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pink martini - Amado Mio








1.

열흘이란 시간 중 대부분을 일본 니가타에서 보냈다. 한창 대설이 내릴 때라, 니가타로 향하는 신칸센에선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배경처럼 터널을 통과하자 새하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차한 기차역에서 산 사케와 맥주를 마시며 료칸에서 보낸 차량에 몸을 실었다. 소설의 첫 문장처럼 온통 하얀 눈에 뒤덮인 마을로 들어서 료칸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곧장 짐을 풀고 노천탕에 몸을 던졌다.

 

 

 

자야          (눈 앞에 펼쳐진 설산을 바라보며 김을 뱉어본다) 하아....

 

 

 

그렇게 일주일 내내 니가타에 있는 료칸들을 돌며 온천여행을 한 게 신혼여행의 전부였다. 정신이 돌아올 때쯤 사케를 마시고, 취할 때쯤 노천탕에 몸을 지지며 그간 쌓여왔던 도시 밀림의 스트레스들은 전부 노천탕에 담가두고 왔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며칠을 남기고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세훈의 아버지가 잡아놓은 호텔에서 꼬박 사흘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룸에 들어가는 건 오직 룸서비스 뿐이었다.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방음에 취약했던 료칸들의 공간적 이유 때문에 일주일 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그 사흘 동안 몰아서 분출해낼 수밖에 없었다.

 

 

 

자야           마무리는 되어가고 있어?

서향           네, 작가님께서 부족하다셨던 부분 보충하면, 아마 이번 주말에 검토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야           반년 금방이다, 그치.

서향           그러게요. 공모전이 한 달도 안 남았다는 게 참, 시간이 너무 빨라요.

자야           나이 들면 더 빨라. 근데 그게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유전자의 노화로 더 빠르게 느껴지는 거래.

서향           진짜요?

자야           (핫도그를 한입 가득 물며) 그러타니까.

 

 

 

오늘도 점심시간에 맞춰 서향과 함께 밖으로 나와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생기를 느껴야 한다며 나간 외근이라지만, 따지고 보면 ‘소풍’이었다. 먹거리투어를 겸한.

서향은 곧 있을 공모전 출품을 위해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출할 작품도 거의 다 썼기에 검토만 하면 되었고, 내용 역시 자야의 살벌한 혹평들을 통해 갈고 또 갈리며 써진 소설이라 단어 하나까지 국어사전을 통째로 뒤져가며 찾곤 했다.

 

 

 

자야           잘될 거야.

서향           감사합니다.

자야           근데 떨어질 수도 있어. 그걸 잊으면 안 돼.

서향           네.

자야           마냥 잘될 거라 믿어버리면 정작 떨어졌을 때, 허무함이 아니라 상실감이 밀려와. 내 걸 남에게 뺏긴 것도 아닌데 등단을 강탈당했단 생각이 드는 순간부턴, 마냥 좋아서 쓰는 글은 더 이상 쓰기 어려워질 거야.

 

 

 

곧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에 근처 카페에 들어간 그들은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두 사람 모두 시선의 끝은 서로가 아닌 창밖의 행인들이었다.

 

 

 

자야           업과 흥미는 다가가는 마음가짐부터 달라. 네 글을 최대한 늦게 생존의 도구로 삼고 싶다면, 실패를 변수라 생각하면 안 돼. 또 하나의 경우의 수라 생각해야지, 변수로 생각해버리면 ‘시간’이란 조급함에 먹혀버리기 쉬워.

서향           ......

자야           그리고 벌써 그러기엔, 네 나이가 아직 젊다.

 

 

 

잊지 말아야 한다. 성공을 위해 한 선택도 때로는 ‘실패’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몇 번씩 실패할 것이고,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원동력 삼아 성공에 도전하기 마련이다. 각자의 실패가 어떻게 다른진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으며, 똑같은 실패라 하더라도 내 옆 사람이 나보다 더 쉽게 털어낼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건 ‘실패란 무게’의 차이가 아닌, 실패와 동시에 밀려오는 자괴감을 ‘얼마나 빨리 털어낼 수 있냐’의 차이다.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을 실패해야 비로소 가야 할 길이 아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려내 제게 알맞은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계속 나아갈 필요도 없다. 자주 쉬어야 오래 갈 수 있다. 길을 걷다 뒤늦게 아니다 싶으면 굳이 돌아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추면 된다. 별 거 아니다. 이미 흘려버린 시간을 토대로 옆에 조그만 샛길을 따로 만들면 그만이다. 그렇게 한 블록씩 벽돌을 깔고 또 깔다 보면, 언젠간 본래 원했던 길에 다시 편입될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은 많다. 그래서 그만큼 실패도 많은 법이다. 사람은 멍청하다. 실패를 해야 비로소 깨닫는 존재들이란 걸,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서향           그러고 보니 전 작가님께 해드린 게 없네요. 청춘을 알려달라 하셨는데, 저는 딱히...

자야           아냐, 백 군은 내게 많은 걸 알려줬어.

서향           제가요?

자야           응.

 

 

 

커피 속 얼음을 와작와작 씹던 자야가 다시 한번 입 안에 얼음들을 와르르 쏟아낸다.

 

 

 

자야           내가 어디 가서 젊은 애들끼리 사랑싸움하다 개싸움으로 번져 파출소까지 끌려가는 걸 보겠니.

서향           ......

자야           나도 어렸을 땐 여럿 만났는데, 전애인이랑 싸워 파출소에 가본 적은 없거든.

서향           ......

자야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지. 백 군은 그것만으로도 할 일 다 했어.

 

 

 

이에 서향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2.

뜬금없이 할리우드에서 협업 제안이 와 당장 다음 달 LA로 출국하게 되었다. 기간은 1년 정도로 잡았고, 상대측에서 제안한 페이 역시 지금 그가 사단 내에서 받는 금액보다 배로 많았기에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1년이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고, LA는 뭐.. 비행기 타고 가면 금방이잖아요. 나는 괜찮아요.

 

 

 

물론 제안을 받아들인 영도 마음은 편친 않았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산의 표정에 암울함이 가득했고, 벌써 저를 나성으로 보낸 여인처럼 아련하게 바라보는 걸 보고 있자니 입안이 버쩍 마른다.

 

 

 

영           ......

           저는 정말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

 

 

 

그렇게 말해놓고, 정작 술이 몇 잔 들어가니 갑자기 뿌앵! 하고 울어버린다. 아까는 잘 다녀오라더니? 영이 어이없어하자, 산은 머리는 그래야 한다는 걸 아는데 마음이 제 마음대로 안 된다며 가슴을 부여잡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가슴 좀 살살 쥐어.. 그러다 뜯어지겠어.

           (품에 스르륵 안기며) 갑자기 간다는 건...

           (등을 토닥이며) 어어, 그래. 섭섭하지. 나라도 섭섭할 것 같아..

           부애앵...

 

 

 

일할 땐 똑똑하게 굴고 뭐든 똑부러지게 처리하기에 속도 단단한 어른인 줄 알았더니, 같이 지내면서 알게 된 건 이 남자의 속은 생각보다 많이 말랑하다는 것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잠깐씩 들어올 거야. 고작 1년이라니까? 이번에 눈 내렸으니, 다음에 내릴 때면 나도 돌아오겠지.

           (음소거로 오열한다) ..!!!

 

 

 

저도 과거에 연인에게 장거리 연애를 통보받은 적이 있어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우는지 너무도 잘 안다. 그때 내가 느꼈던 외로움과 약간의 아쉬움을 이 사람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설득하고 싶었다. 내 커리어를 쌓는데 이번 기회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며 발판이 되는지에 대해 고객들 앞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산이 갖고 다니면 노트와 펜을 꺼내 종이 한가득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과 앞으로 이뤄갈 것들, 그리고 그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선 내가 쌓아야 할 스펙들과 발판엔 무엇이 있는지까지 전부, 전부 다 하나하나 빼곡하게 적어가며 말해주었다.

술집에서 1시간 넘게 애인의 미래 계획을 듣게 된 산도 처음엔 훌쩍거리며 흐르는 눈물만 닦더니,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제 애인이 꽤 진심인 걸 느꼈는지 경청하는 태도가 진지해졌다.

 

 

 

           그러면 나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영           가지 말라는 거 빼고 뭐든. 별도 따줄게.

           우리, 당신 미국 갈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살면 안 돼요?

           ......

           고작 1년이란 시간이지만, 내겐 1년‘이나’ 되는 시간이에요.. 그러니 갈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요. 당신이랑.

 

 

 

이 사랑스러운 인간.

 

 

 

           (산의 두 볼을 가득 움켜쥐며) 그까짓 거 얼마든지.

           ......

           그냥 오늘 밤부터 같이 있어. 옷 입어. 집에 갈 준비해.

           (훌쩍거리며) 멋있어...

 

 

 

망설임 없이 시원하게 대답한 영의 수락에 산은 마음이 놓이는지 또다시 눈물을 줄줄 흘렸고, 그러는 와중에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게 웃겨 영은 웃음이 터졌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술집 사장은 영과 평소 잘 알고 지냈던 사이답게 눈치껏 대리를 불러주었다.

 

 

 

사장           대리 불렀어. 타고 가. 저번처럼 집까지 걸어갔다가 앓아눕지 말고.

 

 

 

 

 

 






 

 

 

 

 

 

 

 

 

3.

대본 오디션이 있던 날이었다. 얼추 추려 몇몇 배우들에게 1차로 일정을 잡은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아이돌 배우, 나재민이 시간 맞춰 회의실로 들어왔다. 입가에 연신 싱글벙글 미소를 띤 매니저의 뒤를 따라오던 재민이 그들을 보자마자 상체를 깊게 숙여 꾸벅 인사한다. 옆에서 뽀삐를 품에 안고 있던 세훈은 조용히 강아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뽀삐야, 쟤가 나재민이야.

 

 

 

자야           오랜만이다.

재민           (자야와 악수를 나누며) 잘 지내셨어요?

자야           키 컸니?

재민           그때보단 6cm 정도 컸어요.

자야           너 스물둘 아니야? 아직도 키가 커?

재민           저 요가랑 발레 하잖아요.

자야           아주 체형 교정에 좋은 건 다 하는구나.

재민           키가 커야 주인공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니까요?

자야           주인공 욕심은 여전하네.

 

 

 

오랜만에 만난 사이치곤 대화의 분위기가 공격적이라 옆에 있던 감독과 캐스팅 디렉터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저 편한 안부 묻는 표정들이라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재민           대표님도 잘 지내셨어요?

 

 

 

감독, 캐스팅디렉터와 인사를 나눈 재민이 마지막으로 세훈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하자 세훈은 단답으로 잘 지냈지, 하며 꺼림직한 표정으로 악수를 받아주었다. <벽두> 첫 오디션 때 자야 앞에서 섹스 어필 드립을 쳤던 걸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그는 지금도 경계를 완전히 거두지 못한 채 재민을 마주했다.

오디션은 재민이 맡을 배역만 나온 부분의 대본 한 장을 내주면서 바로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앞뒤 상황과 배역의 특징을 전달받은 그는 천천히 대본을 읽어보더니 곧바로 몰입해 연기하기 시작했다. 대본을 손에 쥐고 눈빛과 표정, 말투만으로 전체적인 뉘앙스를 흉내 내는 건데도 빠르게 몰입하는 걸 보면, 왜 아직도 배우로 완전히 전향하지 못하는 건지 의문인 자야였다.

 

 

 

자야           근데 좀 더 싸가지없게 해봐. 캐릭터 자체가 지옥 대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왕 자리에 앉은 역할이라 기본적인 소양 자체가 상대를 하대하듯이 굴고 버릇없는 스타일이야. 그러니 방금 했던 것보다 더 싸가지없게, 완전히 듣는 사람 정떨어지게 꼬아보듯이 톤을 잡아봐. 보는 사람 입에서 ‘나재민 쟤 원래 재수 없나?’ 이 소리가 나오게끔.

 

 

 

자야의 디렉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재민은 다시 새로운 톤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분출해내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했다. 단번에 완벽하게 해내자, 자야의 말대로 본래 인성이 의심될 정도로 잘하는 연기력에 세훈의 경계는 점점 커져만 갔다.

 

 

 

세훈           (자야에게 속삭이며) 왜 저렇게 잘해.. 쟤 원래 성격 저런 거 아냐?

자야           집에 갈래?

세훈           (입 꾹 다문다) ......

 

 

 

연기를 마친 재민에게 괜찮은 것 같다며 감독과 디렉터의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고, 꽤 긴 시간 동안 오디션을 진행한 재민은 수고했단 감독의 인사에 잘 부탁드린다며 꾸벅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뽀삐의 말랑한 등을 조용히 쓰다듬던 세훈은 유심히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재민           장 선생님은 잘 지내세요?

자야           그럼, 잘 지내지. 근데 나중에 그 언니 만나거든 ‘선생님’ 소리는 절대 하지 마라.

재민           왜요?

자야           짬밥은 선생 소리 들어도 되지만 아직 나이가 그 소리 들을 때가 아니라서, 분명 자기 늙은이 취급한다고 너 그 언니 주변 관계에서 조용히 삭제당할 게 뻔해.

재민           아, 조심해야겠다.

 

 

 

수고 많았고 이틀 안으로 연락 주겠단 자야의 말에 재민은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곤 덤덤한 표정으로 절 쳐다보고 있던 자야에게 눈꼬리를 잔뜩 휘며 해사하게 웃어 보인다. 세훈의 눈썹이 꿈틀한다.

 

 

 

세훈           쟤, 쟤 저거 뭐야? 눈웃음 뭐냐고!

자야           응?

세훈           쟤 지금 자기 어리다고 나이 앞세워서 매력 어필하는 거 아냐! 느, 늙은이는 눈웃음 못 지을 줄 알고? 허, 나도 지을 줄 알거든!

자야           (재민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가.. 가, 어서 가.

 

 

 

자야를 지키기 위해 잔뜩 성질을 부리는 세훈의 모습에 웃음이 터진 재민은 이내 그에게도 꾸벅 상체를 숙이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재민           결혼 축하드립니다.

자야           오냐. 연락할게.

재민           기다리겠습니다.

세훈           (자야에게 칭얼거리며) 쟤가 지금 기다린....

자야           너도 집에 가! 가, 어서!

세훈           아니 쟤가...!

자야           가!!

세훈           아니 왜 나만..!

 

 

 

 

 

 

 

 














 

4.

하루가 꼬박 걸린 오디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야가 운전대를 잡았다. 솔눈이 다쳐 응급실로 달려갔던 날 이후부터 짬이 날 때마다 새벽에 세훈과 함께 차를 끌고 나와 조금씩 연습했더니 이젠 작업실에 출퇴근하는 것 정돈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다. 예전에 레이싱했던 걸 몸이 기억하는지 사소한 습관까지 무의식 속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가는 길에 분식이나 사 먹자는 세훈의 제안에 동네 단골 분식집으로 향하던 중, 자야가 지금쯤 자고 있을 태영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연결음은 금방 끊겼고, 스피커 너머로 피곤에 쩔어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야           언니 뭐해.

태영           * 대기 중.

자야           촬영 들어갔어?

태영           * 어, 저번 주에.

자야           난 또, 집이면 저녁 같이 먹자 하려 했지. 우리 지금 똥개네 떡볶이 먹으려 하거든.

태영           * 이 시간에 똥개네를 간다고? 일부러 전화했냐?

자야           에이, 내가 그렇게 쓰레기라고?

 

 

 

항상 작품에 들어가면 석 달 전부터 옆에서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태영은 다이어트를 혹독하게 하는 편이다. 그래도 이번 작품은 따로 감량을 요구한 게 없어 지금 체중으로도 괜찮다는데, 태영은 카메라 앵글에 담기는 쉐입이 단 몇 그램만으로도 완전히 달라진단 확고한 고집이 있는 이였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어느 정도의 감량을 이룬 채 크랭크 인에 들어갔다.

 

 

 

자야           언니, 나재민 기억하지.

태영           * 어.

자야           걔가 장 선생님 안부 물어달래.

태영           * ...뭐? 장 선생님? 걔 미친 거 아냐?

 

 

 

그 말에 세훈과 자야가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태영           * 내가 벌써 선생님 소리 들을 나이냐?!

자야           요즘엔 연기 경력 10년만 돼도 선생님이라 하는데, 장장 35년 되신 분께서 안 들으려 하면 그 밑에 애들은 무슨 수로 선생님 소릴 듣니?

태영           * 야, 아무리 그래도 선생은 아니야! 나재민? 걘 이제 내 인생에서 끝이다.

 

 

 

그 뒷말까지 자야가 예상한 대로 똑같이 말하자, 세훈은 둘이 천생연분이라며 박수를 치고 웃었다.

 

 

 

자야           오 대표가 언니랑 나 천생연분이래.

태영           * 옆에 남편 두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 그래. 끊어.

자야           알았어, 전화할....!

 

 

 

뚝.

가차 없이 끊겨버린 전화에 세훈은 여전히 끌끌 웃으며 지갑을 챙겼고, 자야는 귀여워죽겠다며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세훈           튀김도 먹을 거야~

자야           제로 콜라~

세훈           (정색하며) 요즘 시대에 누가 제로 콜라를 먹어요.

자야           이야, 연애할 땐 박스 채로 사주더니 결혼했다고 이미 잡은 물고기 취급이네.

세훈           익스큐즈 미? 내 어장엔 자기 하나밖에 없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릴 하시는 건, 혹시 광기 들리셨나요?

 

 

 









 

 

 

 

 

 

 

5.

책을 읽어준 지 꽤 되었는데도 여전히 눈이 말똥말똥한 솔눈을 보며 기어이 한 권을 다 떼버린 자야는 다른 책을 골라 가져왔다. 난희를 만난 이후로 책 취향도 제법 또래 애들과 비슷해졌는지, 조금씩 그림이 많은 책을 골라오던 솔눈이었다. 이젠 서점에 가도 고전문학 코너가 아닌 아동독서 코너에서 장기간을 머물러 있는 걸 보며 자야는 환경이 아이에게 다방면으로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야           혼자 남겨진 펭귄은 아빠 펭귄이 남겨둔 발자국을 따라가기로 결심했어요.

 

 

 

다음 장을 넘기자 종이 위로 얼음 위를 횡단하는 아기 펭귄의 이미지 조각이 차르르 펼쳐졌다. 그의 팔뚝에 포동포동한 뺨을 찰싹 붙이고 그림을 구경하던 솔눈은 ‘오...’ 하며 작게 감탄했다.

 

 

 

자야           쉽지 않은 길이었어요. 밤엔 엄청난 추위가 덮쳤고, 낮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돌풍이 아기 펭귄을 막아 세웠죠. 아기 펭귄은 먼저 떠난 아빠 펭귄이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단 사실이 그를 더욱 약해지게 만들었죠.

 

 

 

하지만 아기 펭귄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걸음을 멈춘다고 이 길이 끝나진 않는단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지치는 날엔 지친 만큼 조금만 걸었고, 다시 힘을 낸 날엔 전날 못 걸었던 만큼 더욱 열심히 걸었어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뒤뚱뒤뚱.

 

 

 

자야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길을, 언제 첫걸음을 디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걸었을 때...

 

 

 

아기 펭귄은 드디어 저 멀리 눈보라가 휘몰아치지 않는 행복한 얼음 나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 앞엔 아빠 펭귄과 엄마 펭귄이 손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죠. 아기 펭귄은 보고 싶었던 엄마, 아빠를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려갔어요.

 

  

 

자야           아빠! 엄마! 하고 손을 뻗은 순간, 아기 펭귄 앞엔 모든 게 눈송이가 되어 날아갔고 그 앞엔 행복한 얼음 나라로 향하는 계단만이 남아있었어요. 어쩌면, 꿈이었을 지도 모르겠죠. 또다시 혼자 남겨진 아기 펭귄은 자기 혼자선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좌절했어요.

솔눈           ......

자야           하지만 곧 깨달았죠. 엄마, 아빠가 아기 펭귄이 용기 있게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요. 그래서 아기 펭귄은 다시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어요. 용기 있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솔눈           ......

자야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밟은 순간, 아기 펭귄 앞엔...

 

 

 

마지막 장을 넘기자마자 어린애 몸 만한 거대한 그림 조각이 두 사람의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아름다운 오르골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진다.

 

 

 

자야           행복한 얼음 나라의 따뜻한 얼음 송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마침표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아이를 바라보자, 솔눈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마지막 그림 조각을 함께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이제라도 잠이 든 아이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자야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자리에 눕혔다. 그러곤 잠시 뒤척이는 아이의 배를 살살 토닥이며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야           (조용히 속삭이며) 일 초라도 안 보이면.. 이렇게 초조한데...

 

 

 

아이를 재우러 함께 들어간 자야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질 않자, 홀로 사케를 마시던 세훈이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저와 함께 술을 마셔 노곤해졌는지 잠든 솔눈 옆에서 자야 역시 책을 배 위에 얹은 채 함께 잠들어 있었다.

 

 

 

세훈           ......

 

 

 

흔들어 깨우면 아이까지 깰 것 같아 세훈은 동화책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그러곤 조용히 침대 조명의 조도를 낮춘 채 조심스레 자야를 품에 안아 방을 나선다.

 

 

 

세훈           모두 굿나잇.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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