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고사라니, 과목 제목부터 멍청해요! 이딴 과목으로 시험을 치고 성적을 나누고, 패스 논패스로 진급가능 불가가 나온다니 말이 돼요? 사실상 찍거나 느낌대로 푸는 과목을 가지고! 이것 하나때문에 내 등급 평균이 두 개는 떨어졌을 거예요! 이건 말이 안 돼! 이건 진짜로 말이 안 돼! 봐봐요, 수학이랑 연애만 제하면 전교 1등이고, 수학 넣어도 전교 7등이라니까요? 그런데 사십 점짜리 연애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전교 42등이야!"

저 열변을 토하는 사람은, 며칠 전 제 22회 전국연합연애고사를 말아먹은 에투아르의 친구 펠릭스이다. 에투아르는 놀란 눈으로 펠릭스의 말을 받는다.

"42등? 대박...너 지금까지 받은 성적 중에서 최악이네?"

에투아르는 멍하게 펠릭스를 바라본다. 반타작도 못 하다니! 펠릭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성적표를 접어서 다시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번 시험 덕분에 펠릭스의 자존심은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박살났을 것이다. 역사, 문학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만 파는 외곬 에투아르로서는 평균 조금 낮은 건 일도 아니었지만 펠릭스에게는 그런 문제가 아닌 듯했다.

"내가 살다살다가 연애에서 낙제를 받아서 대학을 못 가게 생겼어요."

펠릭스는 으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한다. 입술 끝을 짓씹으면서 씨부렁거리는 모습은 꽤 귀여웠지만, 저러다가 입술에 피가 터지겠다 싶었다. 한동안 시험공부 한다고 밤새웠는지 다크서클도 가득했었는데, 결과가 이랬으니 보통 참담하겠는가. 펠릭스라고 연애의 모든 부분에 전방위적으로 총체적 난국 수준인 건 아니었고, 연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눴을 때 '기술' 과 '마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는 두 가지 다 엉망이었던 펠릭스는 스터디로 '기술' 유형 문제는 크게 점수를 향상시킨 바 있었다. 하지만 '마음' 유형은, 아직도 총제적 난국이었다.

"가만, 당신은 몇 점인데요?"

"92.8이었나? 17번에 '연인과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하냐' 랑 2번 '친구를 짝사랑 할 때'랑 하나 더 틀렸는데... 모르겠다. 그것까진 기억이 안 나."

"92.8? 내 점수 두배에서 조금 모자란 정도잖아!"

펠릭스는 스트레스 받았는지 그 예쁜 곱슬을 전부 다 쥐어뜯어버릴 기세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고, 에투아르는 그러다 탈모된다며 펠릭스를 말린다.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펠릭스는 '공부도 나보다 덜 했으면서' 라는 표정으로 에투아르를 노려본다. 에투아르는 눈을 굴리며 아까 '연애' 3교시에 받았던 오예스를 먹는다. 그거야, 네가 아직까지 솔로니까 당연한 결과 아니야? 

"그러고 보니 정말 이해 안가네. 수학이랑 과학이야 당신이 더 잘하는 거 그렇다 쳐. 그런데 대체 연애는 왜 당신이 더 잘 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실기, 죄다 엉망으로 봤잖아요. 맨날 쓰레기 같은 연애만 하다가 차이면서!"

그러는 너는 실기 시험은...언제나 실격 수준이었으면서. 파트너를 골라서 연애를 해오라고 하면 늘 선생님께 '이건 사랑이 아니고 우정이지...' 라는 소리 들으며 최하점만 간신히 면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에투아르는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대체 비결이 뭐예요? 좋은 팁 있으면 제발 나한테도 좀 귀띔해줘요. 내가 당신한테 라틴어랑 사회랑 영어랑 문학 가르쳐주듯이 하나만 도와달라니까." 

"그거-" 

사랑에 빠지면 점수 엄청 높게 나오던데. 에투아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제 성적을 높여준 그 사람이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 말이다. 에투아르의 라틴어, 사회, 영어, 문학, 연애 성적이 오르고 프랑스어, 과학, 수학 성적이 떨어진 이유랄까.

"진짜 감으로 찍어야 해. 그거 답이 없어."

에투아르는 펠릭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척, 뜯은 부분이 벌겋게 되어 있는 펠릭스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다. 펠릭스는 짜증이라도 낼 듯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으후! 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이럴 줄 알았어! 교과서만 읽었어요, 랑 뭐가 달라. 빌어먹을!"

국숫가락 말아먹듯 펠릭스는 연애고사 성적만은 정말 잘 말아먹고는 했는데, 에투아르도 참 도와주고 싶었지만, 이 녀석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듯해서. 예쁘고 순하고 착하고 참하고 예의바른 금발벽안의 동화속 공주님이 아닌 이상은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도 않을 것 같은 놈이라서. (음, 어쩌면 에투아르도 금발 계열에 푸른 눈이라서 친구를 해주는 걸지도?) 그래서 에투아르가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게 그 순간이 있어. 딱, 그거다! 싶은 순간. 깨달음? 열반? 뭐라고 하지? 아무튼 머리가 이렇게 탁, 트이면서 '아, 이게 이 소리였구나!' 하는 그 순간이 와. 그냥 그게 좀 늦은 거야, 너는."

늦다는 말에 펠릭스의 얼굴에 굉장히 불쾌하다는 기색이 스친다. 언제나 신동 소리만 듣고 자란 펠릭스로서는 견딜 수 없는 말이었으려나. 에투아르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킨다. 다행히 펠릭스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그 과목 때문에 대학을 못 가요, 빌어먹을 연애만 아니었어도 명문대는 따놓은 당상이야!" 

"꼬우면 너도 짝사랑 하시든지..." 

에투아르는 뾰로통하게 그렇게 중얼중얼거린다. 에투아르라고 완벽하게 사랑을 아는 건 아니라서, 만점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랑과 희생' '질투와 집착' 단원은 비가 후두두 쏟아졌고. (뭐, 그 부분은 이번 짝사랑남 덕분에 성적 많이 올랐지만.)

"짝사랑? 그건 2학기 시험범위 아녔어요?" 

"어어, 짝사랑 리얼하게 해봐서 그거 점수 잘나올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어." 

"염장질러요?" 

"지르는데요, 왜요?" 

나도 너를 도울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 근데,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닌 이상, 난 너를 도와주기가 싫어. 왜냐하면 전교일등 씨, 사랑은 공평해야 하거든. 나도 너보다 앞서는 게 한 가지는 있어야-그래야 내가 이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거라고. 설령 그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내가 너를 더 좋아하는 그런 하찮고...입시에 도움 안되는 과목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너보다 잘난 게 하나는 있어야 너는 나를 필요로 할 테니까. 안 그래?

"흥. 네. 알겠어요. 잘나셨네요."

"농담이고. 마음 부분 잘하는 애하고 스터디 하는 건?"

"나라고 안해봤겠어요. 삼십 명도 더 만나봤다구요."

삼십 번? 에투아르의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연애 과목 스터디는 다른 말로는 '준-연애' 인데, 스터디를 빌미로 좋아하는 애한테 접근해서 '실기' 도 같이 해보고 나오는 상황을 '리얼하게 재현해보자' 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투아르의 머릿속에 아주 끔찍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스킨십' 단원 같은 거 말이다. 어디 연애 고수가 펠릭스를 자빠뜨려서-그만!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데 쉽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떨쳐내지지를 않았다. 에투아르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펠릭스의 팔을 꽉 잡는다.

"삼십 명? 나,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보다 당신이 성적 잘 나오는 건 인정하지만, 만점받아본 적 한 번도 없으면서?"

당연히? 라는 듯한 펠릭스의 반문에 에투아르는 입을 뻐끔뻐끔한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에투아르도 아직 사랑의 모든 걸 파악한 건 아니었다. 아니 사랑의 모든 걸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건 고사 출제자들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수학의 전체를 파악한 사람이 아직 존재하지 않고, 철학의 끝을 알지 못하듯이 연애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그래서 무엇인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학자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리고 에투아르는 아직 시험범위도 다 파악하지 못한 차라서. 짝사랑 파트는 당장 수업을 해보라고 해도 교안을 짤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았지만 아직도 알지 못하는 분야가 넘쳐났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네가 왜 연애고사를 맨날 죽쑤는지 알만하다."

방금의 상황이 연애고사에서 출제되었다고 가정하자.

에투아르: 나도 너하고 같이 연애 스터디 해보고 싶었는데,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봤어?

펠릭스:________(A)__________

Q. 다음 중 A에 들어갈 말로 가장 적절한 것은?

1. 너는 연애 과목 잘 못하잖아.

2. 나는 너 별로 안 좋아하니까.

3. 연애는 혼자 공부하는 게 낫더라.

4. 다른 애랑 하는 게 더 좋아서.

5. 나도 너랑 하고 싶었는데.

이 상황에서의 정답은 뭘까? 누가 봐도 5번 아닌가? 그래, 국어 같은 과목이라면 호응관계를 따져봤을 때 1번이나 2번, 4번 중에 정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목은 국어가 아니라 연애이다. 연애의 기본은 둘의 마음이 통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교육과정이 개정되면서도 그 근본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고, 그 원칙은 늘 그대로 유지되었다.

연애를 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건 초보적인 문제다. 하다못해 세 살짜리 아이도 맞힐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 한심한 놈은 의지조차도 없다는 소리다. 자, 그럼 5번이 아닌 답을 골랐을 때 어떻게 될지, 이것도 한 번 연애고사 문제로 출제해볼까?

아래는 펠릭스 (남자)와 에투아르 (여자) 의 대화문이다. 대화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라. (단, 아래 지문에서 에투아르는 펠릭스를 좋아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성격이라고 가정한다.)

에투아르: 나도 너하고 같이 연애 스터디 해보고 싶었는데,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봤어? 

펠릭스: 너는 연애 과목 잘 못하잖아.

Q: 펠릭스의 답을 들은 에투아르의 정서와 생각을 알맞게 짝지은 것은?

1. 무감정-하긴, 내가 연애 과목을 썩 잘 하진 못하지.

2. 기쁨-펠릭스가 내 말을 받아주다니, 정말 기뻐!

3. 분노-나보다 못하는 주제에 꼴값이야.

4. 사랑-무슨 말을 해도 그냥 좋아. 마냥 좋아.

5. 속상함-얘는 눈치도 없고,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도 몰라.

독자들이여, 정답은 몇 번일까? 이번도 뻔하다. 5번이다. 정말 어지간히 좋아하는 게 아닌 이상은 5번이란 말이다, 정신줄을 놓으면 4번일 수도 있고 마조히스트라면 2번일 수도 있고 좋아한다는 전제를 안 붙이면 1번이나 3번일 수 있긴 한데 '일반적인 성격' 을 가정했을 때 해당 지문의 답은 5번이다. 참고로 에투아르는 초등학교 시절 이 상황에서 4번을 골랐다가 오답노트를 썼던 적이 있다. 지금은 직접 당해보니까 5번이라는 걸 확실히 알겠지만.

장황하게 이야기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에투아르는 방금 펠릭스의 답변에 꽤 상처를 받았다는 뜻이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사회성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연애와 사랑에서는 정말 어지간히 눈치가 없어서, 에투아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 당신 여기서 왼쪽으로 틀죠?"

"응."

"집까지 바래다 줘요?"

에투아르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웅덩이에 걸친 제 운동화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펠릭스를 올려다본다. "집까지 바래다 줘요?" 라는 기술은 완벽했지만, 예쁜 눈에서는 조금의 '마음' 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연애는 실생활 밀착형 과목이라니까. 에투아르는 코웃음을 치고 짐짓 도도한 척 몸을 돌린다.

"19년도 기출문제 모범답안 베낀 거 티난다. 됐거든요."

"많이 티나요?"

펠릭스는 웃으며 에투아르의 곁으로 온다. 본인은 알지나 모르겠다, 저 미소 덕분에 얼마나 많은 여학생들이 연애 과목에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하고 있는지. 에투아르는 보드라운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는다. 

"엄청 티나. 넌 역시 이 과목은 가망도 없구나?"

펠릭스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편다. 투정부리듯 사랑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한 차례 굴리지만 다시 진심일 미소를 지으며 초록불 쪽을 향해 턱짓한다.

"가망 없는 것까지는 아닌데... 아무튼 알았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어휴, 요령없는 천재같으니라고... 그 머리를, 그 재능을, 그 다정한 마음을 다른 사람한테 조금만 쏟아봐. 그 마음을, 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쏟는 그게 바로 연애에서 점수 잘 따는 비법이라고, 이 멍청아!

그 다른 사람이 만약 나라면 더 좋을 테고.

에투아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연애 교과서의 1단원 짝사랑, 세 번째 항목. '사랑하는 사람이 친구일 경우' 32페이지를 펼친다. '친구일 경우' 는 실정과는 다르게 주로 '소꿉친구' 일 경우를 상정하고 있어서 영 에투아르를 심란하게 했다. 빨리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실정에 어울리게 개편되어야 했다.

많은 아이들의 연애 교과서는 물에 젖어 있었다. 얼마나 연애 과목에 목을 매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에투아르의 교과서는 종이가 다 젖어서 우글우글할 정도였다. 에투아르는 순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느낌에 서둘러 책상에서 일어나서 화장실로 간다. 다음 번에 펠릭스에게 교과서를 빌려주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친구일 경우' 가 다 우그러들어 있으면 금방 눈치챌 것 아닌가! 원망스러운 연애 '천재' (반어법이다) 같으니라고, 정말 천재야, 자기 마음만 들여다볼 줄 알고, 남의 이런 마음은 눈치도 못 채는 천재야!


몇 시간 뒤, 자기가 에투아르에게 그렇게 욕을 먹은 줄도 모르는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다음 날을 준비한다. 에투아르가 선물해줬던 실리콘 무드등을 괜히 한 차례 더 눌러서 껐다 켰다 해보는 새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갑자기, 잠들기 직전이었던 펠릭스는 이불을 걷고 불을 켠 뒤, 가방을 뒤적거려 연애 교과서를 꺼낸다. 서둘러 32페이지를 펼친 펠릭스의 입에서 나지막이 탄식과 같은 말이 샜다.

"오, 주여."

클래식 작곡가 RPF/RPS 연성을 합니다. 간혹 작곡가 관련 개인적 사담+ 작곡가 편지 자료+ 작곡가 TMI 자료 등등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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