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방과 후 연극부실에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교내 공연을 일주일가량 앞둔 시기였다. 부장의 말에 의하면 나는 들러도 그만, 안 들러도 그만이었지만 때마침 유닛에 관련된 일도 없었으므로 습관처럼 연극부실에 들렀다. 문을 열자마자 발치에 흐드러진 장미 꽃잎이나 날아드는 비둘기 두어 마리 정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대본 위로 하얀 솜털 몇 점이 떨어진다. 하얀 건 종이와 비둘기 솜털이요, 까만 건 글자라. 글자를 가리는 솜털을 털어내며 물리도록 낭독했던 대사들이 일순 흐트러졌다. 뒷수습은 나와 토모야의 몫이었으므로 달갑진 않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에 혼란스러웠던 머리는 금세 맑아졌다. 발 아래로 꽃잎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장은 웬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탓에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 것과 같은 대본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속독하듯 빠르게 중얼거리고 있지만 결코 페이지가 넘어가는 일은 없다. 연습이라면 누구보다 엄격한 그였기에 대본 낭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히비키 와타루는 보기 드물었다. 그만큼 건드리면 귀찮은 일이 있을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조용히 소파 한 구석에 앉았다. 부장이 집중조차 않던 대본을 내팽개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아, 호쿠토 군! 언제 온 건가요? 사랑스러운 후배에게 인사도 하지 않다니 선배 실격, 부장 실격입니다! 지금이라도 인사드리도록 하죠, 좋은 오후입니다!”

“매번 시끄럽게 굴지 마. 토모야는 아직 안 온 건가?”

“네에, 당번 일이 있어서 조금 늦는다고 했어요. 그럼 그 때까지 단 둘이 오붓하게 리허설을 해볼까요?”

“어차피 연습하러 온 거니 그렇게 할까. 그보다 대본, 비둘기들이 먹고 있는데.”

꽃잎 사이로 내던져진 대본에 흥미를 보이던 비둘기들이 대본을 쪼아대고 있었다. 제아무리 훈련이 잘 된 비둘기라도 야생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제 대본을 비둘기들에게 빼앗긴 부장은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도리어 이채를 띤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몸을 들썩이는 꼴이 무언가를 말하지 못해 입이 근질근질한, 딱 그 짝이다. 연극에 관련한 것이라면 철저히 이성적인 그가 눈으로나마 읽고 있던 대본을 집어던지고 심지어 그것이 어떤 꼴을 당하든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일은 흔치 않다. 정말 귀찮아지겠군. 엉덩이를 떼어 슬그머니 피하려고 했지만 그사이 흥분한 부장이 내게 바싹 다가와 앉았다.

“대본이야 다시 뽑으면 되니까요. 사실은 기쁜 일이 있어서 도저히 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답니다! 연극부의 부장으로서 부끄럽습니다만……. 후후후, 드디어 완성했어요.”

그는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병을 자랑스럽게 내밀었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일회용 플라스틱 물병을 축소시킨 것처럼 생긴, 심지어 그 내용물마저 물처럼 아주 투명한 병은 크기가 작은 것만 제한다면 대단히 특별해 보일 것도 없었다. 한 모금이나 될까. 병을 받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점성 없이 찰랑거리는 투명한 액체는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이게 뭐지?”

“놀라지 마세요.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사랑의 묘약입니다! 이 약을 마시면 가장 먼저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 아주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게 되죠. 마치 에로스의 화살과도 같은……. 네, 그런 겁니다. 아직 검증된 건 없지만요. 그런 약이랍니다!”

부장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과장된 어조로 열변을 토했으나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했다. 검증된 게 없다니, 그럼 효과조차 정확히 모르는 거잖아. 그 외에도 면박을 할 만한 말들이 수도 없이 떠올랐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못했다’가 아니라 ‘안했다’는 거다. 핀잔을 해도 들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떨떠름한 얼굴로 부장에게 병을 돌려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최면 같은 놀음을 넘어 급기야는 판타지 세계에나 존재할 법한 약물까지 제조하려고 드는 게 퍽 그다웠다. 게다가 히비키 와타루라면 그런 허구에 가까운 약이라도 실제로 제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기어코 재료가 궁금해졌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화제를 꺼내진 않았다. 그야말로 판타지 세계의 일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것을 간신히 막아 주었다.

단순히 타인과 시선을 교환함으로써 사랑을 느낀다. 엔도르핀, 도파민, 옥시토신 등 여러 호르몬의 적절한 배합으로 인해 발산되는 그 감정을 화학적으로 도출해낼 수 있는지, 부장이 그만큼 화학을 잘 아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냐는 의구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더 캐어물어도 말을 빙빙 돌릴 테고, 대답을 들어도 아리송한 말들의 향연일 테니 그 이상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차라리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지. 그의 기행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시기도 한참은 지났으므로, 언제 어떤 짓을 하든 초현실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내 생각만으로 그것의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에, 어느 샌가 손에 들려 있는 약병은 선명하게 손금을 파고들었다. 매끈하고 둥근 유리가 손바닥 안에 알맞게 들어차 감긴다. 다시 부장에게 내밀었지만 그는 도리어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자신에게 이걸 되돌려주는 건지 묻는 것처럼.

“이런 거 필요 없어.”

“하지만 호쿠토 군, 같은 유닛의 아케호시 군을 좋아하잖아요? 이 약을 사용해보고 싶지 않나요?”

한동안 정적.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부장은 내가 아케호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고, 그를 상대로 임상 실험을 하겠다는 거다. 전자의 사실은 들통난 지 오래였으므로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후자의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를 말갛게 바라보는 부장을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 나름대로는 나를 도와주려고 꺼낸 말임이 분명했다. 허나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투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다시 약병을 떠밀었다.

“검증되지 않은 건 안 돼. 게다가 아케호시는 아이돌이다. 현직 아이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부장이 책임질 수 있겠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아직 실험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래도 이 제가 만든 약이니 안전성은 보장할 수 있어요.”

“실험? 설마 누군가에게 먹인 건가?”

“네, 지금쯤 오고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복도가 시끄러웠다. 여러 사람은 아니고 아마도 한두 사람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가 싶더니 점차 가까워진다. 이내 면식 없는 사람이 부실로 들이닥쳐 숨을 씨근덕거리며 앉아 있는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히다카 호쿠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는 본체만체 무시하며 부장을 향해 보폭을 크게 옮겼다. 작지 않은 부실을 가로지르는 걸음이 빠르다. 형형한 광기마저 느껴지는 눈빛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누구지?”

“저를 증오해 마지않던 아이돌과 학생이랍니다. 효과를 확실하게 보려면 저를 미워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보시다시피. 토모야 군에게는 적당히 설명해주세요. 정말 미안하지만 리허설은 잠시 미루도록 하죠. 먼저 가보겠습니다, 호쿠토 군! 행운을 빌어요!”

대답할 틈도 없이, 어느 새 창틀에 앉아 있던 부장이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부실들은 죄 높은 층에 위치한 까닭에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뛰어내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히비키 와타루는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장의 실험 대상은 그런 기행에 익숙하지 않을 테다. 그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창밖을 내다보더니 즉시 몸을 돌려 부실을 뛰쳐나갔다. 아무리 첫눈에 반해버렸다고 해도 자칫 목이 부러질지도 모를 만큼의 높이에서 뛰어내리지는 못하는 모양이지. 다프네를 쫓는 아폴론 같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문을 닫았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토모야가 유난히 늦는 탓인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미 대본에 집중하기는 글렀다. 종착점을 잃고 방황하는 사고를 정리하기 위해 나는 이유 없이 몸을 움직였다. 허나 비둘기들이 흥미를 잃은,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흐드러진 꽃잎이나 깃털 따위를 줍는 짓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신경이 온통 사랑의 묘약이라는 것에 쏠린 까닭이었다. 얼떨결에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것이 주머니 속을 굴러다니는 게 그렇게 신경이 쓰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의 사소한 무게감이 자켓을 당길 때마다 히비키 부장을 쫓던 광기 어린 얼굴이 스쳤다. 분명 살의가 아닌 강렬한 집착,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의 묘약이라니, 말도 안 되지. 허황된 망상에 불과해. 그렇게 되뇌면서도 나는 끝끝내 그것을 꺼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로 묘약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아케호시를 만나며 이따금 주머니 속의 약병을 만지작거리곤 했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그럴 짬조차 나지 않았던 게, 아케호시는 따로 물병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물에 넣으면 가장 간단할 테지만 그가 마시는 물은 종이컵에 담긴 몇 모금이나 내 물병에서 빌려 마시는 게 전부였다. 유닛 레슨에서 사용하곤 하는 일회용 물병은 네 명의 것이 뒤섞이기 마련이었으므로 함부로 약을 탈 수도 없었다.

결국 가장 편리한 방법은 내 물병에 약을 타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조차도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매일 아침 새 물을 받으며 약을 넣는 상상을 한다. 약병의 뚜껑을 열고 병을 조금 기울이기까지 했으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 때의 남자 때문이리라. 최근 학교에는 3학년 하나가 히비키 와타루에 미쳐 수업조차 빼먹고 그를 찾아 온 교사를 누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정도면 해독제를 투여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해독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근거이기도 했다. 아니면 단순히 흥미를 위해 내버려두고 있거나. 무작정 먹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약병을 단단히 봉해둔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부장을 만나 해독제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스토킹에 가까운 사랑을 피하기에 바빠 보였다. 노상 지하 서고에 틀어박혀 알 수 없는 주술 등을 행하는 사카사키가 그나마 이런 일에 맞닿아 있음직하여 물어도 그 역시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그래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라서, 부장이 만든 약을 꼼꼼히 살피던 그는 그것이 사랑의 묘약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해독제? 와타루 형이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해독제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물 제조 또한 사카사키의 관심 분야 중 하나이지만 아직 부장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게 그의 평이었다. 해도 이미 만들어진 약의 해독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아마 부장이 해독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흥미에 의한 것이라고 예측하며 그는 느긋하게 책상에 기대었다.

“그래, 해독제를 만들어준다면 너는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지? 홋케 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줄 수 있어.”

“마법은 믿지 않을 것 같은 홋케 군이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그렇게 사랑받는 상대가 궁금해지는데.”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굴러 한 켠을 향한다. 그 곳에는 늘 그랬듯 유우키와 만담을 나누는 아케호시가 있었다. 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다. 나는 걸음을 조금 옮겨 사카사키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다시 나를 본다. 얇은 입술에 서린 웃음기에 어쩐지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려 눈길을 피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바보처럼 이런 데에 휘말린 스스로가 창피했다.

“좋아, 돈으로 받을게. 선수금은 1억 엔이야. 해독제가 효과를 보이면 2억 엔 추가할게.”

당연하게도, 농담인 것을 알면서도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사카사키는 금세 말을 물렸다.

“뭐어, 일단은 바루 군에게 사랑의 묘약을 먹이는 것부터 시작할까. 그 다음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너나 바루 군에게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보수는 받지 않을게. 모든 건 그 다음에 시작하자.”

해독제에 대해 묻자 그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만 말했다. 다만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의 묘약이 필요하다고 하여 한 모금도 안 될 것 같은 약을 샘플삼아 몇 방울 덜어주었다. 비밀스러운 대화를 마치자마자 사카사키는 곧장 실험에 착수한다며 교실을 떴고, 타이밍 좋게 교사가 들어왔기 때문에 무어라 물을 여유가 없었다. 그다지 미덥지는 않지만 당장은 그를 믿어야 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수업을 들으며 짐짓 칠판을 노려보았고 필기를 할 때에도 펜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잡념을 잊기 위함이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당연하게 책상 한 구석에 놓인 물병에 온통 신경이 쏠린 탓이었다. 동시에 주머니 속의 약이 몸을 앞으로 기울일 때마다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책상에 부딪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럴 때마다 주의력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약을 넣어야 할까? 넣어도 괜찮을까? 정말 그때의 그 사람처럼 나를 쫓아다니면 어떡하지? 아이돌 활동에 지장이 생긴다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필기를 하던 손이 점점 느려진다. 끝내는 시선이 칠판으로부터 떨어진다.

아케호시는 나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자리에 앉는다. 그 말인즉슨, 그는 늘 둘째 줄 구석자리 즈음에 앉아서 책에 코를 박고 잔다. 달리 공부에 일가견이 없는 그를 위해 내가 생각해낸 방침이었으나 제 의지가 없는 한 수업 태도가 개선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케호시 본인은 고민거리로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아케호시는 꼬박꼬박 앞자리에 앉아 주었다. 책상은 얼마든지 남으므로 원한다면 뒷자리로 옮길 수 있을 텐데도, 꼭 나와 멀지 않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면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인다.

배고파. 졸려. 노래하고 싶어.

……대개는 그런 말들이다. 사실은 그런 것보다도 눈을 맞추고 웃어주는 게 더 좋았다. 눈살이 둥글게 접히고 보기 좋게 벌어지는 입술, 그 아래로 가지런히 열을 맞춘 흰 치아, 가을 하늘 한 움큼 잘라 넣은 눈동자 같은 것들. 그럴 때마다 나는 쉬이 열이 오르지 않는 체질에 새삼 감사했다. 약을 사용하면 그렇게 마음을 졸일 일도 없을 터였다. 얼마간의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더라도 그게 꼭 발현되리라는 확증도 없다. 부장의 경우는 특이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괜찮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약병을 굴리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과 후 레슨 전, 홀로 남은 교실에서 물병에 약을 넣으며 온종일 아케호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오늘의 당번도 나라서 아케호시와 유우키는 일찍이 연습실로 향한 뒤였다. 어차피 곧 볼 테지만 수업 시간의 밀담 같은 구화口話를 볼 수 없었다는 게 아쉬웠다. 보고 싶다. 찬물을 반쯤 채워 넣은 물병을 단단히 감싼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배어 나왔다. 나쁜 짓이야. 심장이 금방이라도 목청 너머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빈 약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다음 교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나는 연습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연습은 평소와 같이 진행되었다. 각자 교내 매점에서 사온 물병은 금세 뒤섞여 어떤 게 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으므로 적당히 알아서 골라 마시는 분위기였다. 연속하여 세 곡의 레슨을 마친 뒤, 정신없이 물을 들이키던 아케호시의 물병에서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잽싸게 물병을 내밀었다.

“아, 홋케~, 고마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는다. 역시 조금 열에 들뜬 얼굴로 고개를 까딱여 대답을 대신했다. 물병을 받아든 아케호시는 익숙하게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충분히 흔들었으니 아마 물과 묘약의 분자는 적절히 섞였을 것이다. 약은 무색무취였기 때문에 물에 넣어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지나치게 여상한 나머지 약을 탔다는 사실을 잊고 마셔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반투명한 병 속의 수면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보며 나는 굳은 숨을 목 뒤로 넘겼다. 이걸로 됐다. 확실하게 눈도 마주쳤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해독제가 준비되지 않은 게 흠이었지만 기이하게도 사건이 발생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뇌리를 스친 게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기묘한 확신은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 아케호시가 물병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들이키고 레슨은 재개되었다. 아까와 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 몇 개를 연속으로 부른 다음 가진 휴지에서나 레슨 도중에나 틈틈이 아케호시를 살폈으나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외려 지나치게 팔팔한 게 평범한 자양강장제를 먹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 난데없이 부장과 사카사키에 대한 배신감이 차올랐다. 사랑의 묘약은 무슨. 빈 물병을 잡아채어 가방 안에 거칠게 쑤셔 넣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시침이 10을 가리키고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다.

“홋케, 집에 같이 가자! 오늘은 웃키가 전학생 데려다주는 날이니까 홋케랑 단둘이 걷고 싶어!”

교복으로 갈아입은 아케호시가 등 뒤로 엉겨 붙어 더운 숨이 뒷덜미를 간지럽힌다. 간질거리는 말을 하는 것도 평소와 같아서 나는 그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라도 있잖아.”

“아, 나는 학생회 일이 조금 남아서 학생회실에 들렀다 가야 할 것 같아. 얘기하지 않았어?”

마냥 기꺼워하기도 민망해 꺼낸 말에 이사라가 부스러지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로가 누적된 게 고스란히 보이는데도 내심 반가운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못 들었는데. 괜찮겠어? 피곤하지 않아?”

“평소에도 하던 일이니까 괜찮아. 다들 조심해서 가! 먼저 갈게.”

그래 잘 가, 조심해서 가, 하며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네 명이 같은 방향으로 걷다가 유우키가 전학생의 집으로 가는 길로 빠져 아케호시와 나, 둘만이 남았다. 평일의 밤거리는 한적하다. 대도시도 아니기에 도로에는 자가용이나 버스가 가끔 오가는 것이 전부였고 인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철역을 향해 아무도 없이 죽 뻗은 인도를 따라 걷는 내도록, 아케호시는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이따금 부리가 튀어나온 보도블럭을 피해 발을 디디며 나는 아케호시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흘려듣는 척을 했다. 부산스럽지 않은 소음을 좇거나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탓에 어딘가에 발이 걸릴라치면 잡아당겨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케호시는 고맙다며 웃었는데 나는 그렇게 웃는, 가까이 붙은 얼굴마저도 좋았다. 찰나에 당겨져 가까워지는 게 좋아서 짐짓 튀어나온 데로 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전철역 계단을 타고 내려가 개찰구를 지나면 플랫폼이 두 개로 나뉜다. 아케호시와 나는 각각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탄다. 지하도 입구로부터 플랫폼이 나뉘는 구간까지의 거리가 제법 길었으나 나는 걸음을 재촉하기는커녕 점차 속도를 늦췄다. 그나마 지하철은 퇴근하는 샐러리맨들로 붐비는 편이다. 조금 소란해진 공간에 아케호시는 자연히 섞여들었고 나는 그런 아케호시가 반대 방향의 플랫폼으로 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 내 갈 길을 가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플랫폼이 갈리기 직전, 나는 아케호시를 붙잡아 세웠다.

“아케호시, 혹시 몸이 어딘가 아프진 않아? 괜찮아?”

곧 지하철이 플랫폼에 도착한다는 방송과 바삐 달리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목소리가 묻힌 건지 아케호시는 대답 없이 눈을 끔벅거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못 들은 눈치라서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곤 바로 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저 멍하니 서 있던 아케호시가 내 팔을 잡았다.

“홋케, 잠깐만! 할 말이 있어!”

답지 않게 힘을 준 손아귀에 잡힌 탓에 교복 소매에 주름이 잔뜩 졌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여 나도 모르게 울대를 일렁이며 숨을 참았다. 설마. 지나친 망상이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고 싶었다. 플랫폼을 향해 달리던 사람들이 차츰 사라지자 개찰구로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곁을 스친다. 개중 몇 명이 우리를 힐끔거렸지만 금세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고선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전철에서 내린 무리가 거의 사라질 때까지, 아케호시는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상기된 얼굴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데에서 말하긴 싫었는데, 좀 더 좋은 분위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저기, 호쿠토.”

힘주어 쥐고 있던 손에 조금씩 힘이 풀린다. 내가 조심스레 팔을 비틀어 빼내어도 아케호시는 말없이 한참 동안 숨을 가다듬었다. 조밀한 속눈썹이 내리깔렸다 뜨이는 게 몇 번이나 반복되고 그 아래로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가 전에 없이 깊었다. 웃는 얼굴도 좋지만 이런 얼굴도 좋다고 생각했다. 비록 약에 의한 것이라도 좋았다.

역은 아까보다는 한산했다. 갈수록 밤이 깊어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평소보다 늦게 귀가할 테지만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그랬을 것이다. 전철이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다시 사람들 몇이 우리 곁을 지나쳐 달린다. 아케호시는 그 즈음에야 겨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좋아해.”


* *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켜고 부장에게 연락을 넣었다. 사카사키의 번호는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으므로 이미 휴대폰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부장의 번호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랑의 묘약이라는 거, 효과가 좋은 것 같아. 짤막한 문장 하나를 보내고 침대 위에 엎드려 의미 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유닛 이름이나 동료들의 이름을 검색한 흔적이 남은 검색 엔진, 서툴게 찍은 사진 몇 장, 아케호시와 유우키가 멋대로 다운받은 게임 어플 몇 개가 전부다. 그것들마저 훑고 나니 정말로 할 게 없어졌다. 부장으로부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아케호시에게 고백을 받았다. 전철이 들어오는, 행인이 조수潮水처럼 오가는, 조금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의 전철역 안에서. 나와 사귀고 싶다는 말로 이어진 그 투박한 고백을 받아들이는 건 나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아케호시와 교제를 시작했고 그 시작은 사랑의 묘약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약물에 기인했다. 옳은 선택이었을까.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배를 깔고 엎드렸던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주로 부모의 취향이 반영되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천장이다. 데카르트는 격자무늬 천장에 앉은 파리를 관찰하다 좌표평면을 떠올렸다는데 지금의 내 방에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아케호시와 사랑의 묘약에 대한 것만 떠올랐다. 애당초 무엇에 홀린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의 묘약이라는 것 따위에 의존했을 리가 없다. 미친 사람처럼 부장을 쫓아다니는 3학년생 때문일까, 해독제를 만들 수 있으니 일단 약을 먹이라는 사카사키의 말에 홀딱 넘어갔기 때문일까. 그토록 망설이고 고민했음에도, 마침내 원하던 결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후회가 치밀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묘약을 직접 마신 아케호시에 대한 걱정 또한.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었지만 혹여나 뒤늦게 찾아오는 부작용이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집에 도착했어?」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완성하고는 곧바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케호시와의 메신저는 언제나 가장 상단에 자리를 잡고 있다. 노상 먼저 대화를 걸어오는 건 아케호시고 나는 그에 겨우 장단만 맞출 뿐이지만 그럼에도 대화는 꾸준히 이어졌다. 실상 아케호시가 쓸모없는 말을 무더기로 쌓아놓는 용도에 가까웠으나, 나는 내 나름대로 거기에 착실히 답을 보냈다. 허나 이런 데에 관해선 말주변이 없는 까닭에 긴 문장은 보내지 못했다. 메신저 창을 보면 아케호시로부터 온 장문의 메시지에 열 자를 넘지 않는 나의 답이 달린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슨이나 과제 여부를 알리는 것 외에는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그만큼 희소성이 있는 것이다. 이 귀한 기회를, 매일같이 메시지를 보내는 아케호시가 놓칠 리 없었다. 보낸 지 1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금세 읽음 표시가 떴다.

「홋케!!!!!(*'∀'人)당연하지!! 홋케는???? 잘 들어갔어??」

「그래. 몸은 좀 괜찮아?」

「٩(•̤̀ᵕ•̤́๑)ᵒᵏ」

제법 복잡한 이모티콘을 쓰면서도 답장은 빠르다. 그 어떤 것도 특별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신체적인 부작용이 따를까 하는 염려에 메시지를 보냈지만 딱히 그래 보이지도 않았다. 다행이야. 누운 채로 휴대폰을 두드리려니 양 팔이 지끈거려 다시 몸을 돌려 엎드렸다. 교복을 갈아입는 일은 뒷전이 되었다. 귀가하자마자 교복을 벗고 목욕부터 하는 내가,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과제는 다 했어?」

「했다구~홋케 너무 딱딱해!!!!」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메신저로는 더 주고받을 말이 없었다. 적당한 단어를 고르며 문장을 만들던 것보다 아케호시로부터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하는 게 더 빨랐다.

「아까는 미안했어(´・ε・̥ˋ๑)サミシイ그래도 그 때가 아니면 홋케한테 말할 수 없었을 것 같았어」

「받아줘서 고마워!!!!!! 내일 보자 정말정말 좋아해٩(*´◒`*)۶♡」

연속으로 도착한 두 개의 메시지에는 흘러넘치도록 과분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어서 무어라 답장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내일 보자. 잘 자, 아케호시.」

라고, 언제나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목욕을 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아케호시와 사랑의 묘약에 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채로 수마를 재촉하는 동안에는 온갖 잡념들이 떠오르곤 한다. 활동을 하는 낮이라면 떠오르지 않을, 무의식에 침잠되어 있던 것들까지도 끄집어내어져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다.

아마도 부장이 말한 부작용이란 부장을 싫어하던 3학년생이 부장을 쫓아다니는 것과 비슷한 종류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케호시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고백을 한 걸 제외하면 언행도 평소와 같았다. 부장이 말한 열렬한 고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고백을 받은 데다가 부장이 겪은 것과 같은 부작용도 없으니 다 잘 된 일이었다. 얇은 여름 이불 아래서 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가끔 이런 밤이 있다. 충분히 움직였으니 몸은 피로한데도 잠들지 못하는 밤. 그리고 그런 밤이면 온갖 걱정이 떠오르곤 했다. 부작용의 잠복기, 심리적 또는 신체적인 부작용, 그리고 온갖 종류의 약물 오남용 사례 등을 생각하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아직 그리 덥지 않은 여름이었지만 열기가 고이니 제법 후덥지근했다. 몸이 찬 탓인지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내려 애썼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요즘은 좀 어때? 이상한 징후가 있다거나.”

“아무 일도 없어. 그래서 더 이상할 정도다.”

“부작용이 없다는 건 좋은 거잖아? 이대로라면 해독제가 따로 필요 없겠어.”

읽던 책을 소리 내어 덮자 사카사키의 시선이 잠시 닿았다 떨어진다. 흘겨보는 시선에 사카사키는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이상하게 장난기가 심해졌단 말이지. 몸을 일으켜 깔때기로 작은 병에 액체를 흘려보내는 사카사키에게로 다가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내는 손놀림은 능숙하고 부드러웠다.

“만들긴 한 건가?”

“물론. 한 번 볼래?”

사카사키가 내민 플라스크에는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얼핏 보기엔 사랑의 묘약이나 물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내 손에서 플라스크를 돌려받은 사카사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틀림없는 해독제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의심이 많구나.”

타인을 꿰뚫어보는 데에 능한 그의 앞에서 괴이쩍어 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탓이었다. 사카사키가 의자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떨떠름히 플라스크를 돌려주고 앉아 사카사키가 실험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대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기이한 약물을 개발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마법사의 제자니 주술이니 하는 것들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화학 실험과 비슷한 약물 실험을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로웠다. 미묘하게 신경전이 오가는 건 여전하지만 해독제에 관한 건으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부쩍 친해졌다. 종종 비밀 서고에 들렀고, 대화를 하지는 않더라도 친밀감을 쌓아가며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아케호시와의 교제도 순조로웠기 때문에 사카사키는 해독제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오히려 해독제로 인해 이 관계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 또한 그에게 해독제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나에게 나쁠 건 없었지만 달리 이득을 보는 게 없는 사카사키는 이 흐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에 한 번쯤 교실에 들렀다 금세 사라지는 그는 여느 때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아케호시와 구태여 떼어내려 하지 않는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관찰하듯 면밀히 훑어보는 시선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카사키에게는 신세를 진 채였으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불투명한 쥐색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사카사키는 알코올 램프를 끄고 그것을 보울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는 귀퉁이가 들어 올려지도록 두 번 접은 기름종이에 싸인 검은 가루를 거기에 풀었다. 아주 까맣고 고운 입자가 액체에 용해되며 은은한 광택을 띠었다. 조금 더 검어진 액체를 들여다보던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포이드로 무언가를 몇 방울 흘려넣고 뚜껑을 씌운 뒤에야 사카사키는 실험 기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카사키의 실험은 예상 외로 현실적이었다. 부글거리는 마녀의 솥과 빗자루, 벽에 거꾸로 걸린 쥐와 개구리 등을 상상했던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기묘하게 빛을 내는 약물이나 고체 덩어리 등은 현실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궁금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건 뭐지?”

“평범한 인간에게는 말해도 모를 거야. 당장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다 쓸 데가 있거든……. 그보다 뒤를 봐, 손님이 왔네.”

사카사키가 턱짓으로 가리켜 돌아본 곳에는 아케호시가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발소리가 분주하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마룻바닥이 요란하게 삐걱이는 통에 사카사키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케호시는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케호시는 내 뒤로 돌아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안전 벨트마냥 단단히 끌어안은 두 팔에는 이상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 있었어?”

“사카사키에게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말의 어조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낀 건 원초적인 직감에 가까웠다. 멀찍이서 실험 기구를 갈무리하던 사카사키 역시 특이점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조여진 미간을 풀고 무표정한 낯으로 그는 아케호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무관심해 보이지만 샅샅이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케호시는 내 정수리에 턱을 올린 채로 어깨를 얽맨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린애 칭얼거리듯 몸을 양옆으로 흔드는 행동은 지극히 그다웠으나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있었다. 몸통을 죄는 게 아파서 팔을 밀어내자 의외로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아케호시, 아파.”

“으응, 미안해……. 빨리 가자, 홋케. 레슨 가야지.”

“바루 군에게 엄청나게 사랑받는구나, 홋케 군. 좋겠네.”

“좋을 것까지야…….”

알리고 싶지 않았던 속내를 들킨 탓에 입술이 마른다. 어느 새 사카사키는 등을 돌린 채로 집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았다. 아케호시는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로 사카사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뒤에서 온몸을 꽉 끌어안긴 탓에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운용하여 계단을 올랐다. 얄팍한 유리로 만들어진 집기들이 부딪히며 나는 맑은 소리 위로 케케묵은 목판 소리가 겹친다.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갈 즈음에야 겨우 계단 아래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인사를 한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비밀 서고를 나온 뒤에야 아케호시는 겨우 몸을 떨어뜨렸다. 손끝만 스치며 복도를 걷는 내내 그는 불퉁한 얼굴이었고 나는 그 이유를 모르는 채로 연습실을 향해 걸었다. 학교는 파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새로운 라이브의 준비로 방과 후 레슨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였다.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잔뜩 부은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을 그려낸다. 조금 찌푸려진 미간은 햇빛 때문일까. 아주 덥지는 않지만 아케호시는 몸에 열이 많으니 더워서 불쾌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잡아도 괜찮을까. 때마침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여름도 아니고 한여름이라도 잘도 엉겨 붙던 녀석이니 괜찮을 것이다. 아케호시는 손잡는 걸 좋아하니까. 걸을 때마다 맞부딪히던 손가락을 먼저 뻗어 뜨거운 손을 얽매었다. 거침없이 걷던 걸음이 잠시 멎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손바닥까지 맞대고 손에 깍지를 꼈다.

“아케호시. 무슨 일 있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케호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주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아니, 괜찮아.”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안색이 좋지 않아. 말투도 그렇고. 혹시 화난 건가? 더워서 그래?”

쏟아지는 햇살을 등진 탓에 온통 짙푸르게 그늘진 아케호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나는 말없이 늘 가지고 다니는 티슈로 땀 맺힌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역시 살갗이 뜨겁다.

“더위는 잘 타지만 그런 걸로 홋케한테 짜증내지는 않아. 알잖아. 나는 그냥……, 홋케가 나츠메랑 같이 있는 게 싫어. 요즘 홋케, 지하 서고에서 나츠메랑 같이 있을 때가 많잖아. 다음부턴 가지 마. 가더라도 나랑 같이 가!”

“어린애냐. 내가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나랑 사귀고 있잖아!”

갑작스레 소리치는 아케호시의 입을 틀어막고 다급히 사위를 살폈으나 다행히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손을 내리자 역시 당황한 낯을 한 아케호시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도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얼굴이었다. 아이돌과 내에서 연애를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뜬소문이 돌곤 했으나 실체 없는 소문일 뿐이었다. 그런 유언비어에 실체를 부여한 주인공으로 교내에 소문이 나는 건 절대 사절이다. 졸지에 입을 틀어 막힌 아케호시 또한 제 실수인 것을 알았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로 옆에 잠그지 않은 문이 있어서, 나는 아케호시를 잡아끌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햇수가 늘어날수록 인원이 줄어들어 올해는 더 사용하지 않는 교실은 오랫동안 환기를 하지 않아 먼지 냄새가 났다. 먼지 쌓인 책걸상에는 앉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먼지와 분필 가루가 한데 섞여 부옇게 내려앉은 칠판 위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었다. 매미가 운다. 고요와 소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웠고 텁텁한 공기가 싫었지만 이야기는 마쳐야 했다. 나는 다시 아케호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케호시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발끝으로 교실 바닥을 툭툭 차고 있었다.

“사카사키와는 아무 일 없었어. 요즘 부장이 이상한 짓을 해서 그걸 해결하느라 만난 거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애초에 별로 좋아하는 녀석도 아니고.”

“…….”

“그리고 학교에서든 어디서든 눈이 많은 곳에선 조심해. 우리 말고도 학교에 남아있는 녀석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미안해, 홋케.”

문득, 어깨에 나지막한 무게가 얹혔다. 아케호시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고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등이라도 다독여줄까 하여 손을 들어 올렸지만,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다시 손을 내렸다. 우는 건 아닌데 그저 반듯한 호흡을 반복하며 어깨에 기대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로 아케호시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랑 단둘이 있으면 안 돼.”

“알았어, 노력할게.”

그리고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자 강아지처럼 가볍게 머리를 비벼온다. 어리광 부리듯 천진한 몸짓이 퍽 귀여워서 심란하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우리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조금 이상해도 약을 사용하길 잘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르는 아케호시에 대한 죄책감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당장의 현실을 외면한 지는 오래였다. 지금 좋으면 됐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어울리지 않게 우울하게 쳐져 있던 아케호시는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차게 굴었다. 평소처럼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었으나, 어째서인지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떨치지 못했다. 아케호시가 화를 내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이때까지와의 그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느낌이었다. 지하 서고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던 그것은 쉬이 갈 생각을 않았다. 한 곡이 막 끝나고 아케호시가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주말에 놀러가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금세 자리를 옮겨 다음 곡을 준비한다. 주말이라면 라이브를 목전에 앞둔 때였다. 제멋대로인 점도 그대로인데 왜 자꾸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찝찝한 의문이 가시지 않았지만 미처 더 묻기도 전에 다음 트랙이 흘러나와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았다.


* * *


몇 주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부장이 슬그머니 부실에 나타난 것은 저녁 즈음의 일이었다. 그간 유례없이 행복한 얼굴로 부활동에 임하던 토모야가 울상을 지었지만 나로서는 내심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스토커도 더 이상 부장을 쫓지 않았고 부장도 여유롭게 연습에 임하며 전과 같은 일상을 영위했다. 그 말은 부장의 해독제가 효과를 제대로 발휘했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는 그에게 해독제에 대해 물어볼 요량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이상해진 아케호시 때문에 해독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부장의 희생양과 같은 증상이었으나 발현 속도가 다를 뿐이라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자 생각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사카사키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캐어묻던 것을 필두로 몇 번의 사건을 겪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약을 마심으로써 사랑에 빠진 상대, 즉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 강도 높게 집착한다. 부장의 희생양은 그 증상이 복용 직후에 나타났고 아케호시는 서서히 강도를 올려가며 나타났을 뿐 결과적으로는 같은 증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집착을 받는 본인이나 약을 마신 게 아니면 타인에게는 큰 피해가 가지는 않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장은 비둘기들에게 쪼아 먹혔던 대본을 새로이 들고 와서 토모야의 연기 상대를 해주는 중이었다. 그럴 때면 부장답지 않게 제법 진지해지기 때문에 쉬이 말을 걸 수가 없다. 다행히도 해당 씬의 막바지 부분이었기 때문에 금세 짬이 생겼다. 먼저 말을 붙이기도 전에, 토모야의 발성을 지적하고 시범을 보이던 부장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할 말이 있어 보이네요, 호쿠토 군. 뭔가 질문할 거리라도 있나요?”

“그, 약에 관한 건데.”

“아, 그거인가요. 토모야 군, 잠깐 혼자 연습할 수 있나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사랑으로 지도해드리겠습니다!”

사랑 같은 거 필요 없어! 토모야의 날카로운 외마디를 뒤로 하고 부장은 내게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부장이 연극 이외에도 작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당신이 겪은 것과 똑같아. 아케호시가 이상할 정도로 나한테 집착하고 있어.”

“집착은 사랑의 또 다른 형태니까요, 이상할 건 없네요.”

집요한 스토킹을 겪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물음을 삼키고 나는 얼마 전의 일을 상기했다.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얼마 전에 라이브가 있었던 건 알고 있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리허설을 했는데 도중에 동선이 꼬여서 유우키와 내가 부딪혔어. 팔만 부딪힌 정도였는데 아케호시가 불같이 화를 내더라고. 그 녀석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어. 내가 다른 사람과 닿는 게 싫대.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이유가 없어. 그냥 싫다는 거야.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본무대에도 오르지 못할 뻔했다고.”

기실 이상하다고 느낄 만한 사건이 이뿐만은 아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을 죄 털어놓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방금도 연극부실에조차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걸 농구부가 연습하고 있는 강당에 밀어넣고 온 참이었다. 그마저도 이사라와 모리사와 선배가 아케호시를 붙잡아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연극부실에 떡하니 눌러앉아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털어놓은 뒤에야 부장은 겨우 진지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문제네요. 해독제는 나츠메 군에게 맡겼다고 들었는데 아직 못 받은 건가요?”

“그 녀석 등교도 띄엄띄엄 하니까. 요즘은 학교에 오는 것 같지 않아서 부장에게 부탁하는 거야. 게다가 안전성은 보장한다고 했잖아.”

“아하.”

짧은 감탄사만을 내뱉고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건지 뭔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반대편 구석에서는 토모야가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잠자코 부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연락도 닿지 않고 등교도 않는 사카사키가 아니면 해독제를 부탁할 만한 사람은 부장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덥지 못한 건 여전하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로 한동안 고민하던 부장이 말을 이었다.

“해독제를 드리는 건 어렵지 않다만, 괜찮겠어요?”

“뭐가?”

“아케호시 군에게 고백을 받았잖아요. 해독제를 먹으면 사랑의 묘약은 효과를 잃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늘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약이 아니면 나 같은 건 아케호시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순순히 약을 받아들었더라도 망설임 없이 개수대에 부어버렸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잡하게 연출된 헛된 감정임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국 내 실수였다. 약의 힘을 빌리는 대신 스스로 해결했어야 할 문제를 간단하게 넘겨버린 내 탓이다. 부장이든 사카사키든, 그들을 탓해도 약을 탄 건 오로지 내 판단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다.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던 사실을 받아들이자 온몸에 힘이 죽 빠져서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소품용 스툴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가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해독제를 먹이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다. 그 정도는 안다. 부장이 해독제를 가지고 있고, 사랑의 묘약을 먹일 때처럼 물이든 음료수든 해독제를 타서 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별 것 아닌 짧은 연애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부끄럽게도. 아래로 수그린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원래대로 돌아갔죠. 다시 열렬하게 미움 받고 있답니다.”

부장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고 나는 거기에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다시 아무 것도 아닌 친구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몇 주밖에 되지 않은 연애일지라도, 나는 아케호시에게 사랑을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시작하지 말걸.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서 줄어들지 않은 약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어떡할 건가요?”

어느 새 다른 스툴을 끌고 와 앉은 부장이 다리를 꼬아 앉으며 물었다. 시야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희고 검은 윙팁이 우아했다. 나는 두 손을 무릎에 걸쳐놓은 채로 꿈지럭거리며 대답을 늘어뜨렸다.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고 망설이는 동안, 부장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럴 때면 그가 선배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굳은 혀를 움직여 겨우 말을 꺼냈다.

“먹여야겠지……, 해독제.”

“그 다음은요?”

나는 떨어뜨렸던 시선을 들어 대답했다. 한 번 말을 시작하니 그 뒤로 말을 잇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잘못이니까 내가 감당해야지. 이대로라면 아케호시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까 가능한 한 빨리 멈춰야 해.”

“후후, 비장하네요. 다음 연극의 대본으로 쓰고 싶을 정도예요.”

“거짓말을 한 당신 잘못도 있어. 안전하다고 했잖아.”

“그 점은 확실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심상에 따라 부작용의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오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원한다면 무엇으로든 배상할 테니까요.”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정적인 실수를 한 건 나 자신이었으니 굳이 부장을 다그쳐 받아낼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배상할 생각이었는지 부장이 한 번 더 물어왔지만 나는 끝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장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게 전과 같은 병 하나를 건네고는 자리를 떴다. 말하지 않아도 그게 해독제라는 것을 알기란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 사카사키가 보여줬던 것과 같이 물처럼 투명하고 냄새가 나지 않는, 극소량의 약물을 주머니에 넣자 예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기껏해야 몇 그램밖에 되지 않을 그것은 꼭 쇳덩이처럼 나를 아프게 짓눌렀다. 저편에서 격정적인 대본의 문장들이 오가는 것을 들으며 나는 한동안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스툴이 작고 딱딱했기 때문에 엉덩이가 아팠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아케호시를 좋아한 지는 일 년이 다 되어갔다. 아케호시와 이사라, 유우키와 함께 트릭스타라는 이름조차 없이 관객 없는 무대에 오를 때부터 아케호시를 좋아했지만 단 한 번도 고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차라리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애였다면 한 번쯤은 고백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케호시는 곧잘 나에게 달라붙었고 좋아한다는 말도 자주 했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그랬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언행을 했고 나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나에게만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어린애 같은 욕심 때문이었다. 우습지, 고등학생이나 돼서 누군가를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래도 좋아하는 애가 다른 애들에게 자연스럽게 들러붙는 걸 보면 기분이 상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여전히 아케호시는 누구에게나 살갑고 쉽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다. 그건 약을 먹기 전과 같았다. 달라진 점이라면 나에게는 손을 잡고 싶다고도 한다는 것 정도일까. 아케호시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처음으로 손을 잡고 걸었던 밤은 잠을 자지 못했다.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처음으로 입을 맞췄을 때에도…….

휴대폰을 켜고 메신저를 켜자 십 분 전에 아케호시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의 알림이 떠 있었다. 언제쯤 끝나냐고 묻는 수많은 메시지를 무시하고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때 라이브 연습으로 못 놀러갔지. 이번 주말에 놀러가자. 오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 * *


그러나 모처럼의 데이트는 오후에 내린 소나기로 인해 날벼락을 맞았다. 비가 온다는 예보조차 없었는데 난데없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우리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편의점을 찾았다. 간신히 편의점을 찾아 우산을 하나씩 사서 돌아다니다 들어간 카페는 규모가 제법 큰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비를 피해 들어온 것치고는 괜찮았다. 내친 김에 음료에 브런치까지 하나씩 주문하고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케호시는 비에 젖어 처진 내 머리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데이트가 아주 엉망이 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홋케! 여름 감기가 독하대.”

“비 맞고 아이스티 마시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커피 좀 마실래?”

빨대를 입에 물고 아이스티를 쪽 빨아들이며 아케호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 앞의 에그샐러드 샌드위치를 몇 입 베어 먹고 바닐라 라떼 위로 듬뿍 올라간 휘핑크림만 조금 떠먹더니 금세 내가 주문한 치아바타에 관심을 보였다. 어린애같이 굴면서 그는 의외로 단 것보다는 담백한 맛을 좋아했다. 커피는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건 싫다고 했다. 쓴 맛은 싫다나.

사등분된 치아바타 한 쪽을 집어 먹으며 나는 안주머니에 넣어온 약병을 확인했다. 지퍼가 달린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약병이 조금 볼록하게 만져지자 안도와 동시에 긴장감이 들었다. 벽 쪽에 붙어 파티션이 둘러쳐진 자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웠다. 아케호시는 음료를 마시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어느 새 음료를 반쯤은 비운 상태였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아케호시를 떼어놓아야 했지만 요즈음 들어 아케호시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테이블 건너편에 놓인 샌드위치로 손을 뻗는 척 바닐라 라떼가 담긴 내 컵을 밀어 떨어뜨렸다. 미처 잡을 새도 없이 기울어진 컵에서 커피가 왈칵 쏟아진다. 일회용 종이컵이라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직 다 식지 않은 뜨거운 커피가 바지 위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감수할 생각이었지만 알싸한 통증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고 비를 맞은 탓에 몸이 식어 뜨거운 커피를 주문한 게 뒤늦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괜찮아?! 잠깐, 잠깐만, 티슈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예상대로 아케호시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티슈를 찾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음식과 함께 티슈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매장인데다가 티슈가 있는 카운터는 우리가 잡은 테이블로부터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다. 해독제를 넣을 시간은 충분했다. 허벅지의 통증도 잊고 아이스티에 해독제를 털어 넣으며 나는 짙은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입에 잘 담지도 않는 욕지기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빈 약병을 주머니에 넣기가 무섭게 아케호시가 티슈 한 뭉텅이를 들고 울 것 같은 얼굴로 테이블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커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의자와 커피로 얼룩진 바지를 연거푸 닦으며 울상을 지었다. 어떡하지, 괜찮아? 청바지 아래로 표피까지 스미는 통증을 잊으려 애쓰며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어찌할 바를 몰라 울먹이기까지 하며 커피를 닦고 나를 걱정하던 아케호시는 겨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얼음이 다 녹은 탓에 묽어진 아이스티의 수면이 조금 올라가 있었다. 흥건히 젖어 바닥면과 맞닿은 테이블을 닦고 자연스럽게 아케호시에게 아이스티를 내밀었다. 투명한 빨대를 통해 액체가 시원하게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쌓여 있던 시름이 녹았다. 약효가 빨리 드는 편이라지만 당장은 아니었으므로, 이전으로 돌아가기까지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오늘의 일정을 끝낼 때까지는 괜찮을 거다. 집으로 돌아가며 이별을 고할 생각이었다. 예전의 관계만큼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실낱같은 희망을 생각하며 한 조각 남은 치아바타를 들어올렸다.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전철을 탔다. 나는 한 쪽이 커다랗게 얼룩진 바지 대신 새로운 바지를 샀고 아케호시는 내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손목시계를 샀다. 손목시계를 본 건 우연이었는데 몇 번 하고 오지도 않은 것을, 아케호시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목에는 내 것과 같은 시계가 걸려 있다. 귀가하면 그 시계부터 서랍 깊숙이 처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가한 뒤의 밤에는 답지 않게 시계를 넣어두는 걸 잊어버렸고 아침에는 늦잠을 잔 탓에 하지도 않는 시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뛰쳐나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철까지 놓쳤다. 등교 시간과 출근 시간이 겹쳐 사람이 미어터지는 전철은 내가 플랫폼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 육중한 몸뚱이를 움직였다. 다음 전철을 타고 뛰어가면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다. 아침부터 땀을 흘려 척척한 셔츠를 잡아당겨 바람을 일으키며 더운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아침부터 엉망이었다.

이 즈음의 전철이 으레 그렇듯, 전철 내부는 콩나물 시루처럼 인간들이 밀도 높게 늘어서 있었다. 더러는 같은 교복도 보였다. 그들과 함께 배앝아지듯 전철에서 내리자 어느 새 목덜미에는 땀이 축축하다. 불쾌해. 손부채질을 하며 시간을 확인했을 때에는 이미 뛰어가도 아슬아슬할 시각이었다. 중간에 예상치 못하게 연착을 한 까닭이다. 어차피 사가미 선생은 종이 울리고도 조금 늦게 들어올 테지만 위원장인 내가 늦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달리는 학생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홋케, 오늘은 늦었네? 같이 가려고 기다렸는데!”

개찰구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부터인가, 어디선가 나타난 아케호시가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 어제 산 손목시계를 그대로 찬 채였다. 새것 느낌이 물씬 나는 손목시계를 보자 어젯밤과 아침에 잊어버리고 서랍에 넣지 못해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을 내 손목시계가 떠올랐다. 왜 이 녀석은 변한 게 없는 거야. 아케호시를 떼어낼 것처럼 부러 다리에 더욱 힘을 주어 달렸다. 그런 나를 따라 숨이 벅차도록 달리면서도 아케호시는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나는 그저 말없이 달음박질을 쳤고 교문이 가까워올 즈음에는 걸음을 조금 늦춰 빠르게 걸었다. 쉴새없이 말을 늘어놓던 아케호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따라 계단을 걸었다.

“……너무 빨라! 같이 가자, 홋케~ 기다려!”

벽을 짚어가며 무거운 발을 하나씩 떼어 계단을 오르던 아케호시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제아무리 체력이 뛰어난 그라도 아침 일찍부터 배가 당기도록 달렸으니 힘들 수밖에 없을 테다. 게다가 끊임없이 떠들기까지 했으니. 아침 식사조차 않고 달린 나도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벽면에 비죽이 튀어나온 2학년 A반의 푯말이 보이기 시작하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 손을 뻗었다. 맞잡아오는 손이 뜨겁다. 아케호시가 내 손을 잡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오는 동안 조회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나 종이 울리는 시간이 꽤 길었기 때문에 우리가 교실에 들어서고도 한동안 종소리의 끝자락이 남았다. 아케호시면 모를까 내가 늦는 일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던 유우키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사가미 선생이 휘적이며 들어와 간단한 인사와 함께 그다지 쓸모없는─이미 내가 고지한 적이 있는─사항들을 일러주고는 들어올 때와 같이 휘적이며 나갔다. 1교시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수업을 몇 번 빠진 탓에 전달 사항을 듣지 못한 아이들이 내게 몇 번인가 물으러 왔지만 아케호시는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우키와 장난을 치며 내 쪽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막상 내 눈으로 확인하자 질척이며 들러붙은 아쉬움이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하지만 끝내야 했다.

유우키가 자리를 비워 나간 틈에 나는 아케호시의 손을 잡고 교실 바깥으로 끌어내었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는 순순히 따라 나와 주었다. 빈 공간을 찾지 못해 사용하지 않는 교실이 즐비한 다음 층으로 올라와서 남자 화장실로 그를 밀어 넣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끌려나와 이용할 일 없을 화장실에 처박힌 아케호시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다 화장실을 죽 둘러보았다.

“아케호시, 이제 그만하자. 너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

밤새도록 연습했던 말 중에서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되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의외로 말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닦지 않아 흐려진 거울에는 망연한 상이 비친다. 아케호시는 잠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내가 왜 홋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너는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아냐. 내가 너에게 이상한 약을 먹였고, 그걸 먹은 너는 날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다. 이제는 약효가 사라졌을 테니까……. 나랑 억지로 사귀지 않아도 돼. 그 동안 고마웠어.”

대걸레가 질질 끌려 거무튀튀한 자국이 남은 타일, 그것의 모서리가 부서져 갈라진 틈에 시선을 박고 나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눈을 마주치면 말을 흐릴 것 같아서였다. 잘 드는 칼로 딱 잘라낸 것처럼, 단면이 깔끔하고 거스러미가 남지 않는 이별을 하고 싶었다.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뻔뻔하게도 나는,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끝내면 잠시 중단되었던 친구로서의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아케호시가 받아들여주기만 한다면.

그러나 거기까지는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약까지 먹여 억지로 관계를 구축한 주제에 뻔뻔한 부탁이라는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화장실 문을 밀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제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어 문을 바깥으로 밀기 직전, 아케호시가 문을 잡아당겼다. 밀리던 문이 역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에 가로막혀 거칠게 출렁이며 멈췄다.

“멋대로 말하지 마. 약을 먹든 말든, 나는 훨씬 전부터 너를 좋아했단 말야!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데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도망치지 말라고!”

시야에 들어오는 건 조금씩 흔들리는 문과 내 손 옆으로 손잡이를 잡은 아케호시의 손뿐이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너는. 손밖에 보이지 않는 아케호시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역력했지만 뒤를 도는 건 무섭지 않았다. 뒤를 돌았을 때, 버려져 구질구질한 화장실을 전경으로 하는 데에서, 아케호시는 예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찡그려졌지만 사납지는 않은 눈썹이나 씨근거리며 숨을 뱉기 위해 조금 벌어진 입술이 그랬다. 드높게 반짝이는 하늘같아서 좋아하던 파아란 눈이 나를 곧게 바라보고 있다. 나는 겨우 시선을 들어 그에 눈을 맞췄다. 드물게 땀 배인 손바닥은 금세 손잡이로부터 미끄러져 떨어진다.

아케호시도 후, 하고 짧은 숨을 끝으로 입을 다물며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케케묵은 물비린내가 역한 공기 속에서 눈을 마주치는 동안 우리 둘 중 어느 한 명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적절할 지 기억을 되짚고 있었고 아케호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미안해.”

결국 어디서부터 미안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냥 다 미안해, 다……. 곧 울음이 터질 것처럼 입매가 실룩거렸으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눈물이 적었던 탓인지, 차라리 이 타이밍에는 우는 게 분위기 전환에 나을 것 같았다. 연극부에서 단련한 대로 눈물 연기나 해볼까 해도 연기를 할 정신이 못 되어서 먹먹한 정적만을 연이어 삼켰다.

“있지, 고백하고 난 뒤로 홋케랑 있으면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홋케가 다른 사람이랑 있으면 화가 나고 짜증나고, 나랑만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주체할 수가 없었어. 만약에 그게 그, 약이라는 것 때문이었고 이제는 소용이 없어졌다면.”

굳게 박혀 있던 시선이 잠시 떨어졌다 다시 나에게로 붙었다.

“더 잘 된 거라고 생각해.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홋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 보니 마냥 맑기만 한 하늘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긴장과 우울, 그리고 열렬한 갈망 비슷한 감정 여럿이 뒤섞인 눈이 내리깔렸다 뜨이면서 나를 보는 게 안절부절 못하는 강아지 같은 꼴이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귀여워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긴장이 풀려서였다.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다리가 주춤거리다 푹 꺾이자 아케호시가 재빠르게 내 팔을 붙잡아 세웠다. 괜찮냐며 호들갑스럽게 물어오는 게 꼭 어제와 같았다. 좋아하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겨우 발을 제대로 붙이고 서서도 나는 아케호시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웃었다. 문 너머 텅 빈 복도로 종소리가 울려도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웃었다. 무드 없이 퀴퀴한 화장실을 울리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사이로 간간히 좋아해, 나도, 정말 좋아해, 그런 소리를 주고받았다.

“홋케, 할 말이 있는데 들어볼래?”

혀뿌리와 가슴께가 간질거려서 웃는 도중에 아케호시가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싹 가까워져 오는 얼굴에 나는 눈을 감았다.

“해 봐.”

“키스해도 돼?”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아도 적당히 하면 되잖아…….”

부러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웃음기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케호시의 숨결이 먼저 조심스레 입술을 적셨고 그 다음에는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아마 아케호시도 눈을 감았을 것이다. 더럽게 무드 없던 두 번째 고백의 기억은 그렇게 남아 있다.


* * *


“그래? 잘 된 일이네. 축하해.”

벽에 걸려 있던 흰 가운에 팔을 꿰며 사카사키는 툭 던지듯 말했다. 아케호시가 사실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더라는 소식을 전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한 반응이었다. 이제는 알아서 의자를 끌어다 앉은 나를 지나쳐 실험 집기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저들끼리 맞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집기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만큼 비밀 서고에 자주 들락거렸지만 아케호시는 예전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조금 질투를 하기는 했다. 짐짓 내 옆에 의자 하나를 더 갖다 바싹 붙여놓고서는, 그대로 나를 꼭 껴안고 사카사키의 실험을 지켜본다. 그러면 곧 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카사키가 우리를 일으켜 서고 밖으로 내쫓는다. 아마 오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곧 그럴 시각이었다.

사카사키가 학교에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최근 이 실험의 재료를 구해오느라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카사키, 일부러 모른 척 한 거지?”

“뭐가?”

“아케호시가 나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 때의 묘한 웃음이 확신을 가져다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이유 없이 곧잘 그런 미소를 짓는 사카사키지만 당시에는 좀 더 자세한 정황이 있었고, 그는 아주 가끔씩만 교실에 얼굴을 비추는 주제에 사람들을 살펴 그들을 둘러싼 여러 상황을 읽어내는 데에 능했다. 아케호시를 주시하던 녀석이었으니 더 잘 알고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말해주지 않은 건 역시 흥미 때문이겠지. 성가신 녀석이다. 역시 사카사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글쎄, 그런 식으로 확증도 없이 사람을 몰고 가는 건 나쁜 버릇이야. 그보다 이것 좀 봐. 와타루 형이 만들었던 사랑의 묘약을 보완해서 새로운 약을 만들었거든.”

뚜껑이 닫힌 플라스크 안에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쥐색?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짙다. 밤하늘의 별을 가루 내어 뿌린 듯, 새틴처럼 은은한 광택이 수면 위를 맴도는 액체는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다지 먹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그것을 천천히 흔들어 보이던 사카사키가 금세 손을 거두었다.

“어때, 이번에도 홋케 군이 실험을 도와줄 수 있겠어?”

대답 대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단호하게.

깨어 있는 시간의 9할은 남자랑 남자 사이의 곱하기 계산식의 답을 찾기 위해 소비하고 있습니다

박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