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하? 황녀저하! 잠시만..!”


율리안은 헤스턴 성의 광장에 마차가 당도하기 무섭게 에스코트도 생략하고 혼자서 마차에서 내렸다. 쫓아오는 호시티안의 다급한 목소리도 그녀에겐 닿지 않았다.


성큼성큼, 무서운 기세로 저택 앞을 지키고 있는 총괄집사 할스에게 다가간 율리안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헤스턴 공작 불러와. 지금 당장!!!”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할스는 대답을 할 정신도 없이 디어노레인을 부르러 갔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얼어붙은 공기에 바짝 긴장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황녀저하께서 벌써 오셨다고?”

“예, 그보다 일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디어노레인 헤스턴 공작까지도 한달음에 달려왔을 때에는 장담하건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숨조차 쉬지 못했다.


“헤스턴 공작!”

“1황녀저하..?”


하얗게 질려 창백해진 디어노레인과 비교 되는 새빨간 얼굴을 한 율리안 황녀는 그가 제 곁으로 다가오자마자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영지 시찰 중이시라고 들었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디어노레인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율리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율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울분을 쏟아냈으니까.


“내가 지금 어떤 모욕을 당하고 왔는지 알기나 해요? 북부의 주인으로서 당장 사과해요! 사과하지 않는다면, 북부의 모든 영지민을 황족모독죄로 처벌할 테니까!”


..황족모독죄? 율리안이 그 말을 입에 올렸을 때 디어노레인은 심장이 철렁였다. 그녀 뒤로 눈이 마주친 호시티안이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 역시 지금 상황의 심각함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자세히...설명해주시겠습니까.”

“.....”

“모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설명을 해주십시오. 부탁 드립니다.”


결국 디어노레인이 영주로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이게 최선이었다. 무슨 일인지 듣고 책임을 지는 것 말이다. 설사 그조차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도 영주라는 자리는 그러한 책임이 따랐다.


북부의 공작님.


11화. 고독한 황녀님.


“..그랬군요.”


무거운 적막 속에 디어노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 얼어붙은 공간 속에서 자유로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리리아와 루카스는 동석하지 못해 그의 곁에는 호시티안과 할스만이 있었다.


“.....”


겨우 입을 연 디어노레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딱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번 일은 명백히 헤스턴과 슬하의 영지 모두의 잘못이었다.


황족인 율리안 황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럴 의도이든 아니든 소문을 이용하여 모욕했으니 그녀의 말대로 황족모독죄로 전부 처벌 받아도 할말이 없었다.


디어노레인은 고민에 빠졌다. 소수의 희생으로 큰 피해를 막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과연 황녀가 만족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황녀저하.”


디어노레인은 안절부절하는 호시티안과 할스를 한번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안에게 다가갔다.


“북부의 주인으로서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이번 일은 영주인 제 책임입니다. 그러니 영지민들의 잘못까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에게 책임을 물어주십시오.”


결국은 디어노레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것이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대표로 나서서 모든 책임을 떠맡는 것.


“..아니오. 이번 일의 책임은 소문을 가장 처음 퍼뜨린 사람과 소문을 접하고 입으로 전한 사람 모두에게 물을 겁니다. 만약 어린아이라면, 그 부모에게.”

“저하..!”


하지만, 율리안 황녀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디어노레인을 얻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던 황녀가 그를 거절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공작. 이것도 자비라는 것을 모르겠어요? 나는 폐하의 명을 전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겁니다. 그대가 내 명예에 흠집을 낸 걸 이곳에서 며칠 머무는 것으로 넘어가려 했어요.”

“.....”

“그런데 그런 내게 당신들은 어떻게 했죠? 감히, 황족인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황족의 이름을 더렵혔습니다. 당장 북부의 영지민을 황족모독죄로 잡아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싸늘한 눈으로 꾹꾹 눌러 말을 내뱉은 율리안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일까지에요. 관련된 모든 자를 잡아들여 내 앞에 무릎 꿇리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부의 주인인 헤스턴은 황실에 충성하는 충신이 아닌 반역을 꾀한 반역자로 낙인 찍히게 될 테니까.”


탁,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히고, 그 자리에 남은 디어노레인, 호시티안, 할스는 할말을 잃은 채 한참을 침묵했다.


“정말 미안해, 디노..우리 영지 아이가 한 말이 원인이야. 그게 아니었으면 황녀저하도 몰랐을 텐데..”

“아니오. 제 책임입니다. 저도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더는 참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린 채로 사과하는 호시티안의 어깨를 두드려준 디어노레인이 할스에게 질문했다.


“할스. 자네도 알고 있었나? 그 소문.”

“..사용인들 몇몇이 그런 내용의 대화를 나누는 걸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헤스턴 성과 다른 영지들에게까지 퍼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군..알았네.”

“죄송합니다, 각하..”


몰려오는 배신김에 아찔할 정도로 뒷목에 피가 쏠리는 느낌을 받은 디어노레인은 부글거리는 속을 참아내고는 할스를 내보냈다.


“이제..어떡하면 좋지..?”

“황녀저하를 설득해야죠.”

“뭐? 하지만, 디노..무슨 수로 설득하려고?”

“글쎄요. 일단, 호시 형님은 레스트랭으로 돌아가십시오. 제가 최대한 다른 곳에 피해가 없도록 막아보겠습니다.”

“뭐? 야, 디노..!”


이어서 잔뜩 울상이 된 호시티안까지 보낸 그는 잠시 서성이는가 싶더니 집무실을 나섰다. 황녀에게 다시 찾아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그, 그런 일이 있었군요..”


리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루카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저하가 북부에 온다고 했을 때 일이 터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생각보다 크네.”

“.....”

“이제 어쩔 거야? 설마 사람들을 희생시킬 생각인 건 아니지.”

“..그렇지 않아. 하지만, 황녀저하 쪽에서 다른 선택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

“황녀저하의 태도가 그 정도란 말이야?”


디어노레인이 비비안 남매에게 찾아온 건 이번 일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사실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제가 황녀저하를 한번 만나봐도 될까요..?”

“리리아..?”


이야기를 전부 들은 리리아는 언제 놀랐냐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허락을 구했다.


“알 것 같아서요. 이러시는 이유를.”


그녀의 단호한 표정에서 루카스와 디어노레인은 어떠한 의지를 읽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조심하십시오. 지금 황녀저하께선 예민하실 테니까요.”

“괜찮아요.”


걱정스런 말에 싱긋, 웃어보인 리리아가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섰다.


--


하지만 곧 그녀는 걱정이라곤 없는 얼굴로 방긋 웃으며 율리안 황녀의 방 앞에서 걸음을 돌렸다.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였다.


“..걱정할 필요 없겠는걸?”


**


한편, 율리안은 방으로 돌아온 이후 울지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전처럼 울며불며 난리를 치지도 않고 고요히 분노하는 그녀가 낯설어 율리안의 수족들조차 숨 죽일 정도였다.


“저하..

“혼자 있고 싶으니 전부 나가 있어.”


축객령을 내리고,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든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런 상태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를 주체할 수 없어 폭발할 것 같았는데, 디어노레인의 사과를 받으니 갑자기 머리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차분해졌다. 

모든 게 다 부질 없이 느껴졌다.


“하지만..벌은 줘야 해..”


그럼에도 그녀가 소문과 관련된 자를 전부 찾아오라고 한 것은 기분과는 별개로 황족을 우습게 본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리 철 없는 황녀, 황실의 천덕꾸러기라 해도 황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은 있었다. 황실의 이름이 저자에서 오르내리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은 없으니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할까.


..혹시 외로워서일까?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다 자부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마음대로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신만큼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멋대로 살아서 벌을 받는 걸까.


북부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북부는 황도와 달랐다. 헤스턴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규칙과 삶의 모습이 존재했다.


이곳 북부에서는 황녀라는 신분도, 이름도, 무엇 하나 의미가 없었다.


북부의 사람들에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 오직 영주인 디어노레인과 그런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약혼녀인 리리아 비비안 뿐.


“...짜증나.”


결국 지금으로선 절대로 리리아 비비안을 이길 수 없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율리안은 훌쩍이며 차오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똑똑. 그때였다.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은 시녀나 유모인 줄 알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무시했다. 하지만 노크는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


“아, 진짜! 혼자 있고 싶다고 한 거 못 들었어?”


짜증이 난 그녀가 문을 벌컥 열자 그 문 앞에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서있었다.


“...뭐, 뭐야? 당신은..!”

“호시티안 레스트랭이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율리안 황녀에게 찾아온 손님은 호시티안 레스트랭이었다.


안녕하세요, 황녀저하.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

“황녀님과 잠시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왔어요.”


..뭐라는 거야. 내가 당신 얼굴이 보고 싶을 것 같아? 율리안은 답지 않게 다정한 말투를 하는 어른스러운 미소의 호시티안을 본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뭐야? 당장 돌아가지 못해? 난 당신 얼굴 보기 싫다고!”


그가 반가운 솔직한 마음과 다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도 그 감정이 왜 생겨난 건지 몰라서 혼란스러워서였다.


“잠시면 된답니다. 아주 잠시만요.”


그러나 그는 그대로 문을 닫으려는 걸 막아 세우고는 끈질기게 졸랐다. 결국 항복 선언을 한 건 율리안이었고, 그녀는 호시티안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건방지게..흥, 당신 진짜 짜증나. 알아?”

“그럼요, 잘 알죠.”


정말이지 눈엣가시 같고, 짜증나는 사람.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율리안은 홀로 중얼거렸다.


**


다음날. 운명의 날이 밝았다.


율리안 황녀는 어제의 화려한 차림과 달리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헤스턴 성 사람들 앞에 섰다. 다섯 명씩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황녀를 향해 고개 숙이고 있었다.


“.....”

“.....”


율리안은 하룻밤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조용히 침묵했고, 곁에 선 디어노레인 역시 소리 없이 고요한 상태를 유지했다.


“저하. 다른 영지의 사람들은 거리가 있어 아직 오지 못했습니다.”


디어노레인이 율리안에게 조용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역시 하룻밤 사이 결심을 굳힌 것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알겠어요.”


율리안은 디어노레인을 한번, 떨고 있는 헤스턴 성의 사람들을 한번 바라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또각또각,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무릎 꿇은 사람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소문을 가장 먼저 퍼뜨린 사람이 누군가요?”


황녀의 물음에 무리가 웅성였다. 어른들의 눈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가장 첫 줄에 있던 아이에게 시선이 쏠렸다. 벌벌 떨면서 일어난 아이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질끈 감은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인 상태였다.


“그래..너로구나.”


율리안의 손이 아이의 얼굴로 향했다. 무리에서 작게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모욕 당한 황녀가 아이의 뺨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차, 찰스입니다..”

“..흠.”


갈색곱슬머리에 녹색 눈, 그리고 주근깨가 박힌 뺨을 느릿하게 훑은 율리안이 손을 들었다.


딱-! 단단한 걸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있은 후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뜬 찰스가 욱신거리는 이마를 매만졌다.


“아야야..”


그 자리의 모두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고, 그곳엔 새침한 얼굴로 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율리안이 있었다.


“흥, 이번만 봐주는 거니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알았지?”

“네, 네에..잘못했어요..”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만족한 듯 미소를 지은 율리안이 뒤돌아서 디어노레인에게로 돌아왔다.


“저하..?”

“이걸로 됐으니 사람들은 전부 돌려보내세요.”


갑자기 태도를 바꾼 황녀에 어리둥절한 얼굴의 디어노레인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율리안이 한마디를 덧붙인 것은.


“..그리고, 어제 레스트랭 영지를 둘러보던 중에 돌아왔으니까 다시 가겠어요. 그리 전해요.”


붉게 물든 귀와, 찰나지만 누군가에게 향했다가 돌아온 시선을 디어노레인은 분명히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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