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기니까 인상을 써도 그림이 되네. 이방중을 읽을 때는 천하의 나쁜 놈, 둘도 없는 개새끼였는데 이렇게 실물을 보니 얼굴이 잘생겨서인지 비열하고 못된 인상은 또 아니다. 역시 한 세계를 말아먹을 뻔한 외모는 저 정도는 되어야지 납득이 간다.

“지금 무슨 소릴…… 불장난이라니요?”

당황했다. 당황했어. 갑자기 또 존대하네? 하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부인이 네 외도를 안다고 말하면 당황할 만하지.

기억상실증 컨셉은 더는 써먹을 수 없다. 하지만 뻔뻔하게 행동하기로 한 나는 더는 베아트리체답지 않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께 밤에 당신이 마을에 간 걸 알고 있어요.”

사실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추측했다. 이곳, 로제타 별장은 외졌으니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따로 있을 것이다. 마르첼로가 첩자랑 만나려면 외출할 수밖에 없다. 별장으로 여행을 왔는데 어제 대공 부부처럼 특수한 경우도 아니고 스파이가 손님으로 같이 머물렀을 리 없다. 실제로 소설에서 대공이, 자기 아내가 죽었는데 성 밖에서 밀애나 나눴다고 화낸 대목이 있었다.

두 사람이 몰래 만나려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마을에서, 밤에 만났겠지? 어떤 핑계를 대고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루치오에게 부탁하면 경비병의 진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사가 하룻밤에 진행되었을 리 없으니,

“한 번도 아니었죠.”

최소 두 번 이상 만났겠지.

내가 제법 예리했는지 남편놈의 미간이 도통 펴질 줄을 모른다. 이야. 미남이 나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데 기분이 좋네.

“기억을 잃었다더니?”

“충격을 다스리려고 한 말이에요. 당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돌변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요.”

아까 로제타 별장이 뭔지 전혀 몰라놓고 이러는 거 나도 신경 쓰이긴 해.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실제 베아트리체랑 달라도 상관없다. 아니 다를수록 좋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잖아. 그런 거거든. 응. 충격적일수록 좋지.

“……이혼 얘기도 그래서 한 건가?”

“그래요.”

거기다 어제 한 말도 알아서 짜맞춰 생각해주니 고맙다.

이제 여기서 여자가 누구냐고 저놈을 압박해서 자백을 받아내고 감옥으로 보내버려야지.

더 더 당황해라. 어서.

그런데 마르첼로는 인상만 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않더니 한숨과 함께 구겼던 미간도 폈다. 눈을 감더니만 자세를 고쳐 등받이에 기대어 앉는데, 그는 이제 허를 찔렸다는 얼굴이 아니라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 해보라는 듯 가소로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당당해. 다 사실이잖아. 소설에서 읽은 내용인데 틀릴 리 없어. 그런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조각 미남은 뻔뻔하게도 나와 눈까지 마주쳐왔다.

“왜 내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말투도 반말로 돌아왔다. 언제 당황했냐는 얼굴이다.

“지금 마을에 갔던 사실을 부정하는 거야?”

“아니. 갔었지.”

내 말에 마르첼로는 긍정하며,

웃었다.

모란이 흐드러지듯 환한 웃음이었다. 순간 넋을 잊고 바라볼 정도로 그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정원의 장미들조차 빛을 잃고 한낱 배경으로 전락할 만큼 눈부셨다. 이상하다. 반사판도 없는데 왜 빛나고 난리야. 저 천연덕스러운 얼굴 하며, 쟤는 역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배우나 했어야 했다. 그럼 긍정적인 쪽으로 한 나라를 뒤흔들었을 텐데.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화가 났다. 웃어? 지금 웃어어? 마을에 간 건 맞다면서 왜 바람피운다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고? 어딜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습니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건가?”

“내가 밤마다 마을을 간 건 맞아. 그런데,”

마르첼로가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은실 같은 머리가 차르르 움직이고 나비가 팔랑이듯 긴 속눈썹이 호박 같은 눈동자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가 빛났다. 깍지 낀 손에 턱을 얹은 그는 잠깐 아래를 봤던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술만 마셨는데.”

순간 멍해졌던 정신을 다잡았다. 호, 홀릴 뻔했어. 지가 잘생긴 걸 아는 놈이다. 이놈 이거 베아트리체가 지 얼굴에 약하니까 은근슬쩍 미인계를 쓰려는 모양인데 취향 씹어먹는 미모에 나도 순간 넘어갈 뻔했다. 나도 모르게 그랬구나. 라고 말할 뻔한 것이다.

“술을 마시려고 마을까지 가?”

“응.”

“왜? 성에서 안 마시고?”

“내가 평민 출신이잖아. 값비싼 술도 좋지만 가끔은 주점의 싸구려 포도주가 끌리거든. 그 분위기도.”

나도 고급 주점이라고 칸막이 있고 그런 술집보다는 그냥 삼겹살 구워 먹는 술집이 좋아. 하지만 무슨 그런 핑계로 빠져나가려고. 미소 지은 얼굴을 보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술을 마셨다고.”

“응.”

미인계에 박차를 가하려는지 손까지 잡는데 정말 기가 찼다. 여태까지 베아트리체가 폭발하려고 하면 이런 식으로 달랬던 건가? 웃어주고 손 좀 잡아주고?

불륜 사실까지 부정할 줄은 몰랐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놈이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베아트리체 사후에 란첼로티를 꿀꺽하려면 지금 흠이 잡혀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해서 이러는 거겠지. 그래봐야 나중에는 다 들통나는데. 여기가 현대 대한민국 배경도 아닌데 애가 없는 걸 보면 이미 견적 나온다. 너는 베아트리체를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러나 소설에서도 당장은 베아트리체의 죽음이 이놈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나중에야 엔리코가 밝혀낸다. 루치오를 시켜서 바로 증거부터 모으면 됐는데 루치오는 마르첼로를 의심하지 않았고 초동 수사는 다른 가문들 쪽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증거 인멸할 시간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거 때문에 루치오가 엄청 자책하며 무리해서 몸을 내던지고 그랬었지.

루치오가 얘를 의심하지 않은 것도 문제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역시, 이 새끼가 란첼로티의 행정을 다 틀어쥐고 있었던 게 크다.

하지만 나는 베아트리체가 아니고 네가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거야.

“누구랑?”

설마 마을까지 가놓고 혼자 마시고 왔다고 할 거니? 마르첼로가 외도를 부정해도 누구를 만났느냐를 추궁해야 하는 내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다르지. 옆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한 사람도 아니고 날마다 상대를 바꾸며 바람을 피우셨다?”

지금은 분노에 파르르 떨어야 더 어울렸으려나? 하지만 나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내 반응이 또 베아트리체답지 않았는지 마르첼로가 또 빤히 나를 보아서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대답이나 하라는 뜻이다. 곧 마르첼로가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왜 이래. 남자랑 마셨어.”

“솔직히 말해도 돼.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니까.”

“이런.”

손을 끌어당기기에 힘을 주었다. 원래 나라면 바로 손을 빼냈거나 쉽게 끌려가지 않았을 텐데 베아트리체의 힘은 턱없이 부족했다. 손등에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그러나 입술은 대지 않은 놈이 또 요망하게 웃었다.

“나는 당신밖에 없는데.”

이번에는 아까처럼 홀리지 않았다.

“……거짓말.”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화가 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뭘 당신밖에 없어.

“넌 베아트리체를 좋아하지 않잖아.”

“뭐?”

어떻게 손을 빼냈는지 모르겠다. 마르첼로의 손에 힘이 빠졌나. 나는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이 거짓말로 몇 번이나 베아트리체를 기만했을까. 그녀가 너무나 불쌍해서 화가 났다.

“그러니까 이용할 생각도 쉽게 했겠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까. 부부가 되면, 같이 지낸 시간이 있으면 얼굴만 알았던 사이라도 어느 정도 마음이 생겨야 정상 아니야? 미안하지도 않던? 넌 어떻게 너 좋다는 사람에게 그럴 수 있어?”

“부인. 아까부터 왜 이러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지 마.

“네가 죽였잖아!”

“뭐?”

“네가 베아트리체를 죽였다고!”

계속 목구멍에서 가래처럼 끓고 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참았던 화와 함께 터져나간 말은 아주 잠깐 내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ㄴ 돼ㅇ…

 

 

 

정신 차리자 나는 목이 졸리고 있었다.

눈을 깜박였던가? 아니 모든 것이 이상했다. 나는 드레스를 입고 아침의 정원에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깜깜하고 내 몸 아래엔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몸에 올라탄 누군가가 목을 짓눌렀다.

목이 아파. 숨쉬기가 힘들어. 익숙한 감각이다. 이미 이틀 전에 느꼈던 감각을 나는 또다시 느끼고 있었다.

“윽……!”

뭐야. 과거로 돌아온 거야?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목은 졸리고 있고 뇌에 산소는 점점 부족해진다. 이대로라면 정신을 잃을 거고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목을 쥔 타인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괴한은 또 놓쳤다. 두 번째에도 잡지 못하다니, 방에서 날 죽이는데 실패하면 쫓아가지 말고 바로 도망가라고 명령받았나보다. 하기야 마르첼로도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걸 들켜선 곤란할 것이다.

“마님. 괜찮으세요?”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리아가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살짝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그녀를 보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괜찮아. 두 번째라서인지 훨씬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고 네 방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어. 그래도 잠은 깨웠네. 미안해……

……라고 말할 수 없지.

왜 내가 이세계에 왔던 그 시점으로 되돌아온 거지? 마르첼로에게 네가 날 죽이려 하지 않았느냐고 따져서? 대놓고 베아트리체인 척하기를 포기해서? 그놈에게 따지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내 남편을 감옥에 처넣어야 하지?

“마님……?”

내가 대꾸하지 않자 리아는 다시 나를 불렀다. 얼굴 가득 그녀가 날 걱정하고 있는 게 보여서 지금부터 할 말이 미안했다.

“죄송한데 누구시죠?”

걱정하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내 어깨를 잡은 손을 떼어냈다. 경계심을 가장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누군지… 모르세요?”

“네. 여긴 어디죠? 저는 또, 왜 여기 있는 거죠?”

리아, 내가 자긴 못 알아봤으면서 루치오는 알아봤다고 무척 서운해했었는데.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정하리고 사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해봐야 또 믿어주지 않을 거다. 베아트리체인 척 하기에는 나는 아직도 그녀를 잘 모른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다른 사람 흉내를 낼 자신도 없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나랑 비슷한 성격도 아니고.

그러니 이번에도 나는 이 사람을 몰라야 했다.

“저는……”

걱정스러워하던 얼굴에 충격이 떠올랐다가 침울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시선을 내렸다.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다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다. 그녀에게 내가 누군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말하게 될 것 같았다.

“저는 로잘리아 디 모레티. 모레티 가문의 차녀이며 마님의 시녀입니다. 편하게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자신을 설명하는 목소리는 처음엔 떨렸으나 곧 차분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역시 내가 누군지 말할 걸 그랬나 후회가 됐다. 믿어주지는 않았어도 얘가 날 많이 도와줬는데. 진심으로 날 위해주고 내 편이라는 느낌이었다.

아침 식사 후 리아는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이제와서 궁금해졌지만 들을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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