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을래?”

“형은 집에 안 가요?”

“태형아, 지금 이 형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디귀한….”

“그 휴가를 저 때문에 쓰시지 말고, 그만 집에 좀 가세요. 아니면 호석이 형 집에 가도 되잖아요!”

 

지긋지긋한 속세를 벗어나 전정국 생각 좀 덜어내려 했건만. 그래서 일주일 내내 집안에만 짱 박혀 있으려고 엊그제 거하게 장까지 봐왔건만! 눈앞에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 인간 때문에 다 망했다.

 

“불알친구는 이제 좀 덜 봐도 괜찮아. 가까운 사람일수록 떨어져 있어야 소중함을 느낀다잖아?”

“아, 남준이 형 제발….”

 

내 집에 남준이 형과 함께 짱 박히게 된 경위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전개였다. 남준이 형은 휴가받은 김에 호석이 형에게 놀러 갔다가, 사소한 일로 다투고는 곧장 옆집인 내 집으로 온 거였다. 친구랑 다퉜으면 그냥 본가로 곧장 갈 것이지, 그건 또 싫단다. 집에 가면 부모님들이 결혼 얘기만 주구장창 하신다나 뭐라나. 형은 팔짱을 끼며 작게 몸서리쳤다. 암만 생각해도 야구 빠따 들고 계실 우리 아버지, 김철용씨 보다는 백 번 나은데.

 

“다신 안 본다고 욕하는데, 거기다 대고 정호석이 또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요.”

“갈 거면 너희 집으로 꺼지래.”

“왜요?”

 

하마터면, 많고 많은 집 중 하필 왜! 우리 집이냐고 물어볼 뻔했다. 억울한 표정으로 묻는 나와 다르게 남준이 형은 내가 끓여준 라면 면발을 호호 불며 대꾸했다.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살아생전 라면 처음 먹어보는 사람 같았다.

 

“한곳에 몰아놔야 손보기 쉽다나 뭐라나.”

“…아.”

“태형아, 너도 정호석이랑 싸웠냐?”

“저는 형처럼 싸우진 않고, 그냥 호석이 형한테 일방적으로 욕 한 바가지 먹었을 뿐인데요.”

“그래? 야 너네는 나이가 몇 갠데 싸우고 그러냐. 애들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그게 형이 저한테 할 소리예요? 하고 따져 물으려다 말았다. 남준이 형이 저래 보여도, 실상은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말은 또 어찌나 잘하던지. 늘 느끼는 거지만, 남준이 형이 변호사가 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저 입담으로 사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요즘 애인은 있고?”

 

별 의미 없는, 그래서 넌지시 던진 말이란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젓가락질이 멈추었다. 사실 호석이 형에게서 이러쿵저러쿵 내 얘기를 듣고 왔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둘이 많이 친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런저런 말이 오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저 내 입으로 실토하는 게 부끄러울 뿐이었다. 최근의 내 꼬락서니가 어떤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래도 남준이 형과 같이 있어서 정신없고 귀찮기는 해도, 한편으로는 전정국을 생각할 틈이 없어서 고맙던 참이었다. 나나 형이나 누구 하나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목표하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남들에겐 지극히 별거 아닌 안부 인사일 텐데, 고작 그 정도로도 기어코 생각나고만 전정국이었다. 내내 꺼두었던 휴대폰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내가 먼저 피하고, 차단해보려고 꺼둔 거였다.

아무래도 보기 좋게 실패한 거 같지만.

 

‘기대하지 말자. 전정국한테 기대하지 말자.’

 

속으로 백 번도 넘게 되새기며 켠 휴대폰이었다. 자기 세뇌가 부족했던 탓인 걸까? 전정국이 남겨 놓은 부재중 전화 한 통, 카톡 하나 없는 걸 알아차리고 나니 커다란 서운함이 마음에 한가득 밀려 들어왔다.

 

“왜? 애인이랑 싸웠어?”

“…애인 같은 거 없는데요.”

“헤어졌네. 맞지?”

“형 좋을 대로 생각해요.”

 

급격히 다운된 기분 탓에 애꿎은 남준이 형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다행히 형은 그런 내 태도에 별생각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냄비 안에 남아있는 라면 면발을 제 앞 접시로 옮겨 담았다. 남준이 형은 라면을 다 먹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형은 잠 오는 게 포만감 탓이라며, 난데없이 낮잠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밥 먹고 바로 자면 소 되는 거 모르냐고 빽빽 소리 질러 보기도 했지만, 그래 봤자 계란으로 바위 내려치는 격이었다. 게다가 이젠 아주 내 양 손목을 붙잡고는 목덜미와 겨드랑이, 그리고 옆구리를 마구잡이로 간질이기 시작했다. 간지러움 태우는 거엔 쥐약인지라, 다리가 풀리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그런데 별안간 도어락 비밀번호가 하나하나 눌리는 소리가 나더니,

“일이 있어서 본가 내려간다더니. 집에 있었네요?”

 

…전정국이 들어왔다.

마주친 상황이 꽤나 묘했다. 침대 위에 엎어진 나, 그리고 그 위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엎드린 남준이 형. 마지막으로 현관에 서 있는 섹스 파트너 상대인 전정국까지.

 

“…왜 왔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총을 설명하자니 연인 사이도 아닌데 괜히 나서서 오버하는 기분이었다. 그건 남준이 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정국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한 채, 이대로 있자니 모호한 이 분위기가 싫었다. 멋쩍게 건넨 내 말에 정국이는 언짢은 표정으로 한쪽 눈썹만 들썩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적막을 깬 건 남준이 형이었다. 형은 흠, 하는 추임새와 함께 내내 붙잡고 있던 내 손목을 슬며시 놓아줬다. 그리고는 특유의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으며 정국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태형이 아는 동생인가 봐요?”

 

남준이 형의 부드러운 인사말과 대조 되게 전정국의 표정은 어딘가 잔뜩 골이 나 보였다.

 

“형, 이쪽은 나랑 같은….”

“안녕하세요. 같은 과 후배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 말의 허리를 싹둑 잘라 먹은 전정국은 제가 언제 언짢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평소 학교생활 할 때의 얼굴을 내비쳤다. 그리고는 남준이 형이 내민 악수에 기꺼이 응했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와 입꼬리지만, 전정국이 웃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 봐요?”

“네?”

“보통 선배 집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진 않으니까요. 그것도 초인종을 누르는 게 아니라, 도어락 비밀번호부터 누르면서요.”

“…….”

 

섣불리 나설 수 없는 분위기에 절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분위기가 어찌나 무겁게 가라앉았던지, 차라리 베타인 호석이 형이 함께 있어 주길 바랄 정도였다. 그 형이었다면, 왜 여길 들락날락하냐고 대놓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보단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이렇게 제 페로몬을 마구 풍기며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기 싸움할 게 아니라.

둘 다 나라는 존재를 아주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바로 옆에 열성 오메가가 서 있는데, 이렇게까지 힘 싸움하지는 않으니까. 전정국 페로몬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마당에, 남준이 형까지 합세했으니 곱절로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창문을 열어서 조금이라도 환기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게 아니면 전정국에게 네 뒤에 있는 문 좀 열어달라고 시키고 싶었다.

숨이 점점 가빠 오고 시야는 점차 흐려졌다. 숨쉬기 버거운 탓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마주 보고 서 있는 남준이 형과 정국이가 마구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고, 점차 실루엣만 보였다.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옷 색으로 누가 누구인지 간신히 보이는 수준까지 빠르게 다다랐다. 누가 되었든 좋으니, 제발 먼저 좀 멈췄으면 좋겠다.

결국, 그 생각을 끝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치고야 말았다.






눈을 뜨자, 사방이 온통 새하얀 벽이 보였다. 알코올 냄새, 그리고 특유의 분위기나 느낌으로 미루어 봤을 때 여긴 병원이 틀림없었다. 하여간 다들 유난이다. 알파들 싸움에 오메가가 쓰러지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입원까지 시킨 건지 모르겠다.

 

“깼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준이 형이 보였다. 아, 형이 날 입원시킨 거였구나. 하긴 1인실로 잡아 줄 사람이 남준이 형 말고 또 있을 리가 없긴 했다. 아주 잠깐이나마, 전정국이 아닐까 하고 기대한 게 민망했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자, 쌉사름한 맛이 났다. 그나저나 쓰러지는 와중에 둘 중 누군가의 소매 끝자락을 잡아당겼던 게 기억났다.

 

“남준이 형, 있잖아요….”

 

꽤 오래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오랜 가뭄처럼 쩍쩍 갈라지며 띄엄띄엄 나왔다.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물어보는 게 더 급했다. 남준이 형의 검은색 셔츠 소매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으려는 찰나, 병실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야 이 미친놈아!”

 

강한 존재감을 나타내며 등장한 호석이 형은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내 등을 세게 내리쳤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남준이 형의 등짝을 내리쳤다. 덕분에 병실 안에는 두 번의 퍽퍽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애 잘 지내는지 살피라 했더니, 병원으로 데리고 와? 화해고 나발이고, 너는 진짜…!”

 

자초지종은 그러했다. 호석이 형 말로는, 김태형 집에 김남준이 있으면 전정국을 덜 만나지 않을까? 했단다. 참으로 1차원적으로 단순한 생각이 아닐 수가 없다.

동기들 중 제일 어린 나이에 변호사가 된 남준이 형과 대학원생인 호석이 형은 동갑내기였다. 나름 머리 좋기로 유명한 둘이었는데, 다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덤 앤 더머가 따로 없다. 문제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저 이 사실을 나만 알고 있다는 게 좀 갑갑할 뿐이다.

그나저나 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호석이 형이 없으면 모를까,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지금으로선 절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전정국의 ㅈ만 꺼내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 게 분명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만 꿈질거릴 뿐이었다. 킁. 콧잔등을 찡그리며 입을 삐죽였다. 스리슬쩍 고개를 돌리자,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이내 남준이 형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 호석아. 나 아까 접수하는 곳 앞에서 너희 할머님 본 거 같은데. 오늘 정기 검진받으시는 날 아냐?”

“헐, 맞다. 야야 나 좀 다녀온다.”

 

남준이 형의 말에 호석이 형은 부리나케 병실을 벗어났다. 나는 형이랑 몇 년을 알고 지내면서도 할머니께서 병원에 다니는 줄도 몰랐는데. 역시 불알친구는 불알친구인 모양이었다.

 

“할머니 안 계신 거 알면, 쟤 눈에 쌍심지 켜고 뛰어올 테니까 요점만 얼른 말해.”

 

형이 제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뚜둑-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형은 오히려 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남준이 형은 말해줄 거란 무언의 믿음이 있었다.

 

“정국이는요?”

“야 그건 너무 요점이다.”

“…정국이는 언제 갔어요?”

“너가 나 붙잡으면서 쓰러지고 나서.”

“…….”

 

정국이를 보고 팔을 뻗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되게 놀라더라고.”

“…….”

“그래서 가택침입죄 적용해서 끌고 가기 전에 당장 나가라고 했지.”

 

지극히 형다운 대처였다. 끌려갈지도 몰라서, 혹은 쓰러진 나 때문에 무서워서 도망간 건 아니었을 거다. 전정국이라면 더 큰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라도 제가 마무리 짓고 갔을 애니까. 내가 모르는 무슨 얘기가 더 오갔을 게 분명했다. 그걸 형들이 말해줄 리 없어서 문제지만. 딱히 더 할 말도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김태형.”

 

남준이 형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로 내 이름 석 자를 불렀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억지로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애써 침착하게 웃어 보였지만, 이제 와 변명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형은 잔뜩 찌푸린 제 미간 사이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할 말은 많은데, 그걸 최대한 좋게 말하려니 고민되는 모양이다. 저렇게 참는 걸 봐선 형이 어른은 어른이었다. 남준이 형은 기나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주 직구로.

 

“너 왜 약 먹어.”

 

오메가가 먹는 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오메가가 먹는 약은 억제제 역할을 하는데,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 비교적 무난하게 넘어가도록 도와주는 약이었다. 그렇다 보니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 대부분의 오메가는 학교나 직장을 조퇴하고 약을 먹은 뒤 푹 쉬곤 했다.

또 하나는 지연 효과가 있는 약이었다. 마약처럼 금지 약품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구하기 어렵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도록 미루는 건데, 대체로 중요한 일정과 겹치지 않도록 먹곤 했다. 그것도 먹어봤자 단기간이었다. 나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주야장천 먹는 게 아니라. 이 약을 다들 꺼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히트 사이클이라는 게 일종의 호르몬이 일으키는 일인데, 자연적으로 발생한 일을 내 멋대로 무작정 막는 셈이니까. 단기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것 자체가 절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마 이래저래 몸이 많이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같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먹었을 뿐이지.

그러니 남준이 형으로선 사뭇 심각한 얼굴로 말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태형아, 내가 너한테 뭐 물어볼 거 같냐.”

“…….”

 

알고 지낸 시간만으로 따지면 호석이 형이랑 더 알고 지냈는데, 이상하게 친형처럼 더 의지 되는 건 남준이 형이었다. 그렇다고 매일 같이 연락하거나, 자주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술술 실토할 자신이 없는 탓에 또 한 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내 태도에 형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준이 형은 제 손목시계를 흘끔 쳐다보더니, 급하게 정장 자켓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는 구두 뒤꿈치도 구겨 신은 채, 황급히 나가며 말했다.

 

“내일 학교로 데리러 갈게. 일단 지금은 정호석 올 때 됐으니까, 후퇴부터 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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