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한은 보란 듯이 일부러 더 몸을 뚝뚝 꺾었다. 분명히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너만 싫냐? 나도 싫어. 수한은 허율에게 지지 않으려 더욱 뻔뻔스럽게 춤을 췄다.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허율이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그제야 수한의 우스꽝스러운 춤사위가 멈췄다.


“수한아, 너 이거 꼭 해!”

“아씨, 한수한 웨이브 개 잘 춰.”

“수한이가 1등이겠다.”


터져 나오는 호평에 허율 때문에 살짝 죽었던 기가 다시 살아났다. 수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자리에 앉았다.

 

“1등 하면 뭐 준대?”

“그건 몰라, 근데 이만큼 하면 뭐라도 주지 않을까?”

“역시. 장기자랑 1등은 내 거야.”


수한은 굳게 다짐했다. 꼭 1등 해야지. 꼭 1등 해서 권허율 앞에서 춰야지.



*



신입생 환영회는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진행했다. 신입생 환영회답게 1학년들과 그 위 학년 선배들도 함께하는 자리였는데 다행히 선배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티 때도 느꼈지만 선배라고 막 고압적으로 인사를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다.

 

환영회라고 준비한 것들이 있는지 대관한 술집에 인원이 모이자 출석 체크를 했다. 이름을 부르면 순서대로 나와서 통에 든 종이를 하나씩 뽑았다. 그리고 뽑은 종이 속엔 숫자가 적혀있었다.

 

수한이 뽑은 숫자는 16이었다. 숫자를 보고 나서도 어리둥절하게 서 있으니 환영회를 진행하는 선배가 수한에게 테이블 위에 놓인 숫자를 가리켰다.

 

단번에 이해한 수한은 숫자 16 표지판이 놓인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수한도 이르게 도착한 편이었는데 그 테이블엔 먼저 도착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

 

‘하필 왜 권허율이랑 같은 테이블이야.’

 

심지어 허율을 좋아하는 한나는 다른 테이블이었다. 들리지 않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아 함께 앉게 될 사람을 기다렸다.

 

“안녕. 신입생이지?”

“네, 안녕하세요!”

 

짧은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선배가 다가와 인사했다. 수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짧은 머리 선배는 수한의 과한 반응을 보곤 “아이고.” 하며 수한을 일으켜 세웠다.

 

“뭘 허리까지 숙여. 괜찮아, 편하게 해.”

“야, 이 정도는 해야지 선배한테.”

“아… 그, 그렇죠. 처음 보는 선배님인데요.”

 

수한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게 대우를 바라는 사람은 안경을 낀 선배 옆에 선 다른 남자 선배였다. 키 작은 남자 선배. 수한은 어쩐지 이 사람이 영민이 말한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안녕하세요. 저희도 16번인데.”

 

막 어색하던 차에 타이밍 좋게 다른 동기 둘이 합류했다. 수한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밀려 허율의 옆에 서게 되었다.

 

“신입생이지? 같은 테이블이네. 앉자, 앉아.”

 

허율과 수한, 그리고 다른 동기 둘과 선배 둘, 여섯이 모이자 안경을 낀 선배가 분위기를 이끌었다. 신입생들이 어떻게 앉아야 할지 몰라 주변을 서성이며 쭈뼛거리자 아예 자리까지 지정해줬다.

 

“우리 여자 셋, 남자 셋이니까 이쪽에 여자 셋, 건너편에 남자 셋이 앉으면 되겠다.”

“환영회인데 친목을 다져야지 무슨 성별로 자리를 나눠?”

“넌 조용히 하고 하라는 대로 해.”

 

생글생글하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받아쳤다. 그 기세에 키 작은 남자 선배가 괜히 눈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인사가 늦었지? 나는 과대 윤민이야. 그리고 얘는,”

 

과대 민이가 엄지로 옆에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나는 조 수일.”

 

입을 크게 찢으며 여자 후배들에게만 눈길을 줬다. 수한은 수일에게서 좋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 안 된다며 이내 그 느낌을 지워냈다.

 

“수일이는 저기 남자 후배들 옆에 가서 앉아. 나는 여기 여자 후배들이랑 앉을게.”

“진짜 그렇게 앉게?”

“앉으라면 앉으라고.”

 

민이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다시 명령했다. 한 번 더 목격한 차가운 모습에 수한은 제 몸이 다 움찔거리며 절로 기강이 잡혔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수일은 구시렁대지도 못하고 못생긴 눈을 옆으로 쭉 찢으며 마지못하다는 듯 수한의 옆자리로 향했다.

 

얼추 자리가 정해지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수한은 그래도 제가 이 넷 중에서 제일 외향적인 사람 같아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반갑습니다. 저는 한수한입니다.”

“편하게 하라니까.”

“어, 그래.”

 

건너편에 앉은 민이는 손사래를 치며 수한의 과도한 예의를 마다했고 수일은 대충 대답하고는 건너편에 앉은 여자 후배들을 훑어댔다.

 

수한이 스타트를 끊자 다른 여자 동기가 이어서 제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 미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크네.”

 

미나의 인사에 옆자리에 앉은 수일이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하더니 킥킥댔다. 수한만 들렸을 목소리에 수한은 싸했던 첫인상이 다시금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 여선입니다.”

 

이어 미나 옆에 있던 여선이 짧게 인사하자 이제는 남은 허율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러나 허율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수한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허율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뭐야.”

 

눈치 없는 허율은 인사 대신 수한을 노려봤다. 수한은 재빨리 태세를 바꾸어 제가 대신 인사를 했다.

 

“이 친구는 권허율이에요.”

“… 권허율입니다.”

 

그제야 제 이름을 말했다. 겨우 이루어진 통성명에 수한은 한시름을 놓았다. 수한은 왜인지 허율을 이 자리에 어울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외향적인 성격은 종종 이런 부작용을 낳았다.

“허율이는 잘생겨서 인기 많겠다.”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자 민이가 조용한 허율을 타겟으로 잡았다. 허율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네.”

 

뭐라고? 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보통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아니요.”라고 하지 않나? 황당할 정도로 뻔뻔한 대답에 수한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허율을 향해 돌아갔다. 수한뿐만 아니라 건너편 세 쌍의 눈도 허율에게 모였는데 그 세 쌍의 눈은 허율의 얼굴에 대답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남자는 얼굴이 아니라 능력이야.”

 

어깃장은 수한이 아니라 수한의 옆 수일에게서 터져 나왔다.

 

“어, 너만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곧바로 민이에게 한 방 먹었다.

 

“큽.”

 

민이 옆에 앉아 있던 여자 동기 둘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고 수한도 입술을 움찔거리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졸지에 웃음거리가 된 수일이 인상을 팍 쓰고 입을 열려는 찰나 민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말고도 거의 다 온 것 같네. 다른 테이블도 다 찬 것 같고? 난 앞으로 가서 환영회 진행해야 하니까 얌전히, 특히 너.”

 

민이 턱을 살짝 들어 끝으로 수일을 가리켰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고.”

 

굳었던 민이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신입생들에겐 한층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신입생들은 장기자랑 준비하자. 이제 곧 할거거든.”

“네.”

 

장기자랑이 자신 있는 수한이 제일 크게 대답했다. 민이는 픽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민이는 커다란 앰프 위에 얹어진 마이크를 잡고 자연스럽게 환영회를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한민국대 경영학과 신입생 여러분, 저는 2학년 과대 윤민이입니다.”

 

수한은 앞을 응시하며 크게 박수쳤다. 민이의 짧은 소개와 환영회 설명이 끝나고 곧바로 장기자랑에 들어갔다. 환영회의 목적은 친목이기에 술을 마시며 친목을 다지는 게 주였고, 그 전에 미리 분위기를 올리려 장기자랑 시간이 주어졌다.

“호명하면 짧게 자기소개하고 장기자랑을 하면 됩니다. 자기소개는 저번 오티 때 충분히 했으니까 이름만 말해도 됩니다. 장기자랑도 부담가지지 말고 짧게 해도 되고, 뭐든 괜찮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민이가 객석을 향해 물었다. 완전히 착석하지 않은 장내는 살짝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긍정의 환호성을 보냈다.

 

앞에서 사회를 보는 민이 대신 다른 선배가 미리 신입생들을 불러 모아 줄을 세웠다. 마치 줄 서서 예방 접종이라도 하듯 자기 이름을 말하고 준비한 장기자랑을 했다.

 

누구는 성대모사를 하고 누구는 춤을 췄다. 초영과 한나는 같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요즘 인기 있는 걸그룹 노래라 반응이 뜨거웠다. 수한도 박수치며 환호했다.

 

자리에 앉아 제 차례를 기다리던 수한은 앞에서 줄을 선 영민의 손짓에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수한보다 영민의 차례가 빨라 영민의 차례에 함께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수한,”

“저는 박영민입니다.”

“저희는 춤과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마이크를 뺏어 들었던 수한이 다시 영민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영민의 어깨를 잡았다. 영민은 기다렸다는 듯 큼큼 목을 가다듬고 남자 아이돌 노래를 불렀다.

 

“내게 말해, 사랑한다고. love love love.”

 

영민이 부른 노래에 맞춰 영민의 어깨를 쥔 수한이 강의실에서 보여주었던 말도 안 되는 웨이브를 췄다.

 

자신 있는 얼굴에 그렇지 못한 춤 실력은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냈다. 영민의 노래도 썩 훌륭하지 못해 오합지졸인 장기자랑이었다. 사실 자랑할 거리는 아니었는데 사람들을 웃기기엔 충분했다.

 

영민이 노래를 마침과 동시에 수한의 몸부림도 멈췄다. 짧은 개그 공연은 호평 속에서 끝이 났다.

 

“아, 한수한 개 잘해.”

“너도 잘했어.”

 

수한과 영민은 뜨겁게 악수하며 서로를 칭찬했다.

 

그 뒤로도 장기자랑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결같이 소극적인 태도에 수한과 영민을 이길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초영과 한나도 반응이 좋았지만 수한과 영민이 더 좋았던 탓에 수한은 마음 놓고 동기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하는 장기자랑은 허율의 차례도 돌아왔다.

 

‘쟤도 해?’

 

수한은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는 허율을 떠올리며 입술을 씩 끌어올렸다. 진짜 웃길 것 같은데? 아니다, 그러다 쟤가 이기면 어떡해? 수한은 황급히 마음을 바꿔 허율이 망하길 빌었다.

 

“저는 권허율입니다.”

 

마이크를 붙잡고 허율이 자기소개를 했다. 으, 진짜 재미없게 딱딱하네. 수한은 허율을 보며 몸서리를 쳤다.

 

허율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마이크를 민이에게 건넸다. 민이는 눈을 잠깐 굴리다가 허율에게 물었다.

 

“준비하신 장기자랑은 뭔가요?”

 

허율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툭 차 냈다. 수한은 그런 허율의 모습에 제 심장이 다 뛰었다.

 

‘저 미친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냥 동기들만 앉아 있는 자리도 아니고 선배들도 있는 자리에서 싹 바가지를 티 낸다고?

 

“저 이런 거 안 합니다.”

 

BL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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