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작 중 유혈, 폭력, 사망 등의 요소가 나옵니다. 감상에 유의하세요!



낭서에게 삶이란,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라고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죽지 못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보스로 군림하고 있는 조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느 곳보다 마초적이고 약육강식의 뒷 세계에 자연스럽게 몸담게 되었더라도 낭서는 무의미한 삶을 지속해갔다.

이렇다 할 자극 없이 이어져가는 삶에서 조직을 만들어 세운 것은 유흥에 불과했다. 어떤 일이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뜻대로 흘러가던 그에게 도덕성을 느낄 일이란 거의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주온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색다른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늘 차가웠으며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회색빛의 세상에서 주온은 유일하게 색채를 머금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평범한 일이었겠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낭서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별할 것 없던 일상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고 해야 할까.

주온은 자신이 베푼 온정이 특별하지 않았기에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낭서에게는 달랐다. 낭서는 그날 이후로 주온을, 그리고 그 상황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부하 조직원을 시켜 주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했다.

민간인을 사찰하는 것에 대하여 낭서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부도덕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그저 자신이 바라니, 해야 하는 일에 불과했다. 그래서 주온을 조직에 불러들일 기회가 다가왔을 때, 낭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제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낭서의 조직에 지게 된 빚은 그 막대한 이자율 때문에 쉬이 갚아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낭서는 그것을 이용해 주온을 갖가지 일에 투입했다. 크게는 타 조직과 전쟁을 치르는 것에서부터, 작게는 자신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에까지 주온을 살뜰히 써먹었다.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뭐, 어떻게든 해내야겠지만. 내 손에 뭐가 달려 있는지 잊지 말렴.”

“……예.”

이번에 낭서가 내린 명령은 타 조직 간부의 집에 침입해, 간부를 암살하고 중요한 장부를 훔쳐내 오는 것이었다. 유유자적한 자세로 제게 명령을 내리는 낭서를 보며 주온은 속으로 이를 으드득 갈았다. 당장에라도 저 가녀린 목을 쥐어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낭서의 손에 달린 제 아버지의 목숨을 생각하며 솟구치는 살심을 애써 참아내었다.

빚을 변제해주겠다는 말과 아버지의 목숨이 달려 있어서 억지로 낭서의 조직에 몸담게 되었다. 그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단 한 순간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주온이 유일하게 살의를 품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낭서였다. 그가 몸담은 조직의 보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아버지의 목숨줄을 쥐고 저를 마음대로 다루는 안낭서. 겉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으나 끝내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끼게 되더라도 머릿속으로는 그의 목을 부러뜨리고 칼을 심장에 박아 넣는 상상을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해왔다.

조직에 들어온 후 낭서의 아래에서 그의 명령에 따르며 점차 죽음에 익숙해지긴 하였어도 겉으로만 그럴 뿐, 속으로는 무뎌지기는커녕 점점 더 꺼려지고 그런 명령은 피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남아,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의 손에 제 아버지의 목숨이 달려있지만 않았다면 주온은 빚에 허덕일지언정 쉽게 다른 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이기적인 위선자라 소리칠 사람이 있을 것은 알았지만, 주온에게는 그 무엇보다 제 아버지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낭서의 명령을 받고 그의 방에서 나온 주온은 방문이 닫히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 조직 간부의 집에 몰래 침입하여 대상을 암살하고 중요한 장부를 훔쳐낸다는 명령은 말이 쉽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낭서가 명령을 내린 간부는 그 조직에서도 상부에 속한 인물이라, 인물 자체의 무력도 뛰어날뿐더러 그를 지키고 있는 조직원들의 수 또한 만만치 않았다.

늘 그랬지만, 쉽지 않은 작전에 한숨부터 새어나왔다. 차라리 장부만 구해오는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머뭇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암살이라니. 주온은 가만히 제 손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말갛게만 보이는 손에 그간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왔던가.

늘 그렇듯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으나, 주온은 오늘도 낭서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야심한 시각, 길을 나섰다.

어둠이 내려앉은 평창동의 고급 주택가 골목. 주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一色)으로 차려입고는 발을 내딛기 전에 자신의 옷매무새와 품 안에 숨겨둔 단검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얼굴이나 특징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 주온은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피해 담을 타 넘었다.

나무가 우거진 정원에 사뿐히 내려앉은 주온은 경비를 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린 뒤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알아봐 온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가만히 떠올리며 주온은 집안을 뒤지며 서재를 찾아 들어갔다. 서재를 뒤지며 장부를 찾던 주온은 달칵 소리를 내며 책장이 열리는 것을 찾아냈다. 이것저것 만져봤기 때문에 원리를 잘 알지는 못하였지만, 손쉽게 책장 안쪽의 비밀 문을 발견한 주온은 한결 안도한 모습으로 비밀 문 안쪽의 작은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책들을 발견했다.

“하… 시간이 없는데…….”

천장까지 빼곡한 책들을 발견한 주온은 낮게 한숨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하다가 가방에서 청진기와 연필을 꺼내 책더미로 가까이 다가갔다. 목표는 장부와 암살 대상. 빠르게 창부를 찾은 뒤 침실로 향하여 잠들어 있을 대상을 암살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끼이익.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언제 들킬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엔도르핀이 솟구쳤고 심장은 쿵쾅거리며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런 와중에 책더미를 뒤지며 장부를 찾아내려던 주온은 뒤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건 아주 크나큰 실착이었다.

“첩보가 사실이었군.”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주온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니, 닫혔던 비밀 문이 어느새 다시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암살 대상이 굳건히 서 있었다. 자신이 알아낸 정보 상으로는 잠들어 있어야 하는 시각임에도 대상은 자신의 앞에 있었다.

‘젠장, 정보가 새어 나갔나?’

짧게 생각한 주온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전부 바닥에 내팽개친 뒤,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굳게 쥐고 상대를 향해 뻗었다. 상대는 그런 주온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그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주온 또한 남자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컥, 으윽!”

격한 전투 끝에 끝내 남자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은 주온은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제 가슴에 박혀 부러져버린 칼날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바르르 떨다, 이내 축 늘어졌다. 맥박도 호흡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주온은 흐려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며 장부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고통이 느껴지는 몸을 움직여 빠르게 저택 안에서 벗어났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으니,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게 분명했다. 그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 낭서에게로 장부를 가져가야만 했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겨우겨우 저택에서 벗어난 주온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비틀비틀 자신이 몰고 온 차에 몸을 실었다. 점점 가물어져 가는 시야에 눈에 힘을 주어가며 낭서가 있을 본부까지 차를 몰았다.

털썩.

본부 건물에 도착해 겨우겨우 차를 멈춰 세운 주온은 반쯤 기어가듯이 건물 안에 들어선 뒤, 낭서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할 새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주온은 낭서의 앞에서 피를 울컥 토하며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장부를 올려놓았다.

“허억, 흐… 이제, 윽, 됐습니까?

피를 흘리며 제 방으로 들어선 주온을 보며 낭서가 눈을 크게 떴다. 슬슬 돌아올 때가 지났나 싶었는데, 이런 꼴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을 했던가. 쉽지 않은 임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인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너, 대체 왜…….”

테이블에 장부를 올려두자마자 그대로 풀썩 주저앉은 주온의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하얀 낭서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낭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피를 흘리고 있는 주온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면서 응급처치라거나 지혈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낭서는 주온의 가슴을 제 손으로 꾹 누르며 어떻게든 피가 멎게 하려 했다. 늘 나른하게 뜨고 있던 눈은 휘둥그레졌고 늘 여유 있어 보이던 자세는 빳빳하게 굳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주온의 가슴을 누른 낭서의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온이 낭서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가물가물해진 정신에 힘이 없어, 스치지도 못하고 아래로 털썩 떨어졌다.

“정신 좀 차려보렴!”

낭서가 가슴을 누르던 손에 힘을 더욱 주며 지혈하다가 눈을 감아버린 주온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주온은 그대로 기절해버려 낭서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낭서는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이 주온에게서 떨어지지도 못한 채 소리만 쳐댔다.

“뭐 하고 있니! 당장 닥터 불러와!”

열려 있던 문틈으로 낭서의 소리가 새어 나가자, 그제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온의 가슴에서는 여전히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주온의 얼굴에서는 점점 혈색이 사라져갔다.

“정신 좀 차려봐…….”

부하들이 불러온 닥터가 주온을 데리고 지하 수술실로 향할 때까지 낭서의 시선은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주온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닥과 손에는 새빨간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글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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