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앙은 숙제를 검사하고 있는 설영의 앞에 앉아 끄응, 작게 앓았다. 아침부터 월영의 손길에 앞을 세웠던 게 떠올랐다.


저를 도와주겠다는 동생 손길에 앞을 세우고 참을 수 없어서 수음을 하다니. 그것도 동생의 방에 딸린 욕실에서! 그리고 떠올린 상대는 누구였던가?


현앙은 제 옆에 앉아 숙제를 검사하고 있는 설영을 흘끔였다. 오늘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옆얼굴을 보니 죄책감과 배덕감에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거 같았다. 월영은 물론이고 옆에 있는 설영의 얼굴 역시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현앙? 현앙!”

“어?! 어, 어! 으악!”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현앙은 제 몸을 흔드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설영을 바라봤다가 그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걸 보고 더욱 놀라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봐, 깜짝 놀랐잖아!”

“저랑 입도 맞추면서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러십니까.”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몸을 뒤로 물린 현앙에게 다시 가까이 다가간 설영이 시선을 맞추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다시금 숨결이 닿았다. 현앙은 크게 뛰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거 같았다. 그에게도 이 요란스러운 심장소리가 들리면 어쩌나 조바심이 났다.


“현앙.”


집요하게 시선을 맞추던 설영이 그에게 입을 맞추려고 더욱 가까워지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긴장 후에 느껴지는 건 설영의 부드러운 입술이 아닌 작은 웃음소리였다.


“어제 제가 많이 괴롭혀서 그러십니까? 오늘따라 심하게 긴장하시네요.”


입맞춤 없이 설영이 물러나자 현앙은 몸에 들어간 긴장을 풀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느껴져 머리를 긁적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현앙을 보고 있자니 설영은 괜한 장난기가 돌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현앙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느릿하게 물었다.


“혹시 몸이 불편한 건 아니죠? 어제 아래에 잔뜩 먹여드렸었는데….”

“아, 아니야. 나 건강해! 그 정도로는 끄떡없지!”


부드러운 손길에 야릇함을 느낀 현앙이 몸의 근육을 굳히며 허벅지를 움찔 떨었다. 옅은 흥분감에 성기를 세울 것만 같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설영은 집요한 시선으로 현앙의 얼굴과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살결을 훑었다. 어제 제가 남긴 붉은 정사의 자국들이 보여 뿌듯했다. 더 괴롭힐 생각은 없는 건지 웃는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숙제를 열심히 하셨네요.”

“그, 그야 당연하지. 빨리 익혀야 빨리 글 읽을 수 있는 거잖아~.”


생각보다는 뭐야? 현앙이 입술을 비죽였다. 설영은 현앙이 연습해온 글자를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현앙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서서히 현앙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렇게 열심히만 하시면 금방 저만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봐, 도련님. 너무 과한 칭찬 아니야?”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에요. 아, 아침에 여관에 다녀왔는데 여관 아주머니께서 수박을 주셨습니다. 공부 끝나고 같이 먹어요.”


아침에 들릴 곳이 있다더니 여관이었나. 현앙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던 설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1/4 정도 크기로 잘린 수박을 가방에서 꺼내는 설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박 좀 주방에 두고 올게요.”

“내가 갈게! 도련님은 수업 준비나 하셔.”


현앙은 신난 표정으로 수박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쫄랑쫄랑 들어가는 뒷모습이 꼭 꽃밭의 강아지 같다. 설영은 작게 웃으며 문방사우를 꺼내 상 위에 올렸다.

주방에 수박을 두고 온 현앙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의 옆에 앉아 바닥에 종이를 깔고,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 모습이 꼭 선비 같아 설영이 그 몰래 작게 웃었다.


“오늘은 간단한 단어들 가르쳐 줄게요. 어떻게 획을 긋는지 잘 보고 따라 적으면 됩니다.”


설영은 붓 끝에 설영이 갈아둔 먹을 살짝 묻혀 토끼(兎), 호랑이(虎), 개(犬)같은 쉬운 단어들을 한지 위에 적는다.


“으음~. 개는 쉬워 보인다.”

“다른 것도 쓰다보면 쉬울 거예요.”


현앙은 글자를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아까부터 붓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마른천이 감겨져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작게 침음하더니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이봐, 도련님. 손 다쳤어?”

“아. 아까 아주머니가 수박 주셨다고 했죠? 그거 대신 잘라드리다가 살짝 베였어요.”

“약은 발랐고? 시장에 약방이 있는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현앙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안 아프니까 신경 쓰지 말고 따라 쓰세요. 웃으며 덧붙여 말한 설영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현앙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글자를 적었다.


하얀 한지 위에 적힌 토끼, 호랑이, 개 글자를 보고 설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쓰는데요?”

“하하, 간신배도 울고 갈만한 칭찬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전 진심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설영은 거짓 하나 없는 올곧은 시선으로 현앙을 바라보았다. 현앙은 그 시선을 조용히 마주하다 민망한 듯 시선을 돌렸다. 이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앙은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아래로 깔아 한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아! 맞다. 알려주는 김에 이름 쓰는 법도 알려주면 안 돼?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아야할 거 같아서.”

“현앙 이름이요?”

“어어, 나도 그렇고 동생 이름도―. 동생 이름은 월영이야.”


현앙의 이름을 쓰던 설영이 동생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왜 유치하게 질투심이 들지. 설영은 억지로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이름을 적었다.


“…알려주는 김에 제 이름 쓰는 법도 알려드릴게요. 이게 현앙 이름이고, 옆에가 제 이름이에요. 그 다음이 동생 이름이고요.”


설영은 한지 위에 현앙의 이름 옆에 제 이름을 쓰고 그 옆에 월영의 이름을 써 주고는 종이를 넘겼다. 현앙 옆에 제 이름. 제 행동이 조금 유치한 거 같아 현타감이 느껴졌지만 설영은 티 나지 않게 웃어보였다.


“전 옆에서 서책 읽고 있을 테니 어려운 거 있으면 불러요. 알았죠?”


설영은 전처럼 벽에 기대어 앉아 서책을 펼쳤고 현앙은 집중이 안 되는 지 몇 번 엉덩이를 들썩이고 나서야 제대로 붓을 잡고 글씨를 적어 나갔다.


***


시간이 흐를수록 바닥에는 현앙이 쓴 글씨가 적힌 한지들이 늘어갔다. 설영은 흘끔, 현앙을 바라보았다. 전보다 나아진 자세에 흡족함이 느껴졌다.


‘이래서 선생들이 제자를 키우는 거군.’


설영은 읽고 있던 서책을 살며시 닫고 글자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현앙의 옆모습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그저 제 취향이라 하룻밤 재미를 보려고 한 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도 모르게 그에게 푹 빠진 거 같다. 몸이 좋은 것 뿐만아니라 매력이 가득한 사내였다. 본인은 모르는 거 같지만.


‘그러니 되지도 않는 선생질을 하면서 떠나지도 않고 이곳에 있는 거겠지.’


몇 번을 이곳에서 떠나려고 해봤지만, 그가 눈에 밟혀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신룡의 일을 핑계 삼아 그가 지내는 이 대륙이 인간들에게 살기 좋은 곳인지, 괜찮은 곳인지, 그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지. 조사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있었다. 제가 그의 옆에 없더라도 이곳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음, 이제 어디 봅시다.”


설영은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현앙에게 다가가 바닥에 놓인 종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오랜 연습을 통해 처음보다 비교적 단정해진 글씨체가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보다 글씨도 자세도 많이 좋아졌네요. 현앙이 습득력이 좋은가 봅니다.”

“스승이 잘 가르쳐서 그런 거지―.”


설영이 웃으며 현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앙은 그의 손길에 눈을 꿈뻑이며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뒷목을 매만졌다.


“스읍, 도련님이 그렇게 칭찬할 때마다 내가 대단한 놈이라도 된 거 같아….”

“음? 세상에 대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면 혹시 칭찬받는 게 부끄러우십니까?”


그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던 현앙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쑥…스러운 것 보다는 익숙하지 못해서 그래. 내가 살던 빈민촌도, 지금 살고 있는 향락가도 서로에게 애정을 주는 곳은 아니었거든. 어떻게든 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놈이 되어야 인정받았고, 그 인정이 애정은 아니었으니까.”


현앙은 생각보다 담담한 말투로 말하며 들고 있던 붓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시 숨을 삼키고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고르던 현앙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도련님은 좋은 집안에서 자랐으니 모르겠지만, 빈민촌은 자기 밥값을 해야 할 줄 알아야 하는 곳이거든. 난 어리고 할 줄 아는 게 놈이라서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고, 향락가에서는 손님을 만족시켜줘야 칭찬받았어.”


아무튼, 도련님처럼 그냥 평범하게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야.


설영은 눈을 꿈뻑이다가 말을 끝낸 현앙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잡고는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쑥스러움에 붉어진 얼굴 탓일까. 맞닿는 입술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현앙은 제 몸을 뒤로 물리며 팔꿈치를 세워 그의 무게를 버텨냈다. 둘 사이의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지고, 현앙은 제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걸 느끼고는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현앙.”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설영이 현앙과 시선을 맞추었다. 내 심장소리를 들었을까? 내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았을까? 제 앞에 있는 이 사내가 신경 쓰여 긴장감에 마른침이 삼켜졌다.


“…성교를 해야 사랑을 받는 건 아닙니다. 그런 일회성 관계가 아닌 깊은 관계를 맺고 지낼 사람을 만나세요. 그런 일회성 관계는 현앙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림자가 진 설영의 얼굴은 검은 눈동자만 영롱하게 반짝였다. 저와 같은 색의 눈동자인데 이상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깊은 심해 속에 빠진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현앙은 설영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럼 당신은 나의 몸을 원하는 거냐고,

아니면 나의 마음을 원하는 거냐고.

우리의 관계가 일회성이냐고,

아니면 깊은 관계를 맺고 지낼 사이냐고.


현앙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물어보지는 못했다. 제가 원하는 답이 아니면 슬프고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아플 거 같았다. 저는 보기보다 겁이 많았다. 현앙이 아무 말 없이 눈을 꿈뻑였다. 설영은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졌고, 그가 제게서 멀어지자 그제야 긴장을 풀어낸다.


“…향락가에 온 이후로 애정 받는 법을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성교 없이도 애정은 받을 수 있어요.”

“어떻게?”

“궁금하시면 저랑 계속 어울려 주세요.”


현앙은 그의 대답에 마른세수를 해보였다. 앞으로 그가 주는 애정을 더 받는다면 정말 그 애정에 익숙해져서 그가 이 대륙을 떠난 이후로 그를 그리워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는 애정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에게 중독되어버렸다.


“…그것도 도련님이 알려주려고?”

“네. 글자 공부 가르치면서 그것도 알려드리죠. 스승이잖아요.”


익숙해지기 전에 거절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할 수 없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앙의 대답에 설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공부는 그만하고 수박 먹을까요?”


현앙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충동적이었다. 미움 받아도 좋으니 이 충동적인 욕구를 그에게 보이고 싶었다. 다행히 설영은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현앙이 바보처럼 희죽 웃었다.


창밖의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며 흔들렸다.

쓰고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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