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대장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두훈은 예상보다 화려하게 만들어진 꽃다발을 꺼내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어젯밤 마감이 가까운 시간, 한 남성이 꽃다발 주문해 다음날 같은 시간에 지인이 찾으러 온다 말해줬다. 두훈은 시계를 보며 손님이 올까 분주히 손을 놀렸다. 한 시간 전 형호와 우림이의 ‘관계 개선을 위한 깊은 대화’를 몰래 엿듣느라 작업이 늦어졌기에 더 손을 바쁘게 놀렸다. 마지막 리본을 묶을 때 가게의 종이 힘차게 울렸다.


“두훈이 형! 고우림 못 봤어요?”

“아이고, 민규구나. 한 시간 전에 형호랑 잠깐 나가고 아직 안 돌아왔어.”

“둘이 뭐 화해했대요?”

“응, 오래 대화하다 나갔어. 술 한잔 하고 오지 않을까?”

“적당히 마셨으면 좋겠네. 꽃다발은 뭐예요? 엄청 화려하네.”

“음, 원래 이렇게 만들 생각 없었는데…. 우림이랑 형호 화해하는 거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이렇게 되었네.”

“손님이 엄청 좋아하겠네요.”


도란도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종이 울렸다. 굵은 웨이브 머리하고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은 우아한 여성이 하이힐을 뽐내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달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은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Forest’입니다. 찾으시는 거 있으실까요?”

“… 제 지인이 꽃을 맡겨놨대서 찾으러 왔어요.”

“아, 이 꽃다발 주인이시구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리본만 장식하고 바로 드릴게요.”

“아뇨, 제가 원하는 꽃은 그게 아니에요.”

“네? 어…. 당신, 인간이 아니군요.”

“이제 두 번은 안 당하나 봐?”

“민규야, 너 돌아가.”

“두훈이 형?”

“어서!”

“이런, 아가야 어딜 가니?”


여자는 긴 다리로 민규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민규는 당황해하며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두훈은 민규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 잔뜩 긴장했다. 여자는 두훈의 턱을 쓸어 만지면서 천천히 향을 맡았다. 황홀한 것을 맡은 듯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찾았어.”

“… 민규는 보내줘. 당신이 원하는 건 나잖아.”

“내가 왜? 저 아이도 별미일 것 같은데. 맛있는 냄새가 나.”

“… 형? 이게 무슨 일이에요?”

“… 민규야, 신호하면 뛰어.”

“네?”


민규에게 작게 속삭인 두훈은 빠르게 여자를 밀쳐버렸다. 여자는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지금!”


불길함을 눈치챈 민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구로 빠르게 달렸다. 그러나 여자는 안광을 번뜩이며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입구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민규의 목을 잡고 바닥에 그대로 내리찍었다. 강한 충격에 민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크억!”

“민규야!”

“깜찍한 전략을 짰네. 어림도 없지만.”

“큭…. 혀… 형…!”


민규는 여자의 강한 악력에 점점 목이 죄여 왔다.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손톱으로 여자의 손목을 긁었지만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여자의 이가 날카롭게 빛났다. 반짝이는 이가 민규의 목을 향하자 두훈이 소리쳤다.


“제발! 민규는 건드리지 마!”

“하하, 눈물겹네.”

“제발….”


두훈이 무릎 꿇고 빌자 여자는 민규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민규가 기침을 하며 안심하는 순간 여자는 민규의 얼굴을 발로 차 버렸다. 그대로 민규는 정신을 잃었다. 여자는 뻗어버린 민규를 넘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두훈에게 향했다. 새빨간 네일이 돋보이는 손으로 진득하게 두훈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여자는 더욱더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따라올 거지?”

“… 그래. 마음대로 해.”

“착해라.”


꽃집은 만신창이가 되고 기절한 민규만이 바닥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


“형님, 저 왔…. 뭐야.”

“어…? 민규 형! 정신 차려요!”

“… 두훈 형님은 어딨지?”


형호는 엉망진창인 가게 안을 뒤졌지만 두훈을 찾지 못해, 욕지거리를 내뱉고 위층으로 다급히 올라갔다. 1층에 남은 우림은 민규를 흔들어 깨웠으나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목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에 우림은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집에서 내려온 형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벽을 내리쳤다. 분노를 고스란히 받은 벽은 충격을 참지 못하고 으스러졌다.


“어떤 개새끼가….”

“… 민규 형부터 옮겨야겠어요. 형이 깨어나야 단서가 있을 것 같아요.”

“뱀파이어 소행이야. 미약하게 역겨운 피 냄새가 나.”

“왜, 왜 뱀파이어들이 여길 노린 걸까요?”

“모르겠어. 일단 민규부터 옮기자.”


침대로 옮겨진 민규 옆에 우림이 의자를 가지고 앉았다. 차가운 얼음주머니를 손수건에 감싸 퉁퉁 부은 민규에 볼에 대며 간호했다. 얼음의 차가운 감각에 민규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벌떡 일어나 손으로 방어자세를 취하고 벽 구석으로 향했다.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으아악! 살, 살려주세요!”

“민규 형! 저 우림이에요! 형!”

“우, 우림이…?”

“형 괜찮아요?”

“흐… 흑…. 우림아….”

“형 이제 괜찮아요.”


민규는 무릎을 감싸 안고 엉엉 울었다. 처음 겪는 죽음의 공포는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우림은 조용히 민규의 손을 잡아주며 위로를 전했다. 저 멀리서 물이 가득 든 컵을 들고 형호가 천천히 다가왔다. 민규는 컵을 받아 다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무슨 일이 있었어.”

“어떤, 어떤 여자가 갑자기 와서….”


민규는 더듬더듬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이 계속될수록 형호의 얼굴은 점점 분노가 가득 찼다. 민규가 말을 마무리할 때쯤엔 방에 형호의 이 가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그때 민규의 대화 중간에 사라졌던 우림이 꽃집에서 무언갈 들고 올라왔다.


“그 개 같은….”

“형호 형, 꽃집에서 이걸 찾았어요.”


우림이가 들고 온 것은 빨간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초대장이었다. 형호에게 주는 초대장.


‘당신을 미식회에 초대합니다.’


형호는 종이를 한 손으로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미식회’는 뱀파이어 무리 내에서도 질 나쁘기로 유명한 무리였다. 인간은 물론, 같은 뱀파이어라도 피 맛만 좋다면 잡아다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고문하고, 가지고 놀고, 나중엔 피를 뽑아 먹는 녀석들이었다. 잡혀간 장난감들은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쉽게 죽지도 못했다. 그런 곳에 두훈이 알려지고, 잡혀갔다니. 형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 잡혔다.

그쪽에서 먼저 초대장을 남겼다는 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 좋은 피를 너만 맛보다니 괘씸죄로 우리가 망가뜨리는 걸 지켜봐라.’란 마음으로 남긴 초대장이었을 것이다.


“제기랄….”

“형, 갈 거예요?”

“가야지.”

“형 혼잔 위험해요.”

“어쩌겠어. 가야지.”

“저도 갈게요.”

“뭐?”

“저도 데려가요. 못 참겠으니까.”

“안돼. 위험해.”

“형 혼자 가는 것도 위험해요. 저라도 있는 게 나아요.”

“… 넌 늑대인간이라 출입도 안될 텐데.”

“형도 저 늑대인간인 거 몰랐잖아요. 빵 냄새 때문에. 그러니까 그쪽도 눈치 못 챌 거예요. 그냥 미식회 초대 선물로 바칠 인간이라 하세요.”

“우림이, 너….”

“저도 제가 아끼는 사람 건드는 거 못 참아요. 복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 그래. 고맙다.”


*


초승달이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길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밤. 두 남자가 한 건물 문 앞에 서있었다. 초대장에 적힌 주소지는 문 너머로 역겨운 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역겨운 피 냄새 사이로 아주, 아주 희미하게 꽃 향기가 났다. 형호와 비슷하지만 커피 향이 빠지고 더 맑은 느낌의 꽃 향기. 두훈의 피 냄새였다. 두 남자는 분노로 이성을 잃지 않게 이를 꽉 깨물었다.

두 남자는 초대장에 대답을 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 어쩌다 글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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