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 습관처럼 베게 옆으로 손을 뻗었다. 어제 오후 늦게 정재현이 받아온 새 워치를 손에 쥐고 시간부터 확인했다. 혹시나 늦잠 잘까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려면 아직 삼십분은 더 남은 시간이다.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는데 좀 더 잘까...


의미없이 워치 화면을 보다가 몸을 굴려 천장을 응시했다. 어제 정재현은 조사팀 콜을 받고 혼자 숙소를 나섰다. 물론 그러고 두어시간 뒤에 김도영한테까지 연락와서 김도영도 같이 조사팀에 다녀왔다. 나눠서 움직였다보니 작전 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사1팀 팀장은 2, 3팀까지 소집해서 한겸이 도망간 위치를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찾아낼거라고 델타팀의 현장보고도 들을거라고 했댔지. 그 얘기 말고는 정재현과 김도영이 팀원들에게 따로 전달한 얘기는 없었다. 1팀 팀장의 연락을 기다리자는 말을 끝으로 하루가 끝났으니까 오늘 안에 조사팀이 연락을 준다면 곧바로 움직일 거 같은데


센터 안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딱히 사적으로 대화해 본 적은 없는 조사 1팀 팀장의 얼굴을 떠올리다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계획보다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어차피 다시 잠들기는 그른 거 같고, 

 




"와 뿌염 무슨 일..."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 절로 혼잣말이 터졌다. 문태일과 박지성을 대동하고 미용실을 갔던 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다시 염색이나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리저리 여러 일들이 생기고나니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보다 수도꼭지를 열었다. 뭐 이게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까

 

반쯤 마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내며 거실로 나가자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는지 정재현과 이민형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뭔가를 보고 있는 듯한 두 사람에게 가볍게 손인사를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니 머그잔을 든 나재민과 떡하니 마주쳤다. 코 끝으로 커피향이 스치는 걸 보니 아침부터 커피를 내린 모양인데





"벌써 일어났어요?"


"으응 알람도 안 울렸는데 눈이 떠져서"


"잠을 못 잔 건 아니구?"


"아냐 잘 잤어"

 




잘 잤다는 말에도 뭐가 그렇게 못 미더운지 코 앞까지 다가온 나재민이 흠- 하는 소릴 내며 날 살핀다. 아침부터 굉장히 거리감을 좁혀오는 잘생긴 얼굴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는 나재민의 손 끝이 가볍게 내 코 끝을 톡 건드리고 멀어졌다. 

 





"잘 자긴 했나보네"


"잘 잤다니까~ 근데 재민아 나도 커피"


"막 자고 일어난 사람이 무슨 커피야"


"연하게 마시면 괜찮을 걸"

 




고개를 쭉 내밀어 나재민 손에 들린 머그컵 안을 살폈다. 고소한 커피향이 가까이 느껴지니까 더 커피가 땡겨서 자연스레 나재민 옆을 지나쳤다. 물을 조금 더 섞으면 괜찮겠지 싶어서 위쪽 수납장을 열고 컵을 꺼내드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가 열린 수납장을 닫는다. 


컵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누가 닫았나 싶어 고갤 드니 김도영이 등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다. 팀원들이 대체로 키가 커서 거기 맞춰놨는지 수납장도 조금 높아서 발뒤꿈치를 들고 열었던건데 가볍게 수납장을 닫은 김도영이 나재민이 내려놓은 듯한 커피를 한 쪽에 치워놓는다. 

 




"빈 속에 커피는 줄이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었는데, 커피 마시고 싶으면 간단히 뭐라도 먹고 마시자"


"최근에는 빈 속에 마신 적 별로 없는데... 애들은 빈속 아니야?"


"아침 일찍 운동갔다가 챙겨 먹었지 우린"


"...다? 나 빼고 다 운동 갔다왔다고?"


"응. 어제 다들 일찍 쉬었잖아. 누나는 더 자도 되니까 안 깨웠지"

 




알람을 듣기도 전에 일어났으니 나도 꽤 일찍 일어난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센티넬들은 다른 모양이지. 가볍게 눈짓을 하며 거실을 가리키는 김도영을 따라 고갤 돌리니 정재현과 이민형이 있던 자리에 나재민 뿐만 아니라 이제노와 정성찬도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인다. 


이제 아홉시가 넘었을 뿐인데 아침부터 다들 모여서 할 얘기라도 있는건가 싶어 정재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막 씻은건지 젖은 수건을 세탁실에 넣겠다는 이동혁이 방에서 나오던 박지성의 손에 들린 수건까지 들고 거실을 가로질러간다. 다들 아침부터 굉장히 부지런하게 움직였구나...

 




"아니 근데 나는 아침 잘 안 먹는 거 알면서... 직장인한테 커피는 포션인거 몰라?"


"알아. 아니까 더 걱정돼서 그러지"


"그럼 나 지금 커피 아예 못 마셔? 진짜로...? 연하게 해서 마시면 안될까..."

 




알파팀에 들어오기 전엔 한국의 직장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 역시도 커피를 하루에 한 두잔은 마시던 편이었다. 정말 바빠서 커피조차 마실 여유가 없는 날이거나 커피가 안 땡기는 날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커피를 마셨던 것 같은데. 가이드 숙소에서 혼자 지낼때는 문태일한테 커피메이커까지 빌려서 썼었고.


빈 속에 커피 마시는 건 직장다니면서 아침을 먹을 바엔 잠을 더 자고 출근하겠다는 마인드까지 자연스럽게 겹쳐져서 생긴 습관이긴 했다. 혼자 자취하느라 김도영처럼 이렇게 옆에 붙어서서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김도영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지는 이미 커피향을 잔뜩 맡아버린 탓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김도영을 힐끔대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자, 때마침 주방에 들어온 박지성이 김도영이 치워놓은 커피를 슬쩍 갖고간다. 


허공에서 박지성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박지성이 가볍게 윙크를 하며 손짓을 했고, 나와 박지성이 꼼지락대는걸 모를 리 없는 김도영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누나가 이렇게 마시고 싶어하는데 그냥 넘어가자 형~"


"맞아. 다음에는 빈 속에 안 마실게~"

 




손가락으로 내 뺨을 가볍게 톡 건드린 김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나저러나 김도영이 져줄 걸 알고 있었어서 김도영을 보며 씨익 웃고는 박지성과 함께 주방을 벗어났다.


박지성이 건넨 머그컵을 손에 쥐고 넓은 거실에 빙 둘러앉은 팀원들 사이에 쏙 들어가자 나재민이 제 옆자리를 통통 쳤다. 비어있던 자리를 자연스레 채우자 테이블 한 쪽에 올려놨던 작은 상자가 내쪽으로 밀려왔다. 


커피를 홀짝이며 내 앞에 자리잡은 상자를 힐끔대니 내 발치에 자리잡고 앉아있던 이제노가 상자를 직접 연다. 상자 안에 담긴 건 샌드위치와 각종 쿠키류였다. 운동 갔다가 아침도 먹었다더니 그 사이에 생활동까지 다녀온건가. 잠깐 생각하는 사이 이제노가 샌드위치를 꺼내들었다.

 




"생활동까지 갔다왔어?"



"아뇨. 누나 생각나서 식당에서 포장해왔어요. 오늘 아침엔 한식이 없어가지구"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내 생각이 났다는 말이 감동스러워서 절로 웃음이 난다.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이제노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내 손길이 간지러운지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이제노가 귀여워서 하얀 볼을 콕콕 건드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이민형이 실소를 터트린다. 

 




"아니 누가보면 제노 너가 포장한 줄"


"어? 제노가 해온 거 아니야?"


"얘기는 제가 꺼냈죠. 신나서 식당 달려간 건 얘고"

 




엄지손가락으로 제 옆의 정성찬을 가리키는 이민형의 말에 오-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노가 앙큼하게 정성찬 대신 생색을 냈단 말이지. 


이민형의 사실적시에도 이제노는 꽤 뻔뻔한 표정을 지었고 그 앞에서 정성찬이 허- 참나- 하며 실소를 뱉었다. 어이없음이 가득한 정성찬때문에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만 가이딩을 방사를 풀어냈다.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버린 가이딩은 이제 내 마음대로 표적 가이딩도 되는 수준이라 정확하게 정성찬에게만 가이딩을 해주자 곧바로 가이딩을 느낀 정성찬의 입꼬리가 하염없이 위로 치솟는다. 


실실 웃는 정성찬의 파장이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걸 느끼자마자 그에게만 풀어냈던 가이딩을 모든 팀원들이 흡수할 수 있게끔 넓게 펼쳤다. 꽤 여유로운 아침이니 가이딩이 크게 닳은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꽉꽉 채워놓는게 모두에게 좋을 테니까.


정재현이 알파팀 팀원을 증원한 뒤로 팀 전체가 모였다하면 대가족이 되고 마는 상황이라 매번 내가 일일히 손 잡거나 안아줄 수는 없다. 그렇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안아준다고 해도 여덟번을 해야 하니까. 이래서 팀가이드에게는 방사 가이딩이 중요하다는걸 새삼 느끼던 차에 나재민이 손수 내 손목을 잡고 슬쩍 올려준다. 

 




"가이딩도 가이딩인데 먹고 해요."


"아 응.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일찍 일어나서 같이 먹을 걸 그랬나봐"


"굳이 뭐하러. 당장 작전 나가는 것도 아닌데 누나는 더 자면 좋지"


"그런가"


'"뭘 그런가야. 당연히 그렇지. 센터 들어오기 전에도 체력 별로였다면서요. 누난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야 돼"


"으응..."

 




또박또박 내뱉어진 말을 들으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재민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으니까. 원래도 체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고, 문태일과 함께 하던 훈련에서도 항상 체력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운동해서 체력을 길러야된다는 말을 듣고도 그냥 흘려버리는 게 일쑤였다. 그래도 팀가이드 된 뒤로 어쩔 수 없이 현장을 같이 뛰어다니고 이리저리 훈련도 하면서 직장 다닐때보다는 체력이 좋아지긴 했지만 센티넬들이 보기엔 별 차이가 없을 거 같다. 게다가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더 어리면 체력이...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나재민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킥킥 웃음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갤 돌리자 나재민 옆에 있던 이동혁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킥킥대며 나재민의 팔을 툭툭 치고 있다. 

 





"누나 지금 눈에 초점이 사라졌는데"

 




그랬군. 나를 가리키며 웃는 이동혁을 보다 나재민을 힐끔 쳐다보니 나재민도 웃기긴 한지 피식피식 웃고 있다. 웃는 둘을 보다 다시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베어물었다. 다들 조사팀에서 연락오기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그런 것 치고는 아침이 꽤 여유롭고 소소한 분위기라 자연스레 긴장도 풀린다. 


내가 다 먹기까지 기다릴 생각인지 샌드위치를 먹는 내내 팀원들은 저들끼리 소소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물론 평온한 표정과 목소리에 비해 내용은 그렇게 마냥 평온한 것들은 아니었지만.

 




"원 바이오가 엮여있다고? 거기 국회의원 했던 인간이 대표로 있는 곳 아닌가"


"센터장님 말로는 그래. 한겸이 센터에 있을 때 우리 붙잡고 했던 것들도 당시 몇몇 정치인들 지원받고 연구목적이라고 입장냈었잖아"


"러시아 조직이 엮인 건 빼박인데 정계 뒷돈까지 엮인거면 정말 그 늙은이 돈이라면 마냥 좋다고 달려들었단거네"

 




마지막으로 남은 샌드위치를 한 입에 털어넣고 팀원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원 바이오면 몇 년전부터 급부상한 제약회사일텐데. 생소한 이름의 회사치고는 거기서 나온 약들이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름도 알려졌던 걸로 기억한다. 회사에 센티넬 가족이 있는 동료 직원이 그 회사 약이 센티넬에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거기 약이 센티넬한테 좋다고 회사 동료가 얘기한 적 있었어"


"센티넬에게 좋은 약이라고?"


"같은 사무실에 주임 한 명이 자기 형이 센티넬이라고 했었거든. 근데 등급이 낮아서 일반인들이랑 같이 지낸다고 했는데 각성 부작용이 있댔나 뭐랬나... 여튼 그래서 거기서 나온 센티넬 전용 약 먹는데 효과 좋다고 했었거든. 근데 무슨 약인지까지는 못 들었고"

 




빈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당시 회사 동료가 자기 형에 대해 몇 번 얘기했던 적이 있어서 그게 기억나긴 하지만 약 이름이 뭐였는지 자세하게 들은 기억은 없다. 사무실에 가이드 직원도 몇 명 있었으나 그들도 등급이 매우 낮았고 회사 동료도 센티넬 전용 약이라고만 했었어서.

 




"원 바이오에서 센티넬 전용 약이 나온 게 있었어?"


"전에 정우형이 지나가듯 얘기해 준 적 있기한데. 등급낮은 센티넬들 때때로 이능 부작용 같은 거 오면 완화 시켜주는 약이라고 그 정도만 들었는데 난"


"그 늙은이만 잡아들일 게 아니네 그럼"


"열시에 안보국 팀장 회의가 있어. 러시아 쪽은 어느 팀이 맡을 지도 정해야되고 원 바이오 쪽도 꼬리 잡으려면 우리만으로는 부족해서.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다 처리해야 돼"

 




다른 팀의 일점 오배 쯤 되는 규모이긴 하지만 정재현 말대로 우리만으로는 제대로 끝을 보기가 어렵겠지. 어차피 한겸을 뒤쫓는 김에 그와 엮인 건 다 처리해야된다는 말은 모두가 공감하는 듯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나름의 생각을 하는지 거실엔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위로 다시 가이딩을 풀었다. 그리고 내 가이딩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이제노가 테이블 아래 쪽에서 웬 종이 세 장을 꺼내들었다. 

 




"성찬이랑 숙소 오는 길에 1팀 팀장님한테 받았어. 일단 의심되는 거처 세 곳으로 추렸다고"

 




이제노가 내민 종이는 테이블 정중앙에 자릴 잡았다. 종이 세 장엔 의심되는 곳의 위치와 그 주변을 상세하게 표시한 지도가 있고 지도 이미지 아래엔 그 주변에서 잡히는 센티넬의 파장 종류가 적혀있다.


 정보국 레이더상으로는 가장 낮은 등급의 파장까지 세세하게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인지 이미지 아래에 적힌 센티넬 등급은 대부분이 E등급 아래였다. 


하지만 레이더상으로 잡히는 파장만 갖고는 등급 낮은 센티넬들이 많은 곳이라고 해서 의심선상에서 제외시킬 수가 없다. 델타팀 눈 앞에서 한겸이 사라졌고 그가 어떤 약물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아직 정확하게 확인된 바 없으니까


테이블 정중앙에 놓인 종이를 각자 말없이 살펴보고 있다. 의심되는 위치 주변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려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눈들을 힐끔거리다 지도 아래에 적힌 센티넬 등급을 한 번 더 읽어내렸다.


센티넬가이드 각성 시 기록상 가장 낮은 등급인 G등급은 거의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수준인 걸로 알고 있다. G등급 센티넬은 가이딩을 받더라도 가이딩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정도라고 하니까 센티넬이라기보단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텐데 유독 G등급이 많이 적힌 곳이 있어 제일 왼쪽에 놓인 종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빈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며 그 종이를 가리키자 맞은편에 있던 이민형이 그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종이를 손에 쥐고 지도 아래에 적힌 센티넬 등급을 확인하는데 이 주변은 신기하게 G등급이 많다. 비율로 따지면 아무래도 제일 많아서 그런가

 




"G등급이 비율로 따지면 제일 많을 수밖에 없겠지?"


"각성 비율로 따지면 G보단 E가 더 많아요. 그래서 E등급 중에는 국가시험 쳐서 연구소나 의국 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꽤 있고. 생활동에도 E등급인 사람들 있을걸"


"아 그래?"



"네. 오히려 일반인이냐 센티넬가이드이냐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이 혼란 느끼는 등급이기도 하고"

 




이민형의 말에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한 번, 테이블에 놓인 나머지 종이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보고는 손에 있던 걸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내 손이 움직이는 걸 말없이 응시하던 김도영이 무언가 대답을 원하는 듯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이 위치는 유독 G등급이 많이 적혀있길래 봤어. 민형이 말대로면 E등급이 많아야 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이건 뭐 공식적으로 표본 잡고 낸 통계도 아닐 뿐더러 그냥 랜덤이니까 별 거 아닌거 같기도 하고"

 




내 말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내가 내려놓은 종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박지성이 손을 뻗어 내가 내려놨던 종이를 다시 쥐면 김도영이 그 옆에서 그걸 뚫어져라 살핀다. 그 때 작은 진동소리와 함께 정재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직 열시도 안 됐는데 벌써 가나 싶었더니 정재현은 숙소 현관이 아닌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방문이 열리고 편한 차림으로 앉아있던 정재현이 멀끔한 정복 차림으로 걸어나온다. 아무래도 각 현장팀 팀장들을 모아놓고 하는 중요한 회의라 그에 맞춘 차림을 해야 되나 보다. 사안이 사안인만큼 팀장들만 있는 회의는 아니겠지. 

 




"정보국장님도 참석 예정이래?"


"응. 총무팀장님도 오실 거 같아. 언론 대응은 총무팀에서 해야되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재현이 현관 옆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다들 편한 차림으로 있는 탓에 혼자 정복을 입고 있는 정재현이 유독 눈에 띈다. 각 잡힌 정복은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고갤 돌린 정재현이 어느새 날 쳐다보며 웃고 있다. 


빤히 쳐다보던 걸 들킨 거 같아서 큼큼 헛기침을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데 이쪽으로 가까이 걸어온 정재현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종이를 손에 들고 빠르게 읽어내린다. 이미 수 차례 읽었으니 위치도 머릿속에 확실히 입력했을텐데 또 한 번 확인한 정재현이 그 종이를 반으로 접고 손에 쥔다. 

 




"회의할 때 가져가려고?"


"정보 공유는 해야 되니까"

 




정성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정재현이 가볍게 정성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시간을 확인한다. 열시까지는 이제 십분 남짓 남았다. 회의 끝나는대로 곧장 오겠다는 말과 함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정재현이 숙소를 빠져나가고 거실엔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회의하는 동안 각자 개인훈련 하던지 총기 정리하던지 하자. 재현이 오는대로 움직여야 될 수도 있으니까"


"오케이. 그럼 난 훈련장에 좀"


"형 나도 같이 가"

 




짧은 정적은 김도영의 지시와 함께 사라졌고 이동혁과 박지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잠깐이라도 훈련을 하러 가겠다는 두 사람 옆으로 나재민도 따라서는 걸 보며 말보다 빠르게 나재민과 이동혁의 손을 낚아채듯 쥐었다. 그리고 박지성을 보며 고갯짓을 하자 박지성이 푸흐흐 웃는다. 

 





"가이딩 거의 다 차서 괜찮은데"


"그래도 꽉꽉 채우면 더 좋지"

 




모두의 워치에 이미 진작 초록빛이 떠 있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김도영말대로 정재현이 오는대로 움직여야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이딩이라도 더 꽉꽉 채워줘야겠다 싶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센티넬의 체력이나 훈련을 따라갈 수는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으니까


내 앞에 털썩 주저앉은 박지성이 내 허벅지를 베고 잠시 눈을 감는다. 이미 많이 채워진 덕분에 가이딩이 스며드는 속도가 느렸지만 내 눈으로 세 사람의 워치에 백이라는 숫자가 뜨는 걸 보고 나서야 마음 놓고 가이딩을 끊어낼 수 있었다. 


가이딩을 완전히 풀로 채운 셋이 훈련장에 다녀오겠다며 숙소를 나가고 이제노와 이민형은 제 방에서 총기를 가져나와 거실에 펼쳤다. 그 옆으로 정성찬이 주저앉아 총기를 확인하고 탄약의 개수를 확인하며 탄창에 집어넣는다. 


누가 봐도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있는 모양새라 말없이 세 사람 주변으로 가이딩을 풀었다. 괜찮다며 만류하는 멀티 두 사람의 말에도 어깨만 으쓱이고 가이딩을 완전히 채웠다. 이제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워치에 뜬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빈 머그컵을 들고 부엌에 들어섰다. 

 




"이리 줘, 내가 씻을게요"


"아니아니 내가 할게"


"어차피 내가 손 댄김에 같이 씻으면 돼"


"그러면... 고마워"


"별 걸 다"

 




싱크대 앞에 서 있던 김도영이 익숙하다는 듯 머그컵을 갖고 간다. 말없이 머그컵을 씻는 김도영 옆에 선 채로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만 쳐다봤다. 


뭔가 내 방에 들어가기는 좀 그런데, 그렇다고 막상 할 말은 없어서 그냥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김도영 역시도 말없이 설거지에 집중하는 듯 했고 물 흐르는 소리만 나던 그 때 수도꼭지를 잠근 김도영이 고갤 돌렸다. 

 




"이번에 현장 나가면 지금까지 했던 작전과는 다를 거야"


"그렇겠지? 언론 대응 얘기도 하는 걸 보면 한겸 잡으면서 그 제약회사와 연관된 정치인도 잡겠다는 말 일테니까"


"작전 자체가 하루만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응"


"아니 그렇게 태연하게 대답할 게 아니라"

 




김도영이 젖은 두 손을 탁탁 털어내자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싱크대 안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갑자기 이능을 썼다고? 갑자기 튀어나온 제 이능에 본인도 흠칫 놀랐는지 싱크대 안에 떨어진 얼음 알갱이를 힐끔거린 김도영이 금세 마른 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다시 날 쳐다본다. 

 





"지금까지 그 어떤 현장보다 위험할 수도 있어"


"알아"


"애초에 한겸 목적이 가이드였고, 납치한 전적도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센터에 있었으면 좋겠다는거지"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꽤 진지한 눈빛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김도영이 어떤 마음에서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말하는 지를 아니까 쉽게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다. 김도영말대로 일부러 나와 나재민을 떨어트려놓고 나재민 눈 앞에서 나를 납치한 전적도 있던 놈들이니까 김도영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다를까, 언제부터 우리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거실에 있는 세 사람의 시선이 여기에 꽂혀있다. 고갤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정성찬은 태연한 척 고갤 돌렸고 이민형은 누가 봐도 내 시선을 피한다. 하지만 이제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그렇겠지만 유독 S급인 두 사람이 더 예민하게 신경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한겸과 직접적으로 엮인 적이 있는 이들이라 더 그렇겠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S급 세 사람도 마찬가지일거란 생각이 들고 나니 조금 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슨 마음인지 잘 알겠어. 근데 도영아 나 혼자 센터에 있으면 나는 그게 더 불안하고 무서울 거 같아. 내 눈 앞에 너희가 없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누나"


"너희가 나 엄청 걱정하고 아끼고 좋아하는 거 알아. 고마워. 근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어.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건 가이딩이고 그건 너희한테 제일 필요한 거잖아."


"......"


"너희가 나 지키고 싶어하는만큼 나도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너희도 알다시피 나 나름 치고빠지고 잘 하잖아 현장에서"

 




말간 두 눈에서 불안감이 읽혀진다. 불안을 느낄만큼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구나.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만 보는 김도영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서 두 팔을 뻗었다. 김도영을 끌어안고 등을 톡톡 다독이자 머리 위에서 한숨소리가 스치더니 이내 나를 더 꽉 끌어안고서 내 어깨에 이마를 폭 기댄다. 

 




"미안해. 누나를 아무것도 못하게 하려고 해서"


"에이 별 걸 다 미안해하네. 나는 더 기쁜데? 그만큼 내가 좋아서 걱정했다는건데 뭐"


"응. 좋아해. 말로 다 담을 수 없을만큼"

 




어라, 이렇게 갑자기 진지해진다고? 처음 들은 건 아니지만 우리 둘만 있는 공간도 아닌 곳에서 이런 얘기를 들으니 괜히 귀끝이 화끈거린다. 차마 김도영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등만 다독이는데 아잇- 하는 소리와 함께 슬리퍼가 척척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가 누나 훨씬 더 좋아해!"

 




큰 소리로 외친 정성찬이 나와 김도영을 끌어안았다. 이게 뭔가 싶어 정성찬을 올려다보자 히히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차 있다. 정성찬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웃음을 터트린 김도영이 고갤 절레절레 내저으며 나를 품에서 떼어냈고, 그 너머로 이제노가 허공 위로 손을 쫙 뻗는다. 

 




"그만 놀고 이거나 마저 합시다~"

 




정확하게 김도영과 정성찬을 한 번씩 가리킨 이제노가 바닥에 잔뜩 널린 총기를 다시 가리키며 말했다. 훈련간 세 사람과 정재현의 총기까지 한꺼번에 정리중인 모양이다. 한 쪽으로 밀려난 테이블과 바닥에 널린 총기를 보다 먼저 몸을 틀자 두 사람도 다시 거실로 향했다. 

 












 









개인 훈련을 끝낸 세 사람이 돌아오고 나서도 정재현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다. 벌써 열 한시가 훨씬 지났는데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모양이다. 벽시계를 힐끔거리는 건 나 뿐만이 아니었고 다들 말은 안 해도 회의가 길어지는 게 조금 걱정되는 듯했다. 

 




"보통 이렇게 안보국 팀장 다 모아놓고 회의하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넘겨?"


"아무래도? 팀장들마다 작전 스타일이 달라서 협의할 것도 많고, 팀장급 회의라고 하면 사안이 간단한 건 아니니까요"


"재현이형 브리핑 시간이 길었을 수도 있어요. 그동안 우리 팀만 알고 움직였던 것들도 많으니까"

 




이동혁말대로 정재현이 그동안 알파팀이 조사했던 것들을 전부 다 공유했다면 그의 브리핑 시간만 해도 꽤나 길었겠구나. 어쩌면 본 회의는 이제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자연스레 시계로 향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시계만 보고 있는다고 당장 정재현이 연락을 주는 것도 아니고 시계만 계속 보고 있으면 오히려 더 팀원들을 신경쓰이게 만드는 것 같아서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리모컨을 주워들었다. 집이 너무 조용하다고 정성찬이 아까 틀어놓은 거였지만 그 누구도 티비 화면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막 씻고 나온 세 사람은 식당에 들러서 포장해온 음식을 확인하고 있었고 점심부터 먹고 하자는 김도영 말에 다른 애들도 거실과 부엌을 왔다갔다 하는 중이었다. 나도 움직이려다 이동혁의 만류로 가만히 있는 중이었고.

 




"어- 얘들아 저거"

 




채널을 돌리다가 무심코 멈춘 화면이었다. 드라마 재방송 중인 화면 아래에 속보랍시고 뜨는 게 눈에 띄어서 본능적으로 채널을 멈췄는데 속보 내용이 꽤나 충격적인 내용이다. 

 




"센티넬가이드 전 센터장 이모씨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뭐야 저거?"


"전 센터장이 한 둘도 아닌데 누구야 저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뉴스 속보에 다들 얼빠진 얼굴로 눈만 깜빡인 채로 서 있다. 역대 센터장의 이름을 달달 외우고 사는 것도 아닐테고 이모씨라고 하면 제일 흔한 성씨 중 하나라 그런지 팀원들도 누군지 단번에 떠오르지 않나보다. 


리모컨을 손에 쥔 채로 멍하니 티비 화면만 응시하는데 속보내용은 금방 사라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전히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다. 지금 막 뜬 속보라면 이제 곧 회의 중인 사람들 귀에도 들어갈텐데

 




"지금 센터장님 말고 그 전은 김씨였잖아"


"어. 그리고 그 앞이 이씨였나?"


"맞아. 전전 센터장이 이씨. 근데 그 사람은 국방부에서 보낸 일반인이었으니까 경찰이 조사하겠지 뭐. 속보만 봐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도 없고"


"자살이나 타살 아니어도 그냥 병이나 사고사 일 수도 있잖아"


"근데 타이밍이 절묘하다 굉장히"


"에이 설마..."


"회의실 사람들도 소식 들었겠네"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대화를 나누는 팀원들을 쳐다보다 다시 티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재민말대로 속보만 봐서는 뭐 때문인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근데도 묘하게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이미 속보내용이 사라진 화면을 다들 한 번씩 힐끔거리며 자릴 잡았다. 


애들이 포장해 온 음식을 세팅하고 막 숟가락을 쥐려는데 김도영 워치가 반짝거린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콜을 연결한 김도영이 짧게 대답하자마자 그 너머에서 정재현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막 회의 끝났어. 현장은 오늘 저녁에 바로 나가기로 했고'


"그래 알았어. 일단 와서 얘기해"


'응 바로 갈게'

 




정재현 목소리를 듣자마자 시선이 벽시계로 향했다. 열두시 반이 넘은 시간이다. 회의를 두 시간 넘게 했네. 짧은 콜은 금방 끊겼고 정적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아무 말 없이 수저만 움직이는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맛도 모르겠고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해 저작운동을 하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옆에 있던 정성찬이 내 손에 직접 다시 젓가락을 쥐여준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쳐다보니 정성찬이 내 손등을 톡톡 다독인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더 먹어요. 한국인은 밥심이라잖아"


"우리 엄마같은 소릴 하네"



"아무래도 어머님이랑 같이 밥 먹은 유일한 남자니까?"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센티넬이라 다들 들었을 게 뻔했다. 아니나다를까 그게 무슨 말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 이동혁과 이제노가 나와 정성찬을 번갈아 쳐다봤고 정성찬은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일부러 더 두 사람을 놀리려는 듯한 정성찬의 행동에 웃음이 터진 나를 말없이 응시하던 나재민이 내 손등을 제 손가락으로 콕콕 가볍게 찌른다. 

 




"혹시 휴가때 얘기...?"


"글쎄에..."

 




이미 정성찬과 단 둘만 아는 비밀로 하기로 했었던 탓에 나도 정성찬의 장난에 맞장구 쳐주려 어깨를 으쓱이자 나재민이 입술을 삐죽인다. 동갑내기 셋과 정성찬 덕분에 긴장감이 내려앉았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대신

 




"내 젓가락!!"


"손으로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성찬아?"


"아 내 물은 또 왜 사라졌어어"

 




정성찬이 젓가락을 쥐려고만 하면 이동혁이 염력으로 젓가락을 하나씩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정성찬 앞에 놓인 물컵에 담겨있던 물은 이제노가 싸그리 없애버렸다. 울상이 된 정성찬이 내 어깨에 폭 기대오는 걸 보며 말없이 내 물컵을 정성찬에게 내밀었다. 형들이 질투하나보다 성찬아...


차마 제 이능을 쓰기엔 양심에 찔렸는지 나재민은 그저 말없이 내 어깨에 기대는 정성찬의 머리를 밀어내기 바빴고 동생들의 꼼지락대는 작은 전쟁을 지켜보던 이민형이 혀를 끌끌 찬다. 형들 너무 유치하다며 어휴를 반복하던 박지성이 이내 삐빅거리는 소리에 현관 쪽으로 고갤 돌렸고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정재현이 들어섰다. 


정재현이 들어서자마자 모두가 얼음이라도 된 것 마냥 동시에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을 응시했고, 모든 팀원들의 시선을 받은 정재현이 살짝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정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 빈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회의가 길었네"


"어쩌다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된 지도 몰랐어"

 




김도영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복 자켓 단추를 풀어헤친 정재현이 벗은 자켓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놔두고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회의만 하고 왔을 뿐인데 피곤한지 넥타이도 느슨하게 푸는 정재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의 몫으로 놔둔 도시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현아 점심은 먹고 얘기해"


"아... 딱히 입 맛이 없어서. 누난 잘 챙겨먹었어요?"


"으응"


"누나가 잘 먹었으면 됐지. 일단 조사 1팀에서 한겸 거처 찾아냈고 아까 봤던 세 곳 중 하나야"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하는 말에 아까 봤던 종이 세 장을 떠올렸다. 한겸이 어디있는지 찾기 위해 세 팀이 달라붙었던 덕분인지 정확한 위치를 찾은 모양이다. 

 





"누나 촉이 맞았어. G등급 파장이 유독 많았던 그 위치야. 근데 센터에서 거리가 꽤 있어서 다섯시넘으면 나가야 돼. 거기까지 가는데만 한 시간 가량 걸려서"


"차량으로 움직인다고?"


"어. 주변에 잠입하고 있다가 쳐야 돼. 아까 지도에서 본 것 중에 교회 건물 기억나지? 그게 지금은 운영을 안 하는 곳인데 박 팀장님 말로는 건물 전체에 이능이 몇 겹으로 둘러져있는 거 같대"

 




이능이 몇 겹으로 둘러졌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이동혁을 제외한 모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냐는 이동혁에게 이제노가 델타팀이 한겸을 놓쳤을 때를 간단히 설명해주자 이동혁 역시도 실소를 뱉었다.

 




"러시아 조직은 인천에 있는 걸 확인해서 그 쪽은 델타랑 1팀이 갈거고, 원 바이오는 2팀이 갈거야. 3팀은 죽었다는 전전 센터장 집으로 가서 조사할 예정이고 4팀은 도시병원, 5팀부터 7팀까지는 경계 태세로 대기하기로 했어."


"7팀까지 전부 움직인다고?"


"일단 대기는 하는 걸로 말 맞춰놨어. 현장 나간 팀을 지원 요청오면 바로 움직여야되니까"

 




안보국 산하에 있는 현장팀 모두가 움직인다는 거구나. 센터장이 이번 기회에 한겸과 엮인 모든 것들을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 같다. 물론 정재현의 의사가 제일 많이 들어가긴 했겠지만


정재현의 얘기를 들으면서 테이블 위를 빠르게 치워내는 애들을 따라 나도 몇 번 몸을 움직이고 나니 어느새 깔끔해진 테이블 위엔 태블릿 두 대가 자리를 잡았고 똑같은 지도가 화면에 떠 있다.


한겸이 있다는 건물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어떤 게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팀원들 옆을 기웃거리다 여전히 정복 차림으로 식탁 앞에 앉아있는 정재현이 신경쓰여서 몸을 돌렸다. 아직 나가려면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앉아있는 정재현의 워치를 힐끔거리곤 그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피곤하지?"


"아니야 괜찮아"

 




손 위치를 바꾼 정재현이 자연스레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가이딩을 넘겨주니 앉아있던 의자를 내 옆으로 끌고온 정재현이 몸을 비스듬히 기대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흔들리면서 나는 아주 은은한 샴푸향이 너무도 익숙해서 절로 웃음이 터진다. 


김정우가 똑같은 걸 여러 개 구입한 덕분에 알파팀 모두가 같은 샴푸를 쓰고 있는 중이다. 박스 채로 들고 오던 김정우를 떠올리며 킥킥 웃는데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정재현도 따라 웃는다. 


웃는 정재현 워치 화면 위로 숫자가 변해가는 걸 보며 가이딩을 조금 더 진하게 넘기자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던 정재현이 비어있던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안았고 그렇게나마 잠시 주어진 여유를 온전히 느꼈다. 
















드디어 마지막 에피가 시작됩니다... 연재가 이렇게까지 늘어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설명충이라 엄청난 장편이 되어버린데다 극악의 연재텀인데도 늘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무한 감사 드립니다. 오늘도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하트하트--



눈덩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