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라는 영 입에 붙지 않는 대사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내년에는 꼭 자신이 극본을 고르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제 옆에 서서 다른 동기의 연기를 지켜보는 차고운을 보고, 연기가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힘을 뺀 차고운의 연기는 이제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내 세상에는 당신뿐이오.”

 

 연보라의 말에 차고운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 

 

 “이제는 이 생명까지 내 세상이야.”

 

 차고운의 등에서 느껴지는 연보라의 체온은 포근하고, 낯설었다. 자기 팔 사이로 들어온 손이 배 위에 얹히는 것을 가만히 느끼던 차고운은 느리게 눈을 열었다. 자신들을 지켜보던 동기들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침을 삼키고 있었다.

 

 “더는 욕심을 내지 마세요. 폭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것에 그저 몸을 맡기세요. 거스르거나 탐욕스럽게 굴지 말고, 당신의 세상에 머물러줘요.”

 

 연보라는 가늘게 떨리는 진동을 손바닥으로 오롯이 느꼈다. 손끝부터 타고 온 파동은 연보라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갈비뼈 안쪽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마지막 연습이라는 것이 아이들을 더욱 진지해지도록 만들었다. 

 

 “신도 여자라 이 폭풍우를 막을 수 없나 보군! 가자, 선원들은 모두 노를 저어라! 저 폭풍도 우리를 거스를 순 없다. 저 너머에 고기떼가 있다. 저것만 잡으면 우리는 모두 어부의 아내 같은 사람과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가자!”

 

 ‘선장’의 대사가 들려왔다. 연보라는 눈을 꼭 감고, 듣기 싫은 대사들을 지웠다. 앞으로 세 번만 더 하면 끝나는 무대. 가을에 학교 축제에서 올리는 무대는 이것보다 나을 것이다. 나이 든 남자가 골라낸 극본이 아니라 더욱 희망차고, 괜찮은 이야기가 무대에 오를 것이다. 연보라는 눈앞에 다가온 무대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어부’가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는 대사나 마찬가지였다.

 

 “이 파도가 나를 막을 수 없지! 몰아쳐 봐라. 내 고기떼를 몽땅 실어 나를 것이니. 입을 다문 신 따위, 약해지는 폭풍 따위가 나를 막을 수는 없다.”

 

 어정쩡하게 선 연보라가 나약한 ‘어부’를 연기했다. 무언가를 꼭 잡은 듯, 힘을 준 주먹에는 얇은 핏줄마저 불거지고 있었다.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도록 연보라는 힘을 주고 있었다. ‘신상’ 앞의 차고운이 바짝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배를 부여잡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음향을 담당한 동기는 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더욱 키웠다. 

 

 연보라는 차고운의 목소리에 실린 힘이 자기 어깨를 떠미는 느낌이 들었다. 거스를 수 없는 무언가가 연보라를 밀어내는 기분이었다. 차고운이 저렇게 우는 일이 있을까? 의문이 든 연보라는 갈 곳 잃은 눈을 돌려 차고운의 어깨를 응시했다. 에어컨이 힘차게 돌아가며 내는 웅웅 소리와 낡은 스피커에서 울리는 지직 소리, 무료 파일을 내려받아서 틀어둔 파도 소리와 천둥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얼핏 창밖을 본 연보라는 바깥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막 자신의 연기를 마친 차고운이 몸을 일으켜 세웠고,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연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창밖에서 우렁찬 천둥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랐는지, 차고운이 연보라에게 한발 다가서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맞닿은 팔에서 무언가 돋아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 연보라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차고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서로 맞닿은 팔뚝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까처럼 주먹을 꼭 쥐었던 연보라는 몸에서 힘을 풀고, 파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

 

 고등학교 3학년 학생도 아직 등교하지 않은 이른 시간, 해가 이제 막 떠올라 아스팔트를 달구는 시간, 연극부 아이들이 하나둘 교문 앞에 도착했다.

 

 “보라야, 너 왜 이렇게 땀을 흘려?”

 

 동기의 따스한 목소리에도 연보라는 오돌오돌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마다 연보라의 이마나 목에 손을 올리며 걱정했고, 지도 교사는 그런 연보라를 보며 심란해했다. 연보라는 애써 웃으며 모두를 안심시켰고, 때마침 택시 한 대가 교문 앞에 멈추어 섰다. 택시 안에서 내린 이는 차고운과 부장 선배. 두 사람을 보던 아이들은 저마다 두 사람 관계를 정의하고는 소리 높여 인사했다.

 

 “어디 아파?”

 

 제 곁을 스치며 남긴 차고운의 질문에도 연보라는 미동조차 없었다. 차고운은 그런 연보라를 보며, 뱃속이 꿈틀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유독 자기에게만 차가운 연보라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전날 연습을 마치고 비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보던 연보라가 우산을 찾았고, 누군가 가져간 건지 보이지 않는 우산을 한참이나 찾던 연보라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섰다. 차고운도 마찬가지였었는데, 중앙 현관을 웅장하게 받친 두꺼운 기둥 사이에 선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다. 차고운 손에 들린 우산을 곁눈질하던 연보라가 모르는 척 말을 건네기 직전, 차고운은 연보라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는 우산을 펼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꽤 무거운 비가 내리는 주말 저녁,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고운이 물웅덩이를 밟는 찰박거리는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듣던 연보라는 체념하고 빗속을 걸었다. 그래서였다. 연보라가 차고운에게 차갑게 구는 이유.

 

 2학년 선배들까지 모두 도착하고, 하나씩 차에 올랐다. 부장은 마지막까지 차고운 곁에 서서 배웅했다. 표면적인 관계라지만, 두 사람의 ‘선후배’ 관계는 매우 돈독해 보였다. 가장 마지막에 탄 차고운이 두리번거리자, 연보라가 가방 하나를 품에 안으며 창가에 붙어 앉았다. 차고운은 망설이다 연보라의 옆에 궁둥이를 붙였다. 딱 하나 남은 자리가 연보라의 옆자리라는 사실은 차고운도 달갑지 않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차고운은 연보라에게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이것은 연보라도 마찬가지였다. 연극이 끝나면 연극부를 탈퇴할 생각이나 하며, 연보라는 눈을 감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창가에 머리를 기대자, 정수리를 통해 그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긴장이 풀린 연보라는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차고운은 창을 넘어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좌석을 빼곡히 채워 앉은 아이들은 저마다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잠을 청했다. 정원을 가득 채운 승합차 안에는 아이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안대마저 챙겨왔다. 흔들리는 차 안에 꼿꼿하게 앉아있던 차고운은 스르륵 드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왼쪽 어깨에 내려앉은 차고운의 머리를 슬쩍 본 연보라는 다시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동시에 슬며시 눈을 뜬 차고운은 차창에 비친 연보라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 꿈이라 여겼다. 

 

 여름날의 단잠에서 깨지 못한 아이들을 태우고, 승합차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승합차가 도착한 곳은 미니버스와 승합차들이 빼곡히 자리해 저마다 분주한 컨벤션 센터 앞이었다. 차 사이를 비집고 걸어간 아이들은 양손 가득 든 짐을 챙기며 들뜬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대기실로 쓰는 큰 회의실에서도 각 구석에 자리 잡은 다른 팀을 살피며 분장 선생님께 분장을 받았다. 챙겨온 의상을 입고, 리허설을 대기하는 동안에도 연보라는 몸을 오들오들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아?”

 

 리허설에 오르기 전, 무대 뒤에 선 차고운이 연보라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심지어는 가늘게 떠는 연보라의 어깨를 손으로 안기까지 했다. 

 

 “응.”

 

 퉁명스레 답하는 연보라를 보며, 차고운은 어금니가 시큰거렸다. 혀가 부풀어 입안을 가득 채운 듯,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전날, 한 우산 아래 서기 멋쩍어 몇 번이고 입안에서 굴리던 말을 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같이 쓸래?’ 연보라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옆에 선 연보라에게 건네지 못한 말. 

 

 “야, 내 팔 잡고 올라와.”

 

 그래서 이렇게나마 둘러대는 마음.

 

 “됐어.”

 

 연보라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통증에 눈을 꾹 감으며, 차고운의 손길을 거부했다. 학교 이름이 들리고, 맨 앞에 선 실장 선배의 힘찬 함성과 함께 무대에 오르자…. 연보라는 모든 고통이 녹아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객석이 보이지 않는 어둠, 머리 위로 내리는 조명, 이 무대 위에 자신만 존재하는 기분이 들자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동시에 자신에게 손을 내민 차고운을 보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뜨거워진 눈가를 검지로 꾹 눌렀다 떼어낸 연보라는 배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섰다. 아무렇게나 헝클어둔 머리 위에 대충 올려 쓴 모자를 벗어낸 연보라는 양손에 모자를 쥐고, 무기력하게 걸어가 차고운의 손을 잡았다.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제 손을 잡아 오는 연보라의 뜨거운 손을 느끼며, 차고운은 극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으려 입술을 꼭 물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단지 긴장해서라 여기며, 연보라의 눈을 마주했다. 

 

 리허설이 끝나고도 두 시간을 대기해 순서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저마다 지친 어깨를 마주하고 대본을 숙지하기 바빴다. 리허설에서 발견한 자잘한 실수를 본 무대에서는 하지 않으려 긴장한 아이들의 코에서는 뜨거운 김이 쏟아졌다. 머리꼭지까지 뜨거워지는 기분에 연보라는 약을 삼키고도 한참이나 물을 들이켰는데, 나중에는 차고운이 그 손을 잡아내려야 할 정도였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다문 연보라를 보며, 차고운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허리를 끈으로 조인 원피스가, 한 번 입고 버릴 옷이라 저렴한 것을 산 것이 문제였는지…. 영 불편했다.

 

 연극제는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마지막 무대까지 오르고, 시상을 마치고 나니 이미 어둠이 내린 뒤였다. 연보라는 이 지긋지긋하던 극과 안녕이 후련하면서도 아쉬웠다. 연습과 달리 실제 무대에서 준비한 것의 반절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연보라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반면 연보라와 달리 차고운은 연습보다 훨씬 뛰어난 연기를 보였다. 이에 앞에 선 연보라도 홀릴 정도였는데, 차고운은 연보라의 눈빛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연기가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들 얼른 차에 타.”

 

 라이트를 밝힌 차, 아이들은 검은 그림자가 되어 하나둘씩 차에 올랐다. 검은색 벨벳으로 감싸여진 상장을 하나씩 품에 안은 아이들이 아침에 앉았던 자리 그대로 앉았다. 연보라는 답답한 무대화장을 맨손으로 조금 문질러내다 포기하고는 눈을 감았다. 창에 기대려던 연보라가 낯선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차고운이 연보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 나게 예뻐, 자꾸 신경 쓰여, 그냥 거슬려. 연보라의 머릿속과 달리 차고운의 눈은 차분해 보였다. 이따금 스치는 가로등 불빛이 오가는 차창, 그 창을 바라보던 차고운은 연보라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이 한마디가 뭐라고, 연보라는 어제부터 지속된 통증이 경감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 끝났다. 이제 연극은 끝났으니까,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방학을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한 연보라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여름의 더위가 에어컨 바람 앞에 지워지는 밤, 고속도로를 달리는 승합차 안에서 연보라와 차고운 두 사람은 단잠을 청했다. 아침과 달리 조금 더 달콤하고, 포근한 잠이 덜컹거리는 차 속에 남았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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