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hours


09. 그들이 사는 세상

 

 

 

알람에 눈을 뜰 때까지만 해도 전정국은 자고 있었다. 그의 자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이 사람이 내 연인이 된 사람이구나’를 수십 번 생각했다. 실감 안 나.

다행히 어제 푹 쉰 덕분에 컨디션이 회복됐다. 잘생기고 돈 많고 능력 있고 몸도 좋은 전정국은 다정하기까지 했다. 혹시나 내가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을까 봐 연고부터 데이트 코스까지 박지민 맞춤으로 하루를 보냈다.

샤워하고 나오니 식탁 위에 커피와 샌드위치가 놓여있다. 전정국이 1층 카페에서 사 온 덕이다.


“지민아, 아침 먹고 가.”


호칭이 하루 새에 형에서 ‘지민아’로 바뀌었다. 부르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데 듣는 내 마음이 더 간지럽다. ‘지민아.’ ‘지민아.’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눈도 제대로 못 뜬 전정국을 쳐다보며 샌드위치를 크게 와앙 베어 물었다. 전정국은 빵 대신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홀짝이며 마신다. 난 리턴 비행인데, 넌 오늘 뭐 하는지 궁금하다. 물어볼까.

사실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그저께 이튼센터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같이 있던 그 여자. 꽤 가까워 보였다. 넥타이를 고쳐 매주는 것도 봤고. 그냥 물어보면 될 일인데 혹시 전정국이 당황할까 봐. 그가 당황하면 난 상처받을 것 같아 서.


“흐흥-”


전정국이 갑자기 날 보며 웃는다. 왜 웃지.


“되게 잘 먹네.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나 봐.”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말없이 샌드위치만 먹으니 아마 먹는 데만 집중한 것처럼 보였나 보다. 원래 잘 먹기도 하지만.


“정국아, 오늘 뭐 해?”

“일하지.”

“무슨 일?”

“업무 보고도 받고, 계약 조건도 따져보고 그런 거.”

“호텔에서?”

“음, 그건 아닐 거 같아.”


토론토에서 전정국을 본 후로 일하는 모습을 못 봤다. 무늬만 대표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나랑 노느라 업무가 밀렸겠구나. 그가 무음으로 해둔 핸드폰 화면이 계속 켜졌다 꺼지는 걸 보니 메일이며 연락이 폭주하는 것 같다.


“근데 나 뭐 물어봐도 돼?”


아무래도 그 여자의 존재를 알아야 비행이 편할 것 같았다.


“당연하지.”

“그저께 같이 점심 먹은 여자 누구야?”


제발 망설이지 말고 빨리 대답해라.


“비서.”

“아.”


1초도 안 돼서 날아오는 대답에 만족스러웠다. 샌드위치가 갑자기 너무 맛있네.


“잘했어, 지민아.”

“뭐가?”


전정국이 손을 뻗어 볼을 꼬집으며 잘했단다. 뭘 잘했지?


“앞으로도 궁금한 거 있으면 참지 말고 바로 물어봐.”


마음을 들킨 기분에 괜시리 민망해져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욱여넣었다.

 

 

*

 


픽업 버스를 타기 전 전정국이 자기 번호는 아냐며 물어왔다. 핸드폰 통화 내역에 있는 부재중 세 통을 보여주며 네 번호냐 물으니 맞다며 얼른 저장하란다. 토론토에 머문 72시간 만에야 그의 번호가 내 핸드폰에 저장됐다. 뭐라고 저장하지. 전정국? 아냐, 정국? 아냐, 정국이? 그래. 이게 제일 낫다.


공항 브리핑 룸에서 듀티를 배정해 준다. 또 밀체크 아니야? 으.


“지민, 지민은 퍼스트 클래스 브리핑도 들어가야겠다.”

“왜?”

“본사에서 노티스가 왔어. 오늘 퍼스트 클래스에 한국인 VVIP 있대. 한국어 하는 승무원으로 전담해 달라고 했어.”


설마, 에이. 설마 전정국은 아닐 테지. 오늘 밀린 업무를 보고 받는다고 했는데.

퍼스트 클래스 브리핑에 들어가니 사무장이 승객 인포 페이퍼를 건넨다. 퍼스트클래스 탑승 인원 4명.

그 중 한국인 이름이…

.
.
.

JUNGKOOK JEON
.
.
.

낯설고도 익숙한 이름에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내가 꽤 괜찮은 남자친구를 만난 것 같다.



브리핑에서 시니어들의 노파심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일등석 서비스 매뉴얼을 교육받았다. 사무장은 지난번 비행 때와 같은 승객이라며 이번엔 항공사를 통해 정식으로 한국인 승무원을 요청한 것이니 실수 없이 서비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육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그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승객들의 보딩이 시작됐다. 나는 이코노미가 아닌 퍼스트 클래스 탑승구에서 나의 VIP 승객을 기다렸다. 아마 지금쯤 라운지에서 올 때가 됐는데.

저깄다.


검은 무지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 누가 저 차림을 한 회사의 오너로 보겠어. 손에 서류 가방만 달랑이며 전정국이 걸어온다. 서비스용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이 나왔다. 정국이. 내 연인이다.


“나 오는 거 알았나 봐? 안 놀라네.”

“브리핑 때 승객 정보 전달받았습니다.”

“와, 이런 사무적인 말투, 너무 섹시해.”

“보딩패스와 여권 보여주시겠습니까?”


그가 건넨 여권과 탑승권을 확인한 후 함께 브릿지로 이동했다. 퍼스트 클래스를 네 명 밖에 부킹하지 않아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지민아.”

“네 손님?”

“우리밖에 없는데 편하게 하면 안 돼? 비행기 뜨면 그때 다시 존댓말 해.”


전정국답지 않게 아이처럼 조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웃으니 전정국도 따라 웃는다. 저 바보.


“오늘 일 한다며.”

“일하러 온 거야. 비행기에서 하면 돼.”

“비서는?”

“몰라? 알아서 탔겠지? 따로 왔어. 잘했지?”


동그란 눈을 크게 떠 보이며 잘했냐 묻는 그를 쳐다보다 빠르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본 사람 없겠지.


“지민아 나 흥분할 거 같아.”

“가방 들어 드리겠습니다. 손님.”

손에 들린 가방을 뺏어 들고 전정국을 앞질러 기내 안으로 들어 갔다. 같이 가자며 쿵쿵대며 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경쾌하다. 연결 브릿지가 오늘따라 짧네.

 

*

 

이륙하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전정국이 날 찾지 않는다. 제공되는 파자마로 갈아입지도 않고 기내식도 먹지 않았다. 배도 안 고픈가. 혹시나 필요한 게 있을까 해서 그의 자리로 갔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노트북을 켜더니 지금도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옆에 놓인 에이포 용지 더미와 번갈아 본다. 일하는 모습이 저렇게까지 섹시할 일인가.



“손님 혹시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종이를 넘기던 전정국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곤 씩 웃는다. 엉덩이를 살짝 들어 기내 안을 휙휙 살피더니 앞으로 모아둔 내 손목을 잡고 손을 조물조물 주무른다.


“박지민 필요한데 서비스되나요.”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얼마면 되는데요. 나 750디르함 있는데.”


전정국이 노트북 가방 앞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반으로 접힌 흰 봉투를 꺼낸다. 저걸 지금도 가지고 다니다니….


“그 봉투 안 버리시나요.”

“너 돌려줘야지. 네 건데.”

“다음에 돌려주시죠.”

“네. 꼭 받아 가세요.”


한국인이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대화가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식사 시간 한참 지났는데 기내식 준비해드릴까요?”

“기내식은 됐고, 시리얼만 주세요.”


혹시 내가 힘들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건가. 웰컴 드링크나 커피조차 마시지 않는 전정국이 의아했다. 덕분에 정말 쉬면서 오긴 했지만.


“일부러 그러십니까? 저 편하게 비행하라고?”

“어, 잘 보이는 중이잖아 너한테.”

“마음이 불편합니다. 한식도 있는데 한식으로 드릴까요?”

“아냐, 나 일 하면서 간단히 먹게 진짜 시리얼만 줘.”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갤리로 돌아왔다.


“지민! 저 승객 지난번 그 사람 맞지?”


면세품 듀티를 받은 소피가 갤리로 따라 들어왔다.


“어. 비행이 겹쳤네.”

“왜 아무것도 안 먹는데?”

“지금 먹는데. 간단하게.”

“와, 지민 럭키다. 이번 비행 편하겠네.”


소피는 부러운 듯 럭키 보이라며 찡긋 윙크해 보이곤 벙커로 간다. 전담 승무원이니 다른 듀티를 할 수 없고 콜 벨이 울릴 때까지 대기하면 되는데 아직 한 번도 울리지 않는 콜 벨에 모든 크루가 날 부러워한다. 조금 어깨가 으쓱했다.

시리얼과 함께 먹을 제철 과일을 준비했다. 피곤할 테니 커피도 한잔 내리고. 제공되는 기내식만 몇십만 원어친데 이걸 안 먹다니. 난 평소에 몇 번 먹어보지도 못한 캐비어가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초호화 식단이었다. 뭐 전정국은 이런 걸 자주 먹겠지만.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노트북 옆으로 시리얼이 담긴 볼과 과일 접시를 올려놨다. 팔걸이 쪽 미니바 위에 커피를 올려두니 ‘와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라며 좋아한다. 바보. 나 편히 쉬라고 일부러 말 안 한 거 맞네.


전정국은 포크로 과일을 하나 집고는 내게 건넨다.


“먹어봐. 싱싱해 보여.”


전정국의 모습에 또 웃음이 난다. 나도 갤리가면 먹을 수 있거든 바보야.


“너 먹어. 서비스 준비하는 거 하나도 안 힘드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나 부르고.”

“싫어. 너 아직 아프잖아.”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내가 서비스하러 와야 네 얼굴 보지.”


내 말에 그가 눈 밑을 도톰하게 접고 웃는다.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 전정국의 차 안에서 처음 저 웃음을 보고 진짜 심장이 떨렸었는데.


“내가 일부러 문도 안 닫고 일했는데. 나 보고 싶으면 지나가는 척하면서 보고가. 은근히 스킨십 하고 지나가면 더 좋고.”


그러고 보니 문을 완전히 닫아 개인 공간을 만들어 일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전정국 좌석의 문은 비행 내내 오픈이었다.


“토론토에서 나랑 만나느라 업무 밀린 거지?”

“아니야 그런 거. 레스트 타임 언제야?”

“한 시간 뒤부터 네 시간 동안. 근데 콜 벨 누르면 바로 올 수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해. 알았지?”

“너 쉴 때 나도 자게. 그럼 이따 레스트 하러 가기 전에 뽀뽀해주고 가면 안 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손님.”


내 손을 조물딱 거리는 전정국의 손등을 찰싹 치고 고개 숙여 인사해 갤리로 돌아왔다.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비행기 엔진소리를 뚫고 귀에 들어온다. 진짜, 진짜 좋다.



*

 


13시간 가까운 비행이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던가. 손님이 원하지 않아도 내 쉬는 시간을 반납해 가며 필요한 게 있는지 물으러 갔던 비행이 있던가. 콜 벨을 한 번도 누르지 않는 전정국 때문에 결국 내가 자리에 몇 번을 찾아가 얼굴을 봤다. 두 번째 기내식도 안 먹는다는 걸 기어코 빵과 우유를 가져다줬다. ‘오 이 빵 맛있어 보여. 먹어봐’ 하며 내게 건네는 전정국의 볼에 입을 빠르게 맞추자 내 얼굴을 잡아 입에 키스해 온다. 오늘 퍼스트 클래스 탑승객이 네 명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비행이 끝났는데도 지치지 않았다. 지루하리만큼 쉬는 시간을 선사한 연인 덕분에. 기내에서 내리는 그에게 고개 숙이며 인사하자 ‘문자로 아파트 주소 보내줘. 저녁 먹자.’라며 속삭이곤 가버렸다.

사무장이 ‘무슨 얘기 했어?’ 라며 물어보기에 ‘기내식이 맛있었대.’ 라고 둘러댔다. ‘기내식을 먹었어?’하고반문하는 사무장의 말에 당황해 ‘시. 시리얼이 맛있었대.’라는 엉뚱한 대답을 하곤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고 목욕까지 마쳤다. 룸메는 또 비행을 갔는지 집 안이 고요했다. 장거리 비행을 다녀오면 늘 암막 커튼을 쳐두고 잠부터 잤는데 이번 비행은 몸이 너무 편안해 잠도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누워있다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 해볼까. 혹시 바쁘면 어떡하지. 또 머릿속으로 온갖 고민이 시작됐다.


[호텔 도착했어?]


저 여섯 글자를 어렵게 보내고 바로 카톡 창을 나갔다. 전정국이 언제 이 문자를 확인할지 마음졸이고 있을 내가 너무 뻔하다.

지잉-지잉-지잉-

문자를 보낸 지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울린다.

‘정국이’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샌다.


-여보세요?

-씻고 나와서 바로 전화하려고 했는데 지민이가 문자로 선수 쳤어.

-앞으로 분발해.

-알겠어. 이제 미팅 갈 거야. 두바이에 얼마나 더 머무를 수 있는지 조정해볼게.

-무리하지 마.

-알겠어. 여섯 시 반 정도면 도착할 거야. 맛있는 거 먹자.

-응.


첫 통화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다정했다.


바로 한국에 가는 일정 같았는데 두바이에 얼마나 더 머무를 수 있을까. 적어도 나흘은 있었으면 좋겠다. 오프 기간 꽉꽉 채워 보고 싶은데.


여섯 시가 지나고 마음이 초조했다. 이쯤 되면 출발했다는 연락이 올법한데 핸드폰이 조용했다. 나름 데이트를 한다고 복장에 신경 써서 입었는데 혹시 너무 바빠 내게 연락하는 걸 잊은 게 아닌가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었다.


[나 조금 늦을 것 같아. 미안, 출발할 때 연락할게] 18:17


전정국의 문자에 마음이 놓였다. 많이 바빴구나. 그가 조금 늦는다 했으니 마음 편히 전정국과 오프 기간 동안 데이트할 걸 찾아야겠다.


*


4일 내내 그와 보낼 계획을 모두 세울 때까지 오는 연락이 없었다. 서운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먹은 게 없어 배도 고팠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다.

우유라도 한 잔 마셔야지 싶어 냉장고 문을 여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전정국이다.


-여보세요?

-미안, 오래 기다렸지?

-괜찮아. 일은?

-끝났어. 나 10분 후면 도착해. 일 층으로 내려와.


전정국의 전화 한 통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참, 단순하지.

10분 후에 내려가면 될 걸 마음이 급해 바로 내려가 아파트 로비에서 서성였다.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며 연락을 기다리는데 뒤에서 누가 내 나를 와락 안아온다.


“지민아.”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버둥 거렸다.


“으악. 놀랐잖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원래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이런 일로 서운해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괜찮아. 보고 싶었어.”


자연스레 전정국의 손을 잡는데 로비에 있는 시큐리티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 이 나라에서 동성애는 적발 시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와도 같다. 물론 나 같은 외국인들에겐 해당이 안 되지만, 매일 마주쳐야 하는 시큐리티와 트러블이 있어 좋을 건 없었다.

내가 슬며시 손을 놓자 전정국이 의아한 듯 쳐다본다.


“시큐리티가 쳐다봐서.”


그도 아차 싶었는지 멋쩍게 웃으며 휘적휘적 걸어간다. 이 나라에서만큼은 한국에서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북적이는 관광지를 피해 근처 레스토랑엘 왔다. 나는 그를 만난 후로 기분이 들떴는데 상대의 표정이 어딘가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있나.


“정국아, 일이 잘 안 됐어?”

“어? 아니? 왜?”

“표정이 안 좋아.”

“아….”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내가 어디까지 그의 일에 관여할 수 있는지 기준이 안 선다. 고작 우리가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됐다.


“서울에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조만간 서울에 다시 가봐야 하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며칠 더 머물겠다는 그의 말에 나의 오프 기간을 너무 기대해서일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데,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말에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언제 가는데?”
“너랑 저녁 먹고.”


나랑 저녁 먹고? 바로?


두바이에서 서울로 가는 항공기는 새벽 세 시가 좀 넘어서 출발한다. 저녁먹고…. 음 그렇구나. 오늘 바로 가봐야 하는 일이 생긴 거구나. 아까 열심히 알아본 내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급한 일이 생긴 거야?”
“응. 추진하는 건설사업에 주도권 다툼이 있었나 봐. 내일 긴급 주주총회가 열린 데.”


건설사업, 주도권, 주주총회?


“너 화장품 회사 아니야? 거기서 건설도 해?”
“내 회사 말고, 현성 그룹.”


아. 잠시 내 앞에 있는 이 남자가 국내 5대 기업가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 다시 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너무 재촉하는 걸로 보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급격히 말이 없어져서인지 그가 내 눈치를 본다. 나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표정이 좋지 않았나 보다. 뭐라고 해야 하나, 서운해서가 아니고, 뭔가 걱정이 돼서. 매번 이런 일이 발생할 텐데 그때마다 내려앉을 내 심장이 걱정돼서 그래서 그렇다.


“지민아.”

“응?”

“오프 때 뭐해?”

“쉬어야지.”

“한국 가자.”

“어?”


오프가 4일이라 비행기로 왕복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틀 정도를 한국에 머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돌아와서 퀵턴 비행을 가면 되긴 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한국이라니.


“밥 먹고 가방 챙기러 가자. 나랑 한국에서 데이트해주라. 응? 지민아아. 제바아알.”


심각한 분위기를 지워내고 싶은지 내 손을 흔들며 졸라대는 전정국에 풉 하고 웃음이 났다. 그는 도무지 내가 걱정할 틈을 안 준다.

그래, 한국 가지 뭐.

 


저녁을 먹고 바로 아파트에 가서 캐리어를 챙겼다. 이틀 하고도 반나절 정도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 큰 짐은 필요 없었다. 아, 비행기. 비행기 예약해야 하는데.


“지민아 여권 번호랑 영문명 알려줘. 비서한테 보내게.”

“내 건 내가 예약할게.”

“…네가 예약한다고?”

“응. 돈 자랑하지 마.”

“아니, 내가 데이트하자고 데려가는 건데. 내가 할 거야.”

“됐거든. 그리고 난 90퍼센트 할인받아. 직. 원. 할. 인.”


이게 바로 승무원의 특권 아니겠니. 뭔가 자랑스러운 마음에 전정국을 쳐다봤다.


“좌석 지정은 6K로 해. 난 5K니까 내 옆자리로.”


6K…6K는 퍼스트 클래스인데. 퍼스트 클래스는 할인권이….


생각지 못한 퍼스트 클래스 공격에 잠시 말을 잃었다. 아니 이코노미도 탈 만한데….


“지민아.”

“어?”

“까불지 말고 영문명이랑 여권 번호 알려줘라. 비서가 빨리 보내달래.”


그래, 내가 재벌 앞에서 좀 까불어봤다. 여권을 그에게 던지니 흐흥-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는다. 어우 얄미워.

 


일등석은 그야말로 하늘 위의 호텔이었다. 집보다 좋아. 자꾸 내 좌석으로 넘어와 도어를 닫으려는 그를 떼어내느라 좀 힘들긴 했지만. (가끔 비행하다 일등석에서 문 닫아 놓고 섹스하는 커플들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나와 전정국이 될 뻔했다.)


공항에 가니 토론토에서 봤던 여자 비서가 아닌 키가 큰 남자 비서가 전정국을 맞이했다.


그는 바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한다며 그 비서에게 나를 부탁하곤 곧장 차를 타고 이동했다. ‘주주총회만 끝나면 바로 연락할게.’ 큰 손으로 내 뒷머리를 쓰다듬곤 발걸음을 빠르게 돌렸다.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그의 일이 잘 해결되길 바랐다.


비서는 나를 전정국의 집으로 안내했다. ‘수행비서 김남준입니다.’ 까만 반 테 안경을 쓴 그는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서글서글하게 말을 걸어 주었다.

한남동에 있는 전정국의 집은 혼자 사는 게 맞나 의심이 들 만큼 컸다. 비서는 옆집엔 유명 여배우가 살고 윗집엔 축구 국가대표 부부가 산다며 귀띔해 주었다.


나를 바래다준 비서가 급히 회사로 돌아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통역 아르바이트를 간 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그를 비행기 안에서 다시 만났다. 토론토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연인이 되어 한국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일주일이 채 안 됐다.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는 전개에 웃음이 나다가, 내게 이런 일이 다 생기는구나 신기하다가, 전정국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왜일까.

갑작스러운 상황들에 마음의 정리가 안 돼서 그런 걸 까. 다른 세계를 사는는 그와 마주할 현실이 무서워서일까?

그가 내 앞에 있으면 아무런 걱정도 들지 않는데 사라지면 스멀스멀 고개를 내미는 걱정들에 내가 마음 편히 이 연애를 만끽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전정국과 공항에서 헤어진 지 여덟 시간이 지났다.

배가 고프지만, 급히 오느라 챙겨온 한국 돈이 없었고 집 밖에 나가고 싶어도 이 집이 정확히 어딘지 알 수도 없어 다시 돌아오는 길도 몰랐다. 핸드폰 유심을 미리 신청하지도 않아 와이파이가 없으면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낯설고 큰 그의 집에서 온갖 걱정들을 혼자 마주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전정국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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