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역과 개인 감상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평소에는 촉이 좋더니, 그날은 왜 그리도 몰랐을까.



꼬박 이틀을 내내 떠오르는 말간 얼굴과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그 후로 이틀을 더 흘려보내고도 아직도 잔울음이 남았는지, 차가운 바깥공기만 들이마셔도 코가 아릿했다. 


“너 진짜 안 가?”

“…….”


내가 이 꼴을 하고 어딜 가. 같이 안 갈 거냐고 묻는 지민에게 태형은 말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일주일 전 ‘이음 미디어’에서 송년회를 한다며 지민을 초대했다. 인맥을 넓히기 이만큼 좋은 기회가 없어 당시엔 참석을 확정했지만 친구의 모습을 보니 이거 두고 가기도 뭐 하고, 데리고 가기도 뭐 하고. 답답한 표정으로 지민이 전신 거울에서 옷을 마저 매만졌다.



“클라이언트도 온대? 그럼 나 안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태형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지난 대화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몰라. 그런 말 없던데.” “상관없다. 얼굴만 비추고 올란다.” 지민이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리를 살피며 말했다. 이쪽, 저쪽 고개를 돌리는데 근래 과묵해진 태형이 뭔가를 건넨다. 흠칫 놀라 상체를 조금 떨어뜨리며 태형을 한 번 쳐다봤다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한 번 쳐다봤다가.



“…뭐야?”

“이것 좀 전해주고 와주라.”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시무룩한 얼굴로 쭉 내민 손에 들린 것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스노우 글로브였다. 지민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애가 이틀을 헤롱거리더만 사태 파악하는 정신머리가 증발한 건지, 아니면 염치가 증발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둘 다 없었다던가.

 


“…줄 거면 거기 지문이나 좀 닦고 줘라.”



그 말에 태형이 ‘아,’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대로 팔 소매를 올려 쥐고 유리 구의 표면을 쓱쓱 닦는다. 얼마나 정성 들여 닦는지 입김을 불지도 않았는데 뽀드득 뽀드득하고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근데, 클라이언트 이름은 알아?”

“당연한 걸 묻고 있냐.”

“이름이 뭔데? 알아야 편집부에 친한 척 전달하지.”

“…어떻게 이름도 몰라?”


되레 반문하는 태형의 표정이 황당하다. 계약한 건 너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출판사를 끼고 계약을 하게 된 것이니 몰라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지민이 억울한 듯 언성을 높였다. “모를 수도 있지!” 태형의 손에서 스노우 글로브를 채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김석진. 서른 살이래.”

“서른? 생각보다 엄청 젊네. 근데 이름이 왜 낯익지?”


지민이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익숙한 이름을 머릿속에 되새겨본다. ‘이음 미디어’와 연관하여…. 아, 혹시…. 의심 가득한 얼굴로 인상을 굳힌 지민이 바로 핸드폰을 찾아들어 무엇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행동을 무기력하게 쳐다봤다.


“설마…. 이 사람이야?”

 

갑작스레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핸드폰에 깜짝 놀란 태형이 인상을 쓰고 지민을 한 번 노려본 뒤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큰 눈이 더 크게 뜨여지는 건 금방이었다.   


“…야…. 너야말로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지민은 좌불안석이었다. 


제 핸드폰을 가져가 한참을 쳐다보다 다시 또 코를 훌쩍이는 태형이 시인했다. ‘이 사람, …맞아.’ 다 잠겨서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로. 진짜로 영화배우 김석진이었다. 마주치면 이거고 저거고 다 파국일 거라는 직감이 정확히 들었다. 어쨌거나 참석한다고 말한 갑의 송년회엔 얼굴을 보여야 했고, 다시 또 주저앉아서 훌쩍이는 김태형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저, 박 에디터님….”

“어머! 박지민 번역가님 오셨어요!”


송년회 겸 크리스마스 파티인지 사내가 색다르게 꾸며져 있었다. 미희가 사람들에게 지민의 참석을 알리고 다시 지민을 살갑게 맞았다. 오늘따라 살가운 이 행동이 어쩌나 속절없어 보이는지 지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번역 일은 잘 되어가고 있냐는 말에 지민이 플라스틱 샴페인 잔을 건네받으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그럭저럭요. 데코 멋지네요. 오래 있을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엥? 어디 또 가세요?”

“급한 일이 생겨서 바로 나가야 해요. 아, 혹시 이것 좀 클라이언트 분께 전해주실 수 있으세요?”



지민이 스노우 글로브를 꺼냈을 때 사내가 갑자기 웅성거렸다. 소곤대는 어수선함을 뚫고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희가 한층 밝아진 얼굴로 지민의 등 뒤로 눈짓을 하며 웃었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클라이언트 분.”


그 말은…. 정말로 지민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손을 덜덜덜 떨며 미희의 팔을 붙잡아 그녀의 손에 기꺼이 스노우 글로브를 올렸다. 여기서 걸리면 망신도 보통 망신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앞이 새하얘졌다. 지민은 차마 수척해진 얼굴에 면박을 주지 못하는 자신이 제일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송년회에 참석하지 말 걸. …아니, 애초에 거짓으로 계약을 했으면 안 됐다.



“부탁드립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애써 웃어 보인 지민은 요주의 인물이 출판사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친구 하나 잘못 둬서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지….







“김태형, 이 미친놈아…. 왔잖아, 왔잖아, 왔잖아아…!”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있지도 않은 태형에게 소리 질렀다. 당장 전화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잠시 들어온 태형에겐 전화번호가 없었다. 고작 하는 것이 구부정한 자세로 격렬하게 키패드를 쳐대는 일이었다. 참 무방비한 일이었다.


“저기…. 박지민 번역가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지민은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뒤돌아보지 말고 이대로 도망갈까. 내가 아닌 척할까. 마른침을 삼켰다. 석진과 태형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지금 마주치는 일은 피해야만 했다.


“아, 그분 맞아. 지민 씨!”


이윽고 가까워지며 들리는 주혁의 목소리에 지민이 굳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 자신이 전달한 스노우 글로브를 손에 쥔 남자가 바로 앞에 서있었다. 존재를 시인하듯 등돌린 지민의 얼굴을 본 석진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환하게, 아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민은 그리웠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많이 아팠어요?”

“아, 네, 네….”


건물 일층 카페에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가 숨 막히듯 어색한 것은 지민뿐이었다. 주혁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석진이 말을 걸어왔다. 영화배우를 이렇게 가까이 대면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도 저렇게 반짝반짝하고 들뜬 표정의 예쁜 사람을.



“오늘 온다고 왜 말 안 했어요?”

“석진이가 지민 씨 갔다는 말에 어찌나 빠르게 뛰어가던지.”

“아, 그, 그게….”


온화한 얼굴이 대답을 부추겼다. 지민은 눈을 꾹 감는 편을 택했다. “잠깐 들렀다 가려고 했어요. 급한 일이 있어서.” 지민의 대답을 끝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민은 저를 관찰하는 석진의 눈이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앞에 앉은 출판사 대표의 존재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주혁이 침묵을 깼다.



“석진 씨 실제로 보니까 잘생겼죠?”

“아, 예에. 연예인 처음 봐요. 영화배우는 진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지민은 기꺼이 그 기회를 잡아탔다. 할 수 있는 한 듣기 좋은 말은 일단 꺼내고 봤다. 하지만 의외로 반응이 서늘했다.



“…저 아세요?”

“…….”

“그럼 인마! 한국에서 너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주혁이 나무라자 석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곁눈질로 쳐다본 석진은 고개를 틀어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온화했던 표정은 어딜 간 건지, 웃음기가 사라지니 냉한 얼굴이다. 가운데서 주혁이 어색함을 깨고자 거진 지민을 인터뷰하듯 말을 걸었다. 석진은 내내 말이 없었다. 지민만 가시방석이었다. “이제 슬슬 올라가 볼까? 번역가님 가셔야 한다면서요?” 주혁이 정말 구세주 같았다. 지민은 강하게 긍정하며 석진의 눈치를 살폈다. 다시 석진이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 올라 가. 난 조금 더 이야기하다가 갈게. 할 얘기 있어서.”

“그럼 먼저 올라간다. 지민 씨, 살펴 가세요.”


악수를 청하려 내민 주혁의 손이 지민을 일으키기커녕 못 박아놓는 듯했다. 지민은 가는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석진은 그런 지민의 모습을 쫓았다.



“드디어 만났네요.”

“…….”

“보고 싶다더니, 눈길 한 번을 안 주시고.”

“그게, 제가 낯가림이 좀 심해서….”

“언제 들어오셨어요?”


그런 게 바로 계산이 될 리가 없었다. 지민은 그저 “들어온 지 좀 됐어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짧은 대답에 석진이 실망한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손에 들고 있는 스노우 글로브를 매만지며 다시 묻는다.



“선물, 많이 주시네요.”

“아하하…. 크리스마스잖아요.”

“전에 그것도 크리스마스라서 준 거예요?”


정말 순수하게 물어오는 눈에 지민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전에, 뭘 줬지. 아는 거라곤 시 뿐이었다. 지민은 모호하게 대답하기로 한다. “좋은 날이잖아요.” 석진이 눈을 내리깔고 살포시 입꼬리를 올렸다. 거진 석진의 질문으로 대화가 오갔다. 여행은 어땠어요. 추웠지만 좋았어요. 스노우 글로브는 어디서 샀어요. 그냥 가다가 샀어요. 언제 또 만날 수 있어요? 글쎄요.... 지민은 전부 모호하게 대답했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또다시 눈을 꾹 감았다.



“지민 씨, 근데 왜 ‘뷔’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뷔요?”


이번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되레 반문함에 석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발음이 좀 그런가….” 석진이 멋쩍게 웃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지민은 서서히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눈치를 보는 듯하던 석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알파벳 ‘뷔’요.”

“아, 아….”

“발음 한 번만 들려주시면 안 될까요?”

“ …브, 뷔? 하하하하… 막상 하려니 어색하네요.”


석진이 지민에게 상체를 가까이 붙이며 턱을 괴었다. 지민은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거짓말을 꿰뚫은 것 같은 올곧은 눈에 덜컥 겁이 나 남지도 않은 커피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털어마셨다.



“러시아에 있었을 때 보내줬던 번역본, 그거 언제 읽어본 거예요?”

“그, 그게 뭐였죠?”

“‘라면 먹고 갈래?’ 나온 거.”


지민은 눈앞이 팽글팽글 도는 경험을 했다. 억지로 정신줄을 잡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애당초 석진이 무얼 말하는지 몰랐는데, 대화가 될 리가 없었다. 이제 정말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시계를 보는 척. 자리를 뜨려고 분위기를 몰며 대답했다.



“대학생 때인가 읽었어요. 저, 이제 정말 일어나 봐야 해서….”

“…….”


석진이 별다른 대꾸 없이 다리를 꼬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입을 꾹 다물고 자리를 정리하는 지민을 보다가 석진이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러시아에 있었어요? 스위스에 있었어요?”

“…….”


지민이 트레이에 휴지조각을 담던 손을 멈췄다. 분명 시험인데. 태형이 스위스에 있다는 걸 말했던 걸까. 둘 중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그 와중에도 고민했다. 스위스. 스위스라고 답하자. 지민이 석진의 눈을 마주 봤다. 이제 진짜 도망갈 시간이다.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 지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석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누구예요. ‘뷔’라는 사람.”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니 겨울 그 자체의 냉기가 돌았다.






그린

Snowglobe

auteur BINE.





석진이 왔다고 지민에게서 한 시간 전에 메시지가 온 뒤로 아무런 연락이 없자 태형은 초조했다. 마른 세수를 연거푸 하며 핸드폰을 잡고 지민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지민이에게도. 석진 씨에게도. 태형은 죄 없는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물었다. 거진 두 시간 만에 온 메시지는 간결했다.


[김태형 나와봐야 할 것 같아.            pm 13: 23]



기다렸던 지민의 연락에 의외로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렇다고 덤덤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태형은 출판사 건물로 향하는 시간 내내 목이 탔다. 이 와중에도 싸한 느낌으로 움직이는 제 뱃속의 감정이 야속했다. 만약 그곳에 그가 있다면, 석진이 있다면 무슨 말부터 해야는 걸까.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다.


“…….”

“왔어?”


눈앞에 보이는 낯선 다리에도 석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화가 나진 않았다. 배신감. 정확히는 배신감이 들었다. 만나길 고대했던 날들과 멀어지며 배신감이 들 정도로 친밀한 사이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할 정도였다. 태형이 느릿느릿 지민의 옆에 앉았다. 껄끄러운 삼자대면이었다. 일순간 석진의 눈빛이 쓸쓸해진 것을 둘 중 아무도 모를 터였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그제야 석진이 눈을 들어 태형을 바라보았다. 다시 마주한 얼굴에 태형이 숨을 조용히 들이마셨다. 그 와중에도 흉곽이 부들부들 떨렸다. 배우는 감정을 눈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화난 것같이 냉정한 얼굴에도 눈빛은 슬퍼하고 있음을 태형은 알았다. 그 말간 눈을 몇 날 며칠 들여다본 태형만이 알았다.


“실체가 있긴 있었네요.”


첫마디부터 강했다. 지민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뭐라 말을 하려다 삼키는 태형을 석진이 가만히 주시했다. 생각보다 멀쩡한 무뚝뚝해 보이는 장신의 남자. 뿔테 안경에 큰 눈을 가진 사람. 저 사람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었던.


“…뷔.”

“……예.”


석진의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에 태형이 바로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진짜라는 듯이. 석진의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이 새어 나왔다. 이게, 첫 만남이라니.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날 속이는 중이었다니. 서글픔에서 배어 나오는 배신감은 종이에 베인 손가락과 같았다. 손에 꼭 쥐고 읽었던 책장에 찬찬히 핏물이 스며든다. 


무얼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는 건 석진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자초지종을 지민에게 다 들었지만 석진은 태형이 이 상황에 대해 뭐라도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자 드는 감정은 배신감보다 두려움이었다. 석진의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파생된 지극히도 개인적인 두려움.    


“미리, 말…. 말 못해서 미안해요.”


벌어지길 기다리던 입에서 시인하는 말이 나왔다. 쿵. 쿵. 석진은 가슴이 뛰어옴에 인상을 쓰며 눈을 꾹 감았다. 이윽고 뛰어대는 가슴을 감당 못하는 신호를 폐가 보내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석진은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고르지 못한 호흡으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의식 못할 만큼 머리가 저려왔다. 결국 석진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괜찮아요?”


석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태형이 다급하게 석진에게 물어왔다. 지민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이, 뭐라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 순간 구름이 걷히며 드러난 오후의 햇빛이 석진에게 강하게 내리쬈다. 눈부심에 석진은 눈을 더 꾸욱 감았다. 의식하며 숨을 쉬려고 하는 시도가 잘 되지 않았다. 석진은 하얗게 변하는 머릿속을 환기하려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떠오른 것이 가장 최근에 읽은 태형의 글이었다.


오후 두시였다. 예심판사의 사무실은 망사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햇빛이 무섭게 내리쬐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Il était deux heures de l'après-midi et cette fois, son bureau était plein d'une lumière à peine tamisée par un rideau de voile.


햇빛, 햇빛…. 아아, 그래. 뫼르소가 봤다던 그 오후 두시의 햇빛. 나를…. 완전히 고립되게 만드는 이 햇빛….


시야를 포기한 석진에게 주변의 소리가 가중되어 들려왔다. ‘김석진 아니야?’ ‘대박. 김석진 맞아.’ ‘앞에 누구야? 나 사진 찍어줘 빨리’ ‘대박, 빨리 사진.’ ‘야 내 앞에 지금 김석진 있어.’ 순식간에 부산해지는 주변을 느끼며 여전히 얼굴을 가린 석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매우 뜨거웠다. Il faisait très chaud.


정말로. 오후 두시의 햇빛이 발작이 일 정도로 뜨거웠다.


급격하게 눈에 띄는 이상 증세에 태형이 석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석진이 팔을 뻗어 태형을 저지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천천히 떨어지는 손안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동자가 갈 곳을 잃어 좌우로 심하게 요동쳤다. 그 안쓰러운 얼굴에 태형의 심장도 따라 요동쳤다.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이제 지민과 태형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석진이 고집스럽게 자리를 일어났다.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선고같이 느껴지는 떨리는 목소리에 태형의 숨도 같이 턱턱 막혔다. 아무리 매정해도 태형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원망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위태로운 사람을 처음 봤다. 내가….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괜찮다고 위로했었는데. 마주한 현실과의 괴리가 컸다. 하지만 눈앞의 석진이 어깨를 들썩이는 게 보일 정도로 가쁜 호흡을 하자 태형은 뭐라도 해야 했다. 그를 붙잡기보단 내 존재를 떠올려달라는 의미가 다급했다.



“내가 시 써준 거 기억해요?”


그 말에 석진의 오르내리던 흉곽이 멈췄다. 지민은 그 상황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다. 둘 사이에서 완벽한 제3자였다. 태형의 말 한마디에 집중할 것을 잡아탄 듯, 숨을 고르게 내쉬는 그 장면을 제3자로서 지켜봐야 했다. 이윽고 머뭇거리던 눈동자가 태형을 올곧이 바라봤다. 그 눈빛을 마주하다 태형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심연에서부터 올라오는 서글픔을, 그리움을 담고 있으면서도 원망하는 그 눈을,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그 표정을, 곧 무너질 것 같은, 저 눈빛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게 너무도 괴로웠다.



“그 시…, 애초에 본인이 쓴 게 맞긴 해요…?”

“…….”


태형은 마른침을 삼켰다. 엄밀히 말하면 그조차 친필이 아니었으니까. 애절하게 석진을 바라던 태형의 눈동자가 아래로 졌다. 지민은 석진이 자조적인 미소를 띠는 걸 봤다. 아아, 상황이 이렇게 치달을 것이었다면…. 의미 없는 후회가 들었다.



“역시….”


석진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도, 태형은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태형을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됐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을 까무러칠 뻔했다. 운전대를 잡고 헉헉대다 결국 석진은 경수를 불렀다. 요 근래 상태가 좋더라니, 일순간 사색이 되어 나타난 얼굴에 그의 매니저의 손이 다급해졌다. “형, 형! 항불안제 먹었어요? 어디 있어요!” 도로 한가운데에 나타난 매니저의 얼굴을 보고서야 석진이 죽어라 붙들고 있던 정신줄을 놓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칼바람이 부는 날씨에 혼자 식은땀에 머리가 다 젖은 석진의 눈이 서서히 위로 향하며 감겼다.



매정하게 말하자면 흔한 공황 발작이었다. 처음엔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작게 배신감을 느꼈더랬다. 하지만 ‘번역가 뷔’를 만나길 바라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석진이 연예인임을 알고 있던 지민과의 시간이 그 마음의 부실한 틈을 파고들었다. 자신을 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된 불안함은 괘씸함에서 비롯된 배신감을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변모시켰다. 사실 그도 나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혹시 모른 척 나를 이용하려고 했던 걸까. 직업으로부터 겪었던 일들로 하여금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도착해서 자신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는 태형과, 속인 사실을 시인하는 말에 트리거가 당겨진 듯했다. 거진 40여 분간. 석진 역시 그렇게 긴 발작은 처음이었다.


누워있는 석진의 방에 햇빛이 들지 않도록 경수는 커튼을 꼼꼼히 쳤다. 처방은 환자 본인이 가야 했기에 경수는 항불안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다시 또 석진이 부서질 것 같았다. 회사 대표에게 상황을 전하면서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이 영 불안했다. 

   


석진은 베개에 파묻혀 몇 번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강한 감정이 갑작스럽게 정신을 침범해 아직까지도 현실 구분이 어려웠다. 너무 피로한데, 기민한 정신에 잠들 수가 없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내가 시 써준 거 기억해요?


잔상으로 남은 낮은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석진은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썼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나를 알면서도 모른 척, 속일 수가 있어. 이불보를 쥔 손이 또다시 떨렸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이성에 잔뜩 혼란스러웠다. 감정의 끝물은 슬픔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감사했어요.”


지민이 전화를 끊었다. 출판사로부터 불어 번역 계약 종료를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고객의 요청으로 계약이 파기된 거니 위약금은 걱정하지 말라던 위로 아닌 위로에 지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민은 말없이 태형을 쳐다보았다. 삼자대면이 있던 날로부터 일주일째. 태형은 오로지 읽어줄 사람이 없는 원서만을 번역하고 있었다.


“그만해. 다 끝났어.”

“…….”


태형의 안경알로 모니터의 빛이 반사되어 보였다. 그렇게 울어댈 때는 언제고, 미동도 없이 모니터만 보고 있는 친구의 옆모습에 지민은 한숨이 나온다. 너, 이 악 문 거 다 보인다. 그렇게 버티고 있음을 시위하지 않아도 다 보인다, 보여….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이 사태가 지민 역시 안타까웠다.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서울에 첫눈이 올 것으로…. 



석진의 불면이 거진 72시간째를 넘어선 듯했다. 초반 이틀은 머리에 먹구름이 낀 듯 아무런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았다. 한 번 상태를 겪고 나면 꼭 몸살을 같이 겪었다. 그래서인지 기진맥진함에 몇 번이나 짤막한 선잠에 빠져들었었다. 경황이 없었던 때가 오히려 육체를 쉬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정이 정리된 이후로 다시 또 지독한 불면이 찾아왔다.



“형, 그러다가 죽어요. 병원 가요, 예? 좀.”

“나 괜찮아.”

“괜찮긴…. 송장 같아요.”


경수가 힘없이 웃는 석진의 팔을 끌어당겼다. 한 손에는 그의 코트를 든 채였다. 몸살 기운이 가시고 생각할 틈이 들자마자 석진은 다시 책 읽는 것에 매달렸다. 책장 한 장 한 장에 피가 묻어났다. 아무거나 읽을 것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의 연예인이 경수는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끼니도 거진 거르며 책장만 넘겨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갑갑했다. 잠이라도 자면 걱정이 덜 할 텐데.


종종 넋이 나간 표정으로 책이 아닌 허공을 보고 있을 때 석진이 실성이라도 한 걸까 봐 경수는 자주 석진의 이름을 불렀다.


“이게 뭐예요? 주머니에 들어있네.”


볼록 튀어나온 코트 주머니에 경수의 손이 들어갔다가 나온다. 손에 들려있는 작은 스노우 글로브. 의외의 물건에 석진에게 아는 물건이냐며 내밀어 보인다. 경수의 손에 들린 물건과 마주한 석진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날 주머니에 넣어놓은지도 몰랐던 물건. 경수가 천천히 스노우 글로브를 석진의 손에 내려놓는다.


워터 볼 안의 눈꽃이 동선의 결을 따라 일렁인다. 석진은 이제서야 제대로 스노우 글로브 안의 작은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눈 쌓인 나무들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사슴 한 마리와 그 옆을 지키듯 서있는 다른 한 마리. 가만히 스노우 글로브를 그러쥔다. 조금은 착잡해 보이는 표정에 경수가 석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없이 번역에만 몰두하는 태형은 결코 석진을 놓지 않았다. 메신저에 나타난 석진의 마지막 접속 시간은 갈수록 늘어나, 이젠 ‘일주일 전’이라는 어휘로 남았다. 메신저에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석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슬픔에 잠식되어가는 눈동자가 방금 전에 본 것인 양 생생했다. 아직도 떠올리면 어금니를 꽉 물어야 할 정도로 마음에 동요가 왔다. 석진의 직업을 알고 나서도 세간에 돌아다니는 그의 화보라던가 하는 사진들을 찾아볼 생각도 하질 않았다. 그가 그리울 때마다 했던 건 몇 번이고 나눴던 대화들을 다시 읽는 것. 그것만이 온전히 태형이 알고 있는 석진이었다.


슬퍼질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사람을 위해 그 말을 옮겼다. 내가 감히 헤아리지 못할 것으로 상처받은 당신의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을, 오직 이것밖에 몰랐다.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어도, 태형은 꾸준히 석진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일방적이어도 그게 얼마나 간절한지 나타내는 유일한 것이었다.







감정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치고 난 이후로는 고요하고 무료한 날들이었다. 폭식하듯 책을 읽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석진이 드디어 손에서 책을 놓고 맨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제 태형을 원망하기보다 사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념무상. 날씨만큼 감정도 사고도 얼어붙은 것 같았다.


아…. 자고 싶다.


시계 소리를 따라 상념이 찾아들었다. 눈을 데구르르 굴려 시계를 본다. 새벽 세시. 잠 못 들던 시간들에 뭘 했나 떠올렸다가 질린다는 듯 눈을 감았다. 아무리 다른 것을 떠올리려고 해도 암전이 아니고서야 지금 가장 큰 불안을 준 존재만이 있을 뿐이었다. 잠을 못 자서…. 그때 잠을 못 자서 정말 어지간히도 빠졌었나 보다…. 석진이 손바닥 끝으로 두 눈을 꾸욱 눌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정하고 감상적인 문체가 그리웠다. 본인이 생각하고도 우스워 석진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문체가 그립다니. 손바닥에 눌려 뿌연 시야를 정리하고 석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스노우 글로브를 집어 들었다. 바닥에 침전되어있던 눈송이들이 낮게 흩날렸다. 사슴들을 거꾸로 뒤집어본다. 그리고 이내 제자리로 돌려본다. 유유한 눈들이 사슴 두 마리를 휘감으며 흩어진다. 석진은 그 행동을 몇 번을 더 반복했다. 계속해서 눈이 내렸다. 눈보라에도 사슴 둘은 여전히 서로의 곁을 지켰다.


눈. 벌써 겨울인가. 알게 된 게 가을인데.


석진은 일어나 커튼을 살짝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휘영청한 하얀 달이 부서져 파편을 날리는 것처럼 하얀 눈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석진은 감상할 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해 판단력이 흐려졌다. 전에 뭘 하고 보냈지…. 뭘 하며 보냈지…. 다시 또 바뀌지 않는 대답에 대한 질문을 한다. 필시 너무 피로한 탓이다.


결국 석진은 이메일을 들춰보기 위해 서재로 들어간다. 아니, 정확히는 태형과의 대화를 다시 읽기 위하여.





처음 석진에게 부탁받았던 「이방인」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 지은 태형은 담담하게 파일을 첨부하여 메일을 보냈다. 그 후 잠시 안경을 벗어두고 깊게 마른 세수를 했다. 피로한 것은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이 선잠이었다.


잠은 자고 있을까.


그리고 매일 같이 석진의 걱정을 했다. 손가락으로 꾹꾹 눈을 마사지한 뒤 다시 안경을 썼을 때 태형의 눈에 다르게 들어온 것이 있었다.


JIN  1분 전


태형의 눈동자가 쪼르르 모니터 우측 하단으로 굴렀다. 새벽 세시 반. 아아…. 여전히 못 자고 있구나. 일주일 만에 근심이 눈으로 확인되니 가슴 아래, 명치끝부터 아려오기 시작했다. 가련해서, 너무 가련하고도 사랑스러워서 마음이 아팠다.



V

벌써 새벽 네시인데.


하루가 멀다 하고 꼬박 온 메일에 눈이 크게 떠진 석진은 그 아래 뜬 태형의 메시지에 더더욱 놀랐다. 어째서 이 시간에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원인 모를 두려움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이유가 뭔지, 왜 내게 손 내미는 거야. 석진이 어금니를 꾹 물었다. 두려워서,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피어 올라서.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하는듯해 보였다.


V

거기서 보고 있는 거죠.

만나고 싶어요.


석진의 눈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감정을 묶었던 부정이 무방비하게 풀리자 공황을 느꼈을 때와는 다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박동이 서서히 석진에게 온기를 불어넣었다. 마치 춥고 메마른 겨울 가지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는 것같이. 태형은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확신하는 듯 말을 했다. 많은 밤을 오로지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잠들지 못한 시간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메신저창 뒤로 쌓여있는 메일들의 수신 시각이 태형이 기다린 시간들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V

지금


찰나에 글자가 올라옴과 동시에 석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 다시 또 순간을 본 것 같았다. 지금 이 기분은 영영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 딱 하나, 딱 하나만 떠올랐다. 

‘영원’이라는 것은, 느낀 순간부터 시작만 존재한다는 것을….


 V

마지막에 봤던 곳에서 기다릴게요.









“…….”

“아, …….”


입에서 나오는 투명한 구름이 석진이 얼마나 숨 가쁘게 뛰어왔는지를 보였다. 새벽 네시가 넘은 시각, 아무도 없는 어두운 건물의 앞에 딱 한 사람이 서서 석진을 맞이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기다리다가 가버릴까 봐 차를 버려두듯 도로에 놓고 정신없이 뛴 탓에, 다 흐트러져 내린 옷과 엉망인 꼴이 우스웠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간 동안 서로의 하얀 숨소리를 보았다.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리며 서로를 훑었다.


“역시, 거기 있었던 거 맞았구나.”


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목소리를 내뱉는 순간순간마다 하얀 입김이 올라왔다. 추위에 휑한 석진의 목부터 뺨이 빠르게 빨개지고 있었다. 태형은 말없이 자신의 목도리를 풀러 석진에게 목 높게 둘러주었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이었다. 꽁꽁 언 손으로도 세심하게 목도리를 매어주며 말했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정말로. 매번 마음에 걸렸어요.”

“…….”

“만나서 말하고 싶었어요.”


목도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손이 아련했다. 차마 눈을 더 마주치지 못하고 잠시간 땅을 쳐다보던 태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석진은 그런 태형의 행동을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위로하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그 무엇 하나도 거짓인 적이 없었어요. 그건 진심이에요.”


추위에 석진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을 옅게 계속 깜박거렸다. 태형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용서를 구하고 이 사람을 마저 위로해주고 싶었다. 까만 밤, 오렌지빛 가로등 아래로 작은 눈송이가 흩날렸다. 태형이 애써 착잡함을 감추며 석진의 눈가로 차가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살짝 스친 손끝이 데인 듯 뜨거웠다.


“…안아줘도 …될까요?”


그 말에 울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던 석진의 눈에서 도르르 눈물이 굴러 나왔다. 일말의 흐느낌도 없이 일주일 동안 얼어있던 감정이 결정이 된 듯 계속 떨어져 나왔다. 태형은 그제야 석진의 눈짓을 이해했다. 울고 싶었구나. 정말 많이. 나 때문에 힘들었었구나. 태형이 조심스럽게 석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진작에 안아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이렇게 안아주고 싶었는데….”


태형도 목이 메었다. 그제야 석진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그새 온기가 옮아 얼었던 눈물이 녹았는지 한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밀려나와 태형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태형은 소리도 못 내고 벌벌 떨며 눈물을 뱉어내는 석진을 더 따스하게 끌어안았다. 고생 많았어요, 견디느냐고. 견뎌내느냐고….


작게 흩날리던 눈이 어느덧 함박눈이 되어 소복소복 곁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Stay with your chérie. forever’

당신 연인 곁에 있어줘요. 영원히.


스노우 글로브를 골랐을 때 점원이 했던 어눌한 영어가 스쳐 지나갔다. 품의 석진을 느끼며 태형도 눈을 감았다. 이상하리만치 춥지 않았다. 따스한 첫눈을 맞고 있었다.


이윽고 석진의 떨림이 잦아들자 태형이 조심스레 석진을 살폈다. 빨개진 눈, 눈물 투성이었지만 가로등 빛에 보석이라도 쏟아낸 듯 눈가가 반짝였다. 태형이 다정하게 석진의 눈물을 훔쳐주며 말했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얼굴에 남아있었다.


“못 잤죠. 가요. 책 읽어줄게요.”


그 말에 웃듯이 살짝 숨을 뱉은 석진의 입에서 모락모락 입김이 올라왔다. 그 입김만큼 투명한 얼굴에 눈코입 모두 빨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태형이 살포시 웃으며 석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렇게 춥게 입고. 석진은 말없이 손목을 내준 채 차를 향해 함께 걸었다. 자박자박. 어느새 함박눈이 얕게 쌓여있었다.





아침 해가 뜨려고 할 때까지도 눈은 계속 내렸다. 석진은 어느새 차 뒷좌석에서 태형의 다리를 베고 누워 고른 숨을 뱉고 있었다. 석진의 앞머리를 어루만지다, 태형은 함박눈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하늘하늘 내리는 함박눈. 마치 스노우 글로브 안의 사슴이 된 것 같았다. 이제야 막 제자리를 찾은 듯한 스노우 글로브. 이렇게 둘이 있다면 영원히 눈 내리는 곳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느덧 하늘빛이 섞이고 있었다. 뭐였더라…. 어딘가 익숙한 말이 떠오를 듯한다. 그렇게 천천히 올라오는 아침 해를 느끼며 태형도 스르륵 눈을 감았다.


차가운 새벽이슬을 온몸에 머금고 당신께 달려오느라

아직 차가운 내 이마가 아침 바람을 편안히 느낄 수 있도록

지친 나를 그대 발치에 눕히시고

당신 곁에 누워 소중한 순간을 꿈꾸게 하시길.

J'arrive tout couvert encore de rosée

Que le vent du matin vient glacer à mon front.

Souffrez que ma fatigue à vos pieds reposée

Rêve des chers instants qui la délasseront.



그날 새벽, 둘은 기꺼이 서로의 영원에 남을 용의가 있었다.




겁많은 뷔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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