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묘사, 살인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Matador - http://posty.pe/3z78sg




불길 속에서 소생해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의 설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불길 속에서 구사일생해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인간의 일화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구해준 사람도 구한 사람을 알지 못하고, 구해진 사람도 자신의 이력을 알지 못한다. 이마저 비극이라 말한다면 세상에는 구제 못할 절망이 너무 많으므로 굳이 비극이라 부를 일은 아니다.

그렇지, 따지자면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희극이다. 기록으로 남지 않을 시간에 기록으로 남지 않을 장소에서 서곡은 시작되었고 악마는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천사라고 그 순간에 축가를 던지지 않았겠는가?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눈을 감지도 못 본 척하지도 않을 거야. 정말로 그럴지도 몰라. 가시나무 덤불에서 새들은 흥분해서 지지배배 떠들어댄다. 눈 먼 도덕도 눈 뜬 죄악도 되지 않을 거야. 발푸르기스의 밤을 겪지도 않을 거야. 그는 미세기처럼 나아갈 거야. 왜냐면 모란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자각도 없이 그를 구했을 때 천사와 악마가 함께 기뻐했거든. 새들은 계속해서 운다.

가장 추악한 구원과 가장 신성한 배교가 눈과 입과 심장을 얻어 저곳에 서 있도다.




Faust

-The Killer with a Cocktail-


w. Serinos




만약 2시간 전의 자신이 제 앞에 서 있다면, 호는 우선 그의 따귀부터 갈긴 다음 관자놀이에 팔꿈치를 박아 쓰러뜨리고 명치를 걷어찼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잡하다. 아니 착잡하다 못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까지 들 지경이다. 술을 그렇게 쳐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킬러가 꼭 밑바닥 인생과 동의어인 건 아니고, 밑바닥 인생이 꼭 술을 맹물 마시듯 들이마시는 건 아니지만. 호를 포함한 대부분의 킬러에게 술은 물이나 공기만큼이나 익숙한 존재였다. 소주이든 맥주이든 양주이든 곡주이든 과일주이든 보드카이든 칵테일이든. 술은 인생의 윤활제라네. 좀 마신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뭐가 나쁜가! 어떤 킬러의 말을 빌리자면 그랬다.

하지만 이번엔 나빴다. 이번엔 지나쳤다. 초이가 운영하는, 그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라는 이유로 마음을 놓았던 게 실책이었다. 늘상 예리한 판단력을 유지해야 하는 킬러로서는 뒤통수에 총알 박혀도 할 말 없는 실수다. 물론 초이가 그를 죽이려 시도해서 이득 볼 건 없으니 그럴 걱정은 없지만. 다른 의미로 뒤통수를 후려맞긴 했다.

"괜찮아, 호?"

"괜찮아 보여? 빌어먹을. 한잔 더 줘, 초이."

될 대로 되라. 초이가 내민 칵테일을 또 다시 원샷해버린 뒤 호가 짤막한 침음을 삼켰다. 식도를 타고 미약한 불꽃이 일렁이다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 잠시 맛을 음미하다가 묻는다.

"그래서 이 칵테일 이름이 뭐야? 모르는 거라 그냥 주는 대로 받아 마셨는데."

그에 초이는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칵테일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졌다. 아, 젠장. 이건 완전 걸렸네.

"아니, 세상 어느 바텐더가 파우스트를 원샷하라고 줘!!"

"여기 있는 이 바텐더가 주지. 자업자득이야, 호. 그러게 누가 공짜라고 받는 족족 다 마시래?"

그럼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술 사준다는데 하나하나 의심하고 따져보면서 먹어?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는 호를 보며 바텐더는 어깨만 으쓱하며 웃는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 때의, 킬러 이그나지오가 아닌 때의 호가 의외로 다정한 구석이 있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어떤가. 당장 제 앞에서 능글맞게 웃는 바텐더의 멱살을 잡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지 않은가. 프론트 바에 얼굴을 떨군 호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말리지는 못할 망정 부추기면 안 되지. 내가 이 일에 예민한 거 알잖아-"

"나도 고작 그 말에 넘어갈 줄은 몰랐지. 뭐였더라. '너의 랑이한테 늦는다고 전화 안 해도 괜찮아?' 이거였나?"

"아, 전화할 게 아니라 그냥 그때 바로 일어나서 집이나 갔어야 했는데...집에 가서 랑이 얼굴이나 봤어야 했는데...."

가짜로, 하지만 반절은 진심을 담아 훌쩍이는 목소리가 꽤나 처량했다. 전화한 것까지는 몰라도, 술김에 아무 생각 없이 상황을 털어놓은 게 문제였다. 정보 관리 똑바로 안 하는 멍청이들을 그렇게 비웃었는데 자신도 같은 수준의 실수를 하다니 입이 열 개가 아니라 스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친구랑 만나서 술 한잔 하느라 좀 늦을 것 같아.'

웃기고 자빠졌네. 근 3년 간 랑이 앞에서는 지인 한 명 만난 적이 없고, 술 한 방울 입에 댄 적이 없으면서. 절에서 도라도 닦다 온 것처럼 구는 그를 은연중에 걱정하던 쌍둥이 동생이 반색을 하며 그럼 자신도 같이 마셔도 되겠냐고 물을 때서야, 호는 누가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이후 수습하려 했지만 수습이 될 리가. 그의 동생은 때때로 정말....정말 완고한 구석이 있었다. 사업하는 사람 특유의 고집과 추진력까지 탑재했으니 어지간한 논리와 설득으로는 그의 결심을 무르기 힘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는 제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는 게 사람 신경줄을 뽑아내서 새끼줄을 꼬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심정적으로는 정말 그랬다.) 무영은 위치를 물었고, 호는 울며 겨자먹기로 초이의 바가 있는 장소를 불렀다.

"그래도 침착하기만 했으면 거짓말로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당황했었어?"

"취해서 그럴 정신이 아니었지..."

"너도 인간이긴 했구나, 호. 파우스트로 그렇게 들이붓고도 멀쩡해 보여서 인간이 아닌가 싶었지."

"하....파우스트가 도수 몇이더라?"

"좀 높게 만들면 50도까지도 갈걸. 참고로 일반적인 위스키나 브랜디 도수는 40도."

호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초이가 좀 더 쾌활하게 웃었다. 너야 도수 80인 발칸 보드카도 마시라면 마시지만, 도수 만만한 칵테일 음료수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원샷하다간 파우스트로도 핑 돌지. 이쪽에서는 나름 알코올 도수 최대인데. 자랑스럽게 칵테일 잔을 빙글 돌리는 초이에게 호가 원망의 눈빛을 쏘아보낸다.

"그래도 네 동생 조금 궁금했는데 드디어 보는구나."

"초이.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안 돼? 내가 랑이한테도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라고 할게."

"너 진짜 취했어? 좀 너무하는데."

"살인자랑 같은 장소에 두기 싫다니까."

"나는 손 씻었잖아. 최근 5년 동안의 살인 회수만 따지면 클린하다고."

물론 10년으로 따지면 꽤 화려하겠지만. 뒷말을 자연스럽게 혀끝으로 집어당겨 목구멍에 처넣는다. 하려던 말을 도중에 삼키는 건 특기였다. 바텐더도 정보상도 중요한 순간에는 입이 무거워야 하기 마련이다. 다시 칵테일 재료를 하나씩 섞고 둥근 잔에 조심스럽게 따라낸다. 바카디 151, 화이트 럼, 크렘 드 카시스. 다 만들어진 칵테일을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올드 패션드 글라스 안에서 악마의 불꽃이 춤을 춘다. 색소로 만들어진 평범한 붉은색이지만 피투성이 밑바닥을 찍어본 이들에게 그 잔은 언뜻 지옥의 열탕처럼 보여, 얼음이 녹지 않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단맛에 감추어진 독한 알코올이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악마 같다.

하지만 그것의 이름은 파우스트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다. 악마와 계약한 파우스트.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 당연하고, 따라서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호소하는 희곡의 주인공. 바의 문이 열린다. 도어벨은 없지만 삐걱이는 문지방 소리를 듣고 초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밤하늘을 녹여낸 듯 검푸른 머리카락. 심연처럼 까만 초이의 것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저문 직후의 하늘처럼 푸른 빛이 감돈다. 그리고 눈동자. 자홍빛이 바의 그늘에 잠들어 붉게 내려앉은 색깔은, 파우스트보다 조금 더 밝고 청광이 섞였지만, 비슷한 색깔이다.

첫눈에 반하는 건 등신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첫 만남에 잠시 눈길을 빼앗기는 것 정도는 자신도 겪는 일이란 사실을 바텐더는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는 물론 부정할 것 없이 호의 동생이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꽤 달랐다. 많이 달랐다.

"호?"

"랑아!! 오늘도 엄청 보고 싶었어-!!"

초이가 찬찬히 숨을 내쉬며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푸른색과 자홍색. 그 색깔에서 눈을 떼고 보니 소름 끼치도록 낯익은 얼굴이다. 호가 두 명. 앓는 소리를 내며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동생이라고는 했지만 쌍둥이였어? 그것도 일란성?

"거기 검은 오빠는, 호랑 쌍둥이?"

확인차 물어보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검은 오빠라는 호칭에 당황한 것 같긴 하지만. 호가 빙긋 웃고는 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초이, 여기 바텐더야. 말버릇은 원래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고... 초이는 랑이 얘기 많이 들었었지? 내 동생이야."

달갑지 않은 아명 때문인지 자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호가 황급히 덧붙였다. 나는 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본명은 신무영. 그러자 잠시 눈을 굴리던 무영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나야말로 반가워, 검은 오빠. 호랑 쌍둥이면 나하고 동갑이지? 말 놔도 돼?"

물어보기 전에 이미 놓긴 했지만. 덧붙이는 말에 무영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 그를 보며 초이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얼굴은 호와 소름 끼치게 똑같았는데,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딴판이다.

대비관계인 건 색깔만이 아닌가 보지? 그렇게 생각하며 초이가 잔을 씻었다. 겉으로는 꽤 냉정해 보이는데, 그렇게 잔뜩 세운 가시 속은 하염없이 정이 많고 무르다. 킬러로 살아가며 성격 버리긴 했지만 본질적으론 외유내강 유형인 호와는 묘하게 반대인 면이 있었다.

"너 술도 마실 줄 알았어? 내 앞에서는 못 마시는 척하더니."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서... 아하하, 우리 랑이 많이 삐졌어?"

"뭔 헛소리야. 신기하니까 그렇지. 벌써 엄청 마신 것 같은데 괜찮냐?"

"...응. 괜찮아."

억지로 미소를 지은 탓에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 형제를 안심시키느라 연신 방긋대면서도, 시선은 그 반대편을 노려본다. 그리고 그 서늘한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초이가 웃었다. 눈가를 초승달처럼 구부리며 싱긋, 바의 그늘에 잠긴 채로, 악마와 같이.

살인자와 같은 공간에 두고 싶지 않다고 했지. 그건 단순히 네 동생이 위험해지거나 불필요하게 상처받는 것 이상의 문제였구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구나. 특히 살인자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무언가가.

거리에서 태어난 아이 하나는 우연히 잿더미를 파헤치며 오열하는 아이를 보고 망설임 끝에 어색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였었다. 그러나 불길 속에서 사랑은 돌아왔다. 기록으로 남지 않을 시간에 기록으로 남지 않을 장소에서. 잃었다가 되찾은 소중한 사람이라. 나에게는 없는 기회를 다시 얻었네. 조금은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어쩐지 이제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주제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입맛을 다셨다.

"검은 오빠도 한 잔 할래? 오늘은 특별히 공짜인데."

"그거 고맙지. 그럼 난 보드카 마티니."

"Shaken, not stirred?"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무영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답한다.

"무슨 영화에 나오던가, 그거? 잘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해줘. 레몬만 넉넉히 들어가면 돼."

"헤에, 검은 오빠 신 거 좋아해?"

"어. 좋아해."

빤히 바라보자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피한다. 좋다고 대답하는 입술이 오물거리다 살짝 벌어진 채 소리를 끝맺는 것에, 초이는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던 호 역시도.

무영의 앞에 막 만든 보드카 마티니를 건네주고는 곧 자신이 먹을 칵테일을 하나 더 만든다. 흰 손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재료를 하나씩 섞고, 흔들고, 쌓아서 칵테일을 만들어갔다. 무영은 그것을 잠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사람의 손이 움직이는 동선과 모양은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다. 두 발로 서고 두 손으로 도구를 쥐고 인간사가 복잡해진 이레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어색해서인지 날이 서 있던 무영도 술이 들어가자 조금씩 풀어졌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덧 시간이 늦어졌다.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가셨는지 묵묵히 칵테일만 마시는 둘에 안도하며, 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조금 기대었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마자 연둣빛 눈동자는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동생을 어루만지듯 꼼꼼히 살핀다. 탓할 일은 아니었다. 동생 앞이라며 도수가 낮은 칵테일만 마셔서 되려 술이 깨기 시작한 호와는 달리, 초이가 주는 대로 대충 다 받아마신 무영은 꽤나 취한 상태였다.

경계심을 슬며시 내리고, 그마저도 형제인 저와 눈이 마주치면 아예 관두고는 희미하게 웃는다. 살짝 풀린 눈으로 제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는 무영을 보며, 호는 어쩐지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술 때문에 발갛게 홍조가 도는 뺨과 부드럽게 반짝이는 자줏빛 눈동자에 문득 치미는 갈증은 단순히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검은 오빠, 신 거 좋아한댔지?"

그러다 문득 묻는 말에, 호는 멍하니 무영을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대놓고 초이를 쏘아보았다. 살인자에 대한 것을 눈으로 다시 일깨운다. 그러나 호의 시선을 아예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잔을 씻던 손을 멈추지 않고 초이가 다시 묻는다.

"마타도르 한 잔 할래? 나 그거 꽤 잘 만드는데."

던져진 질문은, 머릿속으로 궁금해하며 의식적으로 물은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에 쌓여 있던 무언가가 새어나간 무의식의 산물이었다. 아. 이건. 묻지 않고 묻으려던 말이었는데. 내뱉지 않고 삼키려던 질문이었는데. 정보상이자 바텐더는 움찔하고 멈추어 선다. 그러나 얼어붙은 두 사람을 눈치채지 못한 무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툭 던지듯 대답한다.

"괜찮아. 나 마타도르는 안 마셔서."

그러자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초이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렇구나. 입 안이 썼다. 호는 괜한 것을 왜 물었냐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답지 않게 상처받은 얼굴에 초이가 씁쓰레하게 웃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어?"

"그냥, 데킬라가 들어간 칵테일은 별로. 입맛에 안 맞아."

"검은 오빠 데킬라 싫어하는구나."

"그것도 그렇고...마타도르 자체가 어쩐지 거부감이 드는 것도 있어서."

고작 칵테일을 싫어한다는 대답에 물고 늘어지는 것은, 아마 마타도르와 자신을 동일시하던 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끝까지 단호한 말에 둘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다 확인사살만 당한 셈이었다.

"...난 마타도르 좋아하는데."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휙 처들고는, 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단순한 혼잣말이나 투정보다는 거의 선언에 가까웠다. 도전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 쌍둥이를 마주 바라보며 무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신 거 싫어하잖아."

"랑이는 신 거 좋아하잖아."

이어지는 동문서답에 무영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호가 황급히 덧붙였다. 랑이 생각나서, 좋아해. 그러고는 조금 더 있다가 다시 중얼거린다. 좋아해. 아까 무영이 신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어투였으나, 눈치채지 못했는지 무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뭐, 그럼 오랜만에 마셔볼까. 마타도르."

"...마시게?"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 뻔한 초이가 간신히 물었다. 싫어한다며? 그에 무영은 별로 상관없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 근데 이 녀석이 좋아한다니까.

"같이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간단하게 답하는 말, 고작 싫어하는 칵테일 한번 마셔보겠다는 말 한 마디의 파급력이 생각보다 컸다. 생각보다 커서 초이는 기정사실화된 패배를 미리 느꼈다.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구나. 특히 살인자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무언가가. 고작 몇 시간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얼간이처럼 말 한 마디에 영향을 받는다. 우습지도 않은 상징놀음에도 희망 비슷한 것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이런 갈증을 얼마만에 느꼈더라.

손을 뻗으면 아득한 바다도 머나먼 하늘도 손에 닿을 것 같다. 하지만 아니야, 아닐 거야. 고개를 애써 저었다. 지나친 비약이야. 고작 눈동자가 파우스트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만으로. 눈 먼 도덕도 눈 뜬 죄악도 겪었으나 둘 중 무엇도 되지 않고 오롯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모르고 우리를 혐오하지만 우리를 사랑해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저기, 검은 오빠."

새벽 2시쯤 되었을까. 초이가 완전히 취하다시피한 무영을 붙잡았다. 부축해주고 있던 호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으나,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성정과 어울리지도 않는 다급함이 초이의 검은 눈동자에 녹아들었다. 무영의 팔을 잡아 호에게서 잠시 떼어놓았다. 작지만 거센 항의를 무시했다. 그가 무영의 귀에 대고, 호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물었다.

"노력한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락에 있던 사람이 소중한 사람에 의해 다시 끌어올려질 수 있을까?

그에 무영은 잠시 초이를 멀뚱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요즘 소설책 읽냐? 아니면 철학책? 그러나 비웃음으로 대화의 흐름을 도려내 버리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는 다리를 겨우 세우며 그가 귓속말로 답했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제 몸도 가누지 못하도록 취한 주제에, 목소리만은 또렷하다.

"더 시적으로 표현할 것도 없어. 끌어올려지는 것만이 구원은 아니지. 끝도 없는 진창을 향해 함께 끌어안고 추락하는 것도 구원이라면 구원이잖아."

적어도 그 대답은 구원의 서곡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톱니바퀴가 맞물린다고 바람을 탓하리, 무쇠를 탓하리, 먼지를 탓하리.

밤바다가 손가락에 닿았다. 밤하늘이 손바닥을 스쳤다.




*          *          *




짜증스럽도록 긴 정적이었다. 주홍빛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차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초이는 유리잔 두 개를 각각 저와 호 앞에 내려놓았다. 안에는 검붉은 칵테일이 가득히 담겨 있다.

"파우스트(Faust)라는 희곡 알지, 호?"

"......"

"괴테의 모든 삶과 철학이 담긴 역작. 한 줄로 요약하기는 힘들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나아간다면 인간은 언젠간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게 주제였나."

호는 잠자코 칵테일만 노려보았다. 고개를 들었다가 초이의 표정을 보게 될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어둡게 그림자 섞여든 적색의 칵테일은 혈액 같기도, 악마의 불꽃 같기도 했다.

"나랑 거래 하나 안 할래, 호?"

"......"

"지금 꽤 위험하잖아. 안 그래도 적이 많았는데 3년 간 잠적해서 약해졌다는 헛소문도 돌고. 이대로 가다간 검은 오빠에 대한 것도 언제 발각될지 모르고."

아니면 반대로 검은 오빠가 킬러 일에 대해서 알게 되거나. 호에게는 이쪽이 더 큰일이었나. 살인자가 무영에 대해 알았다면 살인자를 죽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무영이 살인자에 대해 알았다면. 그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인정하기는 지독히도 싫지만 사실이었기에, 무어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호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쩌긴. 나랑 거래 하자니까."

그러니까 무슨 거래를 말하는 거냐며 미간을 찡그린 채 묻는 말에 초이가 싱긋 웃었다. 은밀한 것을 말하듯 작게, 그가 속삭였다. 이그나지오가 킬러로서의 일을 처리하는 동안 신무영의 보호 수행. 특히 일이 많을 근 6개월간의 24시간 경호 보장. 기존 이그나지오의 정보 보호와 더불어 신무영의 정보 보호까지 최고 등급 기밀로 동반 갱신. 침묵은 가라앉아 바 안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차근차근 전부 메운다.

다른 사람의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한 바 안에서 전등빛을 받아 흔들리는 그림자는 둘 뿐이다. 미끼는 던져졌고, 악마는 손을 내밀었고, 말이 쏟아져 계약은 제안되었다. 초이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두 사람의 잔에 다시 한번 똑같은 칵테일을 채웠다.

"뭘 원해?"

마침내 호가 물어온다. 복잡한 건 다 생략하고 요점만 잡아 묻는다. 괜히 변죽 올리지 않고 핵심만 꿰뚫는 것이 저격총으로 표적을 잡는 일과 유사하다.

"나눠 줘."

"뭐를?"

"네 삶의 이유."

탁자에 깊게 칼날이 새겨진다. 날렵하게 손을 빼내어 프론트 바를 피범벅으로 만드는 건 피한 초이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에 비해 호의 얼굴은 다섯 번 정도 구겼다가 억지로 겨우 핀 은박지처럼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랑이는 나눠주는 물건이 아니야."

"물론 그렇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아. 내가 말한 건 그냥- 선량한 바텐더가 동생에게 접근해서 꼼수 좀 부린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는 거야. 살인자였던 내가 그의 옆에 알짱거려도 괜히 경기 일으키지 말라고. 친구로든 뭐로든 나를 택할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신무영에게 달려 있게 두고."

사람을 구원으로 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아무리 외친들 구렁텅이에 있는 이들에게 그 소리가 닿겠는가? 초이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익숙한 세계는 만 하루만에 사랑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만 하루만에 죽어서 생매장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곳이니까. 몸을 팔거나 마음을 팔거나 자존심을 팔거나 양심을 팔거나 돈으로 치환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팔아가며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산다. 악착같이 살아도 운 없으면 팔다리가 날아간다. 그마저도 목이라도 지키면 다행이다. 막장 인생이 막장 사랑을 하는 게 이상한가? 사람을 구원으로 삼는 것이 항상 나쁜가? 사람을 삶의 이유로 삼는 것이 항상 나쁜가?

물론 나쁘다. 그리고 킬러는 원래 나쁜 짓을 하면서 산다.

"지금 표정만 보면 다 뒤집어엎고 나한테 총부터 겨눌 것 같긴 하네. 하지만 그거 알아, 이그나지오? 넌 거래를 받아들일 거야."

확신에 찬 웃음 앞에서 호는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눈매가 사납게 날을 세우고, 윗니가 입술을 파고들어 분명 나중에 동생에게 한 소리 들을 상처를 남기고, 입매가 아래로 굳어지고, 늘상 짓는 웃음의 부스러기 하나조차 남기지 않은 채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힌다.

좋고 싫고를 따지는 건 사치다. 동생 목숨이 걸린 일이다. 지금은 아직 뒷세계에서도 간을 보고 있는 판이라 당장 위험한 일은 없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형국은 바로 뒤집힌다.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쌍둥이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되었다. 어중이 떠중이에 불과한 경호원들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적대적인 이들을 처리하려면 호는 자리를 비울 수 밖에 없다. 외통수였다.

칵테일을 들어올리자 악마의 불꽃이 잔 속에 녹아가며 타들어간다. 단번에 입 속으로 털어넣고는, 그가 몇 번 욕설을 읊는다. 초이는 빙그레 웃는다.

"악마의 계약 같네."

"그 말대로, 악마 양반.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라도 되고 싶나 보지?"

그 말에 초이는 웃으며 자신의 잔을 비웠다. 입가에 걸린 비뚜름한 웃음. 조명에서 내리깔린 빛을 쳐올리며 사납게 발산하는 주홍빛은 그 새까만 남자의 더 새까만 웃음이 그저 못마땅하다. 되도 않는 비유를 던지며 코웃음을 치는 호였으나 딱히 그 희곡을 읽어본 것은 아니었기에, 그 물음은 딱히 별 반응을 바라지 않는 일상적인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우리는 원래 상징 놀음 좋아하잖아. 마타도르 양반."

"으, 그 호칭 당장 그만둬. 오글거려 죽겠으니까."

"누가 먼저 시작했더라."

"됐다, 됐어."

계약 건 이후로 술맛이 뚝 떨어져버린 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들었다. 더 이상 빈정거릴 기력도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가려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술값을 테이블에 던져놓고는, 쾅. 지폐 몇 겹을 꿰뚫고 단검은 나무로 된 테이블 표면에 깊이 박혔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빌어먹을 개자식아. 그렇게 마지막으로 욕설을 내지른 뒤에야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그곳을 나섰다. 화폐 훼손으로 신고할 거라는 초이의 농담이 머리꽁지에 달라붙었지만 손만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그거 법적으로 금지된 것도 아니야.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호가 하품을 하며 생각했다. 랑이가 야근해서 집이 텅 비어 있겠지만, 적어도 거기서는 마음 놓고 있을 수 있겠지.




*          *          *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은 거의 빈집처럼 느껴졌다. 인기척이 미약한 건 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는 이미 의도치 않게 제 동생을 몇 번 놀래킨 적이 있었다. 피와 비명과 죄와 죽음으로 그득그득 찬 영혼은 새까맣게 과포화 상태래도, 몸뚱이는 텅 빈 것처럼 움직인다. 동생의 온기와 체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그는 자기 안에 뚫려 있는 구멍을 인지한다. 수챗구멍으로 빨려내려가는 밝고 따뜻한 좋은 것들. 구멍은 나락으로 직행이었다. 호는 무영의 서재에서 책 한 권을 끄집어 와 어느 대목을 찾더니, 입술을 달싹여 읽어내린다.

"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 보거라.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선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이라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잘 알고 있더군요.' "

한숨을 푹 내쉬며, 호가 읽고 있던 책을 제 침대로 집어던진다. 이후 주워 온다. 랑이 책인데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두 번째 한숨은 이전 것보다 더 깊었다. 선한 인간, 내 삶의 이유, 비록 어두운 충동 속이라도 그는 알고 있겠지.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정의, 윤리, 양심, 도덕.

신무영은 어려서 입양되었고 그를 끔찍히 아껴주는 양부모 사이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올 아버지 어머니는 이름 모를 살인자의 손에 죽었다. 살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신무영은 그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어떠한 이유로든 살인은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살인뿐은 아니지만, 그 무게와 빈도를 비교했을 때 가장 참혹한 것이 살인이었다.

십대 시절 겪은 상처를 꺼내놓으며, 담담한 체하지만 눈물 고인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선과 용서를 삶의 한 부분으로 두고 정의와 윤리와 양심과 도덕을 끌어안으며 살지만 도저히 그것만은 안 되었다. 살인자하고는 상종 못하겠더라고. 살인은 진짜 아니야.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야.

부모의 기일에 검은 옷을 입고 떨리는 목소리로. 담담한 체하지만 눈물 고인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동생을 보고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형은 무엇을 느껴야 했을까. 괜찮아,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위로를 속삭이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의 온기를 매만졌다.

천사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가 그의 신을 보필하며 기쁨에 겨워하나니.

어쩔 수 없었어. 네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평온한 십대를 보낼 때 나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 살벌한 십대를 보냈으니까. 네가 살인자의 손에 부모를 잃었을 때 나는 누군가의 부모와 자식을 죽였으니까.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어. 나는 너를 탓하지 않잖아. 너도 나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를 경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그냥 네가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아름다운 눈을 감고 안온하소서.

이는 신과 악마의 내기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악마와 악마의 내기다. 살인자와 살인자의 내기다. 호는 그의 동생 곁에 살인자가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전부터 끈질기게 지적당해 왔듯이, 그 자신도 살인자였다. 탁자를 내리치며 킬킬거리는 머릿속의 악마들.

"랑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다가, 탄식처럼 이름을 부른다. 호는 제 쌍둥이 동생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날을 세우며 경계하고 싸늘하다가도 조금만 정이 들면 풀어져버리는, 자기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속은 여리기 그지없는 사람. 사랑스럽고 소중한 동생. 잃었다가 되찾은 반쪽. 놓을 생각이 없다기 보다는, 놓을 수 없었다. 마음대로 놓고 말고를 운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 '끊임없이 노력하고 나아간다면 인간은 언젠가 구원받을 수 있다'? 퍽이나 그렇겠네."

초이의 말을 떠올리며 호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곳에 구원 받아야할 인간은 없다. 나락에는 발끝조차 들이지 않는 선인과, 나락에 묶인 채 그 손길을 갈구하는 악마 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눈을 감고 안온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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