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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아 이거 네가 마셨어?”

“뭔데요? 술? 저 아니에요.”

“그럼 박재현?”

“나도 아님.”



 며칠 째 밤마다 술을 마셨다. 그냥 맥주 두 캔 정도... 딱 기분 좋을 만큼. 너무 깊숙이 생각에 취하지 않을 정도만. 그래서인지 아침마다 머리가 띵하고 몸이 무겁다.

 


“그거 나야.”

 


 내가 방을 나오며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하자 거실에 모여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아, 이런 관심은 조금 부담스러운데?내가 어색하게 손을 내리며 웃어보이자 인하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새 네가 마셨다고?”

“...응.”

“벌써 3일 째 두 캔씩 비워져있던데? 그것도 그럼 너야?"

“아... 응.”

 


 아침마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인하가 아무래도 며칠 째 쓰레기통에 버려진 두 개의 맥주 캔을 보고 이상하다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하긴 숙소에서 술을 마실 사람은 없는데 계속 빈 캔이 나오니까 이상했겠지.

 


“내가 3일 전부터 누구지 하면서 계속 눈 감고 지나갔었는데 이게 네가 마신 거였다고?”

“...”

“너 몸에 안 좋아.”

 


 인하의 타이르는 듯한 말에 고개를 조금 숙이곤 작게 끄덕였다. 그래도 안 먹으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걸 어떡해. 마음속으로 생각한 말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인하는 마셔도 어떻게 본인을 빼고 마실 생각을 하냐며 투덜거렸다.

 

 타는 목에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지 하고 부엌으로 향하는데 변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였는지 변백현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피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부엌으로 가 컵을 꺼내어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이 뻑뻑한 식도에 부드럽게 흐른다.

 


“다음 주부터는 우리 모두 개인 임무야.”

“응? 왜?”

“팀장님 다음 주부터 출장 나가신다던데. 나도 전해들은 거라서 정확히는 모르고... 스케줄 표 보니까 그렇게 돼 있더라.”

“출장? 갑자기 뭔 출장이래.”

“그러게나 말이에요.”

 


 다음 주부터 팀장님이 출장 나가신다고? 전혀 못 들었는데... 현장 임무를 길게 나가시는 건가? 그런데 잠깐, 개인 임무? 그럼... 숙소에 나랑 변백현만 남는 건가? 변백현은 개인 임무에서 열외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변백현과는 그 날 그런 일이 있고나서 일체 말을 나누는 일이 없었다. 대화라고 해봤자 가이딩 받아. 응. 이정도? 팀원들은 번갈아가면서 한동안 매달리고 다니더니 갑자기 왜 그러냐며 나와 변백현이 또 싸운 줄 알고 있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싸워서 이런 사이가 된 거면 좋겠다. 그럼 이렇게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을 텐데.

 

 씻기 위해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흔적이 방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제 마시고 내놓지 않아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져있는 맥주 캔, 그리고 아무렇게나 펼쳐진 어제 한참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어보던 자료, 그 아래로 아직 산더미 같이 쌓인 파일들. 방 꼴이 말이 아니기에 씻기 전에 책상 위라도 대충 정리를 했다. 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해 파일에 넣고는 빈 맥주 캔은 혹시 몰라 테라스에 내놓고 커튼을 쳐 가렸다.

 


“와씨...”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물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 어제 대체 술 먹고 어떻게 씻고 잔거야. 결국 욕실도 대충 청소한 후에야 세안을 할 수 있었다. 수건으로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으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느새 눈 밑으로 조금씩 기어 내려오기 시작하는 다크서클부터 늦은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 해 푸석해진 피부까지.

 

 3일 전부터 자료를 찾아 읽는 것 때문에 일찍 잠들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자료는 센터 자료실에 열람이 가능한 임무 보고서를 포함한 센티넬 능력 연구에 대한 논문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물론 내가 찾으려는 건 딱 한 가지, 메모리얼의 능력으로 인해 갇혀진 기억을 능력자를 제외한 자의 혹은 타의로 다시 되찾는 방법. 몇날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비슷한 사례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센터 자료실에는 종합 자료만 존재하기 때문에 임무 보고서 같은 경우에는 분류 기준이 명확하게 나눠져 있지 않고 뒤죽박죽 섞인데다가 분류 되어있다고 해도 시간 순으로 분류 되어 있는 것이 다였다. 그런 자료가 몇 천부, 몇 만부나 되는데 그걸 어떻게 다 보냐고... 거기서 또 어떻게 찾아...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난 기약 없이 이렇게 기억을 잃은 채로 살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해야지.

 

 변백현을 꼬시니 뭐니... 진즉에 포기했다. 가능성이 갈수록 희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변백현이 싫다는 짓, 변백현을 힘들게 만드는 짓을 하기 싫었다. 안 그래도 힘들 아이를 더 이상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기억을 찾는 게 급선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 때문에 아픈 변백현을 더 아프게 만들 수는 없었다.

 

 거울 앞에 서서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틀어 묶었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오늘도 찾아볼 자료가 산더미 같은데... 앞날이 막막하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죄가 너무 커 그럴 수가 없다.

 

 그 죄라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무섭게 몸을 부풀려가고 있으니까.

 








약해빠진

 








“누나 그 많은 걸 들고 어디가요?”

“응? 잠깐 본관에.”

“너 요즘 가이딩만 하고 나면 어딜 나간다?”

 


 어제 다 읽은 자료들을 다시 자료실에 갖다 놓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서 들고 방을 나오는데 종인이가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키우며 묻는다. 내가 미소를 띠며 대답하자 언제부터인지 종인이 옆에 서있던 재현이 나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다.

 


“있어. 내 은밀한 사생활이.”

“웃기고 있네. 그래봤자 센터 안인데. 은밀하긴 뭐가 은밀해. 그리고 그 자료들은 다 뭐에 쓰는 건데.”

“나 요즘 공부하고 있으니까 방해나 마셔.”

 


 공부. 그렇지 어떻게 보면 공부 맞지. 그러니까 난 거짓말 한 거 아니야. 내 대답에도 재현은 나를 보는 기분 나쁜 눈빛을 거두지 않았지만 난 그에 개의치 않고 숙소를 나섰다. 빨리 가서 반납하고 팀장님한테 가서 가이딩을 해줘야한다. 아이고 바빠.

 


“SGC.408.... 여기다.”

 


 자료를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것도 일이었다. 나중에 한 번에 가져다 놓으려다 자료실 문을 닫을 때까지 다 못 할 거 같아 어느 정도 자료를 읽으면 읽은 자료를 먼저 자료실에 반납해뒀다. 본관 자료실에서 가는 길에 팀장실 가기에도 딱 좋았다.

 


“다 됐으.”

 


 마지막 자료까지 원래 자리에 끼워놓고 뻐근한 목을 돌리며 책장 사이를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눈에 띄는 책 제목에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그 책 앞에 섰다.

 



[MEMORIAL]

 



 크게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책이었다. 수많은 자료들 사이에 이질적이게 자리한 책에 손을 뻗었다. 메모리얼. 목차를 보아하니 메모리얼에 대한 연구 책인 듯 했다. 망설임 없이 책을 들고 자료실을 나왔다. 오늘 이거부터 읽어야겠어. 왠지 이 책에 내가 원하는 해답이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똑똑-

 

“팀장님.”

-들어와요.

 


 팀장님 가이딩을 위해 팀장실로 왔다. 팀장님은 내가 팀장실에 들어가자 의자에서 등을 떼고 일어나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나를 품에 안았다. 아, 오랜만에 안기는 팀장님의 품에 조금 놀라 움찔거렸다. 팀장님은 그런 나를 안은 채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가이딩을 받으셨다. 많이 피곤하셨나?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나를 안고 계시던 팀장님이 나를 천천히 떼어낸다.

 


“이새 양.”

“네?”

“이새 양은 천국이 있다고 생각해요?”

“...음... 있지 않을까요?”

“그럼 이새 양은 천국을 좋아하나요?”

“천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팀장님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걸요? 천국은 이상의 세계라잖아요.

 


"이새양 말이 맞네요. 천국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죠?"

"그렇죠?"

“내가 요즘 머리가 많이 복잡해서... 이상한 말해도 이해해줘요.”

“괜찮아요. 저도 맨날 이상한 말하잖아요.”

 


 축 처진 듯한 팀장님의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요즘 많이 힘드시구나.

 


“이건 뭐예요?”

 


 잠시 뒤, 안았던 나를 천천히 떼어놓고 소파로 데려온 팀장님이 내가 테이블 위에 책을 얹어두자 궁금하신 듯 물어온다.

 


“...아, 그냥 자료실에서 재밌어 보여서.”

“메모리얼?”

 


 팀장님은 책 제목을 한 번 읊조리고는 관심이 떨어진 듯 다시 책을 내려놓고 내 손을 맞잡았다. 가이딩에 몸에 힘이 풀리는지 팀장님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을 감으셨다.

 


“아 맞다. 팀장님 다음 주에 출장 가신다면서요.”

“아 네. 그렇게 됐어요.”

“무슨 출장을 가시기에 팀 임무도 잠깐 중단하시고...”

“...그냥 현장 임무인데 다른 지역에서 지원요청이 들어온 탓에 어쩔 수가 없네요. 미안해요.”

“그게 왜 저한테 미안한 일이에요.”

“그냥, 그냥요.”

 


 그냥. 어느 순간 내가 받아들이기 너무 힘든 단어가 되어버렸다. 저 그냥이 그냥이 아닌 순간부터 나는 저 말에서 너무나도 큰 무게감을 느끼고 말았다. 지금도, 지금도 그래. 팀장님의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

 


“갔다가 언제 다시 오세요?”

“음... 글쎄요.”

“그런 게 어딨어요.”

“걱정 마요.”

“네?”

“이새 양은 누구나 천국을 원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

“그러니까 됐어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팀장님은 알 수 없는 말만 계속 되풀이 하신다. 팀장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 모습을 난 멍하니 지켜보았다.

 


“조만간...”

“...”

“조만간 다 끝날 테니까.”

“...”

“어쩌면 천국이...”

“...”

“머지 않았을 지도.”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든 팀장님에 내 벌어진 입술은 다시 맞물렸다. 천국... 팀장님이 말한 머지 않았다는 천국은 과연 팀장님의 이상 세계일까? 여전히 난 팀장님이 어렵다.

 








 






 MEMORIAL(메모리얼)은 상대방의 기억을 읽고 상대방에게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장할 수 있다.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은 'COPY' ‘TAKE'로 나눌 수 있는데 'COPY'의 경우에는 이능을 발현할 시에 상대방의 기억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대로 기억을 복사해오는 것. 기억을 읽는 것과 다른 점은 'COPY’시에 상대방의 기억 속 감정도 복사 즉, 공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TAKE'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기억을 아예 자신의 것처럼 가져오는 것, 한마디로 상대방의 기억을 빼오는 것. 'TAKE' 방법을 사용할 시에 상대방은 MEMORIAL(메모리얼)이 가져온 기억을 잃게 되며 그 기억이 있던 곳은 텅 비게 되는데 이때 그 텅 비어버린 기억에 대해 상대방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TAKE'는 수치가 높은 센티넬이 아닌 경우 시도할 시에 신체능력에 큰 타격이 가는 방법이다.

‘TAKE’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기억 저장을 위해 이능을 발현하는데 상대방의 기억의 범위, MEMORIAL(메모리얼)이 기억 속의 상대방 감정에 동요되는 정도에 따라 수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다르다. ‘TAKE’ 방법은 MEMORIAL(메모리얼)이 기억을 가져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 기억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이능을 계속 유지시켜야 한다. ‘TAKE'를 사용한 MEMORIAL(메모리얼)은 이능이 쉽게 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TAKE'해온 기억에 'ROCK'을 걸기도 한다.

 ‘ROCK'은 단어 뜻 그대로 잠금, 기억을 잠그는 것을 뜻한다. 보통은 특정 행위, 키워드 등으로 'ROCK'을 건다. ‘TAKE'를 통해 기억에 'ROCK'를 건 MEMORIAL(메모리얼)은 특정 행위, 키워드를 이행함으로써 ‘ROCK’를 풀 수 있다. ‘ROCK'이 풀리면 상대방에게 기억이 되돌아 가게 된다. 』

 


 눈이 뻑뻑했다. 너무 오랫동안 책을 본 탓이었다. 다음 챕터만 읽고 아무래도 책을 덮어야할 듯싶다. 눈을 비비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또 양 면을 빼곡하게 채운 글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 MEMORIAL(메모리얼)은 가끔 괴심가와 파장이 비슷한 탓에 검사 시에 오판이 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같은 정신계열인 데다가 비슷한 이능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검사한 수치의 자료를 정확히 분석해야한다.

 상대방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MEMORIAL(메모리얼)과 상대방의 트라우마를 억지로 꺼내어 공유하는 괴심가는 밑에 자료와 같이 P5를 제외하고는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래프의 모양이 같아 보인다. P5 마저도 구분하는데 쉽지만은 않은데 육안으로 봤을 때 그나마 차이가 뚜렷한 부분이다. 오른쪽 사진처럼 둘의 수치를 겹쳤을 때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P5는 능력의 성향을 나타내는 그래프로 공격형일수록 한 구간에 짧고 빠르게 파장이 그려진다. MEMORIAL(메모리얼)의 경우 괴심가의 그래프보다 P5에서 더 길고 느리게 파장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미세한 차이지만 이는 명백하게 MEMORIAL(메모리얼)과 괴심가가 다름을 밝히고 있다. 』

 


 결국 한 챕터 더 읽지 못 하고 책을 덮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떴다. 책상 끝에 올려두었던 물기가 흐르는 맥주 캔을 들고는 테라스로 나갔다. 손에 잡히는 캔이 손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테라스로 나오자 얇은 원피스 끝자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안에 들어가서 가디건이라도 걸치고 나올까 했지만 그만뒀다. 그냥 이 바람이 내 속을 시원하게 뻥 뚫어줄 것만 같아서.

 

 치익-. 맥주 캔을 따 조금 올라오는 거품을 핥아 먹었다. 테라스 난간에 팔을 걸치곤 밝게 뜬 달을 바라보았다. 사실 책을 덮어버린 건 눈이 뻑뻑해진 탓도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만 머릿속에 들어차는 변백현의 얼굴 때문이었다. 내게 기억을 돌려줄 수 없다며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변백현. 그리고 그 슬픈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흐르던 것까지. 이렇게 변백현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 때면 술을 마셔 겨우 지워내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고.

 

 혼자 아플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이 존재하긴 한 걸까. 존재하지 않다고 해도 난 찾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존재를 알 수 없는 것들을 향한 희망은 너무 막연해서 때론 좌절되고 만다. 이러다 어느 순간 나도 좌절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픈 것도, 변백현이 아픈 것도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나왔다. 차가운 맥주를 다시 내 입속으로 들이부었다.

 


“아씨... 벌써 다 먹었어.”

 


 금세 비어버린 캔이 원망스럽다. 오늘은 한 캔만 마시기로 했으니 더 아쉽기만 하다. 더 마시려고 해도 더 이상 남은 맥주가 없다. 이럴까봐 한 캔만 사오긴 했지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한 번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에 몸을 한 번 떨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테라스 문을 열자 바람이 방 안까지 침범해버린다. 그에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책이 바람에 힘없이 휘날려 페이지가 수없이 넘어가버린다. 문을 빠르게 닫은 내가 잠깐의 바람으로 한참을 넘어가버린 페이지를 되돌리기 위해 책상 앞에 섰다.

 


“...원래 찢어져있었나?”

 


 언제부터 찢어져있었는지 모를 페이지가 의아해 찢어진 끝을 매만졌다. 곧 달빛에 비쳐 찢어진 페이지 옆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문장에 난 다시 스탠드를 켤 수밖에 없었다.

 

『 독일의 한 연구가 RIAN 교수는 MEMORIAL(메모리얼)에게 ‘TAKE’ 당한 상대방의 기억을 괴심가의 이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계획했다. 모두가 이 위험한 실험을 반대했지만 RIAN 교수는 이 위험한 실험을 불법적으로 실행하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연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

 

 그 뒤로는 페이지가 찢어져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난 그 페이지가 찢어졌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드디어 해답을 찾아냈으니까.

 


 드디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약해빠진

 








- 윤이새 정신 똑바로 차립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얇은 잠옷 차림으로 테라스에 오랫동안 있어서 인지 아침부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그래도 피로에 쌓여 면역력이 떨어져 있었는데 차가운 바람까지 쐬어 감기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 김인하, 제 3구역에서 2구역 센티넬 추적 중 사라졌습니다. 순간이동 센티넬입니다.

- 전 구역 대기. 도주한 센티넬 추적 불가 상태. 주위 경계에 신경 쓰세요.

- 제 5구역 이상 없음.

- 제 4구역 이상 없음.

- 제 6구역, 7구역 이상 없음.

- 제 8구역 이상 없음.

 


 귀로 타고 들어오는 통신에 나 또한 긴장 했다. 오늘은 구역이 많아 다들 단독으로 구역을 나누기로 했다. 1구역은 함께 제압하고 다른 팀원들은 각자 구역으로 가 팀장님의 오더에 따라 구역을 장악했다. 이곳은 입구와 출구가 각각 하나씩밖에 없는 탓에 입구와 가장 가까운 1구역에 나를 배치해둔 팀장님은 1구역을 쓸어버렸음에도 혹시 모를 상황에 정신을 자꾸만 빼놓는 나를 걱정했다. 다른 팀원들도 말은 없지만 아마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이렇게 정신을 빼놓은 적은 없었는데...

 


- 남은 구역은 제 9구역. 이곳은 제가 갈 테니 다른 팀원은 1구역으로 이동합니다.

 


 팀장님의 말에 모두가 알았다고 말했다. 제 1구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인하가 곧 도착할 것이다. 총을 들고는 인하가 올 제 2구역 입구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순간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왼쪽으로 빠르게 돌리며 총을 겨누었는데 등 뒤로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내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분명 왼쪽이었는...

 


- 김인하, 제 3구역에서 2구역 센티넬 추적 중 사라졌습니다. 순간이동 센티넬입니다.

 


 그제서야 도주한 센티넬이 순간이동 센티넬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숨을 죽였다. 아직 총을 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려 들면 바로 발포해버리겠지.

 


“움직이면 쏠 거야.”

- 이 목소리 누구야. 이새야. 대답해 봐.

 


 인하의 목소리가 인이어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내가 계속 이렇게 잡혀있으면 지금 이곳으로 모이는 다른 팀원들이 위험해진다. 일단 이 범위 안에서 벗어나야한다. 저번처럼 또 나로 인해서 팀원들이 위험해 처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빠르게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다면 뒤에 있는 센티넬이 발포하기 전에 벗어날 수 있다. 하나 둘 셋 하면 도는 거야. 긴장하면 내 빨라지는 심장소리를 들을 거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하나, 둘,

셋.

 

타앙-

 


 빠르게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감기 기운으로 무거운 몸 때문이었는지 발포된 총을 그대로 맞아버렸다. 다행히 심장을 겨누고 있던 총이 내가 몸을 틈으로 인해서 왼쪽 어깨를 맞췄지만 말이다. 내 왼쪽 어깨를 관통한 총알에 왼쪽 어깨에서부터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욕을 지껄이던 적 센티넬이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총을 겨누었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내 앞으로 인하가 끼어들었다.

 


“크윽-”

 


 이미 방아쇠를 당긴 적 센티넬은 인하의 능력으로 인해 다시금 튕겨나간 총알을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맞아버렸다. 고통에 신음하며 그대로 뒤로 넘어간 적 센티넬에 인하는 순식간에 그 센티넬의 위에 올라타 제압했다. 통신으로 팀원들이 상황 설명을 요하며 소리치는 것이 들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번져오는 고통에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해 눈을 꾹 감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곧 그런 내 입술에 닿는 따스한 온기. 팀장님의 손이었다. 나, 뭘 기대한 거지?

 


“쉬이- 이새 양.”

“아...”

“괜찮아요. 눈 떠 봐요.”

“아... 아파요...”

“이새 양? 그만.”

 


 고통에 이로 깨문 아랫입술에서부터 피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와 왼쪽 어깨에서부터 번져오는 시린 기운에 얇은 신음을 내며 아랫입술의 고통도 잊은 채 더욱 꽉 깨물었다. 아프다는 말에 내 턱을 당기는 팀장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말에 겨우 아랫입술을 깨물던 입을 열고 눈을 떴다.

 


“옳지- 조금만 참아요.”

 


 총상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던 왼쪽 어깨는 팀장님의 능력으로 얼어붙어 피가 멎어있었다. 내 눈 끝에 고인 눈물을 제 손으로 훔친 팀장님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제 품에 안곤 팀원들을 돌아봤다. 어느새 도착한 재현과 변백현, 종인이도 보였다.

 


“김종인 센티넬이 이새 양 데리고 먼저 의료국으로 향합니다. 2분 뒤에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할 테니까 그 전까지 의료국으로 이동해서 바로 응급처치 하도록 합니다.”

“네.”

“그리고 남은 팀원들은 저와 함께 현장 마무리 하고 복귀합니다.”

 


 팀장님 어깨너머로 나를 걱정스럽게 바로 보는 팀원들의 얼굴이 보인다. 아... 또 이렇게 걱정 시켜버렸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에 방황하던 시선이 한 곳에 정착했다. 변백현. 나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그 눈이 텅 비어 보였던 건 착각일까.

 



“누나 잠깐 눈 감아요. 바로 의료국으로 이동할게요.”

 


 힘없이 제게 기댄 나를 팀장님은 조심스럽게 종인이에게 넘겨주었다. 다친 어깨를 잡을 수 없어 허리에 조심스럽게 팔을 두른 종인이가 내 눈 앞을 제 손으로 가렸다. 더 이상 변백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 보고 싶은데... 너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리고 난 가장 먼저 내 앞에 나타난 팀장님을 두고 왜 실망이란 걸 한 거지.

 






 





 종인이의 능력으로 순식간에 의료국에 도착한 나는 바로 응급실 베드에 눕혀졌다. 의료국 힐러 센티넬과 바인드 센티넬이 다급하게 달려와 내 앞에 섰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팀장님의 능력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팀장님의 능력이 풀리면 그 순간부터 엄청난 고통이 나를 덮치겠지.



“아마 많이 아플 거예요. 참으셔야 합니다.”

 


 힐러 센티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팀장님의 능력이 풀렸고 그 순간부터 왼쪽 어깨가 타들어가는 고통에 난 비명과 다름없는 신음을 내었다. 누가 내 왼쪽 어깨를 도려내는 것 같았다. 팀장님이 잠깐 막아둔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 했다. 내 상처에서 다시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바인드 센티넬은 내가 고통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몸을 속박 시켰고 힐러 센티넬은 귀를 찌르는 듯한 내 비명 섞인 신음에도 내 어깨를 치료하는 것에 집중했다. 종인이는 그런 내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등을 돌렸다.

 


“뜨거워요... 흐으... 너무 뜨거워요... 제발...”

“조금만 더 참으세요.”

 


 고통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 고통 속에서 난 변백현을 찾아 헤맸다. 네가 이때까지 느끼던 고통도 이만큼 아팠을까? 아니... 더 아팠겠지? 그 고통을 혼자 견뎌냈을 변백현이 떠올라 더욱 괴로웠다. 내 잘못으로 인한 고통도 이렇게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아픈데 네 잘못으로 인한 것도 아닌 고통을 넌 어떻게 견뎌왔을까... 내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겠지? 그 순간 난 참 이기적이게도 변백현이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일단 이만큼만 할게요. 더 이상 했다가는 아마 몸이 견디지 못할 거예요. 내일 한 번 더 치료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관통상이라 한 번에 치료하는 건 힘들어요.”

“...네.”

 


 식은땀을 닦아내며 내 어깨에서 손을 거둔 힐러 센티넬이 종인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 몸을 속박하던 무언의 힘이 풀리자 나는 온 몸을 축 늘어뜨렸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상처 부위가 뜨거울 거예요. 일단 진통제 맞고 숙소로 돌아가셔도 되고, 내일까지 입원 하셔도 됩니다.”

“...숙소로 돌아,”

“입원해.”

 


 답답한 병실보다는 숙소가 더 나을 거 같아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종인이에게 말하려는데 내 말을 끊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백현이 형 말대로 해요. 누나.”

“...”

“입원 수속은 제가 밟을게요.”

 


 나를 설득시키는 종인이의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변백현을 바라봤다. 변백현은 나를 보지도 않은 채 힐러 센티넬의 따라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그 뒤를 따른다. 왼쪽 어깨가 잔뜩 홧홧 거리는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 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다친 건 왼쪽 어깨인데 내 눈가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종인아 나가서 나 물 한 잔만...”

“잠시만 기다려요!”

 


 종인이가 나간 후에야 난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냈다.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이제야 깨달았다. 내 삶부터가 이미 비현실적이었다는 것을.

 





약해빠진

 





 입원한 다음날 받은 치료는 어제보다는 확연히 고통이 덜했다. 조금 뜨거워서 눈살을 찌푸릴 정도? 힐러 센티넬은 치료를 마친 후에 바로 상처가 아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아물어가는 것이라 아직 무리하는 건 안 된다고 말했다. 그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나는 부상으로 인해 나를 빼고 임무에 나간 팀원들로 인해 혼자 병실에 남아야 했다.

 


‘조금 있다가 412호 센티넬 바이탈 체크하러 가야합니다.’

‘아... 누구였더라.’

‘얼마 전에 D팀 발령난 오세훈 센티넬이요.’

‘아,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들어오자마자 D팀 들어간 괴심가 센티넬?’

‘네네. 회복은 빠른데 가이딩이 한참 부족해요.’

 


 아까 힐러 센티넬과 가이드의 대화가 귀에 맴돈다. 그들의 대화 사이에 오가던 괴심가 센티넬이라는 단어에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가 찾으려 했던... 센티넬이다. 이렇게 쉽게 찾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계획을 실행할 좋은 생각도 떠올랐다. 일단 그 센티넬을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 어떻게 해서는 퇴원해야 한다. 갈아주고 간 안정제 다 맞고 나면 바로 퇴원 수속을 밟으러 가야겠다.

 

 멍하니 누워서 링겔이 떨어지는 것만 보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꽤 오랫동안 잠에 들었던 건지 어렴풋이 잠에서 깼을 때는 어느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듯한 인하와 변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간다.”

“야 변백현."

“...”

“내가 이렇게 둘만 있으니까 말하는 건데. 너,”

“간다.”

“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변백현이 나간 모양이다. 뒤이어 인하의 깊은 한숨소리도 들려온다. 천천히 눈을 뜨자 인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손을 뻗어 인하의 손가락을 툭툭 치자 인하가 놀라 뒤를 돌아본다.

 


“일어났어?”

“응.”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까 치료도 받았고.”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 무리하면 안 돼.”

“나 퇴원 수속 밟을 거야.”

“벌써?”

“응. 오늘 안에 상처 다 아문다고 했어.”

 


 내 말에 인하는 그럼 오늘까지 입원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며 말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하도 크게 나를 말리진 않았다. 내가 답답해하는 걸 알기 때문인 듯 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지금."

“지금?”

“응. 안정제도 다 맞았어.”

“...그럼 뭐. 그러자. 숙소 가서 쉬면되니까.”

“응.”

 


 인하가 웃으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인하가 나가자마자 한쪽에 놓여있는 내 옷을 상자에서 꺼내어 갈아입었다. 퇴원수속을 밟고 온 인하는 벌써 준비 다 했냐며 놀라했다. 내가 그에 웃자 인하는 얼른 가자며 내 오른손을 잡고 이끌었다. 의료국을 벗어나 팀장실과 숙소로 갈리는 갈림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냐는 듯 뒤를 돌아보는 인하의 손을 놓았다.

 


“먼저 가. 나 팀장님한테 갔다가 올게.”

“팀장님?”

“응. 나 입원한 동안에 한 번도 못 오셔서 아마 걱정하고 계실 거야. 할 얘기도 있고...”

“기다릴게. 갔다 올래?”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힘들면 팀장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게. 오래 걸릴 거 같아서.”

“...그럴래?”

“응. 먼저 가.”

 


 인하는 잠깐 망설이는 듯 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인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금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412호 라고 했지.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직 왼쪽 어깨가 아려오는 탓에 왼쪽 팔의 움직임을 최소화 한 채 걸었다.

 


[ 412호 / 오세훈 ]



 412호 앞에 선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천천히 병실문을 열었다. 창문 앞에서 밖을 보고 있던 오세훈이라는 센티넬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뒤 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의 주변으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듯 했다. 나는 조용히 병실문을 닫고는 오세훈 센티넬에게로 다가갔다.

 


“...누구?”

“저 초면에 죄송한데 부탁드릴게 있어서요.”

“...네?”

“A팀 소속 가이드 윤이새예요.”

“...아... 그런데 저한테 무슨 부탁을...”

“저한테 그쪽 능력 좀 써줄래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말에 오세훈 센티넬의 표정이 잔뜩 굳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괴심가의 능력이라 하면 상대방의 트라우마를 꺼내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 지금 그런 능력을 자신에게 써달라는 내 말에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하다. 사정을 전부 말해줄 수는 없다.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할까.

 


“많이 당황스럽겠지만 부탁해요. 사정이 있어서.”

“네... 많이 당황스럽네요...”

“...”

“그런데 부탁 못 들어드릴 거 같은데...”

“... 어째서요?”

“제 능력이 대충 뭔지 아시는 거 같은데 그 괴로운 걸 기억해서 어쩌시게요.”

“...”

“그리고 저 지금 수치가 불안정해서 능력 발현하면 그쪽이 다칠지도 몰라요.”

 


 오세훈 센티넬의 말에 오늘 낮에 나를 치료해주던 힐러 센티넬과 가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아 가이딩이 부족하다고 했었지?

 


“그럼 이렇게 하면요?”

 


 내가 제 손을 덥썩 잡자 놀란 듯 내 손을 뿌리치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들어오는 가이딩에 오세훈 센티넬은 힘이 풀리는지 벽에 기대 몸을 지탱했다. D팀이라고 했지. 도팀장님이 담당하고 있는 팀. 저번에 들은 바로는 전담 가이드가 없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맞는 전담 가이드를 구하기 못한 건가. 내 가이딩에 저렇게 힘이 풀려하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생각 안 바뀌었어요?”

“...”

 


 난 오세훈 센티넬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뗐다. 그러자 내 손을 쫓아오는 오세훈 센티넬의 손을 피했다. 그래. 처음 느껴보는 가이딩에 안달이 나겠지. 센티넬은 처음 느껴보는 강한 가이딩일수록 집착하려 하니까.

 


“가이딩 받고 싶어요?”

“...”

 


 오세훈 센티넬이 고개를 끄덕인다. 됐다. 작전이 먹혀들어갔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저한테 능력, 써줘요.”

“...그건...”

“...”

 


 오세훈 센티넬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떨리는 손끝은 그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으니 더 강한 여운이 남아 맴돌고 있을거다.

 


“그럼 이유를 알려주세요. 제 능력이 위험하다는 거 그쪽도 알잖아요.”

“...기억을 잃었어요.”

“...”

“그 기억을 찾지 않으면 내 주변 사람이 다쳐요. 아니... 이미 다쳤어요. 너무 많이 다쳐서...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예요.”

“...”

“부탁해요. 사람 살린다고 생각하고.”

“...전 그쪽이 어떤 기억을 떠올려도 책임져 줄 수 없어요.”

“...괜찮아요. 감당은 내가 해요.”

 


 오세훈 센티넬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난 능력을 발현하려는 오세훈 센티넬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흘려보냈다. 할게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지? 왜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 ...지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내 귀를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 하지마...! 제발...!

 


 숨이 턱 막혀온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릴 뿐인데... 벌써 심장이 조여 온다. 왜... 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거야. 분명 내 목소리다. 작지만 애처롭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내 목소리다. 그 순간 눈이 떠졌다. 눈앞의 오세훈 센티넬도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딘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소리가 들렸어요.”

“소리요?”

“네. 다시 한 번 더 해봐요. 조금만 더...”

“...알았어요.”

 


 오세훈 센티넬이 눈을 감음과 동시에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여전히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검은 공간만이 보일 뿐이다. 난 오세훈 센티넬을 잡은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리고 그때.

 


- 윤이새!!!!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에서부터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뭐하는 거야!!”

 


 그때, 나와 오세훈 센티넬을 이어주던 손이 순식간에 떨어지고 난 누군가의 손길에 밀쳐졌다. 순간 밝아지는 시야에 머리가 깨질 거 같았다. 오세훈 센티넬과 나의 사이를 떼어놓은 이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윤이새! 너 정말 미쳤어?!!”

“...도팀장님.”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도팀장님이었다. 도팀장님이 이렇게 나타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세훈 센티넬은 도팀장님이 소속된 D팀이니까. 도팀장님은 나를 내려다보며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병실을 가득 채운 도팀장님의 커다란 목소리가,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나를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도팀장님의 얼굴이... 도팀장님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 정신이야 너?”

“...대체 뭐가요...?”

“뭐?”

“내가 내 기억 찾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리는 사람이 많아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또 나를 위해서라고 하시게요?! 난 아파서 죽을 거 같은데... 그런데도 그게 저를 위한 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하아...”

 


 아무래도 왼쪽 어깨에 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덧난 모양이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가이딩도 그렇고 오세훈 센티넬의 능력이 나를 짓누른 탓에 그런 듯하다. 조금씩 번져오는 고통에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란 도팀장님과 오세훈 센티넬은 그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왼쪽 어깨에서부터 옷을 적셔오는 피에 둘 다 당황한 듯 했다.

 


“으으...”

“너, 너 어깨 왜 이래!”

“...도팀장님.”

“...”

“저... 저 너무 아파요...”

“...”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다른 거에 아파할 시간이 없어요...”

“...”

“그런데 변백현은... 백현이는... 더 아프겠죠.”

“...”

“이것보다 몇 십배는... 몇 백배는 아프겠죠. 그런데 아무도... 아무도 그걸 모르잖아요...”

“세훈아 가서 빨리 힐러 불러와.”

“아무도 변백현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잖아요. 네?”



 도팀장님의 말에 오세훈 센티넬은 빠르게 병실을 나섰고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오세훈 센티넬의 능력으로 어렴풋이 들렸던 변백현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내 이름을 외치던 변백현의 목소리. 분명 변백현이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

“오세훈 쟤,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능력도 불안정한 애야. 자칫 능력 사용하다 폭주 올 수도 있는 애라고.”

“...”

“네가 왜 세훈이한테 찾아왔는지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이새야 이건 아니야.”

“그럼 맞는 건... 맞는 건 뭐예요...”

 


 내 말에 도팀장님이 입을 닫았다. 도팀장님을 원망했다. 도팀장님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 감정을 풀 상대가 없어서 이기적인 난, 도팀장님을 원망하고 만다. 이런 나를 도팀장님이 이해해줄까...

 


“제가 뭘 해야... 뭘 해야 맞는 건데요.”

“...”

“아니지... 애초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해요?”

 


 도팀장님이 내 눈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려던 손을 멈추었다. 그 손이 결국 거두어진다. 도팀장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이고 계셨고 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곧 병실 문이 열리며 힐러 센티넬이 도착했고 도팀장님은 울고 있는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겼다.


 힐러 센티넬은 잔뜩 덧난 상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랬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말없이 고통을 삼킬 뿐이었다. 주먹을 꽉 쥐고 고통을 참아내는 내 손 위로 도팀장님의 손이 덮였다. 도팀장님의 표정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약해빠진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들어가자 신발장에서 신발을 구겨 신던 인하가 놀라 내 어깨를 부여잡는다. 상처에 닿는 인하의 손에 인상을 찌푸리자 인하는 미안하다며 손을 급하게 뗐다. 그리고는

 


“너 안 와서 찾으러 가려고 했어.”

“팀장님한테 갔다가 온다고 했잖아.”

“그래도 너무 안 와서...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 하고...”

“...미안.”

 


 인하는 아니라며 아무 일 없었으니 다행이라며 내 팔을 쓸어내렸다. 그때 누군가 현관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한손에는 두꺼운 겉옷을 하나 든 채로. 나와 마주친 눈이 커진다. 변백현... 곧 다시 뒤도는 변백현의 모습에 나 또한 시선을 거두었다. 나를 찾기 위해 급하게 달려 나오던 거겠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응? 왜 웃어?”

“아니야. 나 방에 들어가서 쉴게.”

“그래 얼른 자. 그래야 빨리 낫지.”

“응.”

 


 인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나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왔다.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상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새야 난 이렇게 사물따위의 시간은 되돌릴 수 있지만 생명을 가진 생명체의 시간을 되돌리지는 못 해.’

‘...’

‘난 때로 이런 내 능력이 한심하게 느껴져.’

‘...’

‘정작 되돌려야 할 시간은 되돌리지 못하는 내 능력이...’

‘...’

‘나를 자꾸만 좌절시켜.’

‘...’

‘백현이도 너도... 난 둘 다 지키지 못 했어.’

 


 도팀장님의 쓴 웃음이 떠올랐다. 나만큼이나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도팀장님의 표정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피로 얼룩졌던 옷이 도팀장님의 능력으로 피로 얼룩지기 전으로 되돌아갔지만 내 기억 속에 피에 젖은 내 옷은 변함없었다. 도팀장님 또한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 기억은 지워졌지만... 도팀장님의 기억 속엔 그때의 내가 선명히 남아있겠지. 나와 변백현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기억하는 도팀장님은 어쩌면 가장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모든 걸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내 모습이 나를 스스로 좌절시켜.’

 


 또 내가 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난 또 누군가를 아프게 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어쩌면 나를 가장 생각해주는 사람을... 난 또 괴롭게 했다. 도팀장님께 또 좌절을 안겨드렸다. 옷이 내 손 안에서 보기 싫게 구겨졌다. 주름이 가득 잡힌 옷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린다. 그 꼴이 마치 내 마음 같다. 모난 모습으로 잔뜩 뒤틀린 내 마음과 같다.

 

 가야할 길을 또 잃었다.

 









 







- 빨리...

- 기다리고 있어요.

 


 한참을 뒤척이던 이새가 간신히 잠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완벽하게 떠지지 못한 눈이 텅 비어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난 이새는 얇은 원피스 잠옷 차림 그대로 방을 나선다.

 


“... 윤이새?”

 


 마침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던 백현이 이새의 모습을 봤다. 이새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렸지만 곧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 이새의 모습을 백현은 이상하다 느꼈다. 텅 빈 듯 풀린 눈동자, 자신의 의지로 걷는 것이 아닌 듯한 걸음걸이. 백현은 그런 이새를 따라가려 발걸음을 옮기다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신발을 신지도 않은 채 맨발로 현관을 나선 이새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홀린 듯 한 곳을 향했다. 빨리 와서 안아줘요. 다시 한 번 목소리가 울렸다. 의식 없이 걸어가던 이새가 한 곳에 멈췄다.

 


- 얼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손을 뻗어 문을 열고 들어온 이새가 여전히 아무 것도 담기지 않는 눈동자로 제 앞에 서있는 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두 팔을 들어 올린 이새가 주저 없이 그를 안았다.

 


“기다렸어요.”

“...”

“이새 양.”

 


 자신의 두 팔로 이새를 한껏 안은 민석이 이새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한다. 제 앞에 선 이새가 그토록 예뻐 보일 수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이새 양을 이곳에 두고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

“우리 함께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가요.”

“...”

 


 민석의 품에 안긴 이새가 천천히 민석의 품에서 벗어나 민석을 올려다 보았다. 그에 민석이 이새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지옥을 벗어난 그곳은 천국인가요?”

“이새양이 있다면 그 어디든.”


 

 민석이 웃으며 이새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손을 내려 이새의 손에 자신의 손을 끼워 넣어 깍지 낀다. 그리고 곧 이새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어버린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 설켜 진득한 소리가 팀장실 안을 가득 채운다. 한참 서로를 찾던 둘의 입술이 떨어진다. 이새는 떨어져 나간 민석의 입술을 다시 찾기 위해 민석의 목에 손을 두른다.

 


“이새 양이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요.”

“...”

“그래줄 수 있죠?”

“...”

 


 대답 없는 이새에 순간 민석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이새를 내려다 보곤 이새의 턱을 잡고는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주한 민석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이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떠진다.

 


“그래줄 수, 있죠?”

 


 이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이새 양은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

“다른 누구도 아닌.”

“...”

“나를.”

 


 다시 한 번 이새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민석은 그제서야 만족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새의 볼을 감싸 쥔다. 다시 가까워진 얼굴. 그리고 다시 겹쳐진 입술이 또 서로를 찾기에 바빴다. 민석의 팔이 이새의 허리를 감싸고 민석의 손은 이새의 척추뼈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간간히 터져나오는 이새의 신음에 민석 또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쾅-!

 

“윤이새!!”

 


 그때 팀장실의 문이 거세게 열리고 백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빠르게 팀장실 안으로 들어온 백현이 민석과 꼭 붙어 입술을 맞대고 있는 이새의 오른쪽 팔을 잡아 당겼다. 그에 민석의 품에서 떨어져나온 이새가 백현의 품으로 쓰러졌다. 주저앉은 이새에 무릎을 꿇고 앉은 백현이 이새의 텅빈 눈동자를 보고는 이새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었다.

 


“윤이새!! 정신 차려!!”

“...”

“이새야 제발...”

 


 곧 이새의 탁했던 눈에 백현이 가득 담긴다. 백현은 돌아온 이새의 눈동자에 이새의 어깨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옷소매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이새의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한동안 멍하던 이새의 눈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 그런 이새를 바라보던 백현이 시선을 옮겨 민석을 올려다봤다. 민석이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리며 백현을 내려다봤다.

 


“용케도 알고 왔네요.”

“...”

“아무 것도 못하는 거 같아서 쉽게 뺏어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민석의 한참 깔보는 듯한 눈빛에 백현이 금방이라도 민석을 찢어발길 듯 노려봤다. 하지만 민석에게 달려들 수 없었다.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백현에 민석은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서 능력을 쓰면 당연히 내가 이기겠죠.”

“...”

“하지만 난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요.”

“...”

“지옥에 사는 네가 불쌍하니까.”

“...”

“이새 양은 곧 다시 데리러 올게요. 그때까지.”

“...”

“흠집 내지 말고 잘 지켜줘요.”

“...”

“변백현 센티넬.”


 

 그 말과 동시에 민석은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이새의 손을 붙잡은 백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속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분노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새의 모습에 백현은 결국 이성을 잃었다.

 


“...! 백현, 아...!”

 


 거칠게 이새를 일으킨 백현이 빠른 속도로 이새를 끌고 숙소로 향했다. 자신의 손목을 꽉 쥔 백현에 이새가 고통을 참아내며 거의 끌려가다시피 백현의 이끌림에 따라야했다. 금방이라도 팔이 빠져버릴 것만 같아서 풀리는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주고 뛰다시피 발을 내딛었다.

 

 숙소 앞에 도착한 백현이 문을 열고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던졌다. 반면 제대로 신발도 벗지 못한 이새는 속수무책으로 백현에게 끌려갔다. 백현은 자신의 방으로 이새를 데려와 문을 닫고는 이새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올라탄 백현에 이새의 젖은 눈이 한껏 커다래진다.

 


“...변백현...”

“각인 하자고 했지.”

“너... 왜 그래...”

“지금 해.”

 


 백현이 이새의 손에 제 손을 멋대로 끼워 넣는다. 이새는 그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백현은 마치 성난 짐승처럼 이새의 손을 옭아맸다. 백현의 거친 숨소리가 이새의 귓가에 내려앉는다. 그가 잔뜩 흥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흥분이 성적인 흥분이 아니라는 것 또한.

 


“...싫어.”

“뭐?”

“싫다고.”

“네가 하자고 했잖아.”

“...”

“그것까지 할 수 있을 거 같다며.”

“...그건...”

 


 이새의 눈가에 가득 맺혀있던 눈물이 기어코 흐른다. 이새가 억지로 울음소리를 삼켜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런 이새를 백현은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볼 뿐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

“...백현아 그건... 그건 사랑이 아니야...”

 


 백현의 표정이 굳는다. 곧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이 잡았던 이새의 손을 백현이 놓아준다. 이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서러운 울음소리에 백현은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이새의 위를 차지하고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온다. 이새에게 등지고 고개를 숙인 백현이 두 손을 주먹쥐었다. 그 주먹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말했지.”

“...”

“난 사랑, 못 한다고.”

“...”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린 백현에 이새의 울음소리가 짙어진다. 센티넬 숙소가 방음이 완벽함에 감사했다. 이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갔더라면 아마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을 테니까. 이새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꺼번에 자신을 덮쳐버린 수많은 감정들이 이새를 잔뜩 괴롭혔다. 가슴께를 꽉 누른 이새가 반대 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이불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백현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거 같다던 난, 이미 널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아닐까.












김민석 


멀티 센티넬/가이드


빙결 SS이상 (수치 측정 불가)

페서네이트(수치 측정 불가) 


前중앙관리실 팀장 

現  A팀 소속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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