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정보: Photo by Yuiizaa September / Unsplash 


1.

밤하늘에 불꽃이 만개하는 순간

꽃들은 흩어지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아요

불꽃의 소나기는 땅에 닿기도 전에

짙은 어둠에 빛깔을 빨아 먹히고 말죠

 

우리도 그런가 봐요

불씨는 작아지더니 꺼졌고

발밑에는 잿가루 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순간의 불꽃이 남겨둔 검은 재마저도

우리 함께했던 시간의 증거겠지요

까맣게 식어갈 이별이 머무는 자리도

속주머니에 고이 넣어둘게요.

-2019.8.24.~2020.11.30.

 

이미지 정보 : Photo by Jon Tyson / Unsplash 


2.

표본과 박제의 차이를 아시나요? 전자는 살아있는 것들도 본보기로 삼을 수 있지만 후자는 이미 생명의 숨결이 스미지 못할 것들만이 될 수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는 표본이 아니라 박제로 남겠지요. 과거의 어느 한 자락에 멎어버린 시계판 위, 흐름을 멈추고 우뚝 선 초침에 걸려 빛바랜 사진처럼요.

-2018.9.30.

 


이미지 정보 : Photo by Joanna Kosinska / Unsplash 


3.

손끝에 매달린 초승달은

별가루를 품고 연보랏빛에 젖어있어요

제게 선물했던 매니큐어를 기억하나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어째선지 당신은 입안에서

바이올렛이란 말을 굴렸다고 했죠

제가 새벽반 별빛을 닮았다며

맑은 보라색 매니큐어를 선사했던 그대

그날부터 제 손톱은 언제나 새벽이었죠

 

당신이 물들인 초승달은 이걸로 마지막

달님에 붙들린 별들도 죽이기로 합니다

손톱마다 끝에 걸려 가물거리던

자월(紫月)과 여린 별들이 딱하고 떨어졌어요

손톱도 첫만남도 새벽도 휴지로 돌돌 말아

휴지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손톱깎이는 생각보다 좋은 도구였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손톱입니다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

자리를 메우는 당신이니까

떠나도 떠나도 다시 떠올라

새벽을 부르는 당신이니까.

-2019.6.7.~2020.11.30. 


이미지 정보 : Photo by Dayne Topkin on Unsplash


4.

당신은 말했죠

저의 문장이 되고 싶다고

저도 말했죠

당신의 높은음자리표가 되고 싶다고

 

우울 서린 렌즈가 보여주는 쪽빛에 잠긴 세상

거기서 마주친 우리는

서로에게 새로운 색깔로 빛나고 있었어요

함께할 때면

제 문장은 사랑시가 되었고

당신의 음악은 장조가 되었죠

 

그런데 어쩌면 좋아요

사랑을 담았던 눈동자가 식어버리고

변질된 렌즈는 잿빛만을 보여주네요

우리는 각자의 예술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어요

이별은 우리에게 어떤 빛깔을 선사할까요? 

-2019.2.7.~2020.12.19.


이미지 정보: 제가 직접 촬영했습니다


5.

그저 맑았던 연심도 깊어지면 잡다한 색깔이 섞이기 마련. 검은 사랑을 버티지 못해 무너지던 연인을 기억한다. 어둡게 웃으면서 굿나잇을 고하던 우리의 해질녘, 돌아가지 못할 석양 끝자락에 나는 아직도 묶여있다. 이별의 순간마저 치사량을 넘어선 당도가 서렸다. 기억 속 마지막 그림자가 나를 달게도 갉아먹는다. 행복한 시간은 언제나 노을 아래 주렁주렁 열리더니. 이제는 붉은 열매에 맞아 죽어갈 시간이다.

-2020.8.28.



이미지 정보: 클라나드


6. 

그대는 봄 같은 사람.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봄빛을 만끽했어요. 이 품에 쏘옥 들어오던 봄이 시들자 꽃구경은 철 지난 추억이 되었지요. 그럼에도 당신이 물들인 나의 일부는 영원토록 지지 않을 봄날이에요. 입추를 입춘처럼 반기고 입동에도 결국 다가올 새봄의 냄새를 맡죠. 내게 봄철을 선물해준 그대. 부디 당신의 하루하루가 봄이기를.

-2020.12.23.

어둠을 헤매는 자에게 글로써 작은 빛줄기라도 비추어 그들이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돕고 싶다. 세간의 병든 운석이 나를 상처 입히려 해도 나만은 이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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