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화 보기★


#47

 

“마르크. ‘계륵’이라는 말, 알아?”

 

너울너울 햇살 조각들이 일렁이는 온화한 아침. 세라는 옷을 챙겨 입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마르크에게 물었다. 마르크는 비몽사몽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마르크가 세라는 올려다보았다.

 

“Guerk?”

“아니, 그러니까. 계륵. 영어로 하자면, Chicken ribs 정도 될까?”

“오, 치킨 립은 정말 맛있는데.”

“말이 안 통하는군. 의대 나온 남자 맞냐, 너?”

 

마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러블리한 방 안에서 세라와 눈이 마주쳤다. 마르크는 이 기회에 (남자인)세라에게 접근해 보기 위해 부드러운 얼굴로 세라의 얼굴에 입술을 댔지만, 세라가 마르크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세라가 말을 이었다.

 

“가지고 있어 봤자 별 도움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운 걸 말하는 거야.”

“아. 그런 뜻이구나.”

“바로, 너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다, 이 멍청이야.”

“그래도, 치킨 립은 맛있는걸. 내가 그렇게 맛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 주는 거야?”

“그럴 리가.”

“고마워, 세라.”

 

마르크는 방긋방긋 웃으며 세라에게 키스했다.

짧고 귀여운 키스.

세라는 마음속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는 걸 느꼈다. 짜증 나지만, 좋은 사람. 언젠가는 좋아했던, 좋아해 마지않았던 사람.

그래서 세라는 반쯤 감은 눈으로 마르크를 쏘아보았다. 두 뺨은 붉게 물든 채로.

 

“이런, 계륵 같은 놈.”

“아하하.”

 

마르크는 웃으며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고, 세라를 이끌었다.

거대한 두 남성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나갈 때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반대로 적은 건데.”

 

목욕을 마치고, 문 앞에 섰을 때, 세라는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한, 0.87초 정도.

분명, 랠프의 이름, Ralph를 반대로 적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게 뻔했다. 본래는 h, p, l, a, R 순으로 사라져야 할 철자가, R, a, l, p, h 순으로 사라질 테니, 즉 랠프의 이름 자체가 사라진다는 의미니까.

문 앞에 서서 머리를 감싸고 있던 세라에게 마르크가 물었다.

 

“혹시, 그런 원리인 거 아니야, 세라?”

“어떤 원리?”

 

세라가 마르크를 쳐다봤다.

마르크가 방긋 웃었다.

세라는 그때, 아. 역시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는 정말 최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의식을 잃어서 별로 기억이 없지만. 내가 생각한 걸 한번 얘기해 볼게. 사실, 방 안에서 나올 때 비로소 완벽해지는 구조였던 거지. ‘mark’라고 입력하면, 방 안에는 마르크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없는 거야. 하지만, 나올 때 kram 순으로 사라지면서, 하나의 단어가 정방향으로 한 번, 반대 방향으로 한 번, 즉 모든 방향에서 한 번씩 겹쳐졌으므로 완벽한 단어가 되는 거야. 그래서, 희미하게 존재했던 내가 완전하게 실재하게 되는 거지.”

“그게 무슨……”

“자, 생각해 봐.”

 

마르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문 위에 가져다 댔다.

마르크의 검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이동했다.

 

“마스킹 테이프처럼 둥그렇게 움직이는 도장을 생각해 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감으면 종이 위에 온전한 글자가 찍혀. ‘mark’라고.”

“아, 그렇다면…”

“그래, 이번에는 똑같은 도장을 방금 찍은 단어 위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찍어 보자.”

“아! 그러면, mark라는 단어가 한층 더 진하게 찍히게 되겠네!”

 

세라가 마르크를 바라보며 말하자, 마르크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세라가 다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하지만, 랠프는 원래부터 있었는걸?”

 

머리가 복잡한 세라와 달리, 마르크는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세라. 반대로 생각하면 돼. 진하게 찍혀 있던 도장을 한 겹씩 벗겨낸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이 방을 나서면서 랠프의 이름을 정방향으로 입력하면, 랠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되는 거지!”


...

 

나와 도리는 이번에는 무기 상점으로 향했다. 여차할 때 쓸 무기를 사려는 생각이었다. 내가 리볼버 권총에 눈을 두고 있을 때, 도리는 여러 개의 작은 젤리들에 푹 빠져 있었다.

언젠가 우리를 태우고 하늘을 날았던 연둣빛 젤리가 미니어처처럼 작은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다람 씨. 이거 사요. 연둣빛 젤리.”

“오. 좋은데요? 어떻게 쓰는 건지 주인아저씨께 물어봐요. 도리 씨.”


도리는 카운터 앞에 서 있는 하얀 토끼에게 총총총 달려가 연둣빛 젤리 사용법에 관해 물었다. 펭귄, 펭귄, 하고 펭귄만 말하는 하얀 토끼가 뭐라 뭐라 말을 해 주었고, 도리는 그 곁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작은 하얀 다람쥐의 몸이라 권총을 들어 올릴 힘이 없어서, 그저 리볼버를 눈으로 살펴보았다.

 

“총을 사려고요?”

 

도리가 내 몸을 두 손으로 감싸 들어 올리며 물었다.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뱃가죽을 쓸면서.

도리의 손길이 간지러워서 나는 까르륵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거니까….”

“저도 좋아요. 그럼, 젤리 하나랑 총을 사기로 해요. 토끼님에게 물어봤더니, 젤리는 던져서 쓰는 거래요. 젤리를 터뜨리면 독성 물질이 줄줄 흘러나온다고 해요. 그리고, 유사시에는 공중으로 높게 던져서 이동 수단으로도 쓸 수 있대요. 하지만 딱 한 번만 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여 주셨어요.”

“와, 대단해요, 도리 씨.”

“헤헤.”

 

나는 도리의 손바닥을 콕콕 누르면서 말했다. 도리가 헤헤, 하고 웃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우리는 리볼버와 연둣빛 젤리, 그리고 카운터에 놓인 간식거리 몇 개를 사고서 가게를 나섰다. 계산은 펭귄으로 대신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왠지 토끼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느낌이 들어 가슴 한편이 영 찜찜하지 못했다.

아무튼, 우리는 체르트의 하늘을 나는 버스를 기다렸다. 오묘한 보랏빛 하늘, 그 위로는 지구처럼 푸른 4행성이 보이고, 그 곁에 날아다니는 투명한 버스들, 그리고 체르트를 가득 채운 하얀 토끼들.

체르트에 살고 있다는 하얀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던 그때, 별안간 쿵, 하고 위성을 삼키는 거대한 소리가 났다.

 

“헉,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다람 씨!”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갈라지고,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우리를 품은 위성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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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주말이네요! 좋은 주말 아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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