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씨에 대해 알게 된 것. 말을 참 재미있게 한다. 스스로가 듣는 사람의 입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굳이 먼저 말하는 타입이 아닐 뿐이라고 여겼는데, 그와의 대화는 듣기만 해도 즐거워서 청자를 자청하게 된다. 그래서요? 재밌었어요? 왜요? 어떻게? 어쩌다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스킬 따위를 사실 잘 쓰는 편이 아닌데도 계속해서 묻게 된다. 더 듣고 싶어서. 더 많이 이야기해줬으면 해서. 누군가를 좋아하면 작은 정보라도 알게 되는 게 기뻐서 하나하나 저장하게 된다고들 하지만, 그것보다도 대화 자체가 즐거워서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다.


 하나 씨가 나에 대해서 알게 된 것. 생각보다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생각보다라는 어감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의 말은 그러했다. 카페에도 느지막이 나가서 마감하고 오니 꽤 여유롭게 사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까지 일찍 일어나는 줄은 몰랐지.

 아침에 눈을 떠 간단한 스트레칭 후 양치질할 때면 그 말이 떠오른다. 피식피식 웃다가 거품을 주룩 흘리기도 했다. 사귀지 않고서야 새벽마다 가볍게 걷고 온다는 걸 어떻게 알겠나 싶긴 했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하나 씨는 우는 일이 적어졌다. 종종 기분이 좋다는 이유로 저도 모르게 울긴 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럽다는, 예전과 같은 이유로 울진 않았다. 더욱이 편안한 얼굴을 하는 그가 좋았다.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하나 씨에게 사랑을 느꼈다. 하루하루 더 깊게.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개강이 있고, 매장도 조금은 더 바빠지니 우리는 열심히 대화하고 데이트도 부지런히 다녔다. 전시회나 박물관에도 가고 공연 관람도 하면서 취향에 대해 알아갔다. 무언갈 보고 나면 또다시 대화의 물꼬가 터졌고 나는 그게 즐거워서 하나 씨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문화생활을 즐긴 후에는 또 밤이 떠나가는 내내 함께 향유했다. 굳이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책 읽는 날도 있었다. 밖에서만 문화생활을 즐기진 않으니까. 전자기기는 전부 꺼두고 온종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나열하기도 했다.

 짧은 여행으로 다른 지역까지 가서 밥을 먹고 오기도 하고, 겨울 바다도 즐겼다.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스포츠도 했다. 클라이밍이든 스쿼시든 영 어설픈 모양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허리 접어 웃는 만능 스포츠 재주꾼인 그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무슨 일을 하든 즐거웠다.


 우리는 똑같진 않지만 많은 부분이 겹치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서서히 알아갔다. 입맛도, 걸어온 삶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이렇게나 녹아들 수 있구나. 새삼스러운 기쁨과 놀라움을 공유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주 재미없는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웃음이라곤 하나도 짓지 못할 순간들에 자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신기했다. 그저 어떤 조각처럼 여겨왔던, 그런 척 삼켜온 지난날이 하나 씨 앞에서는 확실한 상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나를 조금도 흔들지 않았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흉터는 아프지 않으니까.


“그래도, 흉터는 아파요. 저는 지금도 흉터 난 곳이 욱신거릴 때가 있어요. 아픔은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익숙해진 거지.”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거운 말을 할 수 있는 단단함과 그것을 마주 보는 견고함 중에서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 작게 느껴졌다.


“익숙해지는 게 정민 씨의 방식이었을 뿐이에요. 그런 표정 하지 마요.”


 어떤 표정을 하는지 몰라, 그저 감겨드는 팔에 풍덩 빠졌다. 내가 매번 모르는 척 돌아서고 멀어지는 동안, 너는 어쩌다 이렇게 깊어진 걸까. 그 시간 동안 너는 괴로웠던 건 아닐까. 내가 몰랐던 나를 계속해서 마주하는 데도 두렵지 않은 너에게 언제나 지고 만다. 이토록 강하고 멋진 사람에게 나는 이길 도리가 없다. 완벽하고 산뜻한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아파요?”


 여실하게 느껴지는 흉터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달리는 것에 문제는 없었지만 다시 설 수 없을 만큼 두렵게 만든 큰 부상.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이라 생각했던 트랙 위는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 이후의 두려움.

 혼자만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돈 버는 일에만 급급했던 나는 꿈이 깨지는 순간을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미안했다. 너는 이토록 존재만으로도 나를 위로하는데 나는 이렇게 미약하다.


“…음, 아니. 이젠 많이 아프진 않지만. 그래도 속상하긴 해요.”

“지금이라도 다시 할 수 없어요?”

“무섭지 않은 순간이 오면요. 그때가 오면 언제라도 뛸 거예요.”


 여전히 하루 중 적어도 한 시간은 운동하고, 여전히 좋아하는 스포츠 브랜드의 운동화만을 고집하면서 하나 씨는 달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트랙 위가 아니라면 어디서든 잘 뛰고, 누구보다 빠른 최하나. 이 빛나는 사람의 싸움을 나는 끝까지 응원하고 싶다. 흉터마다 입술을 내리며 보듬고 쓸었다.


“꼭 보게 해줘요.”

“당연하죠.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앉게 해줄게요.”


 이미 승리한 사람의 미소를 짓는 그에게 나는 또 하릴없이 반하고 만다.





 갈색의 도톰한 비니를 쓴 머리통을 내 노트북에 박은 연인이 깊이 좌절 중이다. 둥근 뒤통수를 만지작대자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분명히 접속까지 했고, 쿠키도 풀고 하여간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다고 했는데. 서버가 다운됐단다. 손에 쥔 전화기는 연이어 들어오는 카톡으로 화면이 꺼지질 않는다. 흘긋 보니 온통 욕이다. 이걸 어쩌나.


“잠시만 기다리면 복구되지 않을까요?”

“……제일 중요한 강의 두 개나 잡았는데.”


 반쯤은 우는 듯한 목소리가 안쓰럽다. 대학엘 가지 않아 이 고통은 넘겨들었던 탓에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등을 쓸어주며 손에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친구들도 화가 잔뜩 났네요. 욕도 하고.”

“제 친구들 원래 욕 절대 안 하는 애들인데.”

“알아요. 저번에 막걸리집에서 도망쳤을 때도 화 안 낸 친구들이잖아.”

“으아, 정말!”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한 얼굴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새빨간 자국이 가득 남은 미간은 잔뜩 좁아졌다. 곧 운다는 뜻이다.


“내가 왜 이 짓을 돈 줘 가면서 해야 하는 거야.”


 식탁 의자에 앉아 울 태세를 한 하나 씨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으허, 하고 숨을 뱉을 때마다 배가 뜨끈해지는 게 웃기고 귀여웠지만 잠자코 받아주었다. 억울함에 잠시 울 상태가 되었던 그는 이내 분노가 솟구치는지 짜증을 버럭버럭 내기 시작했다.

 이토록 감정이 휘몰아치는 건 처음 보는지라 내심 신기하고 좋았다. 혼날 게 뻔하니 굳이 말하진 않았다.


“서버 다시 연결된다고 해도, 수강 신청된 건 날아가요?”

“저번에 그랬어요. 그걸로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정도면 점검을 안 하나 봐. 손이라도 좀 볼 것이지. 왜 이렇게 하나 씨 힘들게 해.”

“그러니깐!”


 갑자기 식탁을 팡팡 치기 시작해 서둘러 막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러면 못 써요. 손 아파요. 그만해. 꽉 쥔 주먹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 맞추고 전화기를 쥐여주었다. 일단 친구들이랑 대화 좀 해요. 금세 진정한 그가 빠른 속도로 무언가 토독토독 대화를 이어갔다.

 수강 신청이 뭐라고. 원수다, 원수. 사람을 저렇게 힘들게 하는 학교가 어딨어. 이제야 알바생들이 수강 신청 시즌마다 화를 냈던 이유가 이해됐다. 곁에서 보니 반쯤은 알 것도 같다.


 이러다 식사도 거르면 어떡하나. 요리하는 재주가 있었다면 뭐라도 해줄 테지만 실력은 나보다 하나 씨가 훨씬 좋다. 사 먹거나 시켜 먹는 게 아니라면 늘 그가 먹고 싶다는 것을 위해 재료를 사 오고 보조해가면서 그렇게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나가서 사 오기엔 혼자 두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서 싫고. 이른 시간이라 시키기는 애매하다. 어제 뭐라도 사둘 걸 그랬어.


 고민을 뚝 자를 만큼 크게 헉 소리를 낸 그가 다급하게 마우스를 잡고 빠른 속도로 딸깍이다 말고 마침내 번쩍 두 팔을 올렸다.


“다 잡았다!”

“끝났어요?”

“네!”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지르는 걸 보자 힘이 쭉 빠졌다. 나까지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고생했어요. 그새 핼쑥해진 얼굴에 양껏 뽀뽀하고 입술도 몇 번이나 핥고 깨물었다. 이제야 얼굴 근육이 다 풀린 그는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배 안 고파요?”

“이제 엄청 고파요. 뭐 먹고 싶어요?”

“글쎄. 나는 뭐든 좋은데. 하나 씨는?”

“그럼 국밥 먹으러 가요!”


 자신이 사겠다며 반사적으로 지갑과 차 키를 챙기려는 손을 저지하고 반쯤은 뛰듯이 방방이는 그에게 붙들려 아침을 먹기 위해 서둘러 나섰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은채가 프슬프슬 웃었다.


“수강 신청 하는 애인 이야기를 다 듣고.”


 괜히 말 꺼냈나. 요즘 어떠냐는 말에 대답한 거였지만 새삼스레 멋쩍어져 조용히 물이나 마시는데 시선을 맞춰온다. 왜. 뭔데. 고개를 저어서 더 궁금했다. 무슨 말 하려고 그래.


“그냥. 네가 이렇게 안정적으로 연애한다는 게 신기해.”

“그건 나도 그래.”

“예상했던 거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술잔을 비우는 애매한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읽기 어려웠다. 아니, 알 것 같았지만 말로 하기엔 어려웠다. 그런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나 씨가 나 만나는 거 싫어하지는 않니?”

“아니야. 오히려 너 만나고 싶어 한다니까.”

“그래?”


 이미 들었던 말을 애매한 표정으로 맥주병을 휘휘 흔들더니 그대로 마신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버릇임을 알지만 모르는 척 안주를 밀어주었다. 은채는 똑똑하고 늘 여유가 흐르지만 그만큼 감정을 숨기는 게 익숙하지 않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사람이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지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없을 땐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폭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도 서로에게 폭발한 적은 없었다. 나도, 은채도 그랬다.


“대학생이니까 시간 만들기가 어려워. 네 스케줄도 맞춰야 하고. 여러모로.”

“그래. 편하게 하자. 여유 있을 때 말해. 봄 지나면 한가하니까.”


 그 후로 대화에 하나 씨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일 이야기를 듣다, 이것저것 해볼 생각 없냐는 말을 거절했다.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하는 일이 정말 많은 은채는 나에게도 제안할 때가 가끔 있었다. 사진이든, 글이든 뭐든. 아무것도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 돈 받고 할 실력은 아니라는 말에도 늘 납득하지 않았다.


“그럼 학원이라도 보내줘?”

“카페만으로도 바쁜데 무슨 학원이야.”

“너 아직도 공부 욕심 못 버린 거, 난 알거든.”

“그래서 혼자 하잖아. 그러니까 더 바빠.”


 취했는지 유달리 불평이 길다. 추가 주문하려는 걸 말리고 물을 마시게 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도 늦었다. 옅게 느껴지는 취기가 가벼워서 조금만 있으면 금방 깬다는 걸 알기에 취한 은채를 먼저 보냈다.



 기사님이 오시고도 한동안 빤히 쳐다보던 얼굴이 또렷했다.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많이 바빴는지 그동안 애매하게 길어진 은채의 머리칼 길이처럼, 그 애매한 마음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긴 한 걸까. 그것조차도 짐작 가지 않았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니 지나갈 감상이라는 걸 안다. 미안하지 않아서 조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조만간 술 없이 만나야 하나.

 생각에 잠기기 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단골 기사님은 여전히 능숙한 운전실력을 뽐냈다. 뒷좌석에 늘 구비 중인 담요 속에 늘어져 기분 좋게 즐겼다. 이래서 재벌들이 전속 기사님을 임용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짧은 대화 후 잘 가시라 인사하기 무섭게 대뜸 이름을 불렸다.


“윤정민!”


 나의 어리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어둠과 밤을 등지고 서 있다. 반가움과 놀람이 밀려들었다.


“왜 여기 있어요!”

“도착한다고 해서 나왔죠.”

“졸린 줄 알았는데.”

“그런 척 해봤어요. 놀라게 하려고.”


 성공했어요? 두툼한 털옷 속에서 빙글 웃는 그는 혹시라도 걱정할까 싶어 기다리는 것도 단지 안에서 했다며 신난 듯이 말했다. 동그랗고 보들보들한, 나의 작은 연인. 따듯한 온기가 물씬 뿜어져 나오는 사랑스러운 사람. 서둘러 품에 꼭 끌어안으면 웃으며 마주 안아주는 너.


“사랑해요.”


 차가운 공기가 매서운 소리를 내며 스치는데도 나는 추운 줄을 몰랐다. 마주 안은 몸이 둥실거려 달밤 아래에서의 달콤한 댄싱을 즐기느라 추위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입술 끝에 묻어난 설탕을 털어내듯 우리는 사랑을 말하고 입을 맞췄다. 이런 감정에 색깔을 칠할 수 있을까. 이름을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완벽히 알맞은 것을 찾을 수 없어서, 익숙한 단어를 계속 되뇌었다. 사랑해. 사랑해. 그것보다도 더 많이 너를 좋아해.





1

저도 사실 수강신청 그렇게 피터지게 안 해봐서 잘 모릅니다 (약간 죄송) 중간고사는 얼마 전에 끝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하간 고생이 많으십니다 학생 파이팅


2

은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은데 그건 나중에 나올까요 모르겠네요


3

저는 그새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답니다 여러분은 고생하지 마세요



take your broken heart make it into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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