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Radiohead - Decks Dark

연속 재생 필수

대장님 :)

10




   그건 레오의 첫 임무였다. 카르마가 아닌 디의 개인적인 일을 수행했으니 첫 임무나 다름없었다. 레오는 오래전 붉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빅토리아 항구의 마약 밀매선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시궁창 같던 유년 시절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부여해준 디에게 모든 것을 바칠 준비는 끝나있었다. 오랜 시간 걸쳐진 테스트를 통과해 신뢰를 얻은 레오의 첫 임무는 하여주였다.

   쫓아가.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레오는 그 속에 담긴 수만 가지의 의미를 읽었다. 마지막 테스트였다. 레오는 디의 한 마디에 홍콩의 여행지를 일주일 내내 돌아다니며 하여주의 뒤를 밟았다. 백만 불짜리 야경이라는 빅토리아 피크에 걸어 올라갔고 고급 북경 오리 식당 앞에서는 빵조각으로 배를 채웠다. 깨끗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하버시티 명품 매장에는 들어가지 못해 밖에서 온종일 기다리기도 했다.

   첫 임무였으니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일주일 만에 더욱 꾀죄죄한 모습으로 돌아와 보고 외운 것을 빠짐없이 읊는 어린 레오에게, 디는 처음으로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홍콩 정·재계 거물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연예인도 더러 보였다. 침사추이에서 가장 크고 좋은 호텔에서 열리는 모임의 주최자는 어거스트였다. 당연히 모든 비용은 어거스트가 댔다.

   사람들을 무시하고 하대하는 게 기본적으로 깔린 어거스트의 인성이었다. 질 낮은 연예인이라도 등장해 살가운 척을 하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구룡반도의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를 혐오스럽게 보는 표정과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거스트의 눈에 들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아양을 떨었다.

   디는 그런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익혔다. 나이가 많건 적건, 돈이 많든 적든 모두가 디에게까지 고개를 숙였다. 디는 그게 우스웠다. 홍콩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디는 이 파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은 부를 가졌다. 스물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디는 제게 주어진 강점을 이용해 사람을 손아귀에 쥐는 법을 배운 거였다.

   디는 그런 면에서 빼어난 사람이었다. 파티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얼굴, 이름, 걸음걸이, 행동 하나까지 모두 기억했다. 그 원동력에는 역시나 어거스트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향한 경멸과 무시가 깔려있었다. 그저 단순한 재미였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걸 알았다. 사람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축구공을 차고 뛰어노는 또래의 아이들과 다르게 디는 가식으로 가득 찬 파티를 지루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피곤할 법 했지만 처음 파티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거스트의 비서, 호석의 부친은 그런 디를 보며 감탄했다. 성인도 쉽게 배우지 못할 포커페이스를 어린 나이에 터득했으니 경외심이 일었다.



   파티가 한껏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디는 술과 약에 취해 해롱대는 사람들 틈을 벗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호텔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침사추이의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린 디는 홍콩의 모든 이들이 제 발밑에 놓인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홍콩 전역의 유명 인사들이 모인 이 파티도, 발밑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고층 건물들도. 디에겐 그저 수족관의 물고기와 같았다.

   디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았다. 취한 사람 몇몇이 테라스로 들어왔다. 디를 발견한 사람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며 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미 기분이 상한 디가 난간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나이가 지긋이 든 사람들은 무표정으로 지나치는 어린 디에게 고개를 숙였다. 디는 본체도 않았다.

   파티가 열리는 펜트하우스를 빠져나온 디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풀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미성년자인 디는 당연히 출입이 불가한 곳이었다. 그러나 디를 본 호텔 가드들은 일제히 조아리며 길을 비켰다. 표정 없는 얼굴로 들어선 디는 풀 파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로 향했다. 일반인들로 가득했지만 펜트하우스의 파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수영복을 입은 성인남녀는 마약 대신 칵테일을 손에 쥔 채 즐기고 있었다.

   처음으로 디에게 흥미가 생겼다.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람들 틈에서 눈에 띄는 어린아이를 본 거였다. 아이는 모친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손을 꼭 쥔 채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곳과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아이의 부모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 치장에 애를 썼지만 아등바등 사는 티가 났다. 없는 돈을 끌어모아 해외여행이라도 온 게 분명했다.

   아이는 제 부모와는 결이 달랐다. 느껴지는 분위기는 굳이 분류하자면 호감에 가까웠다. 늘 무언가에 쩔어있는 사람만 봐온 디에게는 아무래도 신선한 자극이었다. 저 순수한 얼굴에 때가 묻으면 어떻게 될까. 디를 마주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두려워할까. 아니라면 어떤 모습일까.





"..."



   아이는 어린 디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디의 입가 가득 웃음기가 걸렸다. 살면서 처음이자,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웃음이었다.








   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기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어거스트가 매일 끼고 다니던 반지였다. 죽은 아버지를 닮고 싶어서라거나 존경심 따위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경각심이었다.

   어거스트가 죽고 난 후 디에게 넘어간 카르마는 급성장을 했다. 홍콩과 러시아, 한국까지 뻗어나간 그의 세력을 질투하는 이가 비례하게 늘어났다. 주변에는 늘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고 홍콩 경찰까지 그를 주시했다. 카르마는 구룡채성을 다스린 삼합회의 잔재였다. 사실 그 이상의 활동을 보이는 카르마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동시에 디에게는 거머리가 붙었다. 피아오는 사사건건 그에게 간섭했다. 카르마를 탐하기보다는 디를 괴롭히고 싶어 했다. 피아오의 삶은 뿌리 끝에서부터 디를 향한 열등감으로 썩어있었다. 디는 저를 향한 피아오의 증오를 알았다. 그의 집착이 날로 심해진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약점을 숨기는 것. 디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거였다.

   피아오의 송곳니가 당장이라도 디의 목덜미를 뚫을 정도로 날카로워졌을 때였다. 디는 결단을 내렸다. 그에게 이사의 직책을 내림과 동시에 러시아 발령을 내렸다. 피아오가 제게 득인지 실인지 분간하지도 못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디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피아오를 따랐던 이들도 갈팡질팡했다. 변절자를 판단할 잣대였다.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디의 입김이었다.



"러시아 사업계획서입니다. 피아오 이사님이 결재 요청하셨어요. 서명해 주시면 빠른 시일 내에 출국 일정 잡겠습니다."



   디는 대답 없이 손만 뻗었다. 호석은 단단한 파일철을 건네주었다. 디가 담배를 피우며 찬찬히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의 알림음이 울렸다. 디의 허락 없이는 펜트하우스까지 올라올 수 없는 엘리베이터였다. 누가 내릴지는 뻔했다. 금색으로 칠해진 문이 열리고 레오가 피를 뚝뚝 흘리며 내렸다. 호석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호석의 손수건을 건네받고 피를 대강 닦아낸 레오가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눈길도 주지 않던 디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레오를 쳐다봤다. 레오는 그의 몸값 몇 배를 뛰어넘을 카펫에 핏방울조차 묻히지 않기 위해 입구에 가만 서 있었다. 디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호석이 느끼기에 몇억 초의 시간이 흘렀다. 디가 고갯짓을 했다. 그제야 레오는 있는 힘을 다해 지혈하며 천천히 펜트하우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디의 입김에 움직이는 용병은 수없이 많았지만 레오는 특별했다. 충성심이 남달랐다. 레오는 디를 구원이자 망가진 삶의 유일한 빛으로 섬겼다. 어린 레오에겐 디가 전부였다. 원칙도 없고 주관도 없었다. 디를 향한 레오의 행위를 설명하자면 그랬다. 디가 그의 맹목적인 헌신을 이해했을 즈음 레오의 펜트하우스 출입이 잦아졌다.

   피로 물든 손수건을 돌려받은 호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가 어딜 다녀왔는지 알 길이 없어서였다. 그만큼 레오를 향한 디의 신뢰가 깊어졌다는 의미였다. 디의 시선이 호석에게 향했다. 뜻을 알아차린 호석이 고개를 숙이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호석은 카르마에서 일어나는 음지의 일들이 디의 수많은 용병들의 손을 통해 처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주축이 레오가 된 거였다. 아마도 그 범위는 더욱 좁혀질 것이다.

   피아오의 러시아 출국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동시였다. 구룡반도의 한복판에서 여자아이를 다시 만난 건.








   처음에는 사소한 담배 심부름부터였다. 라마섬 너머의 바닷속에 시체가 담긴 드럼통 몇 개가 가라앉고 나자 디는 언제나처럼 담배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 라이터 불꽃 뒤로 레오의 얼굴이 환하게 비쳤다. 디는 불을 붙여주는 레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 디가 레오에게 뿜어냈다. 열세 살의 어린 레오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你会啥? 너 뭘 할 줄 아냐?"

"果以后有机会的话 随时可以展示给大家. 기회만 있다면 뭐든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도 죽여봤어?"

"네."



   디가 수트 안쪽에서 단도를 꺼내 레오의 손에 쥐여주었다. 레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디가 턱짓으로 조직원 하나를 가리켰다. 레오는 망설임 없이 칼을 쥐고 조직원에게 향했다. 어린 레오가 다가오니 비웃음으로 가득했던 조직원의 얼굴에 금방 두려움이 번졌다. 레오가 피가 튀긴 얼굴로 디에게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

   디가 죽은 조직원에게 향했다. 정확히 목덜미 급소 한 번이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디가 시체의 얼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작은 실수도 용납 못한다는 본보기를 눈앞에서 지켜본 다른 조직원들 사이에 공포심이 퍼졌다.



"快点撤. 치워."



   디가 말했다. 조직원들이 움직이려 하자 이를 제지한 호석이 눈치 빠르게 레오에게 손짓했다. 레오는 제 몸집의 두 배만 한 시체를 질질 끌어 비어있는 드럼통에 쑤셔 넣었다. 유난히 벌벌 떨고 있는 조직원 하나가 레오를 도와주었다. 레오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 디를 쳐다봤다.

   디는 레오가 아닌 겁먹은 조직원을 응시했다. 보스의 시선이 정확히 제게 꽂히니 조직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친구가 드럼통의 시체가 되었으니 디는 어쩌면 자신의 실수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는 확신했다. 디가 천천히 다가오자 조직원은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비어있는 드럼통이 뒤꿈치에 닿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디가 다시 담배를 꺼냈다. 가까이 있던 레오가 빠르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 너머로 디의 눈이 번뜩였다. 조직원은 주변에 깔린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디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스스로 빈 드럼통에 다리를 넣었다. 달달 떨리는 몸짓에 드럼통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디가 뒤돌아 창고를 나갔다. 두 개의 드럼통에 시멘트가 채워졌다.

   호석과 레오가 디를 따라 나왔다. 호석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방금 죽은 두 명의 조직원에 대한 이제는 소용없는 보고였다. 디가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외심이 일었다. 디는 두렵고도 위대했다. 호석이 고개를 숙였다. 마이바흐가 부드럽게 디의 앞에 멈춰 섰다. 호석이 문을 열어주었다. 담배를 발로 비벼 끈 디가 차에 타려다가 뒤를 돌아 레오를 내려다봤다.



"아무한테나 쉽게 감사하지 마."



   죽은 이와 함께 일을 도모한 놈이란 걸 모르고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표했던 아까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처음으로 디에게 가르침이란 걸 받았다. 레오가 뻣뻣이 굳은 채 디를 올려다봤다. 디가 무표정으로 레오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차에 올라탔다. 호석이 문을 닫아주며 여전히 돌처럼 서 있는 레오를 곁눈질로 흘끔거렸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레오가 디의 주축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감히 예측했다.








   호석의 예측 대로였다. 레오는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디와 가까운 곳에까지 설 수 있었다. 라마섬의 일 이후로 이 년이 흐른 뒤였다. 레오는 아직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웬만한 카르마 조직원들을 뛰어넘었다. 법에 걸리지 않은 표면적인 일을 호석이 도맡아 한다면 레오는 보이지 않는 일을 수행했다. 누군가를 죽이고, 협박하고, 괴롭혔다. 잡음 없이 처리하는 레오의 방식 덕에 디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레오는 주인만을 맹렬히 추종하는 투견이었다. 주인이 좋아하는 일을 했고, 싫어하는 것은 온 힘을 다해 경멸했다. 경멸의 끝에는 피아오가 있었다. 디의 배다른 동생이자 신경을 긁는 피아오를 누구보다 싫어했다. 피아오의 러시아 출국 일정이 잡히자 레오는 바빴다. 디의 기분에 잔물결이 일지 않게 해야 했다.

   필로테스를 나온 디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피아오가 일궈놓은 곳이었으므로 그가 러시아로 출국하기 전에 다른 이에게 인계를 끝마쳐야 했다. 성가신 피아오가 홍콩 땅에서 사라질 날이 코앞이었다. 디의 표정은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는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여행객들이 많은 침사추이의 번화가까지 걸어 나올 때까지 레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디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잠자코 서 있는 게 다였다. 디의 목적지라든가, 카르마의 다음 사업 방향 구상을 위해 피해야 할 법적 조치 같은 것들은 레오에겐 중요치 않았다. 디가 시킨 것 이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열다섯의 레오가 디와 독대를 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디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끝을 쫓지 않았다. 디가 코웃음을 치며 레오를 돌아봤다. 레오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디가 턱 끝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레오의 시선이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쫓아가."



   디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레오는 처음으로 디의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단란한 세 가족의 뒤를 쫓는 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세상에 없었다. 라이터조차 건네지 않고 가족을 쫓아간 레오의 뒷모습을 보며 디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하버시티로 와. 디가 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금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디가 연기를 뿜어내며 레오가 사라진 골목길을 응시했다. 사 년 전이었지만 또렷이 기억했다. 그 당시 여자아이의 나이와 레오가 겹쳐 보였다. 얼추 그 나이대였다.








   이년 전 여자아이를 봤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불편함으로 치장했던 아이에게서는 이제 여유가 묻어 나왔다. 복권에라도 당첨된 모양이지. 디가 픽 비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훌륭히 일을 수행해낸 레오 덕에 알아낸 정보가 많았다. …하여주. 이름을 여러 번 곱씹었다.



"그리고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피아오의 비서를 봤어요."



   디의 눈이 번뜩였다. 레오가 그를 발견한 건 여주 가족의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러시아 출국 전 구룡반도의 일을 정리하기 위함이라 생각했지만 레오는 금세 깨달았다. 그는 레오와 같이 여주의 뒤를 밟고 있었다.

   피아오는 존재 자체가 디를 향한 열등감, 그리고 집착이었다. 그랬기에 누구보다도 디에게 예민했다. 늘 붙어 다니던 레오가 일주일씩이나 보이지 않는다는 건 분명 수상한 일이었다. 피아오의 러시아 출국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더 그랬다. 피아오는 제 비서를 시켜 레오를 찾게 했다. 그리고 레오가 쫓는 여주를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디가 웃음을 터트렸다. 소름 끼치는 모습에 레오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날것의 민윤기를 들킨 건. 피아오가 뒤를 밟을 것이라 생각 못 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얼마나 하여주에게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으면. 양가의 감정이 충돌했다. 카르마를 지키고 피아오를 짓밟기 위해 이 불장난 같은 짓은 오늘로써 끝을 내야 했다. 디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렇지만 차마 잊을 수 없었다. 또 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你会撒谎吗?거짓말 좀 할 줄 아냐?"



   레오는 화상을 입을 정도의 뜨거움을 느꼈다. 디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가장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얼굴이었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하여주를 들켜버렸으니 디의 포커페이스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를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 레오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레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여주에 관해서 디는 상상 이상이었다. 레오는 그걸 사랑이라 여겼다.






Hozier - Arsonist's Lullaby







   여주가 뒷걸음질 쳤다. 언제부턴지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디는 그런 여주의 모습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팔짱을 낀 채 정신이 나가버린 여주를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응시했다. 스스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여주가 카펫에 주저앉았다.



"물었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디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여주를 뒤로하고 구룡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유리로 향했다. 레오가 두고 간 라이터가 딸각이는 소리가 났다. ………언제부터예요? 여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중요한 부분인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하면 말해주지 않을 건가요?"

"글쎄."



   디가 턱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여주가 있는 힘을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설마 하며 내던진 말에 돌아온 건 충격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주가 입고 있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풀어헤친 속옷에 손을 넣었다. 창밖만 보던 디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은 여주의 가슴에 묶였다.



"이건 두고 갈게요."

"..."

"모두를 죽일 정도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잖아요."



   여주 나름대로 수를 쓴 거였다. 말려버린 둘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고삐라도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디가 비웃음을 흘리며 금박으로 D가 박힌 검은색의 명함을 쳐다봤다. 디가 위스키를 콸콸 부었다. 불을 붙이니 작은 폭발음이 났다. 일초도 되지 않아 펜트하우스로 레오가 들어왔다. 혹시나 디가 다쳤을까 걱정돼서였다.



"원래 자리에 데려다 놔."



   디는 뛰쳐들어온 레오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여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디를 바라봤다.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은 남자치고는 냉정했다. 아니, 냉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디에게는 사치였다. 여주의 얼굴에 두려움, 그리고 일말의 관심이 그려졌다.



"조커라고 한걸 보면 피아오가 게임을 시작한 모양인데."

"..."

"실망이네. 고작 이 정도로 판을 시작한 거라면."



   레오가 여주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여주가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디가 알지 못하는 피아오와 진의 계략을 술술 불어주는 친절을 베풀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디의 관심이 제게 향해있는 거라면, 여주는 자신이 흔들어놓은 판에 그가 발을 내디뎠을 거라 믿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만약 디가 말하는 사랑이 여주가 아는 것보다 얄팍한 것이라면, 여주의 목표는 피아오. 그 이상이 되지는 않을 거다. 디를 향한 묘한 동경심과 찬양은 일찍이 접어두면 되는 거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디는 끝까지 여주를 쳐다보지 않았다. 여주가 분한 숨을 내뱉었다. 끝내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뷔가 잡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을 마친 레오가 펜트하우스로 돌아와 물었다.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레오는 행동이 빠르고 정확했다. 뷔가 잡히면 빼내라는 이전 명령이 있었지만 상황이 급변했으니 다시 물은 거였다. 피아오가 어떤 패를 이용해 목을 졸라올지는 뻔했다. 그리고 여주는, 피아오에게 뺏긴 핸드폰을 돌려받기만을 갈망할 것이다.



"냅둬."



   디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의 약점을 손에 쥐었다 여기며 기세등등한 얼굴들이 훤했다. 디는 제 것을 뺏은 이들의 목을 조르는데 능했다. 그리고 레오는 하여주마저도 손아귀에 넣기 위해 그가 깔아놓은 판에 탄복했다.





이태현 - In my Mind

연속 재생 필수





   홍콩 경무 처장은 태형을 고문했다. 무법 구역인 구룡채성, 그곳을 다스린 삼합회. 경찰의 눈을 따돌려 양지로 뻗어나간 삼합회의 잔재. 경무 처장은 구룡반도 전역을 흔드는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뒤꽁무니조차 쫓지 못하는 카르마와 관련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파에톤 사장 살인 사건의 진범은 단순한 조사 수단일 뿐이었다.

   우지만에 있는 무너져가는 태형의 집에 버려진 여주의 짐, 필로테스에 반강제로 잡혀들어간 여주.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고문을 당해도 태형의 눈앞에는 여주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不要隐瞒了,你还是说出这件事的真情吧。그만 숨기고 이제 진실을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현 홍콩 경찰의 수사와는 조금 달랐지만 아무도 경무 처장의 고문에 대해 말을 얹지 못했다.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카르마를 향한 네놈의 충성심은 알아주겠어. 경무 처장이 욕이 섞인 말을 내뱉었다. 태형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우스웠다. 태형이 입을 다무는 것은, 디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어디 있을지 모를 여주를 걱정해서였다.





"백날 광둥어로 씨불여봐. 내가 답하나."

"说说粤语吧. 광둥어로 말해."

"싫은데."



   태형이 경무 처장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경무 처장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몇 번이나 뺨을 얻어터져 태형의 볼은 붉었고 깊이 패어있었다. 有什么话就痛快地说出来吧,好吗? 속 시원히 말을 해봐, 응? 경무 처장은 이제 어르고 달래기까지 했다. 그만큼 홍콩 경찰은 카르마를 잡고 싶어 했다.

   홍콩 경찰은 뷔 체포와 동시에 빅토리아 항구에 들어선 모든 선박의 화물칸을 뒤졌다. 러시아나 싱가포르, 미국으로 수출되는 모든 선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모두 디의 것이었으며, 마약으로 보이는 것들은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 건진 것은 식용 버섯이 전부였다.

   고문실의 문이 열리고 말단 경찰이 들어왔다. 昨天说的资料都准备好了吗? 어제 말한 서류 다 가져왔어? 경무 처장의 물음에 경찰이 고개를 끄덕이며 회색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경무 처장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을지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경무 처장의 표정이 서류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굳기 시작했다. 태형이 피떡이 된 얼굴로 경무 처장을 쳐다봤다.

   말단 경찰이 들고 있는 회색 봉투를 경무 처장 쪽으로 향했다. 철컥하는 익숙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상황을 파악한 경무 처장이 몸을 피했다. 그러나 서류 봉투 속에 있던 권총은 이미 발사된 뒤였다. 경무 처장의 이마를 관통한 총알이 벽에 박혔다. 상황 파악이 덜된 태형이 경무 처장과 말단 경찰을 번갈아봤다.



"어. 끝났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벗은 석진이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말했다. 석진을 알아본 태형이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조금 실망이야. 이렇게까지 카르마에 대해 충성심이 남다른지는 몰랐는데."



   잡힌지 며칠이나 지났잖아. 석진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태형은 짧은 새 머리를 굴렸다. 고작 저 같은 놈을 구하기 위해 디가 손을 썼을 리 없었다. 결국 카르마에도 분열이 일어나고 있구나. 태형이 이를 갈며 석진을 노려봤다. 석진이 원하는 건, 카르마에 대한 것들을 불어버리는 것이었나? 태형이 입술을 꽉 깨물며 생각했다. 그게 뭐든, 누가 같은 편이든 태형은 상관없었다.



"안나. 보고 싶지 않아?"

"…………."



   견고했던 태형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석진의 입에서 여주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피아오와 함께 있다고 했는데. 혹시 여주에게 무슨 일이 생겨 또 다른 이에게 넘어간 거라면…. 끔찍한 추론을 시작한 태형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석진의 웃음소리가 고문실에 울려 퍼졌다.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의 말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오랜 시간 고문을 당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던 태형이 울부짖었다. 그런 태형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석진이 그의 귓가에 대고 말을 계속했다.



"하여주의 안전은 내가 보장해 줄게. 어때."



   악에 받친 태형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유혹적이었으며 악독하고 잔인했다. 수갑에 짓눌려 터져버린 태형의 손목은 고문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주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일초라도 함께 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를 모질게 짓밟았다. 태형이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재업 끄읏


+) 시간 순서

어거스트의 파티에서 19세 디가 15세 여주를 봄

21세 디가 13세 레오를 주움

23세 디가 15세 레오에게 19세 여주 뒷조사 시킴 (복권 당첨 이후)

현재 29세 디가 홍콩에서 25세 안나를 만남


++)

10화는 과거의 내용이 중심이다 보니 속지를 기준으로 시간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15세 레오가 뒷조사 한 것으로 시작 - 19세 디가 15세 여주를 봄 - 23세 디가 15세 레오에게 여주 뒷조사 시키기 직전의 사건 - 21세 디와 13세 레오의 이야기 - 23세 디가 15세 레오에게 19세 여주 뒷조사 시킴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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