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우영은 반쯤 넋을 놓은 표정으로 관장약과 태오를 번갈아 보고 있었어. 이 적나라한 것을 보고 있자니 덜컥 겁도 났지.


똥꼬에 수박을 끼워 넣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말. 뽕이라도 맞은 거처럼 황홀한 쾌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인터넷에서 뒤지고 뒤져서 찾아낸 ‘그것’의 후기 글이 뇌리를 빠르게 스치고 있었어.


끔찍한 고통과 황홀한 쾌감의 갭은 너무 크잖아. 도대체 어떤 말이 맞는 거지? 그 중 어떤 걸 믿어야 하는 걸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 황홀한 쾌감도 굳이 지금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도 같은데...이걸 꼭 해야 해?


태오는 눈까리는 별이라도 따다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이며, 우영을 보고 있었어. 이걸 꼭...해야 하나보다. 문득 억울함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어.



“근데..왜 내가 이걸 해야 하는 긴데?”

“이걸 해야, 위생적이라카드라.”


 

그걸 묻는 게 아닌데. 태오는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머릿속에 할 생각으로 가득해서 우영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어.


 

“아니 그니까 내 말은, 내가 왜 위생적인 행위를 해야지만 하는 기냐고.”

“위생적이믄 좋은 기니까.”


 

이 새끼, 일부러 이카는 기네! 태오는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싶은 것 같았으나, 우영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어.


물론 위생적이고, 청결한 건 좋은 거지. 태오도 나름대로 많이 알아보고, 공부를 해 온 티는 났어. 이걸 대견하다고 해야 할지, 여우같다고 해야 할지.


 

“내가 서방이라매?”


 

태오의 눈동자가 일순 빠르게 흔들렸다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어. 우영이 이 순간에 서방이니 마누라니 하는 카드를 꺼내들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지.


 

“근데 왜 내가 박히는 쪽인데?”

“니...혹시 공부하고 왔나?”


 

아차, 싶었어. 우영의 눈동자도 아마 흔들렸을 테지. 그리고 그걸 태오가 못 봤을 리는 없었을 테고.


박히지 않으려는, 두 놈의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어.


 

“상식이지, 상식!”

“싫나?”


 

태오가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어. 어데서 약을 파노!


태오가 불쌍한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지. 거기에 마음이 흔들린 건 아니었어. 생각을 해보면, 박히지 않는 쪽이라면 박아야 하는 쪽이란 거잖아. 자신이 없는 건, 그 쪽도 매한가지였거든.


 

“그라믄 내가 할까? 내는 니랑 이어질 수 있다믄,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데..”


 

우영이 뛰는 놈이었다면, 태오는 나는 놈이었어. 지금 이 상황에 저런 표정과 저런 말투로 그렇게 말하면, 고집을 부린 우영이 굉장히 옹졸해지는 것 같았으니 말이야.


 

“오늘 내 생일인데...”


 

태오가 쉬지 않고, 콤보를 가해오고 있었어. 여우같은 새끼.


 

“이게 생일이랑 뭔 상관인데?”

“아니, 누가 상관있다캤나...그냥, 그렇다는 기지...”

“후우...내가 아프다카믄...그만해야 된다..”


 

태오는 빠르게 침울한 표정을 거둬내고 빙긋 웃었어. 고개도 격하게 끄덕여보였지.


우영은 은연중에 자신이 깔리는 쪽이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었어. 태오는 아마도 그런 선택지 따윈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지.


우영은 관장약 상자가 구겨지도록 꽉 쥐고, 갈아입을 팬티와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어.


뚜껑 닫힌 변기에 앉아 관장약 상자에 적혀있는 설명서를 읽는데,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지.


기어이 그 강을 건너게 되는구나...지금이라도 문을 박차고 열고 나가, 우린 아직 어리잖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어.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아서, 우영은 깊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지.


원래 누구 부탁을 잘 들어주거나 마음이 그리 약한 타입이 아닌데, 태오에게는 이상하게 약해진단 말이지.


그러다 문득 침울한 척 연기하던 태오의 표정이 떠올랐어. 우영은 피시실 웃음이 작게 터져 나왔어. 이 정도면 중증인데, 아무래도 우영은 자각이 없나봐.



**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에 한참 있었더니, 우영은 종국쯤엔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지.


태오가 얌전히 기다렸냐고? 그 성격 급한 놈이 그럴 리가.


세어보진 않았지만, 못해도 열 번은 욕실 문을 두드렸을 걸?


드디어 모든 것을 마친 우영이 욕실 문을 벌컥 열었지.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태오는 황급히 담배를 끄고 안으로 들어왔어.


뭉개뭉개 흰 수증기가 쏟아져 나오는, 욕실 문 중앙에 따끈따끈하게 익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우영은, 마치 산신령처럼 서 있었어. 하얀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벌게져 있었지. 게다가 어쩐지 비장한 표정이었어.


빨갛게 익은 토마토 같은 우영의 얼굴은, 손가락 끝으로 살짝만 눌러도 과즙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 태오는 그런 우영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어.


우영이 욕실에서 나름 자신과의 사투를 하며 고생하고 나온 이 타이밍에 웃으면, 우영이 애써 먹은 마음을 돌릴 것 같아서 웃음을 꾸욱- 눌러 참아야 했어.



“축축한데, 옷은 뭐 할라고 껴입고 나왔노.”


 

우영은 대답을 하지 않고, 비틀비틀 걸어왔지.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생각도 없이, 침대 위에 쓰러지듯 풀썩 드러누워 버렸어.


태오의 말대로 온 몸이 축축한 느낌인 건 물론이고, 머릿속에도 수증기가 꽉 채워진 듯 축축한 느낌이었지. 근데 이거 할 때마다, 매번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가.


관장 자주하는 거 별로 좋지 않다고 하던데...그럼 자주 하지 않으면 되는 거겠지.


이런 걱정이나 하고 있는 게 웃겼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어. 정확히는 웃을 힘도 없었던 거였지.


태오는 팬티 한 장 달랑 들고 씻고 오겠다며, 수증기가 가득 차 있는 욕실로 들어갔지. 우영은 잠시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어.


아직 현기증이 남아 있었기에 머리통이 지잉- 울렸지.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기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어.


우영이 욕실에 들어가 있을 때, 열 번이나 문을 두드렸던 성격 급한 놈인데.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나올 리가 없잖아. 분명히 물이랑 인사만 하고 후다닥 나올 게 뻔하지.


우영은 침대 위에서 구르듯 내려온 뒤, 제 가방 속을 뒤적였어. 잠시 후 가방 밑바닥에 깔려있던 빨간색 공단 리본을 꺼냈지.


화장대 앞으로 간 우영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해서 넘겼어. 나름 세심한 손놀림으로 턱 아래부터 리본을 둘러 정수리에서 매듭을 지었어.


채준이 했던 말을, 실현하기 위함이었지.


 

‘강태오 셔츠라도 입고 머리에 리본 하나만 매믄 딱 선물이겠네. 아, 바지는 안 입는 기 뽀인뜨인 건 알제?’



바로 이 말!


처음엔 이한겸 같은 소리하네, 라고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었어.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이벤트일 것 같았거든. 변태 끼 다분한 태오가 딱 좋아할 만한.


우영은 리본이 풀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냈어. 그런 뒤, 태오가 오늘 폴라 티 위에 입었던 흰색 셔츠를 집어 들고 팔을 끼워 넣었지.


생각했던 것보다, 막 헐렁한 느낌은 아니었어. 그래도 우영에겐 크긴 컸지.


우영은 서둘러서, 입고 있던 츄리닝 바지도 훌렁 벗었지. 채준이 바지를 입지 않는 게, 포인트라고 했잖아. 착실하게 이행하는 중이었지.


셔츠에서 태오의 체취가 풍겨와, 괜스레 기분이 야릇해졌어. 마치 태오에게 안겨있는 것 같다고 할까.


생일이라고 진짜 별 거, 별 거, 다 해 준다, 싶었지. 그러면서 내년 자신의 생일을 벌써부터 기대하는 우영이었지.


태오가 머리에 빨간 리본을 두르고, 바지를 벗은 채, 우영의 셔츠를 입고 있으면...음, 다른 건 다 빼버리고, 머리에 리본만 두르라고 해야겠다, 그건 귀여울 것 같으니까, 라고 속으로 뇌까리며 키들 거렸어.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리본 매듭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어. 욕실 문이 벌컥 열렸고, 곧 트렁크 팬티만 입은 태오가 왜인지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어. 가운데 호랑이 얼굴이 위엄 있게 새겨져 있는, 다소 화려하고 부담스러운 팬티였지.


국제시장에 널어놓고 파는 거 보고, 저런 거 사가는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요기 있었네. 아주 가찹은(*가까운) 곳에.


역시 우영의 예상대로 물이랑 하이파이브만 치고 나왔나봐. 우영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가뜩이나 커다란 태오의 눈이 땡그랗게 더 커져 있었지.


꿈에서도, 아니 정정할게. 태오라면 꿈에선 생각해봤을 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이 이벤트는 성공인 것 같아. 


우영의 행색을 본 태오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코뿔소 뺨을 칠 정도로 콧김을 뿜어대고 있었거든. 채준의 말대로 하길 잘했네, 싶어서 약간 뿌듯해진 우영이었어.


그러다 시선에 뭐가 걸려, 눈을 아래로 스윽 내리는데...


맙소사...! 남의 거시기 텐트를, 쌩눈으로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팬티 가운데 박혀 있는 호랑님이 코 수술이라도 한 듯 높아만 지고 있구나...


태오가 텐트를 친 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어. 우영은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밀었지만, 두 걸음도 못가서 태오에게 붙잡혀 버리고 말았어.


툭- 태오의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미지근한 물방울이, 우영의 콧등 위로 떨어졌어. 불시에 와 닿은 촉감에 우영은 움찔, 어깨를 작게 떨었지.


태오는 손을 들어 우영의 한쪽 얼굴을 감싸 쥐었어. 엄지를 밀어 우영의 콧등에 떨어진 물기를 닦아주며, 태오가 입을 열었어.



“진짜 선물은 이거였네. 인제 포장지 풀어 봐도 되나?”





몽상가 夢想家 꿈을 꾸는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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