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2.

간밤에 예스24에서 엘피 구경하다가 ECM 앨범들 팔길래 스포티파이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오늘 출근길에 들었는데, 운전하면서 듣기 좋은 음악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지금 내 차의 시스템으로는...

작업실 현관 앞에 쿠팡에서 온 멀티탭이 놓여 있었다. 확실히 알루미늄이 안정감 있고 보기 좋구나. 오디오에 관련된 많은 것들이 결국 사이티드인 것 같다. 보기 좋은 기기가 듣기에도 좋다. 그러니까 음질은 실은 눈과 관련된 문제다. 한 마디로 뽀대.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아저씨 같네... 근데 오디오가 아저씨랑 뗄 수 없는 취미인 것도 맞다. 어디서 읽기론 예전엔 중고 레코드도 커버에 여자 사진이 있으면 아무리 무명 아티스트라도 무조건 한등급 비싸게 팔았다니... 요즘엔 또 모르겠다만. 

결국 취미라는 건 돈을 체계적으로? 합리적으로? 테크 트리 타듯이?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수단 혹은 핑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 찔끔찔끔 돈을 써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게 태워버리느니 취미를 가지면 그래도 뭐라도 남으니까. 장비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장비, 그것이야말로 취미의 본질. 등산 골프 오디오 카메라 기타 등등을 생각해보라. 골프 자체의 즐거움 음악의 즐거움 사진 찍는 즐거움은 장비를 사는 즐거움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게 아닐까?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립 반 윙클씨... 근데 정확히 몇 세기에서 오신 거죠?

또 그런 생각도 했지. 오디오에 관한 수많은 신화? 미신?들 중 어처구니 없는 것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근거가 있다. 어제 방에 있는 전열기가 거실에 있는 진공관 앰프에 트랜스 험을 일으킨 것만 봐도, 전기의 차이 선재의 차이 등등에 의해 음질의 차이는 분명 발생하는 것 같다. 문제는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다. 따라서 오디오파일의 세계는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소수의 사람과 자기가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과 자기도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갖고 싶은 사람들과 그런 핑계로 돈을 쓰는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과 그걸 이용해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다. 

근데 진짜 감각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지? 자동차 정비소에 가서 아무것도 수리하거나 정비하지 않고 그냥 본네트 열고 이상 있나 없나 점검만 받고 와도 차가 잘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게 나의 감각인데. 말하자면 플라시보, 그런데 아주 강력한...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비싼 장비는 스스로에게 플라시보를 걸고 그것을 좀처럼 풀리지 않게 해주는 정신계 아이템 같은 거라고... 오디오 커뮤니티 같은 데 보면 정기적으로 케이블을 바꾸면 정말 음질이 좋아지나요? 같은 질문이 올라오고, 거기에 진지하게 그렇다고 답변하는 사람들 사이로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어느 정도 이상 되는 걸 산다는 사람들이 꼭 몇 명씩은 있는 걸 보면... 

그나저나 알리에서 주문한 케이블은 언제 올까. 밤에 발송 메시지가 뜨긴 했던데. 

새로 산 멀티탭으로 교체하고 앰프 켜서 진공관 예열하고 엘피 정리하고 뭘 들을까? 하다가 너바나 [언플러그드 인 뉴욕] 들었다. 좋네... 좋아... 이런 게 막귀의 축복인 것 같다. 뭘 먹어도 맛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처럼. 여기에  알리에서 주문한 Yaqin 포노 프리앰프에 역시 알리에서 주문한 케이블을 연결해서 들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모르겠지만 분명히 좋을 것이다. 비록 정신계 아이템 중에서는 싸구려 축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나 역시 막귀 쪼렙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어제도 느꼈지만 확실히 크래클 같은 게 더 크게 들리긴 한다. 포노 앰프가 이런 잡음들을 더 증폭시키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긴 한다. 진공관 포노 앰프+진공관 파워 앰프 좋은 건지 투머치인지도 잘 모르겠고... 

어느덧 50장 들이 LP 속비닐 다 써서 새로 사려고 들어갔다가 5만원 이상 무료배송이라길래 같이 살 거 없나 한참 들여다봤다. 정말 돈이란 게 그렇다. 안 쓰긴 상대적으로 쉽지만,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멈추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트위터에 스포티파이 결산이 유행이길래 나도 해봤다. 결과는 이랬다. 

--올해 음악을 들은 시간: 50065분

--제일 많이 들은 노래: 엘씨디 사운드시스템 'all my friends' 42회

--올해 들은 아티스트: 2401명

  1. 아이유
  2. 매닉 스트릿 프리쳐스
  3. 블러
  4. 엘씨디 사운드시스템
  5. 리버틴즈

--올해 들은 장르: 161개

  1. 인디록
  2. 브릿팝
  3. 뉴웨이브
  4. 얼터너티브록
  5. 싱어송라이터

--올해 내 삶을 영화로 표현한다면:

  1. 오프닝 시퀀스: 크랜베리스 '링어'
  2. 라이벌 댄스팀과 경쟁하는 순간: 'all my friends'
  3. 빗속에서 사랑을 고백할 때: 더 네이버후드 'you get me so high'

근데 맷 버닝거는 어딨지? 피비 브리저스는? 데이터 가지고 뽑은 통계일 테니 오류는 없겠지만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운전할 때 자주 듣는 리스트에 있는 음악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그렇고... 근데 진짜 노래 많이 듣는구나. 나윤이랑 있을 때, 그러니까 일주일의 절반은 듣지 못하는데도 이렇다니. 심지어 엘피는 들어가지도 않는 거잖아?

다음 노래는 뭐죠? 하다가 속 비닐 없어서 새 바이닐을 뜯기는 그렇고, 맷 버닝거를 틀었다. 어제 소리가 너무 달라서 놀랐는데 다시 들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근데 정말 판이 많이 휘긴 휘었구나. 출렁출렁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은 철렁철렁... 하하... 근데 진짜 왜 이렇게 휜 거지? 하는데 어라? 바늘이 미끄러졌다. 휘어서 그런가? 하면서 있는데 또 미끄러져서 슬립 매트를 가죽에서 원래 있던 펠트로 바꿔보았다. 그러고 다시 트니 다행히 미끄러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휜 데다가 가죽 매트의 약간의 굴곡이 더해져서 그랬던 것 같다.

첫 곡 좋고, 두 번째 곡도 좋고... 단촐한 구성의 앨범이라 그런지 진공관이랑 확실히 잘 어울렸다. 공간이 넓어지고 소리가 더 부드럽게 맑아진 느낌? 하하 요즘 부쩍 이런 표현을 쓰게 되는데 아직도 너무 쑥스럽다... 일기장에 쓰는 건데도... 

그리고 문제의 'One More Second' 나왔다. 어라? 어제랑 달라... 이건 내가 늘 듣던 그 노래가 맞다...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생각하면서 과연 오디오 광인들은 이 현상을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결국 이것 또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과 연관이 있는 거구나(당연하게도). 그러니까 외계인을 믿고, 사후세계를 믿고, 그런 것처럼 오디오를 믿는 거지. 아무튼 좋다. 디지털 앰프+음원의 조합하고는 확실히 달랐다. 

알리에서 케이블 어디쯤 오나 보러 갔는데 받는 사람 이름이 work로 되어 있었다. 뭐지? 일이나 하라는 건가? 이미 발송된 거라 어쩔 수 없고 설마 그것 때문에 반송되거나 하지는 않겠지. 케이블은 그렇다쳐도 야친 앰프는 나름 고가라 스토어에 확인 요청했다. 혹시 이름이 work로 되어 있으면 keum jungyun으로 바꿔달라고. 그리고 영수증은 세일 전 가격이 아닌 세일 후 실구매가로, 그러니까 150달러 미만으로 적어달라고. 그래야 관부가세를 물지 않으니까... 소소하게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아... 

앰프 그냥 끄기 아쉬워서 제프 버클리 [grace] 들었다. 처음 엘피로 들었을 때 실망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 소리가 났다. 하하하... 일이나 하자... 

피치포크 보다가 dltzk 앨범 커버가 맘에 들어서 틀었는데 좋았다. 디지코어라고 하던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어떤 느낌으로 지은 조어인지 알겠는 느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포티파이가 제공하는 자비스 코커와 스티브 매키의 더 트립 플레이리스트 들었다. 전부 처음 듣는 옛날 노래들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노래도, 오늘 하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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