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린에게 전화가 왔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 했는데 타이밍이 좋았다.

“여보세요?”

“나야. 오늘도 늦어?”

“아니. 지금 가는 중이야. 버스 탔어.”

퇴근했다는 말에 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대화를 나누었다. 딱히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하루종일 지쳐있던 내게 힘이 되기엔 충분했다.

“그래서, 네가 빨래며 뭐며 다 해 놨다고?”

얹혀사는 대신 집안일을 다 해 놨다며 자랑하듯 말하는 모습이 기가 막혀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반면에 린은 꽤 진지한 말투였다.

“왜? 내가 못할 줄 알았어?”

“어.”

“날 대체 뭐로 보는 거야.”

잔뜩 풀 죽은 목소리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뭘 웃어.”

“그냥.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응. 왜?”

“집안일 해 줬으니까 밥 사줄게. 먹고 싶은 거 있어?”

내 물음에 그는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는지 대답을 망설였다.

“음. 그냥 아무거나 사와.”

“그게 제일 어려운데.”

“진짜 아무거나 괜찮아.”

마침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 휘청거리며 버스 출구 쪽으로 갔다.

“그럼 내가 알아서 사 갈게.”

“응. 난 분리수거나 하러 가야겠다. 끊을게.”

“그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나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시내로 향했다. 동네에 먹을 만한 음식점이 많지 않아서 뭘 사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참이나 고민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문득 새로 생긴 초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상 그가 초밥을 잘 먹었던 것 같긴 한데. 한참이나 초밥집 앞을 기웃거리며 메뉴를 살피다가 결국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아서 오래 걸리긴 했지만 초밥 상태가 꽤 좋아 보여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포장한 초밥 2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퇴근길이 이렇게 기대되는 건 독립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집에 가서 그와 저녁을 먹고 쉴 생각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폭풍전야에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열었다. 린이 나를 반겨주리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이런 내 기대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현관에 달린 노란 센서등만이 나를 비춰줄 뿐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 곳곳을 살펴보았다.

“최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란다까지 나가 봤지만 어디에도 린은 없었다. 대체 어디를 간 걸까. 분리수거를 하러 갔다기엔 그와 통화를 마친 지 거의 1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고작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데 구두를 신고 갔을 리가 없지 않은가.

거실 소파에 앉아 그가 갈 만한 곳을 생각하던 중이었다. 불안과 두려움에 눈앞이 흐려지던 찰나,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너무 정신없어서 보지 못했나 보다.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한 채 쪽지를 펼쳐 보았다. 급하게 휘갈긴 글씨체만 봐도 최린임을 알 수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얼마 안 걸려. 미안해. 먼저 자.’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친놈. 나갈 거면 전화라도 하고 나가던지. 핸드폰도 없으면서 이런 쪽지 한 장 남기고 사라지면 내가 용서할 줄 알았나 보다.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래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아니니까 일단 기다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나타나는 사람이 바로 최린이니까. 어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다시 돌아올 거다. 분명 그럴 테니까, 너무 불안해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손에 떨렸다. 나는 결국 소파에 앉은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몇 모금 피우고 나서야 속이 가라앉았다. 생각해보니 그와의 관계는 항상 이 모양이었다. 잘 되는가 싶다가도 금세 끊어지는 관계인데 고작 며칠 함께 일상을 나눴다고 내가 너무 자만했던 모양이다. 허무함에 한숨이 나왔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 술이나 마시고 잘 참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보란 듯이 초밥에 맥주를 마셨다. 초밥과 맥주 둘 다 오랜만에 먹는 거라 그런지 아주 맛있었지만 따로 빼놓은 린 몫의 초밥을 보자 괜히 마음이 껄끄러워졌다. 결국 몇 점 먹지도 못하고 맥주만 들이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야근이나 할 걸 잘못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맥주 4캔을 비우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린이 언제 올지 몰라 신경 쓰여서 잠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맥주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쪽잠을 자던 중이었다.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렸다. 놀란 마음에 헉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잠결에 휘청대면서도 현관으로 나갔다.

“최린?”

대답이 없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 줬음에도 문을 두드리는 거에서 뭔가 수상하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챘어야 했다. 하지만 맥주 몇 캔이 뭐라고 머리가 울렁거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

하지만 현관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최린이 아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초면의 사람 3명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술이 확 깨버렸다. 황급히 현관문을 닫았지만 맨 앞에 서 있던 누군가가 문틈 사이에 발을 끼워 넣었다.

“얘기 좀 하죠?”

어려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리 정신없다 해도 그 ‘얘기’라는 게 별반 유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 수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경찰인 거 알고 찾아온 거냐 말하려던 찰나, 여자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건장한 성인 3명이 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서은 형사님 맞으시죠?”

여자가 현관문을 잠그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센서등이 켜졌다. 여자가 입은 와이셔츠 안쪽에 핏자국을 확인한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딱 봐도 린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린이 갑자기 집을 나간 것과 이 사람들이 찾아온 게 관련이 있는 걸까?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뭐라도 떠보기 위해 여자에게 물었다.

“최린은?”

내 물음에 여자가 정색하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지었다.

“와. 역시 형사님이라 그런가? 눈치 빠르네. 안 그래?”

여자를 따라온 남자 2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키득댔다. 반면에 나는 이 상황이 웃기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걱정하는 건 좋은데, 지금은 형사님 코가 석자라서요.”

“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이 바닥 구르면서 흉악범 검거만 수백번이니 조폭들이야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이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당황했던 탓인지, 남자 손에 전기 충격기가 들려 있는걸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목덜미에 차가운 전기 충격기가 닿았고 이내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몸과 정신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너져내렸다.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정신을 완전히 놓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분명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눈을 떴다. 조폭들이 끌고간 거니 버려진 창고 아니면 폐공장일 거라 예상했지만 내가 있는 곳은 웬 사무실이었다. 그것도 꽤 깔끔하고 넓은 사무실. 어디인지는 둘째치고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온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설마설마했는데 팔과 다리가 묶인 채였다. 미친놈들.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헛웃음이 다 났다. 그러자 내 옆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외쳤다.

“누님. 일어난 모양인데요?”

그 부름에 아까 봤던 단발머리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미소지었다.

“똑바로 세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건장한 사람 2명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나는 손이 뒤로 묶인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고개를 드니 단발머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아픈덴 없고?”

그가 뱀같이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부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너 뭐야.”

여자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색하고 내 턱을 잡아끌더니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깟게 뭐가 좋다고.”

그가 중얼거렸다. 딱 봐도 이제 스무살로 보이는 애새끼 주제에 뭐? 홧김에 침이라도 뱉을까 했지만 소란 피워봤자 내 손해일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사람보고 이깟거라니.”

“그럼, 뭐라 불러줄까?”

“아까부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수현아.”

의미 없는 말싸움 도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주변이 하도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사무실 안쪽 책상에 누가 앉아있다. 그 말 한마디에 단발머리는 내 얼굴을 밀치곤 열중쉬어 자세로 섰다.

“예. 회장님.”

회장님? 저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특정 인물이 떠올랐다. 린의 어머니라던 여자. 그 여자가 벌인 짓인가?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린이나 나 둘 중 하나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시끄러우니 뒤로 물러나 있어라.”

“네.”

단발머리가 나를 한 번 노려보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내 회장이 구두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던 중,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서 있는 중년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회장이라는 여자는 젊었을 때 외모가 궁금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꼿꼿하게 핀 허리와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꽤 인상적이었다.

“매번 말로만 들었거든. 딸 애인까지 직접 신경쓰기엔 내가 너무 바빠서.”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담배를 물자마자 옆에 서 있던 단발머리가 재빨리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어두운 사무실에 새빨간 담뱃불이 확 터졌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내가 누군지는 아나?”

회장이 독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내가 빨아들이는 담배 연기는 달기 그지 없는데 남이 뱉는 건 왜 이리 지독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야 대답했다.

“당연히. 린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지만 초면부터 반말하는 사람에게 딱히 존댓말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도 그건 마찬가지인지 상관없다는 듯 반말로 대꾸했다.

“그래? 그 애가 나에 대해 뭐라 말했는데?”

“무서운 사람이라던데? 고아인 자기 데려다가 15년 동안 부려먹었다고.”

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린이 대놓고 저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봐 온 게 있으니 린도 분면 저렇게 생각할 거라 예상하고 한 말이었다.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거 보면 그쪽이랑 많이 친한가보네.”

회장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뭐. 이런 잡담 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그쪽이 여기 왜 왔는지는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다. 린이 조직 일에 집중 못 하고 오히려 망치기까지 하는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 거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추측이었기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일단 기다렸다. 그러자 그는 담배를 빨아들이며 말했다.

“그쪽 때문에 린이 정신 못 차려서 손해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불렀지.”

역시 내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없다. 고작 이런 거 때문에 나를 납치해 온 거야? 하여튼 조폭 새끼들. 기막힘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거의 참았다.

“그래서 불렀다고. 물론 맞지. 맞는데, 그게 정말 나 하나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뭐?”

“원인 제공은 전부 당신이 했다는 거, 당신도 알고 있잖아.”

잔뜩 구겨지는 그의 미간을 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조용히 머리 숙이고 기어도 모자랄 판에 너무 돌직구를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만 태웠다. 덕분에 금방이라도 숨막혀 죽을 것 같은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냥 혀 깨물고 죽어버릴까 싶던 찰나, 회장이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멱살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나이에 비해 힘이 어찌나 세던지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낮게 속삭였다.

“내 딸이 푹 빠진 사람이라 그래서 좀 기대했더니. 고작 이런 건방진 짭새였어? 얼굴도 그저 그렇고. 하긴. 린이 예전부터 사람 보는 안목이 없었지.”

이 인간들은 왜 아까부터 내 얼굴 가지고 지랄인 걸까. 불쾌함에 몇 마디 쏘아붙이려는데 그가 나를 내팽겨치는 바람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충격에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그가 담배 하나를 더 꺼내 물며 말했다.

“린을 포기해. 그러면 그쪽이랑 린 둘 다 살 수는 있을 거야. 내가 약속하지.”

하여튼 내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없다. 분명 예상했던 일인데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어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똑바로 앉은 뒤 대답했다.

“내가 포기하면 린은 어떻게 되는데?”

“예전처럼 살겠지.”

“그쪽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네?”

“그렇지. 그쪽은 그쪽대로 잘 살고. 예전처럼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손해 볼 건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마음 하나 접으면 둘 다 살 수 있는 건데.

“예전처럼?”

“그래.”

“웃기지 마.”

내 대답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와 각자 사는 삶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와 함께 나누는 일상의 감정을 알아버린 이상,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린은 돌아가지 않아. 그쪽이야말로 다 큰 애를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말해. 당신도 린이 두렵지? 점차 자라는 그 애가 두려운데 억누를 방법이 없으니까 괜히 나를 끌어들이는 거잖아. 아니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하이힐을 신은 발로 나를 걷어차버렸다. 굽이 어깨를 짓누르자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비명을 꽉 삼킨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다음 말은 신중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딱히 더 할 말도 없는데.”

그가 혀를 차며 발을 거뒀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주변에 있던 조직원들이 내 팔을 잡고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형사라 그래서 똑똑할 줄 알았는데.”

“당신도 마찬가지야. 똑똑할 줄 알았는데 고작 나랑 린 하나 떼어놓자고 이런 짓을 벌여? 조폭들은 원래 머리가 잘 안 돌아가나? 하긴. 윗대가리가 이렇게 꼰대인데. 옛날에나 쓰던 이런 무식한 방법밖에 모르겠지.”

“저 새끼가...”

내 말에 단발머리 여자가 괜히 울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주먹이 날아와 턱에 꽂혔다. 제대로 맞았는지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단발머리가 주먹을 더 휘두르려는 찰나, 회장이 그를 말리고 나섰다.
“됐다. 일단 숨은 붙여놔. 죽일지 말지는 린이 판단해야 하니까.”

회장의 입에서 린이 언급되니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어 두통을 참고 회장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린은 어디 있는데?”

다급한 나와 달리 회장은 느긋하게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 애 걱정은 안 해도 좋아. 안 죽일 테니.”

하긴. 제 딴에는 애지중지 키운 귀한 딸일 테니까.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이 상황인 만큼 린의 안위부터 확인해야 했다.

“어디 있냐고!”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회장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버르장머리하고는. 수현아.”

“네.”

단발머리 여자가 내게 다가와 내 머리채를 잡고 책상에 내리꽂았다. 팔다리가 묶여있어서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이거 놔!”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뭐?”

“죽기 싫으면 닥쳐. 지금 그쪽 목숨줄 쥔 게 누구인 줄 알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회장의 눈빛에서는 분명 살기가 느껴졌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회장이 겉옷 주머니에서 작은 리볼버를 꺼내 든 걸 보고 나서야 이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었음을 깨달았다.

차가운 총구가 미간에 닿았다. 나는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며 회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쏘게?”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내 말에 회장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들어있지 않은 리볼버가 찰칵 소리를 내며 한 번 돌아가더니 제자리에 멈췄다. 탄창이 비어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식은땀으로 등이 흥건히 젖고 말았다.

“왜 쏘겠어. 사무실 지저분해지게. 이건 그냥 경고야. 죽은 듯이 있으라는 경고. 알겠니?”

회장이 총을 거두고 조직원들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나는 그들이 내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어딘가로 끌고 갈 때까지 반항 한 번 하지 못했다. 그저 힘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두려움과 동시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린이 위험한 상황인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물이 되어버렸다. 그에게 가야 하는데. 린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 애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속이 타들어 갔다.

머릿속으로 린의 이름을 부르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십 번, 수천 번이나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른 채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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