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잘 먹었어.”

 

아일렌은 깔끔하게 그릇을 비우고 수저를 내려두었다.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잘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만들었던 크림스튜는 도저히 먹지 못할 맛이었는데. 아일렌은 심각한 표정으로 빈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덩달아 카린은 표정이 굳었다. 잘 먹었다니, 설마 아닌 걸까. 설탕과 소금을 헷갈리지는 않았는데. 카린은 잔뜩 찌푸린 아일렌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아일렌…. 혹시 맛없었어?”

 

“아니. 맛있었는데.”

 

카린의 물음에 그녀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카린의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기사단이 사용하는 식당에서 주는 음식보다 훨씬. 간도 적절했고, 많은 종류의 재료가 들어간 것이 아닌데도 맛이 깊었다. 혼자 오래 살아서 이렇게 요리를 잘하게 된 건가. 맛있었다는 아일렌의 대답에 카린은 마음을 놓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표정이 왜 그래?”

 

“그냥…. 어떻게 만들면 이렇게 맛있어지나 싶어서.”

 

“...크림스튜 레시피 알려줄까?”

 

“진짜? 그럼 좋고.”

 

아일렌의 대답에 카린이 잠깐 침묵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고 있길래 설마 요리가 맛이 없었나 걱정했는데, 정반대일 줄이야. 늘 표정이 딱딱해서 몰랐는데 아일렌은 생각과 표정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구나. 카린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카린이 레시피를 알려주겠다고 하자 아일렌은 바로 수락했다. 요리는 끔찍하게 못 하지만, 좋은 레시피대로 한다면 자신의 요리도 조금은 먹을만해 지지 않을까.

 

바로 좋다며 대답을 하는 아일렌을 보고 카린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오늘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게 몇 번째인지. 하지만 즐거웠다. 꼭 그녀와 친구가 된 것 같아서. 카린은 종이에 레시피를 적어 아일렌에게 건넸다. 그녀는 레시피가 적힌 종이를 잘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답례로 다음에 뭐라도 살게.”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 아일렌은 다음을 약속했다. 이런 훈훈한 일상이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약속이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카린의 집을 나와 시장으로 향했다. 거리를 걷는 발걸음은 느릿하고 가벼웠다. 다음으로 갈 곳은 미용실이었다. 아일렌은 긴 분홍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했다. 아일렌은 머리카락이 제 외모에서 가장 봐줄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이나 소중하게 기른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닿았지만, 지금 아일렌은 긴 머리칼을 볼 때마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던 순간만이 자꾸 떠올랐다.

 

이제는 아일렌만이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미래이자 과거. 그녀는 그 사라진 시간을 기억해야 했지만, 그 시간에 매여 살 수는 없었다. 아일렌은 아직도 현실이 현실 같지 않았다. 그녀는 한순간에 모든 걸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녀에게는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이 현실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했다. 이곳이 꿈속이라면 시간이 흐르지 않을 테고, 당연히 머리카락을 잘라도 자라지 않을 테니까.

 

딸랑, 미용실 문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한번 울렸다. 종이 다시 한번 울렸을 때는, 아일렌의 머리카락은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다. 귀밑으로 내려온 분홍색 머리칼이 이제는 어깨에 닿지 않고 가볍게 흔들렸다. 가벼워진 무게가 조금은 어색했다. 아일렌은 손으로 짧아진 머리칼을 몇 번 매만지다 은화 한 개를 품속에 넣었다. 설마 머리카락이 돈이 될 줄이야. 분홍색 머리카락을 본 미용실 주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사고 싶다고 얘기했고, 아일렌은 흔쾌히 허락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돈이 생겼다.

 

기분이 좋아진 아일렌은 모처럼 시장으로 향했다. 평소에 그녀는 체중조절을 위해 군것질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의 검술은 빠르고 변칙적인 것이 특징이었고, 그런 검술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몸이 가벼워야 했다. 하지만 가끔 정도는 괜찮겠지. 아일렌은 시장에서 꿀과 생크림을 듬뿍 넣은 와플을 하나 샀다. 한 입 베어 문 와플은 엄청나게 달았다. 어릴 때는 어떻게 이게 맛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일렌은 와플을 버리지 않고 전부 먹었다.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낸 그녀는 단맛이 감도는 입안을 씻어내기 위해 새콤한 주스까지 사서 입에 물었다. 이렇게 먹으면 살찌겠지. 가뜩이나 오늘 훈련도 빼먹었으니. 그런 생각을 잠시 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붕붕 저었다. 가끔은 이런 날도 필요했다.

 

아일렌은 본인이 바뀌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효율적이지만,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소한 군것질은 비효율적이지만 모처럼 단것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거면 된 것이다. 주스까지 다 마신 아일렌은 기지개를 쭉 켰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황궁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건….”

 

황궁, 기사단 숙소로 들어온 아일렌은 제 침대 옆 책상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기사단 지원서였다. 오늘 훈련을 빠졌으니 제이나가 대신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그녀가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으려니 제이나가 방안으로 돌아왔다. 아일렌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제이나에게 물었다. 회귀 전 제이나는 3기사단에 들어갔었다. 이번에 그녀는 3기사단으로 들어갈 생각이니, 아마 같은 기사단 소속이 되겠지.

 

“제이나, 넌 어디에 지원할 거야?”

 

“글쎄다. 내 실력이나 인맥으로 1기사단이나 2기사단은 무리일 거고. 3기사단에 가야겠지.”

 

그러고 보니 제이나 역시 평민이었다. 그래도 제이나의 실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아일렌은 펜을 내려두었다. 그녀의 지원서에 적은 곳은 3기사단이었다. 그녀의 지원서를 흘끗 본 제이나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일렌의 실력은 유명했다. 정식 기사가 되기도 전에 마스터가 되었으니까. 게다가 1황자와 1황녀에게 직접 스카우트를 받기까지 했다. 아일렌은 역시 사생아에 평민이니 인맥은 없지만, 그 압도적인 실력 때문에 자신과 달리 선택지가 많았다. 그런데 3기사단이라니.

 

“황녀 전하께 답을 드린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3기사단으로 가려고?”

 

“응. 황녀 전하를 주군으로 정한 건 맞아. 하지만 바로 친위대에 들어가진 않으려고. 적어도 1년 정도는 3기사단에 있을 거야.”

 

“... 괜찮겠어?”

 

아일렌은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특유의 싹수없는 성격과 자존심 때문도 있었다. 아일렌의 신분은 평민이긴 하지만 그녀가 귀족의 사생아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장 저 분홍 머리도 오린지 오니엘인지 뭔지 하는 백작가의 특징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기에 아일렌은 평민과도, 귀족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나마 귀족들은 귀족의 체면 어쩌고 하면서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평민인 기사들은 대놓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리고 시비를 건 놈들은 죄다 작살이 났었다.

 

제이나는 아일렌의 성격이 얼마나 까칠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야 성격이 좋은 편이라 그녀와 룸메이트를 하면서도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만, 그녀가 3기사단에 들어간다면 분명 마찰이 생길 것이다. 아일렌의 성격도, 재능도 분명 남들에게는 아니꼽게 보일 테니까. 제이나는 아일렌을 아직 친구라고는 여기지 않았으나 같이 밥 먹고 사는 룸메이트의 정 정도는 있었다.

 

“괜찮아. 내가 선택한 거니까.”

 

“... 진짜 변했구나, 너. 뭐 잘못 먹었다거나 죽을 때가 다 된 건 아니지?”

 

아일렌은 제이나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카린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지. 자신이 변한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모두 자신의 업보였지만, 똑같은 말을 하루에 두 번이나 듣게 될 줄 몰랐다. 저것도 나름대로 걱정을 해주는 것이니 고마워해야 할 테지만.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녀는 튼튼했다. 이미 한 번 죽었으니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말이 아주 많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카린하고 똑같은 말을 하냐…. 걱정이 되는 건 알겠지만 아주 멀쩡해. 그냥, 좀 바뀌고 싶었을 뿐이야.”

 

“카린이 누군데?”

 

“내 동네 친구.”

 

“네가 친구가 있어? 처음 알았네.”

 

“...”

 

할 말을 잃은 아일렌이 잠시 침묵했다. 친구가 많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친구가 없었다. 카린 역시 한동네에서 같이 자란 사이이기에 동네 친구라고 하긴 했지만, 그녀는 카린에게 친구라는 말을 직접 들어본 적은 없었다. 제대로 된 친구 한 명 없는 인생이라니. 정말 잘못 살았구나, 아일렌. 그녀는 새삼 허망함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야, 친구 없으면 뭐 어때! 혼자서도 잘 살잖아, 너는.”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본 제이나가 황급히 분위기를 수습했다. 친구가 없다는 말에 화를 내면 냈지, 설마 이렇게 우울해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혼자서도 잘 산다는 제이나의 말에 아일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혼자서 잘 살아왔다. 친구 따위, 동료 따위 거치적거린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혼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잘 살아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 그래, 그랬지.”

 

“그치. 그러니까, 음. 괜찮을 거야!”

 

제이나는 태연하게 아일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떻게든 우울해진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제이나를 잠시 바라보던 그녀가 한가지 생각이 났다는 듯 얘기했다. 제이나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싹수없는 자신과 3년이나 룸메이트를 했으니 말 다 했지. 아일렌은 그런 제이나를 돕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자 행운은 그녀의 재능이었다.

 

“그래, 위로 고맙다. 그러고 보니 실력이나 인맥이 부족해서 다른 기사단은 무리라고 했지? 인맥은 내가 못 도와주지만, 실력은 도와줄 수 있는데.”

 

“아일렌 네가 도와준다고?”

 

갑자기 도와주겠다니.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절대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제이나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황실 기사단에 들어올 정도의 재능은 있다. 하지만 천재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다. 딱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능. 그런 재능을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인 것은 맞지만, 제이나는 때때로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그녀가 도와준다면 벽을 넘지는 못해도 가까이는 가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산을 끝낸 제이나는 흔쾌히 아일렌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제이나는 자신과 다르게 눈이 부실 정도의 재능을 가진 그녀가 부러웠다. 하지만 질투하지 않았다. 질투도 어느 정도 급이 비슷해야 할 수 있지. 아일렌의 재능은 아예 제이나와는 급이 달랐다. 그러나 그녀의 재능은 자신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훈련하는 거, 도와줄게. 어차피 1년 동안은 같은 기사단 소속이잖아.”

 

그러니 우리, 잘해보자고. 아일렌은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제이나는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일렌의 재능은 분명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수련량 역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일렌은 기사단 내에서 가장 독한 놈이었다. 그냥 안 도와줘도 된다고 할 걸 그랬나. 제이나는 불길한 미래를 직감하고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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