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가언

하이큐 드림 글커미션

사쿠사 키요오미x이시하라 이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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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3시 10분.

 



휑한 경기장이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차는 데 필요한 시간은 아주 일순간뿐이다. 배구화가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부터, 일찌감치 들어온 관객들의 아득한 함성이라던가, 아직 경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개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사쿠사는 이 익숙해질 듯 안 익숙한 공간에서 조금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마다 폴짝대거나, 뭔가를 중얼대며 스트레칭을 하거나, 함께 어울려 등근육을 풀어주는 등 시끌벅적하게 구는 동료들도 이 소란에는 한 몫 하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사쿠사는 타올이며 음료병을 벤치에 내려놓고 그들 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쿠사의 나른하던 눈빛에도 약간의 빛이 깃들었다. 의식적으로 이 번거로운 소란을 차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때, 띠롱. 벤치에 대충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상황에 집중하려던 노력조차 무색하게, 사쿠사는 반사적으로 민감히 반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시간에 연락이 올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니까. 화면을 열자 발랄한 라인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발신자는 이시하라 이치카. 기다렸던 연락이었다.

 

[공항 도착! (o゜▽゜)o☆] -15:12

[중계 방송도 볼 수 있겠는데?] -15:12

 

띠롱. 연달아 메시지 말풍선이 떠올랐다. 사쿠사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돌아왔구나. 표정 변화도 없이, 사쿠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쉬어.] -15:13

[싫어! 경기 볼 거야!!] -15:13

 

짤막한 답장을 보내자 단박에 떼쓰는 문장이 돌아왔다. 사쿠사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어차피 그렇게 귀여워하는 히나타 쇼요의 이야기겠지. 입을 비죽거리며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자니, 또 한 번 알림음이 울렸다. 띠롱!

 

[키요, 경기 힘내!o((>ω< ))o]-15:14

 

“…하아.”

 

사쿠사는 휴대폰을 다시 갈무리했다. 벤치에 놓인 수건으로 습관처럼 손을 닦은 사쿠사는 성큼성큼 동료들 틈으로 돌아갔다. 쉬라고는 말했지만, 아마 그러지는 않겠지. 자신이 한 번 하겠다고 정한 일에 결코 물러섬은 없는 녀석이었다.

 

그때, 불쑥 아래쪽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다가온 히나타 쇼요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잘거렸다.

 

“라인? 누구입니까? 헉, 혹시 이시하라 씨? 귀국하신 거예요?”

“뭔데뭔데? 이치카야? 돌아왔대?”


히나타에게 질세라 이번에는 보쿠토가 성큼 다가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두 휴대폰을 만지작대는 사쿠사를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미야 아츠무 역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감탄사처럼 끼어들었다.


“사이 좋은 거 티 내나? 이야, 청춘이네~”

“신경꺼.”


사쿠사는 그들을 노려보며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거리를 벌렸다. 이시하라 이치카, 그의 연인은, 과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저 녀석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바보들이고.

 

그들이 잠깐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도 경기장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상대 팀의 선수들 역시 슬슬 나와 몸을 푸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쿠사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경기에 대충 임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그건 다른 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짧은 잡담도 잠시, 그들 사이에는 다시 투지가 자리잡았다. 


사쿠사는 동료들과 조금 거리를 벌려 다시 워밍업을 시작했다. 그의 고요한 눈동자에도 알아보기 힘든 열기가 깃들었다. 

 


 

금요일, 오후 8시 6분.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보다 다소 어질러진 상태이긴 했지만, 넓은 거실은 사쿠사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보드라운 러그가 한가운데에 깔려 있고, 이치카가 취향껏 고른 소파에 작은 테이블까지. 의미 없이 켜진 TV가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역시 잠든 거냐고.”

 

그리고 이치카는 제가 좋아하는 그 소파에 모로 누워 곤히 잠든 채였다. 사쿠사가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가라앉은 채였다. 어쩐지 라인 답이 없더라니. 피로와 어긋난 신체의 시차에 못 이겨 중계를 보다 곯아 떨어져버린 모양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사쿠사는 습관처럼 쓰고 다니는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는 이치카의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리모컨을 집어 TV를 껐다. 그리고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서 크로스백을 내려놓은 뒤 간접조명을 켰다.

 

부드러운 불빛 아래에 그녀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였다. 해외 활동이 잦은 인기 무용수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손을 뻗어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칼 끝을 만져 보던 사쿠사는 이내 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언제나 생기 넘치는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가라앉은 지금, 그녀는 마치 섬세하게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 같았다. 작은 얼굴과 사랑스러운 입술이 그랬다. 도드라지게 새하얀 얼굴은, 얼핏 피로함에 창백한 듯해서, 사쿠사는 조금 언짢아지고 말았다.

 

그의 시선은 한동안 더 이치카의 얼굴에 닿아 있다가, 이내 다시 주변으로 향했다. 그 역시 제법 오랜만에 들어오는 집이었다. 아직 채 풀지 않은 이치카의 짐가방과 대충 벗어 걸어 둔 겉옷, 마시던 음료수 컵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그저 깨끗하기만 하던 이 집에 다시 깃든 이치카의 흔적이었다.

 

그 어질러진 자리에서 사쿠사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먼지가 없는 자리도 매번 쓸고 닦아대는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나도 미쳤다니까. 스스로에게 작게 중얼거린 사쿠사는 몸을 일으키고 조심스럽게 이치카를 안아 들었다. 갑자기 몸이 움직이자 이치카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곧 스스럼없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서 와.”

 

사쿠사는 그녀가 듣지 못할 작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그녀를 침실로 옮겨 편하게 눕혀주었다. 꼼꼼히 이불까지 덮어 준 사쿠사는 경기 직전과는 짐짓 다른 결의가 서린 표정으로 돌아섰다. 일단 정리부터 한바탕 할 생각이었다.

 

 

금요일, 오후 8시 52분.




청소를 끝내고, 샤워까지 마친 사쿠사는 조심스레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쓰기에는 다소 큰 침대가 방 대부분을 차지한 침실이었다. 그 위에서 이불에 파묻힌 채 웅크린 이치카의 실루엣이 보였다. 잔뜩 옹송그린 몸은 미묘하게 경직된 채였다. 얼핏 보아도 그리 편안히 수면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이치카의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니나다를까, 이치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간간히 앓는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사쿠사는 익숙하게 이치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리광쟁이.”


잠깐 생각하던 사쿠사는 이내 이치카의 옆에 천천히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웅크린 이치카를 끌어안았다. 품에 온기가 가득 들어차고, 잠깐 그대로 기다리자 차츰 이치카의 호흡이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사쿠사는 조용히 이치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치카가 품 속에서 꼼질, 움직여 편안한 자리를 찾았다. 그러더니 이내 사쿠사의 가슴팍에 이마를 파묻고는 다시 고르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이제야 완전히 편하게 잠든 모양이었다. 


비행기를 탄 날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피로함에 기절하듯 잠들기는 하지만, 언제나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깨어버리거나 잠든 내내 악몽에 시달리곤 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사쿠사는 이치카가 귀국하는 날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비워두고 이 집으로 오곤 했다.


이것도 이제 제법 익숙해진 일이었다. 사쿠사는 괜히 이치카를 꼭 끌어안았다. 마음이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녀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천천히 사쿠사의 눈꺼풀 역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처음 그녀를 받아들이게 된 것도 이 체향 때문이었다. 오래된 병원의 소독약 냄새 사이에서도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것. 그날도 이치카는 오랜 비행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해 몽롱한 상태였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서로 처음 마주하게 된, 10대 시절의 어느 봄날이었다.


거기는 사촌인 코모리 모토야가 추천해 준 병원이었다. 한번 두 번 씩 드나들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사쿠사는 부상을 입을 때마다 그 병원만을 고집하게 되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어깨가 자꾸만 삐걱거리는 통에 병원을 찾았고, 멍하니 대기하다 부르는 소리에 터덜터덜 진료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목도하게 된 것이다. 진료실 소파에 옹송그린 채 에처로운 꼴로 누워 있는 이시하라 이치카를.


“…….”


솔직히 조금 당황한 그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담요 덩어리를 마주했으니까. 하지만 약 3초간의 관찰 끝에 그는 그 덩어리가 자신과 비슷한 나잇대의 여학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법 재미있는, 혹은 안타까운 광경었다. 진료실의 소파에 퍼질러진 고등학생이라는 존재부터가 참 이질적이었던 데다가, 그 예쁜 얼굴에는 매사에 무심한 사쿠사가 흠칫할 정도의 피로감을 줄줄 달고 있었으니까. 소파 위로 흐트러진 긴 머리칼이 애잔하다못해 기이하게까지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사쿠사가 들어온 것도 깨닫지 못한채 소파에 달라붙어 있었다. 사쿠사도 곧 이시하라 유우신이 어깨를 보자며 말을 거는 통에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야 했다.


“나 참. 맹하게 생겨선 뭘 그렇게 배구를 열심히 한다고…. 아직 성장기라 몸이 덜 여물어서 그럴 거다. 흔한 일이지만, 지금 어깨가 맛이 가 버리면 답도 없어. 운동하는 것도 좋은데 어느 정도는 신경써가면서 해.”


이제는 슬슬 익숙해지는 타박을 들으며, 사쿠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사쿠사는 자꾸만 소파에 퍼질러진 그녀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언뜻언뜻 담요 덩어리 사이에서는 앓는 소리에, 심지어는 훌쩍임까지 흘러나왔다. 척 보기에도 좋은 상태는 아닌 듯했지만 특이하게도 이 의사는 익숙한 상황인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따르르릉. 조금 이질적인 벨소리에 사쿠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의식을 의사 쪽으로 돌리자, 그는 전화기를 꺼내 보며 쯧 짜증스럽게 혀를 차고 있었다. 아무래도 급한 의사가 생긴 모양이었다. 사쿠사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 그는 곧장 소파에 뻗은 자신의 손녀에게 다가섰다.


“이치카. 일어나봐라. 이치카!”

“으에?”


이시하라 유우신이 툭툭 치자, 소파의 괴생명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사쿠사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잠이 덜 깬 멍한 얼굴의 이치카에게, 유우신은 스포츠 테이프를 휙 던져 주었다.


“으어어?”

“저 녀석 손목부터 팔까지 좀 감아 줘라. 나는 다른 환자 때문에 나가야겠다.”


이치카는 얼떨떨한 얼굴로 유우신과 사쿠사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우신은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쌩하니 진료실을 나가버렸다. 이제 둘만 남은 공간, 사쿠사와 이치카는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를 환기한 것은 이치카의 기다란 하품 소리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이치카는 터덜터덜 걸어가 방금까지 유우신이 앉아 있던 자리, 즉 사쿠사의 맞은편에 턱 걸터앉았다. 그녀는 한 번 더 하품하고는 흐트러진 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낯을 가리는 일도 없이, 사쿠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도 정말, 환자나 떠맡기고 말이지…. 팔 줘봐.”

“…….”


그 한 마디로 사쿠사는 그녀가 이시하라 유우신의 손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잠깐 멀뚱히 있던 사쿠사는 순순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테이프를 쭉 빼낸 이치카는 의자를 조금 더 당겨 가까이 앉았다.


문득 병원 전체의 소독약 냄새 사이에서 은근한 사람의 체취가 느껴졌다. 사쿠사는 이게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전히 잠이 덜 깬 듯한 이치카는 테이핑에만 집중했다. 사쿠사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치카의 보드라운 손이 맨살에 닿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방금 처음 마주한 낯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봄날, 늦은 오후. 따뜻한 햇살이 이치카의 머리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이치카의 동그랗고 새하얀 뺨도, 점점 졸음기에서 깨어나는 부드러운 색의 눈동자도 오후의 햇빛에 반짝였다. 이내 완전히 잠에서 깬 이치카가 조잘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손, 배구 선수인 거야? 나도 무용을 하다 보니까 이래저래 자주 다쳐서…. 테이핑은 자신 있어! 할아버지한테 배웠거든.”

“어….”


무심하게나마 대답하면서도 사쿠사의 시선은 여전히 이치카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말을 증명하듯, 이치카의 손길은 야무졌다. 무용을 하는구나. 사쿠사는 저도 모르게 되뇌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공을 잡느라 벌써 투박해지기 시작한 사쿠사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문득 그의 시선을 느낀 건지 이치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사쿠사는 티 나지 않게 움찔하고 말았다. 순박하게 생긴 커다란 눈동자를 몇 차례 깜빡이던 이치카는 이내 동그랗고 앳된 얼굴에 잘 어울리는 미소를 가득 드리웠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네. 난 이시하라 이치카. 저기 인상 사나운 의사 선생님의 손녀야.”

“…어어.”


사쿠사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치카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똥히 그를 바라보았다. 뭘 원하는 거지. 얼마간 생각하던 사쿠사는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쿠사 키요오미.”

“그나저나 병원에는 자주 오는 거야? 아까 언뜻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제법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던데. 아, 내 친구도 배구 하는 녀석이 있거든?”


그제야 이치카는 다시 재잘대며 말을 이어갔다. 사쿠사는 어울리지도 않게 귀를 기울이며 간간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치카가 말한 그 친구라는 녀석이 코모리라는 정보까지 들었을 때, 이미 이치카는 스스럼없이 그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거리를 좁혀 온 그녀였다. 평소라면 성가셔했을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쿠사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그녀의 손길이 기분 나쁘지 않아서? 코모리의 사촌이라는 걸 알게 된 이치카가 더욱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목소리는 참 듣기 좋았다.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을, 사쿠사가 깨달은 것은 또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지금, 이치카는 사쿠사의 품에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사쿠사 역시 점점 무거워져 가는 눈꺼풀에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움직여 이치카의 머리칼을 한 차례 쓸어 주었다.


느긋한 공기 속에, 시간은 점점 깊은 밤을 향했다.




토요일, 오전 4시 21분.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녘은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이시하라 이치카는 그런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반짝 눈을 떴다. 그러자 곧장 가까운 거리에서 푹 잠든 사쿠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치카는 한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를 마주보았다. 언제 잠들었던 건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분명 거실에서 경기 생중계를 보다가….’


이치카는 잠깐 머릿속으로 가늠해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사쿠사, 그리고 블랙 자칼의 경기였다. 그래서 혼자 제법 들떠 있던 것도 떠올랐다. 주스며 과자까지 챙겨 소파 앞에 앉았고…. 아무래도 시차에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


이치카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사쿠사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도 경기를 뛰고 온 참일 테니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집까지 와준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치카는 슬쩍 손을 뻗어서 사쿠사의 곱슬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래도 사쿠사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치카는 꼼질꼼질 움직여 사쿠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 바람에 사쿠사가 잠에서 깬 건지 응, 하는 소리를 냈지만 이치카는 조용히 그의 어깨에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더 자.”

“…….”


사쿠사는 조금 몸을 움직여 자세를 고쳐 잡더니, 이내 다시 잠든 듯 조용해졌다. 이치카는 어둠 속에서 작게 미소 짓고는 예민한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침실 밖으로 나갔다.


자꾸만 흘러나오는 하품을 꾹꾹 눌러 참으며 본 시계는 새벽 4시. 아무래도 이놈의 시차 때문에 빨리 잠들고 지나치게 일찍 깨버린 모양이었다. 이치카에게는 제법 익숙한 일이었다. 사쿠사가 달려와 준 덕분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으니까.


이치카는 간접 조명을 켰다. 탁,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은근한 빛이 거실을 부드럽게 감쌌다. 집은 어느새 이치카가 귀국한 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청결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과자 봉지를 뜯고 옷을 이곳저곳에 걸쳐두며 삽시간에 집을 어지른 것을 떠올린 이치카는 조금 머쓱해졌다. 아무래도 경기를 끝낸 뒤 온 사쿠사가 말끔하게 정리해 둔 모양이었다.


“귀여운 깔끔쟁이 같으니….”


작은 투덜거림으로 멋쩍음을 몰아낸 이치카는 소파에 푹 몸을 던졌다. 편안한 정적이 흘렀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 기분 좋은 안정감. 이치카는 언제부턴가 이 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오랜 비행으로 인한 불안감을 다독여주는 사쿠사가 있기에.


이치카는 한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따분해지고 말았다. 이미 잠은 완전히 달아나버린지 오래였다. 결국 그는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한참을 거실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던 이치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이런 순간을 위해 언젠가 사뒀던 직소 퍼즐이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테이블을 비운 뒤 퍼즐을 올려두었다. 밝지 않은 불빛이었지만 그래도 퍼즐의 그림을 판별하기엔 충분했다. 조각조각 난 바다의 잔물결이 퍼즐의 고운 입자가 되어 테이블 위에 흩어졌다. 완성되면 커다란 바다의 한 자락을 담은 일러스트가 되겠지. 이치카는 약간 기대감에 차서 첫 조각을 집었다. 그때, 옆에서 굵고 투박한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할 거면 불 제대로 켜놓고 해. 눈 나빠지니까.”

“엥?”


이치카는 반짝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사쿠사가 그녀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는 퍼즐 한 조각을 집어들고는 천연덕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떨떨하게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이치카가 한 박자 늦게 놀란 목소리를 냈다.


“키요! 뭐야, 깨버렸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사쿠사는 능숙하게 가장자리에 들어갈 퍼즐 조각을 먼저 하나씩 골래내기 시작했다. 이치카는 한동안 멍하니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퍼즐 골라내기에 집중하던 사쿠사는 그녀의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왜?”


사쿠사의 새카만 눈동자에 조명의 은은한 빛이 깃들었다. 사쿠사는 무뚝뚝한 얼굴에 읽어내기 어려운 약간의 의아함을 담아 이치카를 가만히 마주보았다. 잠시 후, 이치카가 씨익, 입술을 휘어 미소 지었다. 


“…그냥, 좋아서!”

“싱겁긴.”


그는 다시 퍼즐 쪽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치카 역시 싱글벙글 웃으며 퍼즐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내기 시작했다. 산더미같은 퍼즐 위로 두 사람의 손이 느긋하게 오갔다. 이치카의 가벼운 재잘거림은 덤이었다.


“엄마가 다음에 키요랑 놀러오래! 새로 포도주 사업도 시작하려고 한다는데, 키요랑 테스트 겸 마셔 보라고 몇 병 줬어.”

“…여전히 잘 지내시네.”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사쿠사는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치카는 조잘조잘 말을 이어갔다.


“와인이라~. 뭐 특수한 제작 과정이라도 있었던 건지, 몸에 좋은 술이라던데. 술이 몸에 좋을 수가 있나?”

“몸에 좋은 술이라는 게 있던가.”

“있…지 않을까? 아, 이렇게 된 거 술 한 잔 할래, 키요?”


문득 손을 멈춘 이치카가 사쿠사를 향해 눈을 찡긋, 해보였다. 사쿠사는 곧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새벽에 마시는 술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


퍼즐에 집중하던 사쿠사가 시선을 들어 이치카에게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의 눈길을 무시해 버린 이치카는 턱을 괴고서는 빈자리에 조각을 맞춰 넣었다.


“하긴, 일주일 내내 시차에 적응 못해서 골골거리는 건 사양이니까. 아 참, 전에 노아 일본 왔을 때 있잖아. 노아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어?”

“딱히, 별말은.”

“그래? 노아가 갑자기 배구에 홀딱 반했던데. 노아도 승부욕이 제법 있으니까…. 아, 이번 여름에도 키요 경기 보러 올 거라던데? 혼자라도 어떻게든 오겠다고 박박 우기던걸.”

“흐음.”


달칵, 작은 소음을 내며 퍼즐 조각이 제자리에 맞물려 들어갔다. 그 위에 다시 이치카의 가벼운 목소리가 얹혔다.


“일단 말리긴 했는데… 오면 거실에서 재워야겠다. 아참, 노아가 승리 팔찌도 만들어줬어! 내 거 하나, 키요 거 하나.”

“어어.”

“솜씨가 제법 좋던걸. 아, 그런데 내 건 너무 커서 발찌로 써야 할 것 같아. 누나 사이즈도 모르다니, 너무한 거 아냐?”


이치카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사쿠사는 여전히 퍼즐에 집중하는 듯하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다시 히죽, 미소 지었다. 그것으로 둘 사이에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잘그락, 잘그락. 작은 퍼즐 조각이 부딪히는 잔잔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밤에 참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마치 아득한 나라, 조용한 해변의 파도 소리처럼. 아직 완성될 때까지 한참 남은 퍼즐 속의 바다가 만들어낸 작은 음악 같기도 했다.


그 사이로 흐르는 시간은 그저 고요했다. 사쿠사는 문득 손을 멈췄다. 이제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커튼 사이로 여명이 밝아올 무렵. 이치카는 손에 퍼즐 조각을 하나 쥔 채 까무룩 잠이 든 뒤였다.


꾸벅, 꾸벅. 위태롭게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보드라운 머리칼 역시 흘러내렸다. 마침 창 밖에서 천천히 스며드는 새벽의 첫 햇살이 이치카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사쿠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럴 줄 알았지.”


그는 손을 뻗어 이치카가 쥔 조각을 조심스레 빼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흐트러진 퍼즐을 익숙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원할 때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이치카를 안아 드는 거였다.


이렇게 잠들어 버릴 거면서, 술은 무슨 술이야. 속으로만 가볍게 투덜거린 사쿠사는 그녀를 안은 채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도중에 깨지 않고, 편히 오래오래 쉬기를 바랄 뿐이었다.




일요일, 오전 7시 23분.




잠에 취해 비척비척 부엌으로 나온 이치카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데 열중하는 사쿠사를 발견했다. 샐러드를 썰던 사쿠사가 인기척을 알아차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깼어?”

“…….”


아침부터 이미 샤워를 끝냈는지, 검은 곱슬머리는 약간 촉촉하게 젖은 채였다. 이치카는 간편한 옷차림 위에 앞치마를 한 모습의 사쿠사를 얼마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사쿠사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뭘 봐, 라고 묻는 듯한 그의 눈빛에 이치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아침부터 눈 호강한다 싶어서. 웃통은 안 벗어?”

“앉기나 해.”

“뭐야, 새삼스럽게 내외하기야?”


사쿠사의 냉정한 대꾸에 이치카는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았다. 사쿠사는 그녀가 덧붙인 뒷말을 무시하고 접시를 옮겼다.


아침 식사 메뉴는 오리엔탈 소스를 뿌린 닭가슴살 샐러드, 그리고 빵이었다. 마지막으로 간편식을 이용해 만든 스프가 이치카의 앞에 놓였다. 앞치마를 풀어 원래 자리에 걸쳐 둔 사쿠사가 이치카의 앞에 앉았다.


“오늘은 뭐 할 건데?”

“응? 으음, 글쎄. 아직 졸려.”


이치카는 벌써 빵 한 개를 손으로 톡톡 뜯어내고 있었다. 잠깐 생각하던 이치카가 씨익, 장난스레 웃었다.


“누구씨 덕분에 허리도 아픈 것 같고.”

“…많이 아파?”


포크로 샐러드를 쿡쿡 찌르던 사쿠사가 슬쩍 시선을 들어 이치카를 보았다. 무표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꼭 눈치 보는 커다란 강아지 같은 눈이었다. 대충 예상했던 반응에 만족한 이치카가 히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따가 할아버지랑 저녁 먹으러 갈 거야. 그리고 경기 보러 가야지.”

“피곤하다면서.”

“그래도! 겸사겸사 다른 녀석들도 만나고. 선물도 다 사 왔는데.”

“…….”


뒤에 덧붙여진 그녀의 말에 사쿠사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그 점이 또 재미있었는지 이치카는 닭가슴살을 푹, 꽂은 포크를 이리저리 흔들며 말을 얹었다.


“할아버지랑 같이 보러 갈 거야. 할아버지도 기대하고 계시던데? 저녁 식사하고 바로 가려고.”

“…그래.”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이시하라 유우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쿠사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치카가 갑자기 아,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맞아. 잠깐만 눈 감고 있어 봐!”

“뭐?”

“눈 감아봐. 빨리!”


갑작스러운 그녀의 성화에, 사쿠사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사쿠사의 얼굴 앞에 손까지 흔들어가며 그의 시야가 차단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이치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녀가 밝게 말했다.


“키요, 이제 눈 떠도 돼.”


눈을 뜬 사쿠사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물건에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치카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은 반지 한 쌍이었다. 사쿠사는 눈만 깜빡였다. 손으로 나무를 직접 깎아 만든 듯, 짙은 갈색의 반지는 묘한 광택을 내고 있었다. 이치카가 생긋, 웃었다.


“짜잔, 커플링! 플리마켓에 놀러 갔는데 어떤 꼬마가 팔고 있더라고. 키요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버렸어. 어때?’


이치카의 재잘대는 목소리에도 사쿠사의 시선은 반지 한 쌍에 닿아 있었다. 큰 것과 작은 것의 한 쌍으로 이뤄진 반지는 두 사람의 손에도 꼭 맞을 듯했다. 사쿠사가 한참을 가만히 있자, 답답해진 이치카가 사쿠사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아무 예고 없이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짠! 아, 역시 잘 어울려. 사이즈도 꼭 맞네!”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치카는 사쿠사의 손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곧 자신 몫의 반지도 약지에 끼웠다. 그리고는 손등 쪽을 들어 사쿠사에게 내밀었다.


“난 어때? 나한테도 잘 어울려?”

“…….”


하지만 이번에도 사쿠사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이치카는 조금 의아해져 손을 내리고 다시 사쿠사를 보았다. 어느새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이치카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였다.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던 이치카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었어?”

“…고마워.”


한참 만에 사쿠사가 짤막하게 툭 내뱉었다. 그 직후, 사쿠사는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귀가 미묘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놓칠 이치카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포크로 샐러드를 쿡 찌르며 킥킥 웃었다.


“사랑해, 키요.”


농담 어린 한마디를 던진 뒤, 이치카는 샐러드를 입에 쏙 넣었다. 한참의 뜸을 들인 뒤, 사쿠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얼마나 큰 뜻이 담겨 있는지, 이치카는 잘 알았다. 사쿠사의 투박한 손에 자리 잡은 검은 반지가 예쁜 빛을 냈다. 이치카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커튼 사이로 미끄러진 햇빛이 반짝였다. 


오늘도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요일, 오후 5시 46분.




“키요도 같이 식사하러 오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는 같이 와요. 여기 좋아할 것 같은데.”

“너는 오랜만에 조부를 만나고도, 그 녀석 이야기만 하는 거냐?”


이시하라 유우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치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치만 할아버지도 싫어하지 않잖아요. 나 없을 때, 둘이서라도 종종 만나지. 부상입었을 때만 찾아가죠?”

“잘 지내는 거 아는데, 굳이 뭐하러.”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홀짝인 유우신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7시에 시작하는 경기 시작 시간에 맞춰, 두 사람은 조금 이르게 저녁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이치카는 턱을 괴고 유우신을 마주 보았다.


“할아버지는. 잘 있었어요?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당연하지.”


여전히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이치카는 그저 기분이 좋기만 한 듯 다시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걸 알아차린 유우신이 툭 내뱉었다.


“왜?”

“아니. 좋아서요~.”


엉뚱한 대답이 돌아오자, 유우신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홀짝였다. 거기에서 이치카는 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부의 그런 모습에서 누군가와의 정감 가는 기시감이 느껴졌기에.




일요일, 오후 6시 32분.




경기장과 가까운 식당을 고른 덕에, 그들은 일찌감치 워밍업 하는 선수들을 마주하러 갈 수 있었다. 아직 채 관중이 들어오기 전의 조용한 경기장은 어둑어둑해지는 외부와는 달리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폴짝폴짝 뜀박질하며 몸을 풀던 히나타가 가장 먼저 인기척을 알아차리고는 반짝 고개를 들었다.


“어라? 이시하라 씨다!”


히나타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미야와 보쿠토 역시 고개를 들었고, 그들은 곧 체육관 정면으로 들어오는 남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시하라 유우신과 이치카였다.


언제나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는 이시하라 유우신이 밖에서 목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편한 셔츠와 바지 차림의, 단정한 사복을 입은 이시하라 유우신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런 그의 곁에서 걸음을 옮기는 이치카는 움직이기 편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사뿐사뿐, 마치 인형 같은 몸짓으로 가볍게 걸으며, 이치카는 웃는 낯으로 유우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잦은 해외 일정 탓에 유우신 이상으로 사석에서는 만나기 힘든 그녀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은 누구나 한 번씩은 돌아볼 만한 광경이었다. 한창 경기 준비에 열을 올리던 스탭들은 이시하라 이치카를 알아보고 짧게 탄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마침 히나타를 발견한 이치카가 손을 붕붕 흔들어 주었다. 히나타는 당장이라도 이치카를 향해 달음박질칠 기세였지만, 그는 제 뒷덜미를 덥석 잡는 손길에 저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히나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미야 아츠무가 서 있었다.


“왜, 왜요?”

“이해는 한다만. 양보하는 게 좋을 것 같지 않나?”


미야는 씨익 웃으며 다시 이치카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히나타는 그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곧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히나타가 붙잡힌 사이 어슬렁 어슬렁 그들에게 먼저 다가간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사쿠사였다.


이치카의 곁에는 모두가 익히 얼굴을 아는 이시하라 유우신 역시 있었다. 이내 세 사람은 자연스레 동그란 모양으로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히나타가 얌전해지자 미야는 그를 놓아주었다.


“경기 전 멘탈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걍 냅둬.”

“그래도 독차지라니, 좀 치사하지 않냐?”

“샘나면 저 사이에 껴 보시든가요.”


불쑥 끼어 들어온 보쿠토가 큰 소리로 툴툴거리자, 미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보쿠토 역시 쉽게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는지 끙, 하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지? 너.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하라고.”

“어라~. 그런 거 신경 쓰는 편이었던가, 봇군.”


미야가 장난스레 보쿠토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저명한 의사인 이시하라 유우신과 이곳저곳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 무용수, 이시하라 이치카, 그리고 두말하면 잔소리인 실력의 팀메이트, 사쿠사 키요오미. 말도 안 되는 세 사람의 조합은 어디 가서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이 끼어들 수 있는 틈도 아니었다.


한편, 한쪽이 와글와글한 것을 알아차린 이치카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선수들이 보였다. 의아해진 이치카가 사쿠사에게 물었다.


“어째 저쪽이 소란스러운데?”

“내버려 둬.”


하지만 사쿠사는 짤막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보나 마나 독차지하니 뭐니 하며 투덜거리고 있을 게 뻔하지, 하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시하라 유우신 역시 그쪽에는 별로 관심도 없는지, 사쿠사의 한쪽 손을 잡고 유심히 근육을 따라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지난번 부상은 회복이 다 된 모양이군. 신경 안 써도 돼.”

“감사합니다.”


한참 만에 유우신이 짧게 내뱉자 손을 갈무리하며 사쿠사가 마찬가지로 담백하게 대답했다. 이치카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으며 툴툴거렸다.


“뭐야, 나 없을 때 다치기라도 했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냐.”


이치카가 그렇게 볼멘소리를 냈지만 사쿠사는 슬쩍 시선을 피해버릴 뿐이었다. 유우신은 한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옛날처럼 근육이 연하지만은 않으니 조금 더 관리해. 이치카, 너도.”

“엑. 갑자기 나한테까지 잔소리?”

“잔소리는. 의사로서의 충고지.”


이치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서자 유우신이 다시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이치카 역시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시작했다.


“저는 자기관리 잘하고 있어요! 키요나 더 혼내시라구요.”

“너희 둘 다 똑같아. 그렇게 말한다는 점까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익숙한 말다툼 사이에 사쿠사는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전 이만….”


하지만 두 사람 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쿠사는 새삼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6시 45분. 슬슬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게 향했다. 사쿠사의 시선을 알아차린 유우신이 한숨을 푹 쉬며 화제를 돌렸다.


“나도 이제 가봐야겠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네⁈ 진짜요? 언제 연락 온 건데? 좀 더 빨리 가봐야 했던 거 아니에요?”

“됐어. 그렇게까지 급한 환자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우신은 힐끔 시계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사쿠사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이치카는 입을 비죽이면서도 순순히 그를 배웅해 주었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늦장 부리다가 늦지는 말고.”

“그래. 다음에 보자.”


유우신의 거친 손이 이치카의 머리를 한 번 대충 쓰다듬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묵례하는 사쿠사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준 뒤, 그는 빙글 몸을 돌려 미련 없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유우신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자 사쿠사가 다시 이치카를 내려다봤다.


“나도 가볼게.”

“응, 경기 힘내.”


생긋, 웃으며 이치카가 대답해주었다. 사쿠사는 대답 대신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이치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막 다시 스트레칭을 시작하려던 선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쿠사는 이치카를 등지고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매번 저렇게 새삼스러운가….”


쿡, 작게 웃음을 터뜨린 이치카는 선수들을 향해 가지고 온 가방을 높이 들어 보였다.


“선물 가져왔어! 이거 대기실에 가져다 둘게! 나중에 확인해!”


멀리서 보쿠토가 잘 알아들었다는 듯 두 팔을 들어 커다랗게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미야와 히나타는 여전히 충격에서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한 듯, 사쿠사에게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치카 역시 가벼운 몸짓으로 돌아섰다. 이제부터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가장 멋진 남자들의 경기를 지켜볼 참이었다.









일요일, 오후 7시 12분.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다시 블랙 자칼에게 서브의 타이밍이 돌아왔다. 슬슬 몸에 도는 열기를 느끼며 사쿠사는 습관처럼 공을 한 번 쓸어내린 뒤 자세를 잡았다. 


경기장의 조명이 뜨겁게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차분한 머릿속의 냉기가 서늘하게 손가락 끝까지 장악하는 감각. 모든 집중력이 필요한 감각을 곤두세우고, 호흡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다가오는 이때를, 사쿠사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공에서 시선을 뜨고 관중석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이치카가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이치카는 씨익 웃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공이 강한 힘으로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쿠사의 투박한 손이 강한 서브를 내리꽂았다. 공의 움직임에 따라 다시 모든 선수가 제자리를 찾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쿠사 역시 경기장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잠깐 정지된 듯하던 시간이 재차 뜨거운 열기를 띠었다.




일요일, 오후 9시 42분.

 



“오미 선배, 오미 선배! 아까 이시하라 씨 본 거 맞죠!”


방방 뛰어대는 히나타에게, 사쿠사는 질색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히나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짝반짝한 눈으로 사쿠사와 이치카를 마구 번갈아 볼 뿐이었다. 마치 반가운 사람을 만난 커다란 강아지라도 된 것 같았다.


“히나타! 잘 지냈어?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이 누나 보고 싶지 않았어?”


반색하는 것은 이치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커다랗게 미소 지은 이치카는 히나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칼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히나타는 마냥 좋은지 히히 웃어댔다. 옆에서 불쑥 끼어든 보쿠토가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뭐야, 나도! 나도!”

“시끄러.”


사쿠사의 짧은 타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이시하라 이치카가 함께하는 이 순간만큼은 다른 팀메이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신경은 온통 이치카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경기가 끝난 뒤, 뒷정리까지 모두 한 다음 그들이 자연스레 모여든 곳은 경기장에 딸린 주차장이었다. 대부분의 관객 역시 빠져나가고 상대편 팀 역시 이미 돌아갔는지, 가로등만이 주위를 밝혀주는 주차장은 그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이 소란이 감당이 안 되었는지, 결국 사쿠사는 뒤로 슬쩍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레 이치카 주변으로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이번에도 해외 나갔다 온 거지? 네덜란드?”

“어디 아픈 곳은 없었슴까?”

“언제 귀국한 건데?”


차례대로 보쿠토와 히나타, 그리고 미야였다. 순식간에 와글와글 쏟아지는 질문들에 미처 이치카가 대답할 틈도 없었다. 거의 날아다닐 기세의 히나타를 붙잡은 이치카가 목소리를 조금 키워 그들의 입을 막았다.


“아~. 한 명씩 말해, 한 명씩! 다들 선물은 풀어 봤어?”


이치카가 말하는 선물. 그건 바로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이치카가 친히 선수 대기실까지 가져다준 물건들이었다. 그녀는 매번 해외 방문을 마칠 때마다 그들의 선물까지 하나하나 챙겨주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물, 선물이라. 멀찍이 떨어진 사쿠사가 그 말을 듣고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보쿠토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 역시 미묘해졌다. 미야 아츠무가 특유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여러모로 굉장하긴 하던데.”

“응~. 인상적이었지. 난 맘에 들어!”


보쿠토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 역시 애매한 얼굴로나마 해맑게 웃으며 긍정을 뜻했다. 그들의 반응에 이치카가 씨익 입술을 휘었다.


“그치그치? 내가 하나하나 고른 거야. 고맙게 여겨!”


분명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닐 터였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이치카가 대기실에 가져다 둔 가방의 내용물부터 확인했다. 포장까지 예쁘게 되어 있는 상자를 하나씩 손에 쥐게 된 일행은 기뻐서 방방 날뛰었고, 그들은 땀이 채 식기도 전 본인의 선물을 확인했다. 


히나타의 것은 엄청나게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데다 프릴까지 줄줄 달린 전통 모자였다. 보쿠토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나무 조각품을 건네받았다. 미야의 몫은 괴상한 표정을 지은 고양이 인형이었다. 보쿠토 이외의 모두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자, 이치카가 곧장 도끼눈을 치떴다.


“뭐야. 다들 반응이 왜 그래?”

“아냐, 아냐! 마음에 들었어. 소중히 간직할게!”

“저도요! 잘 때 꼭꼭 쓸게요!”

“나도!”


미야와 히나타가 곧장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급하게 대답하자 이치카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없이 끼어든 보쿠토는 덤이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사쿠사가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완전 손바닥 안이군.”


그것을 듣지 못했을 이치카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깔끔하게 무시해 버렸다. 사쿠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치카는 결코 센스가 없는 게 아니었다. 바로 전날 자신이 건네받은 예쁜 반지만 생각해 봐도 그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치카는 그 물건들이 괴랄하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면서, 단지 재미있겠다는 이유만으로 서슴없이 골랐을 게 분명했다. 선물 받은 본인들도 상당히 만족하는 듯하니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듯했다.


소란을 피우는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쿠사는 고개를 내젓고는 이치카의 옆으로 다가섰다.


“돌아가자. 피곤해.”

“엥? 벌써? 아, 하긴. 방금 경기도 뛰고 온 참이니까.”


아쉽게 눈썹을 휘던 이치카였지만 그녀는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뭐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더 이야기하면 안 돼?”

“에이. 나중에 따로 자리 만들면 되지. 다음에는 괜찮은 술집에서 한 잔 어때? 조만간 다들 시간 내서.”


그런 보쿠토를 대강 밀어낸 미야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히나타 역시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경기 뒤인 데다가 이치카가 귀국한지 며칠 되지 않은 것을 배려해주는 모양이었다. 미야의 제안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치카가 사쿠사 쪽으로 돌아섰다.


“차 어디에 있어?”

“저쪽.”


간단히 대꾸한 사쿠사는 팀원들에게 따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빙글, 몸을 돌렸다. 이 상황이 익숙한 이치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세 사람을 향해 생글, 미소 지어 주었다.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고. 푹 쉬어! 먼저 간다!”


그리고 그녀는 먼저 가버린 사쿠사를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남겨진 그들은 점점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미 사위는 어둠에 잠긴 시간, 주차장의 은은한 불빛이 그들이 머리 위에, 그리고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치카가 사쿠사의 팔짱을 끼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 달라붙었다면 당장에 진저리칠 게 뻔한 사쿠사였지만, 그는 그냥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쿠사의 시선이 미미하게 부드러워졌다. 미야가 질색하는 척하며 툭 내뱉었다.


“엄마야, 눈에서 꿀 떨어지겠네.”

“저 두 사람…. 진짜 사이좋지 않아요?”

“두말 하면 잔소리지.”


히나타가 우물거리는 말에 킥킥 웃으며 한 마디를 얹은 사람은 보쿠토였다. 미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미 군도 쓸데없는 고민이 많아서 큰일이구만~. 누가 봐도 잇 상이 제일 좋아하는 건 오미 군인데.”

“다음에 본인 앞에서 말해보는 건 어때요?”

“안할란다. 뒷감당 우째 하라고.”


히나타가 던진 말에 미야는 잽싸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방금 사쿠사와 이치카가 사라진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곧 실현될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이 더해진 까닭인지, 밤공기는 평소보다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왁자지껄 떠드는 그들 곁으로 새카만 suv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미야 아츠무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 




어느 순간부터 사쿠사 키요오미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가기 전의 탈의실. 벤치에 걸터앉은 사쿠사가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케비넷을 탁, 닫고 돌아서려던 히나타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오미 선배, 뭐 하심까?”

“…….”


들었는지 못 들은 건지, 사쿠사는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하던 일을 속행했다. 히나타는 그에게서 대답을 듣는 대신 몇 번 뒷걸음질 치는 걸로 직접 확인했다. 사쿠사의 손에 들린 건 가죽끈과 언제나 끼고 다니는 반지였다. 반지를 가죽끈에 꿰어 넣은 사쿠사는 그것을 목에 느슨하게 걸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검은 반지가 은근하게 반짝였다.


‘우와….’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히나타는 속으로 소리 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항상 경기장에서나 훈련장에서 사쿠사의 가슴께에 근처에 매달려 조용한 존재감을 발휘하던 반지였다. 슬금슬금 사쿠사의 옆으로 다가간 히나타가 말을 걸었다.


“경기 중에는 목걸이로 하시는 거예요?”

“이쪽이 편하니까.”


의외로 대답이 간단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단지 그뿐, 히나타가 뭔가를 더 물을 엄두도 나지 않도록, 사쿠사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뭔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했다. 히나타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쿠사는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데구룩, 굴렀다.


그날 히나타의 궁금증이 풀릴 일은 없었다. 사쿠사에게서 그와 관련된 언급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일언반구도 없이 이치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선가 사쿠사의 티셔츠를 찾아 입고는 티비를 보며 과자를 먹던 이치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반지. 줘봐.”

“응? 아.”


잠깐 생각하듯 눈을 깜빡이던 이치카가 짧게 탄성을 터뜨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전날, 집에서는 가벼운 소동이 있었다. 사쿠사가 집을 비운 사이, 오랜만에 집안일에 의욕을 불태우던 이치카가 반지를 빼두고는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린 거였다. 결국 사쿠사는 귀가하자마자 이치카를 도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야만 했다.


이치카는 약지에서 반지를 빼 그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왜, 뭐 하려고?”

“밖에서 잃어버리면 속상해할 거잖아.”


담백하게 대답한 사쿠사는 이치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가죽끈을 꺼내들어 꼼질꼼질 작업을 시작했다. 이치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뭐야? 산 거야?”

“어.”


사쿠사의 손에 쥐어진 건 몇 가닥의 얇은 가죽끈을 꼬아서 만든, 제법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제법 신경 써서 골랐는지 어두운 빛의 끈은 마침 반지와도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따로 액세서리 소품 가게에 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사쿠사가 경기 때마다 반지를 목걸이처럼 만들어 지니고 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쓰던 것은 평범한 가죽끈이었다. 이치카가 몇 차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사쿠사는 짧은 작업을 모두 끝냈다. 그는 멍하니 있는 이치카를 향해 돌아앉았다.


“자.”


이치카는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문득 사쿠사의 셔츠 아래로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보였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밋밋한 끈에 반지를 걸어뒀을 뿐이었던 그의 목걸이는 어느새 지금 사쿠사가 손에 있는 것과 똑같은 줄로 바뀌어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치카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릎만 꼼질꼼질 움직인 그녀는 사쿠사와의 거리를 더욱 좁히고는 애교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직접 걸어 줘.”

“…….”


뚱하니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쿠사는 순순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팔을 뻗으며 이치카의 상체를 감싸자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짧은 순간을 이치카는 조용히 만끽했다. 


신중한 손놀림으로 목걸이를 딱 맞는 길이로 걸어준 사쿠사는 그대로 물러서려다 문득 잊어버렸다는 듯 멈칫하곤 이치카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다시 이치카를 마주보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어때?”

“엄청 마음에 들어.”


목걸이도, 자연스러운 스킨십도. 이치카는 헤헤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개구쟁이처럼 미소 짓는 그녀가 편하게 걸쳐 입은 헐렁한 티셔츠 아래, 새하얀 가슴팍에 걸린 반지가 은근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쿠사는 제법 만족스러워졌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몸을 기우뚱한 이치카는 폭,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저녁 뭐 먹을까? 맥주 어때?”

“마음대로.”

“그럼 맥주랑 닭튀김으로 하자!”

“어.”


이치카가 재잘재잘대는 소리에 사쿠사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도 저녁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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