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actually is all around

And always







민혁이가 집을 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민혁의 집에서 이민혁이 나간 것이니까 표면상으로는 형원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지만 이상하게 형원은 혼자 큰 타격을 입고 요새는 어디에도 나서지 않고 집에서 칩거 중이다. 대학교 앞에 원룸촌이니까 거기가 그렇게 좋은 집도 아니었는데 그냥 추워도 잠깐 견디면 서로의 집에 갈 수 있다는 점과 보고 싶으면 전화해서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는 건 아무래도 아주 큰 위로와 안심이었는지.


싸우거나 우리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니었는데, 민혁이는 본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애초에 통학이 불가능한 거리도 아니었는데 이민혁이 자기가 알바해서 쎄빠지게 번 돈과 각종 과외와 국가근로 장학생으로 학교를 누비며 번 돈으로 마련한 임시 거처였다. 이민혁이 죽어라 돈을 벌어서 굳이 나와산 이유는 하나였다. 채형원. 고등학생 때부터, 아주 오래 짝사랑하던 이민혁은 채형원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그냥 추워도 잠깐 견디면 오갈 수 있는 거리,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 뛰어갈 수 있는 거리에 채형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연인이 된 지 1년하고 조금 지나 민혁은 그 집을 떠났다. 싸우거나 멀어진 건 아니었고 가족 때문이었다.


이민혁의 이사를 도와 창신동 아파트에 짐을 옮겨주고는 빌린 쏘카 스타렉스에 시동 걸고 있는데 하얀 입김 흩뿌리면서 걔가 뛰어왔다. 형원은 또 겨울이라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나는 너 코맹맹이 소리 나도 좋아, 그게 오히려 좋아. 실컷 떠들고 열심히 짐 옮기는 동안에도 내내 따끈한 이야기를 뱉던 입술. 조심히 가라고 인사도 잘 했으면서. 다시 후다닥 뛰어와서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코 끝이 빨개가지고는. 강아지 같이. 


“형원아.”

“엉, 왜.”

“내가 사랑한다고 아까 말했나?!”

“어. 했어.”

“아. 안 한 줄. 그럼 또 사랑해.”

“…나도.”


영 쑥스러워하는 대답을 듣고 민혁이 웃는다. 나 갈게. 전화할게. 얼른 들어가. 이불 속에서 만나! 열심히 손 흔드는 민혁이한테 대고 알겠다고 고개 끄덕이던 짝고 동그란 머리통은 집으로 오는 길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니, 내가. 이민혁이랑 평생 산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따로 살았으면서. 물론 연애하는 동안 니집 내집이 없긴 했지만. 여린 속을 흠씬 파고든 이민혁이 어지럽다. 역시 정신 사납구 힘든 새끼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형원은 오래된 민혁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는 않는다. 그 애는 오타쿠라서 우리의 오래된 서사가 담긴 책을 덮으면 그 때부터 또 벅차서 새 사랑과 마음을 꺼내올 애니까. 민혁이를 사랑하고 믿지만, 사랑하면서 더불어 생긴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법까지 민혁이가 가르쳐주진 않았다.


그래놓고 어디갔쓰어. 


크리스마스에 잔뜩 들떴던 이민혁이 채형원의 어둑어둑한 취향의 집에 온갖 반짝거리는 것은 다 갖다가 붙여놨다. 칩거 중. 이불에 둘러싸인 형원은 그래도 저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핸드폰을 들어서 [재수탱] 이라고 저장된 이름에 전화 걸었다. 몇 번 신호음 끝에 이어지는 목소리에 또 이상하게 불안하고 외로웠던 마음이 걷어진다. 그게 참. 걷어지면서도 마음이 이상한 거였다. 나 진짜, 이민혁한테 홀렸나. 나중에 이민혁 없어지면 어떻게 살려고.


집에 오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와 더불어, 이따 내려가는데, 거기 내려가선 할 것도 없어서 온갖 구독을 했다고 했다. 넷플릿스랑 왓챠랑 티빙이랑. 나 디즈니 플러스도 가입했잖아. 그래서 지갑 탈탈 털렸다는 이야기. 형원아 너 이거 나랑 꼭 같이 봐야돼. 이거는 진짜 너도 재밌게 볼 수 있어. 머글도 재밌게 보는 거라 그랬어, 하면서 10년 째 변하지 않는 오타쿠 같은 소리를 하다가 한참을 떠들다가 말이 꾸욱 사라진다. 이민혁이 입 다무는 일이 흔하지 않은데.


“...왜?”

“야, 형원아.”

“어.”

“나 자주는 못 올라올 거야.”

“알어. 괜찮아.”

“마음이 슬퍼.”

“뭐가 슬퍼. 괜찮아.”

“못 보는 거 슬퍼.”


너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우리 열번째 겨울인데.

열번째 크리스마스인데.


그렇게 됐냐?


응. 그렇게 됐다.


그랬네. 

그래서 내가 이러나보다.


왜?


그게, 사실은.


응.


나도 마음이 조금 슬퍼.


이불에 푹 둘러싸여서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코 훌쩍거리니까 이민혁이 너 울어 형워나? 하고 소리소리를 질러서 아니라고! 안 울어. 왜 울어. 너 죽으러 가냐?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이게 다 이민혁 때문이었네.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10년을 지독하게 크리스마스에 붙어있었네, 우리. 


무기력함과 외로움의 원인이 미세하게 파악된다. 얼렁 짐 싸. 카톡해.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지? 하는 말에 웅웅. 하고 대답하는 이민혁의 얼굴이 훤하다. 전화 끊고 따끈한 아이폰을 명치 위로 올렸다.


천장에 별. 누가 대학생 사는 방 천장에 야광별을 붙여놔. 누구긴 누구야, 오타쿠가 한 짓이지. 내가 네 별이라고 중얼거리던 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아는 오타쿠가 있다면

이민혁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다면


혹시

오타쿠가 아닌 사람이 하는

오랜 사랑도

별처럼 반짝거릴 수 있나요.


나도 걔처럼 사랑할 수 있나요.


묻고 싶은 거였다.










열일곱의 크리스마스




그 당시 이민혁은 호불호가 아주 강한 고등학생이었다. 형원은 쟤는 진짜 뭐가 저렇게 싫은 게 많은지, 그리고 좋아하는 건 더 많은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때의 형원의 감정의 폭이 잔잔한 파도라면 민혁의 것은 폭풍과 해일을 동반한 쓰나미 어쩌구 그것이었다. 


그런 민혁의 극호 선생님은 단연 한국지리이다. 5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아주 유쾌했고 수업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연륜에서 오는 여유가 있었고 지그시 10대들을 휘두를 줄 아는. 오타쿠 이민혁이 좋아하는 ‘관록캐’의 표본이었다.


보통 보충 수업으로 언수외를 듣는 애들과 달리 이민혁이 극단적인 개인의 호불호로 한국지리 보충을 선택했고 옆에는 이민혁 설득에 그냥 귀찮아서 한국지리를 선택한 채형원이 있다. 수업 신나게 듣고 있는데 한국지리가 민혁을 살살 웃으며 불렀다. 옙! 하고 달려나간 민혁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노곤노곤. 히터에 지져지던 볼살 빵빵하고 뼈대는 바른 형원은 막판 10분은 기가 막히게 졸았고 그 사이에 부어서 봉긋해져 있었다. 이민혁이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서 형원의 팔을 채어 질질 끌고 나간다. 왜애. 하고 느리게 물었더니 신이 잔뜩 나있다. 압축을 두 번은 한 뺑글이 안경을 쓴 이민혁이 흐흐 하고 웃었다. 어, 아. 어쩐지 예감이 영 안 좋다.


“낼모레 장학사 온대.”

“아.”

“아니야. 들어봐.”


장학사의 꽃말이 대청소 아니였냐, 물으려고 하는데 한국지리가 대청소에서 민혁과 형원을 빼냈다는 것이다. 민혁은 몸에 비해서 커다란 손을 펼쳐 보인다. 약지에 걸린 키링. 손바닥에 키가 달랑달랑.


“뭔데?”

“우리 보고 트리 만들래.”


나 크리스마스 개좋아! 너무 좋아. 트리도 좋고! 

해리포터 미치고, 러브액츄얼리도 좋고.

산타도 좋고! 캐롤 진짜 좋음. 


나 별명 크친놈이잖아. 크리스마스에 미친놈. 크리스마스가 좋은 이유를 쉴 새가 없이 나열하던 이민혁은 진심으로 신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야자하기 싫어서 끄응 앓던 새끼의 기분이 나아져서 형원은 그러려니 했다. 


근데, 민혁아. 나는 왜 트리 만들어야 돼. 하니까 먼저 성큼거리며 걷던 이민혁이 뒤를 훌쩍 돌아본다. 왜긴, 너 키 크잖아! 되도 않는 대답에 형원이 죽을래. 입모양으로 물었다. 고작 몇 센치 차이니까. 절대 키 커서 데리고 온 거 아니라는 거 알았다. 


형원은 민혁의 ‘호’의 범위의 자신이 들어간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지랄을 품고 다니는 민혁의 수만가지의 호 중에 하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평생 불호로 변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민혁이 싫어하는 건 쳐다도 안 보는 성질인 걸 천천히 느릿하게 알아채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추운데. 귀찮은뎅.”

“대청소 하고 싶음. 하던가.”

“그건 시러.”


너랑 트리 만들께.


형원이 덥수룩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을 떼어낸다. 조금 삐질랑 말랑했던 이민혁이 웃는 소리 들으면서 자신이 이민혁의 불호로 가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형원은 실은 단촐한 식구로 외롭게 자란 편이라 살면서 트리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고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그런 조금은 쓸쓸한 생각을 속으로 몰래했다. 너무 날것의 속마음이라 입 밖으로 내기엔 좀 부끄러웠다. 이민혁과 너무 불알친구의 그것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쯤 이민혁은 태어난 이래로 가장 강력한 짝사랑의 시발점을 온몸과 마음으로 겪은 뒤였다. 같은 반 친구이던 채형원에게 한눈에 반한 뒤에 사랑을 하게 되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어차피 오타쿠라서 형원을 가지고는 성경을 쓰라고 해도 쓸 수 있을 지경이 되었으니까. 그치만 형원이가 내게는 성경 어쩌구 복음 어쩌구인 걸 부정할 순 없다. 박해당하던 내 세상을 지도 모르게 지켜주고 있는 것도 정말 좋았다. 굉장히 비밀스럽고 은밀한 마음들이 자꾸 푹푹 샘솟는 시기였다. 


학교에는 재작년에 맞춘 커다란 트리세트가 있었다고 했고 눈치 빠른 민혁은 그 트리세트가 빈약하기 그지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크리스마스 하나는 정말 진심으로 챙겼던 민혁은 집을 이 잡듯이 뒤져서 전구를 찾고 커다란 방울들과 사슴 인형을 찾아냈다. 다음날 학교에 이고 지고 왔더니 잠 덜 깬 얼굴의 채형원이 그게 다 뭐냐고 물었다. 귀찮은 거 하나는 질색하는 형원이가 싫어할까봐 좋아하는 인형들이라고 구라치니까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거 보고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쟤한테 나는 얼마나 오타쿠인 거야.


그리고 대망의 석식 시간. 진짜 대청소에서는 쏙 빠진 이민혁과 채형원 둘이 로비에 덜렁 서있었다. 창고의 먼지를 다 뒤집어 쓰고. 그리고 민혁은 커터칼 하나를 빼들고 정신없이 박스를 뜯고 있다. 집에서 볼 수 없는 규모의 트리. 보고 좀 당황한 건 민혁이었으나 오히려 담담하게 하나씩 꺼내서 나무가지를 하나씩 펼치기 시작한 건 형원이었다.


작은 사다리까지 동원되어서 나뭇가지 다 펼치는 데도 한나절이 걸렸다. 붉은 오너먼트, 눈송이 모양 하나씩 세심하게 붙이는 동안에 형원이는 꾸미는 거 말고 다른 일을 했다. 채형원이 은근히 손재주가 좋고 남자다운 구석이 있다. 아부지가 건축을 하셔서 그런지 어깨 너머 배운 게 있는 모양이었다. 창고에서 전선릴을 질질 끌고 오더니 콘센트에 연결해서 로비로 끌고 와서 전기 테이프로 마무리까지 꼼꼼히 하는 동안 이민혁은 트리가 묵직해질 정도로 뭔가를 걸고 매달고 빙빙 돌려 마무리했다. 전기 다 끌어온 채형원은 저 트리에 뭔가를 더하면 투머치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가만히 뒤에 서있다. 민혁은 집에서 들고 온 지 손바닥만한 별을 들고 사다리 위에 서있었다. 이거지. 이게 화룡점정이지. 이걸 해야 트리라고 할 수 있지.


별 들고 잔뜩 설레하다가 뒤 돌았더니 멀뚱하니 서있는 봉긋한 얼굴의 채형원. 그 얼굴 위로 별 겹쳐 보였다. 채형원! 내가 니 별이다! 명대사 시끄럽게 날리니까 채형원 표정이 똥씹은 얼굴이 됐다. 뭐? 하고 되묻는 얼굴을 보고 이민혁은 턱이 뚝 떨어진다. 


“너 내 남자친구에게 몰라?”

“그게 뭔데.”

“이강순! 내가 니 별이다! 이거 몰라?”

“이강순이 누군데.”

“…됐다.”

“네가 내 별이다, 도 아니고 내가 네 별이다는 무슨 말이야.”


그거잖아, 내가 너한테 그만큼 엄청나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그런 맥락인 거고 권은형은 진짜 이강순한테 별이긴 했잖아! 채형원은 궁금하지도 않을 그 서사의 맥락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채형원이 천천히 다가와서 미니 사다리 위로 올라온다. 위에 나 있는데. 너 왜 올라와. 이민혁 손에 들려 있던 별 쥐고 저기 꼭대기 위에 툭 올려 걸어내고는 됐지? 하고 묻는 형원이랑 너무 가까워졌다. 


이민혁은 ‘어.’와 ‘허어어’ 사이의 이상한 대답을 내놓고 형원이 사다리에서 내려가는 동안 어깻죽지로 안경이나 올려썼다. 와씨, 채형원 저 새끼. ‘내 남자친구에게’ 가캐하면.. 백퍼 권은형의 얼굴과 몸이다. 이딴 오타쿠 같은 거친 생각을 멈추지 못하면서. 


형원은 민혁이 좋아하는 조금은 무심한 얼굴로, 불 켠다? 하고는 물었다. 민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허리 숙여서 아래에 야무지게 숨겨 놓은 멀티탭의 스위치를 올렸고, 이민혁이 내내 둥글둥글 잔뜩 감아 놓은 전구들에 불이 들어오고 어두웠을 땐 과해보이던 오너먼트들이 빛을 품고 저마다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내내 어두웠던 로비, 전구 덕분에 환해진 형원의 얼굴, 내내 좀 귀찮고 무심해보였던 형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형원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 때 전구가 켜질 때 이민혁의 시선은 전혀 트리가 아니라 반 발자국 뒤에서 슬며시 올라온 채형원의 광대, 반짝이는 눈에 가있었다는 거. 


“이거 내가 처음 만든 트리야.”


형원은 저도 모르게 저절로 튀어나온 속마음에 대꾸하지 않은 이민혁이 불알친구 특유의 투박한 우정을 발휘한 줄 알았다. 실은 짝사랑의 저며오는 심장에 아무 말도 못한 거였다는 거. 그것도 채형원만 몰랐다. 이민혁은 그 때 또 다짐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꼭 크리스마스는 너랑 보낼래. 순정으로 돌돌 뭉친 그 마음을 꾹 삼킨 순간이었다. 확신에 확신을 더하는 짝사랑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형원이가 내 별을 뺏어 대신 걸어도 하나도 밉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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