 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동혁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소년은 단지 지쳐 잠이 들었던 건지,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을 즈음 스르륵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저를 덮어둔 보들보들한 담요에 흠칫 놀란 소년이 작게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곧 멀뚱히 저를 본 동혁과 그의 누나를 보았는지, 대뜸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누구, 누구세요?”

“그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인데.”

“길바닥에 누워 있길래 주워 왔어.”



한마디씩 내뱉고 나서야 소년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일어났으면 저녁 먹어.”

“네…?”

“카레 안 좋아해? 누나가 너 말랐다고 밥 한가득 펐는데.”



소년이 슬쩍 본 식탁에는 수저 세 개와 밥그릇 세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소담스레 담긴 고봉밥과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음식 냄새에 소년은 꼬르륵대는 제 배를 감싸고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

“올해 열일곱이요.”

“와, 나랑 동갑이네. 이름은?”

“이제노.”

“나는 이동혁이야.”



동혁은 제노의 옷차림부터 이름까지 무엇 하나 정성스럽지 않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셔츠에 니트까지 갖춰 입은, 심지어 이름마저 제노인 소년은 어쩐지 동혁과는 판이했다. 

딱 봐도 범생이가 잠깐 부모님이랑 다투고 홧김에 집 나온 거네, 동혁은 덤덤히 제노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여기는 시민동인데, 집까지 찾아갈 수 있어?”

“…….”



동혁의 말에 제노는 아- 하며 작게 탄식하고 어쩐지 안쓰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손만 꽉 쥐었다 폈다 반복하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선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고 가. 이동혁, 얘 옷 좀 빌려줘.”

“엉, 이제노 따라와.”



제노는 조금 당황한 눈으로 동혁의 뒤를 따랐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속으로 생각했다.

 



 


바닥에서 자보기는 꽤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제 방의 침대보다는 편안했다. 폭신한 이불에서 올라오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에 누운 제노를 보던 동혁이 툭툭 제노를 쳤다.



“야.”

“왜?”

“올라와서 자. 내가 바닥에서 잘게.”

“…어, 안 그래도 돼. 괜찮아.”



동혁이 픽 웃고는 제노를 일으켜 침대 위에 앉혀 놓았다. 제노는 얼결에 침대에 앉았다가, 금세 바닥에 누운 동혁을 보고 당황해 황급히 일어났다.



“아냐, 나 진짜 괜찮아!”

“괜찮기는, 바닥에서 자본 적 없을 것 같은 도련님이.”

“…….”



그런 거 아닌데…. 


제노는 차마 아니라고 말도 못하고 멀뚱히 서서 돌려 누운 동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만 신세 질게.”

“그러던가.”



이윽고 제노가 불을 끄고 동혁의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시선이 닿는 곳에 반짝이는 야광별이 하나 붙어있었다. 제노는 멀뚱히 별을 보고 생각했다.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하지, 난 이럴 때 갈 친구네 집도 없는데.



“야.”



갑자기 방에 울린 동혁의 목소리에 제노가 고개를 돌려 동혁의 쪽을 바라봤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동혁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응?”

“무슨 이유로 거기 쓰러져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

“그냥 집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뜻한 가족과 집에서 여태 아무 걱정 없이 살았을 이동혁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제노는 조금 고까웠다. 제노가 동혁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여기서 집주인의 심기를 더 거슬러봤자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어, 제노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너는 돌아갈 데가 있을 거 아니야.”

“…….”

“나랑 다르게.”



갑작스럽게 들려온 뜻밖의 말에 제노가 놀란 눈으로 동혁을 바라봤다. 동혁은 제노를 보고 피식 웃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주정뱅이에 엄마는 나 7살, 형은 나 13살 때 집을 나갔어.”

“아….”

“그래서 난 집을 나왔어.”

“…….”

“그냥, 나는 그렇다고.”



거기까지 말을 마친 동혁은 눈을 다시 감았다. 제노는 한참을 동혁만 바라보았다.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를 털어놓은 것치고는 너무 태연자약했다. 이동혁이 그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할 수 있는 이유를 이제노는 알지 못했다.



“그러면, 누나는?”

“누나는 그 후에 만났지. 너랑 똑같아, 누나가 날 주웠어.”

“뭐?”

“누나는 내 새 가족이야.”

“…….”

“누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아직 이제노는 이동혁과 누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이동혁은 꽤 그 누나라는 사람에게 애착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그 누나도, 얘도 어떻게 생판 남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거지. 나는 이렇게 어려운데, 몇 년을 노력해도 안 됐던 건데.


저 둘은 애초에 일면식도 없는 저를 집까지 끌고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누나와 이동혁. 그 둘이 이상한 사람인 거다. 이제노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편이 제 마음이 편할 수 있으니까. 어째선지 머리가 더 복잡했다. 괜히 속이 쓰렸다.

 



 


다음 날, 역시 몸에 밴 습관은 어쩔 수가 없는지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6시, 아직 해도 뜨기 전인 새벽녘에 눈이 떠졌다. 이동혁은 여전히 이리저리 이불을 차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달칵, 문이 열렸다.



“일찍 일어났네.”



이동혁의 누나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이불을 다 차내고 자는 이동혁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혹시 이동혁이 깨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운 손길은 이제노에겐 그저 의문이었다. 그녀는 제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얘는 깨워도 잘 못 일어나던데.”

“아….”

“잠깐 차나 마시러 갈까. 할 일 없으면 같이 가.”

“그래도 돼요?”



누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노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온 곳은 그 집의 뒷마당이었다. 눈이 내려서 그런지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익숙하게 뒷문으로 들어간 누나의 뒤를 따랐다. 좁은 복도를 죽 걷자, 곧 넓은 카페가 제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카페였구나.”

“뭐 마실래?”



제노는 멀뚱히 메뉴판을 보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뱉었다.



“아메리카노요.”



제노의 말에 누나가 팍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저었다.



“레몬차 먹어.”

“네?”

“청소년에게 커피는 아직 일러.”

“그런가요…?”

“카페인은 청소년의 성장에 필수 불가결한 칼슘의 섭취를 저해하고….”

“네?”

“…쓰잖아, 어린 애가 먹기에는.”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지 싶었지만, 따로 말을 보탤 필요는 느끼지는 못했다. 결국, 누나는 제노의 손에 레몬차가 담긴 머그잔을 쥐여 주었다. 매일 공부하다 너무 졸리면 억지로라도 두세 잔씩 마셔서 커피는 이제 하나도 쓰지 않은데. 제노는 머그잔 안에 띄워진 레몬 조각을 바라보다가 곧 한 입 머금었다.



“시다.”

“레몬이니까.”

“달아요.”

“꿀을 넣었으니까.”



입에 감겨오는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생소하다. 레몬 향이 솔솔 올라왔다. 이상하게도 억지로 쥐어진 레몬티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편안했다. 크게 숨을 뱉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고 있었다.

 



 


“너 또 편식하지.”

“아, 나 콩 싫단 말이야….”



밥 속 콩을 하나하나 모조리 골라낸 동혁을 보고 누나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장면이 낯설어서 힐끔 보기만 하다가 머뭇거리며 수저를 뜬 순간, 누나의 눈초리는 제노에게로 옮겨갔다.



“너도 참 옆에서 혼나는 거 보고도 똑같이 따라 하니.”



한숨을 내쉰 누나가 그대로 멈춘 제노의 밥 위로 나물을 얹어줬다.



“골고루 먹어, 그래야 키도 크지.”



제노는 조금 당황한 탓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만 끄덕였다.

 



 


“누나 오늘 가게 안 열어?”

“응, 눈 오잖아. 오늘 같은 날엔 열어도 사람 안 와.”

“그건 맞지….”

“나가서 눈이나 치워야겠어.”

“지금?”

“어, 너희도 나와.”

“오키-, 야 이제노 빨리 너도 옷 입어.”

“응?”

“눈 치우러 가야지.”



이동혁이 이제노에게 겉옷을 내밀었다. 이제노는 조금 당황했다. 마치 저도 이들의 가족이 된 것처럼 구는 둘이 낯설었다.



“…응.”



그냥 기분이 조금 그랬다.

 



 


온몸이 후끈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 추워서 몸이 움츠러들었는데, 제노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눈을 치우는 것까지는 평범했다. 마당이 이제야 겨우 깨끗해졌나 싶을 때, 갑자기 이동혁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헐, 이제노 눈사람 만들까?”

“눈사람?”

“이글루가 나으려나?”

“음, 재밌겠네.”



이동혁의 그 한마디에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누나로 인해 이제노와 이동혁은 카페의 앞마당에 커다란 이글루를 세워야 했다. 세네 시간을 둘이서 눈밭에 매달린 끝에 두 사람 정도는 옹기종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이글루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긴 했다.



“정말 노력만 했네.”



어느새 지쳐 쓰러진 둘은 본 누나가 굉장히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반응이 겨우 그게 다야?”

“음, 그래. 수고했어, 군고구마 먹어.”



제노는 멀뚱히 누나가 건넨 고구마를 바라보다가 동혁을 따라 껍질을 벗겨 한입 물었다.



“아, 뜨거….”

“뜨거워, 조심해.”



그 무뚝뚝한 말투가 왜 그리도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제노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제 옷은요?”

“아, 다 젖어서 빨았는데. 아직 안 말랐어.”

“내 옷 빌려줄 테니까 나중에 다시 가지러 오던가.”

“…….”

“그냥 하루 더 자고 가, 내일이면 말라.”



누나의 말에 제노의 표정이 눈에 뜨이게 밝아졌다.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제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러던가. 저녁으로 곱창 먹을 건데, 너 곱창 먹니?”

“어, 그게….”

“……?”

“…모르겠어요.”

“아니면 아닌 거지 모르겠어요는 뭐야.”

“먹어본 적 없거든요.”

“헐, 곱창도 안 먹어보고 어떻게 살았냐.”



제노는 대답 대신 살짝 웃기만 했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그 표정에 동혁은 그저 손을 뻗어 제노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야, 존맛이니까 그냥 너도 이번 기회에 먹어봐.”

 



 


오늘은 동혁이 침대, 제노가 바닥이었다. 깨끗하게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둘은 동시에 이부자리에 누웠다. 어쩐지 몸이 피곤했다. 몸을 많이 움직여서 그런가, 눈이 계속 감겨왔다. 몽롱한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동혁아.”



이제노의 목소리였다. 동혁은 천천히 대답했다.



“왜….”

“있지, 나 여기에 와서 처음 해본 게 너무 많아.”

“뭐가….”

“레몬차도, 이글루도, 군고구마도, 곱창도. 난 다 처음이었어.”

“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았길래….”

“소망 보육원.”



그 말에 이동혁은 반쯤 감았던 눈을 바로 뜨고 이제노를 바라보았다. 졸음이 싹 달아나버렸다.



“…뭐?”



제노는 그저 배시시 웃기만 했다.



“몰랐지? 나 고아였어.”

“고아라고, 니가?”

“아마도 지금은 아닐 걸, 아홉 살 때 입양됐거든.”



분명 어느 귀한 집 도련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동혁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하는 제노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우리 아버지는 의사셔, 대학병원 교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참 완벽한 집안이야. 그치?”

“뭐야, 너 지금 자랑하냐….”

“그렇게 들렸나,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그런 완벽한 집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잖아.”

“그렇지, 보통은….”

“그래서 나는 늘 궁금했어, 우리 부모님은 왜 나를 입양했을까. 왜 하필 그 많은 아이 중 나를 입양해야 했을까. 왠지 알아?”

“…….”

“그 집 아이가 죽었대.”

“뭐?”

“내가 입양되기 1년 전이랬나. 8살이던 그 집 아들이 죽었어, 공부도 잘하고 아주 예쁘게 생긴….”



제노는 말을 하다가 목이 메는지 잠깐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착한 아이였대.”

“아….”

“나랑 그 애가 많이 닮았대, 그래서 나를 그 애 대신 입양한 거야.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이제노.”

“단 한 번도 이제노였던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이제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이동혁은 잠시 대꾸할 말을 잊고 제노를 바라보았다.



“늘 그 아이 대신이었어, 그래서 빈 자리라도 채워보려고 정말 열심히 했어. 공부든 뭐든. 어머니와 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어. 근데 이 세상엔 노력한다고 될 수 없는 게 너무 많더라. 내가 내 몸의 피를 모두 빼서 바꾸지 않는 이상 난 그들의 아들이 될 수 없었어. 그냥, 난 그냥 이제호의 대신일 뿐이야.”

“…….”

“노력한다고 노력했는데, 결국 이번에 자사고에서 떨어지면서 나는 이제호의 대신조차 되지 못했어. 나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한 거야, 이제호의 대신도, 이제노도. 나는 그래서-”



이제노가 멍하니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이동혁을 향해 한번 웃었다.



“집을 나와야 했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거야, 나는 이제 그들의 자식이 아니니까, 이제노는 계속 그렇게 읊조렸다.



“그래서 말이야. 동혁아, 나는….”



제노의 눈에선 눈물이 한 방울도 묻어나지 않았지만, 말끝에 서린 물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여기에 좀 더 있고 싶어.”



이제노에게는 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누나,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아 제노 옷 다 말랐어.”



빨래를 개켜두며 누나가 말했다. 정말 담담하다 못해 차갑게 보이기까지 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계속 눈치 보지 말고 말해.”

“사실, 제가….”

“…….”

“갈 곳이 없어요.”



어젯밤엔 그토록 담담하게 말했으면서, 왜 오늘은 또 눈물이 이렇게나 차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목이 메는 목소리로 계속 토해낸 말에 누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



그래, 될 리가 없지. 결국, 이렇게 난 또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혼자가 되어버리겠구나. 제노는 제 옷을 챙겨 들고 풀이 죽은 태도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얼음장 같던 누나의 말투에 한줄기 불길이 서린 듯했다.



“옷 갈아입고 나와, 집이 어디랬지? 도곡동? 앞장서.”

“네? 네….”

“지금 내가 너 데리고 있어 봐야 납치밖에 더 안 돼. 나오려거든 확실히 끝내고 오는 거야.”

“네?”

“말해, 나는 당신네들 죽은 자식 대신이 되어줄 생각이 없으니-”

“…….”

“내가 당신들을 버리겠다고.”

 



 


누나는 곧장 차 열쇠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동혁은 멍하니 집을 나서는 그들을 보다가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갔다 와.”

“집 잘 지키고 있어, 갔다 올게.”

“이제노.”

“어?”

“잘 다녀와.”



제노가 부은 눈을 곱게 휜 채로 미소 지었다.



“응.”

 


◆◆◆

 


제노는 어쩐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혁아.”

“엉, 왜.”

“나 이제 고아다?”

“잘 해결된 거지?”

“응, 친양자 입양도 아니었고…. 그냥 합의로 끝내기로 해서 어려운 건 없을 것 같아. 오늘 서류 냈으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아, 누나가 내 법정대리인 해준대.”



그렇게 말하는 이제노가 너무 말갛게 웃고 있어서, 이동혁은 그냥 장난스레 따라 웃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다행인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이제노가 얼굴에 상처를 단 채로 중얼거렸다.



“모질아, 다치고 왔으면서 뭐가 좋다고 실실 대.”

“누나!”



누나가 제노에게로 다가와 살짝 피가 맺힌 이마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흉터 남으면 어쩌려고 그래.”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와는 달리 다친 제 이마를 쓸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멍하니 누나를 올려보다가 동혁과 누나를 번갈아 바라본 제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헐- 누나, 얘가 우리 비웃는데?!”

“너 내 말이 웃기니?”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그냥….”



너무 따뜻해서, 이제노에겐 생전 처음 맞는 따뜻한 겨울이었다.




*모두 허구일 뿐이니 실제 입양가정에 대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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