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아름다운









1. 절벽 위의 수족관






수심은 생각보다 깊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짙푸른 색에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우시지마의 이마에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수조 주변엔 가림막이 하나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이 정도라면 물도 뜨겁게 달궈질 법 한데, 마치 레이어가 나뉜 것처럼 수면 가까이로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느껴지는 한기는 기이하기까지 했다. 수질을 관리한다는 건 유명한 얘기였지만 그래도 가능한 기후는 자연에 맞춰준다고 들었다. 여름의 바닷물은 미지근하다. 위치를 고려한다 해도 이상한 건 맞다.


사실 이곳을 수조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완전히 인공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바다에 거대한 판을 사방으로 짜 넣어 인위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만든 것뿐이다. 일반적인 바다라면 그조차 불가능했겠지만. 우시지마는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던 안내서의 글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바다를 눈에 담았다.


바다 위의 작은 바다. 거칠게 깎인 절벽 위에 펼쳐진,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일, 시작과 끝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바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발견된 바다는 존재를 아는 모든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 누구도 쉽게 드나들지는 못했다. 바다가 맞냐 아니냐 한동안 의견이 분분했을 정도로 기이한 구조를 가진 탓에 하루에도 몇번씩 규칙없이 뒤집히는 해류로 인해, 물고기들조차 길게 머무르지 못하고 빠져 나가는 위험 구역이기 때문이었다.


워낙 흐름을 예측하기 어려운 탓에, 판을 짜 넣기 위해 위치를 잡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렸다 했다. 복잡한 해류 덕에 끊임없이 순환되어 얼음장같이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는 해수는 소금기만 없었더라면 당장 식수로 사용해도 좋을 만치 깨끗했다. 망망대해도 아닌데 사방으로 보이는 수평선은 마치 몽골 평원의 지평선처럼 시야가 탁 트이게 만들어 주었다. 어차피 빠지면 죽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그 끝을 알 수 있다는 자체는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한계가 있는 바다는 한계가 없는 바다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굳이 그런 수고를 들여 인간의 영역으로 만든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정작 이 절벽 위에 만들어진 수족관이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네, 생각보다 오기가 어렵지 않더군요.”
“하긴, 우시지마가도 보통은 아니니까요. 바다는 좀 구경하셨어요? 어때요? 첨에 생각하신 거랑 비교해봤을 때, 비슷한가요?”
“음…. 생각한 것보다 더….”
“…더?”
“이상하네요.”


덤덤한 목소리에 여태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던 회색 머리 남자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이내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시지마는 다시 고개를 돌려 큭큭거리며 웃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가 그리 웃겼는지 한참을 웃던 남자는 이내 손가락으로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털어냈다. 바닷가에서 일한다고는 믿기지 않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게 새까맣고 커다란 눈 아래에 눈물점이 콕 박혀있었다. 샌님처럼 매끈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을 보아하니 그리 쉬운 인생을 산 것 같지도 않다. 남자는 애써 참으려 한 웃음이 다시 새어나오는지 한참을 몸을 돌린 채 소리죽여 웃다가 겨우 수습하곤 다시 돌아서 우시지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해요. 그렇게 말한 분은 처음이라.”
“…괜찮습니다.”
“늦었지만 제 소개부터 할게요. 안녕하세요. 절벽 위의 수족관 관장이자 연구소 소장, 스가와라 코우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포토그래퍼, 우시지마 와카토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주잡은 손의 힘이 보기보다 강했다. 가늘게 휜 눈매가 순식간에 우시지마의 위아래를 훑었다. 만만한 사람은 아니군. 다소 기분 나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목적은 다양했다. 개중에는 본래의 목적을 숨기고 뱀의 혀를 내미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경계심이 하늘을 찌르겠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간의 시선을 잽싸게 갈무리한 스가와라는 우시지마의 손을 한번 힘주어 꽉 쥐는 것을 마지막으로 제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곤 입고 있던 흰 가운에서 손수건을 꺼내 익숙하게 손을 닦아내며 말했다.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연구 관리를 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서요. 우시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셨죠?”
“네. 전시회 일정이 잡혔는데, 새로운 테마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테마라면, 바다인가요? 아니면….”
“….”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는 역시 하나뿐이겠죠.”
“…맞습니다.”
“좋아요. 안내할게요. 다만 제가 불러드릴 수는 없어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미리 전달받은 안내서는 두툼한 책자였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얄팍한 팜플렛은 대외용에 불과한 것으로, 진짜 안내서는 알음알음 다리를 놓아 신청하고 또 몇 단계의 엄중한 심사를 받고난 다음에야 받을 수 있었다. 책자는 자체적으로 분권이 가능했는데, 두께가 얇은 1권과 그 세배쯤 되는 두께의 2권, 이렇게 두 권으로 나뉘었다. 그중 1권은 수족관에 관한 내용으로, 배포되는 팜플렛에 담긴 내용을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진짜는 2권이었다. 그리고 우시지마가 원하는 내용 또한 2권에 실려 있었다.


2권의 내용 절반 이상은 깨알 같은 주의사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시지마는 한글자라도 빠뜨릴 새라 꼼꼼히 하나하나 머릿속에 밀어 넣었다. 행여나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이곳에 온 의미가 사라진다.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게 벌써 이주 전의 일이었다.


우시지마의 단호한 대답에 스가와라는 앞서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사방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눈이 깊고도 곧았다. 만나게 해줘도, 괜찮겠지. 다른 때 같았으면 몇 번이고 의심하며 본인은 모를 테스트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구심을 갖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명문가의 자제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절벽수족관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이 있고 명예가 있었다. 손이 빈 사람은 애초에 자신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면 익히 들어왔던 그에 대한 말들 때문일까.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가와라는 떠돌기만 하는 근거 없는 소문은 믿지 않는다. 주고받은 메일을 제외하면 오늘이 우시지마와 첫 대면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안정은 무엇인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가와라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내가 괜찮다고 해도 뭐. 그 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용 없겠지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인적 없는 해변이었다. 하얀 백사장 대신 까맣고 거친 바위로 뒤덮여 험난하기 짝이 없는. 그 자체로 출입금지구역이나 다름없는 곳. 수조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투명한 길마저 없었다면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배를 타고 오면 암초에 부딪힐 것이고 헤엄쳐서 온다면 급류에 휩쓸릴 것이다. 바다에 사는 것들조차 드나들기 힘들 것 같은데, 놀랍게도 바다는 다른 곳보다 활기를 띄웠다. 눈에 보이는 생물이 없는데도 유난히도 청량하고 생명력 넘치는 바다의 모습에 우시지마는 메고 있던 카메라가방의 끈을 꽉 붙잡았다. 당장에라도 카메라를 들고 무어라도 담아내고 싶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그러나 설렘 사이로 차곡차곡 새긴 규율이 파고들었다. 허락이 없이는, 그 무엇도 기록하지 말 것. 첫 번째 장에 적혀있었던가. 차라리 중간에 지나쳐 온 연구실에 가방 채로 맡길 걸 그랬다. 손이 근질거렸다.


“일단 저희는, 이쯤에서 만나는 게 보통이에요.”
“보통이라고 하면….”
“저희는 연구를 목적으로 정기적, 그러니까 2주에 한 번 정도 이곳에 와서 기다립니다.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시간은 다소 불규칙해도 이제껏 거부를 당한 적은 없다고 보시면 되고요. 그동안은 이 기간에 맞춰 방문하시게끔 조치하고 되도록 낯설지 않은 환경을 조성해드리려 노력해왔죠. 그런데..”
“….”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가장 최근은 공교롭게도, 어제였네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스가와라의 눈은 깊은 바다 속을 향하고 있었다. 밝은 잿빛의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정신없이 흩날렸다. 시선을 따라가자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물이 작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신호가 오면 알려드릴 수 있는데, 들어가서 기다리실래요?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꽤 시간이 걸릴 텐데요. 어쩌면 다시 2주가 걸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각오는 하고 왔습니다. 안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게 저에겐 더 힘들 것 같고요.”
“지루하긴 하겠죠. 여긴 달리 할 것이 없으니까요.”
“신호가 온다고 무조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들었습니다.”
“아….”
“구경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만나고 싶어서 온 거죠.”
“…그렇군요. 다들 그렇게 말은 합니다만.”


내내 살짝 올라가 있던 스가와라의 입 꼬리가 어느새 내려왔다. 기본적인 얼굴상이 부드러운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외용 미소가 지워진 얼굴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내로라하는 연구원들을 다 제치고 올라왔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손을 마주잡을 때부터 얼핏 짐작했지만 역시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란 확신이 서자 우시지마는 도리어 신뢰가 감을 느꼈다.


“어쨌거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인간과의 신뢰관계가 깨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저희의 몫이 될 테니까요.”


연구사적이든, 아니든 말이죠.


웃으며 보태는 말이었으나 가라앉은 표정만큼이나 차갑게 날이 서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멋대로 이곳을 휘저어대려 했을까. 자신 또한 나름의 욕심을 안고 왔으니 그에겐 남들과 다를 바는 없어보이리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우시지마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쉰 스가와라는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 뒤돌아섰다. 그리곤 지금껏 함께 걸어온 길로 홀로 되돌아가던 스가와라는 잊고 있던 말이 생각난듯 아, 작게 중얼대고는 우시지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세미를 만나게 되면 안부 전해줘요. 지난번엔 고마웠다고.”


과연 당신이 그에게 인사라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2. 세미瀬見






가만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질리지 않았다. 그동안의 촬영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던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우시지마는 몇날 며칠을 가만히 숨죽이고 엎드려 셔터를 누를 순간만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아니 많았다. 원하는 때를 기다리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들에 품고 있던 감정은 기대요 설렘이었다. 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게다가 환경이 어땠냐고 하면, 10분만 걸어가면 연구실에 돌아가 깨끗한 물과 정갈한 음식을 먹을수 있는 지금에 비하면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여차하면 산소통을 메고 뛰어들 각오도 하고 온 참이었기 때문에.


한편으론 이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보단 적당히 눈을 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경계심이 강한 만큼 시선을 두려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다른 곳을 보는 사이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다면. 우시지마는 갈등에 휩싸였다. 상황이 쉽다고는 해도 이곳에선 위장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언제든 숨을 수 있는 상대와는 다르게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조금 걷기로 했다. 벌써 3일째였다. 우시지마는 그간 아주 짧고 불규칙하게 연구소를 몇 번 오간 것을 제외하면 내내 한자리에만 있었다. 자리를 비웠다 돌아올 때마다 물 냄새가 났다. 그래서 더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인 물에서 나는 특유의 악취에 가까운 물비린내가 아닌, 아주 차갑고 짭조름한 내음을 맡고 있노라면. 자신을 괴롭혀 온 그 모든 것들이 단숨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몸을 낮추고 있던 탓에 온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연구소 방향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바닷바람이 점점 더 거세어졌다. 이대로라면 계속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오늘은 철수해야하나. 사람이 내딛고 있을 수 있는 발아래 물살이 고스란히 보이는 길은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게다가 흔한 난간조차 없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리는 순간 손도 쓰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깊은 바다에 빨려 들어갈 것이 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시지마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점점 기세를 더하며 높아지는 파도가 크게 철썩이는 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어느새 컴컴해진 바다 위 하늘 아래에서 마치 플래시가 터질 때처럼 순간적으로 번쩍인 빛 너머로, 무언가가 스쳐지나간 것은.


태어나서 이토록 가슴이 뛴 적이 또 있었던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우시지마는 방금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반짝이는 물살과 함께 날아오른 것의 행방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 수면 위를 매끄럽게 파고들던, 두갈래로 갈라진 먹빛 꼬리의 잔상만은 선명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일부러일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어느새 다시 잠잠해진 파도를 이상하게 여길 겨를도 없이 우시지마는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딱 세발자국 남겼을 때, 그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겁먹고 도망갈 줄 알았는데, 목숨 소중한 줄 모르나봐?”


한없이 흰색에 가까운 옅은색의 짧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물기를 머금은 채 찰랑였다. 끄트머리만 물든 것은 먹빛인 줄만 알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바다와도 같은 짙은 푸른색이 햇빛을 타고 넘실거렸다. 무언가 맘에 안드는 듯 삐죽대는 입술은 해질녘 어슴푸레한 노을빛을 띄고 있었다. 이곳을 형상화한다면 이리 생겼을까. 우시지마가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할뿐 대답이 없자,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이 조금씩 찌푸려진다.


“너, 계속 보고만 있을 거야?”
“…아, 미안. 실례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지만, 실례가 더 큰 건 지금 니 꼴이거든?”
“무슨….”
“너 말이야. 첫 만남엔 좀 잘 보이려는 척이라도 할 수 없어?”
“아….”
“여기 있을 테니까, 좀 씻고 와. 그, 수염도 좀 깎고.”
“정말, 안 갈 건가?”
“거짓말은 안 해.”
“…알겠다. 다녀오지.”
“연구소 애들한테는 말 하지 마. 귀찮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우시지마는 발을 떼었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눈을 깜빡거리는 걸 물끄러미 보다, 어깨에 메고 있던 장비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두고, 가도 되겠지. 이곳에 온 이래 단 한 번도 카메라 가방을 곁에서 떼어 놓은 적은 없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기회를 놓쳐선 안 되니까. 그러나 지금은 바로 앞에 그토록 원하는 이가 있고, 기다려주겠다 했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그리 결론을 내린 우시지마는 연구실을 향해 뛰듯 걸었다. 안가겠다고는 했지만,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거울을 보니 정말로 꼴이 엉망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땀으로 얼룩진 얼굴, 잔뜩 구겨진 옷도 모자라 거뭇거뭇 난 수염까지. 확실히 첫 만남에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만한 행색은 아니었다. 예의 없다 여겨질 법도 하군. 간단히 정리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




다시 연구소 밖으로 나섰을 땐 제법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른 오후였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가 짧은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시지마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마음이 급해진다. 까탈스럽다고 들었다. 변덕스럽다고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뀐다 했다. 조금만 수틀리면 다시는 안본다고도 했다. 결코 누구 하나에게 맞춰주는 일도 없다 했다. 우시지마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했으니 아마도 계속 그 자리에 있을 테지만, 그대로 말없이 가버린다면.




*



덩그러니 놓인 가방 앞에서 우시지마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없다. 역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걸까. 그 대가로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지속해야 하는 거겠지. 담담히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잔잔해진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안간 건가.”
“거짓말은 안한다고 했잖아. 물밖에 오래 있긴 힘들어서 안에 있었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그런 건 됐으니까, 계속 서있지 말고, 몸 좀 숙여봐.”
“…그래.”


눈높이에 맞춰 몸을 굽혀 앉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어선 팔을 뻗는다. 길쭉하고 창백한 손가락 사이사이가 물갈퀴처럼 이어져 둥근 곡선을 그렸다. 우시지마는 좀 더 몸을 가까이했다. 그러자 손이 더듬거리며 뺨을 덧그리듯 매만진다. 닿아오는 감촉이 선뜩하게 차가우면서도 청량해 마치 바람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뺨부터 시작해 턱을 타고 얼굴 라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손이 곧 떨어져 나갈 때엔 아쉽단 기분마저 들어 우시지마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깨끗하니까 보기 좋네. 앞으로도 이러고 와.”
“…언제 올지 모르는데, 가능할까?”
“음…. 그건 그러네. 그럼…. 일단 너 이름이 뭐야?”
“우시지마… 와카토시.”
“내가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거고.”
“…세미.”
“그래, 잘 아네. 하긴 모르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어쨌거나, 내가 언제 올지 모르겠어서 지저분한 꼴을 면하지 못하겠다면, 이렇게 하자. 와카토시가 없을 땐 안 올게. 그럼 됐지?”


우시지마의 눈이 흔들렸다. 만나기도 쉽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다고 들었다. 경계심이 어마어마해서 좀처럼 낯선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다 들었는데, 먼저 다음 만남에 대해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정말로, 다음을 기약하는 건가?”
“응?”
“내 앞에 또다시 나타나주겠다는 말인지, 묻는 거다.”
“…적어도 네가 없을 때 나타나지는 않겠다는 소리지.”
“어째서?”
“음…. 그렇게 망부석같이 서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조차 챙기지 못한다면. 너는 날 원망하겠지. 저런 것 때문에 그런 꼴 겪었다고.”
“그럴 일은 없어.”
“다들 그렇게 말은 해. 어쨌거나 난 인간에게 원망의 말 같은 거 듣고 싶진 않거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있다고, 나. 괜한 소리 뒤에서 듣고 싶지 않아.”
“…그렇군.”
“뭐, 스가는 지금도 날 욕하고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고.”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고맙다고 전해 달라 했다.”


스가와라가 그 말을 할 때만 해도 본인이 직접 말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았었다. 단지 그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지, 아니면 설명이 더 필요한지. 다행히 전자인 것 같았다. 잠깐의 생각 끝에 뭔가 떠올랐는지 세미가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남들 다 보는 데서 말하긴 좀 그랬나. 전해줄 건 그게 다야?”
“내가 들은 건 그 말이 전부였다.”
“인간들은 정말 예의가 없네. 고마우면 보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
“지금 물어보고 있으면서 무슨 허락을 구하는 척이야. 그냥, 반지 찾아줬어.”
“반지?”
“걔가 멍청하게 반지를 물에 빠뜨렸어. 소중한 반지라면서 빨리도 포기하기에 내가 찾아다줬지.”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누가 그래? 나 인간 안 싫어해. 예의가 없으면 당연히 싫어하지만, 그건 인간들도 똑같잖아.”


삽시간에 홱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사납기 그지없었다. 잘못 건드렸나. 우시지마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자 한참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흰 눈으로 보던 세미가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그건 그렇고, 넌 여기에 왜 왔어? 저기 가방이랑 관계있는 거야? 중요해 보이던데.”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이 저 안에 담겨 있으니까.”
“그래? 열어봐도 돼? 젖어도 괜찮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이 우시지마의 발치에 놓인 가방을 향했다. 손을 뻗으려다 물기가 흥건한 제 손을 보고는 잠시 머뭇거린다. 손틈 새로 바닷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젖어도 괜찮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물이 들어가면 곤란해.


“엑, 그럼 못 보겠네. 궁금한데.”
“만지는 게 아니라 보는 것 만이라면 괜찮다.”
“그래? 그럼 보여줘.”


가방과 최대한 닿지 않게 멀찍이 떨어진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배려해주는 걸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재촉하듯 깜박이는 시선을 받으며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당장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전부 보여줘야 될까. 우선 플래시는 제쳐두었다. 그 무엇보다 화사한 빛이 눈앞에서 반짝이는 이 환한 공간에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너무 어마어마한 걸 들이대면 놀라지 않을까 싶어 가진 것 중 제일 작은 단렌즈를 끼운 채로 세미를 향해 내밀었다. 그전에 습관처럼 초점을 맞추다 그대로 셔터를 눌러버릴 뻔 했지만.


“카메라? 엄청 크네. 스가네가 가져오는 건 손바닥보다 작던데.”
“이건 전문가용이니까. 단순 기록용과는 다르겠지.”
“흐음…. 그래서 네 목적이 저 가방에 들어있던 이 카메라에 담겨있던 거라면.”
“….”
“넌 날 찍으러, 온 거겠네.”


내내 변화무쌍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무표정의 거짓 없이 맑은 눈동자가 빤히 눈을 마주해온다. 허락받기 전에 기록을 하지 말라는 것은, 외부 유출의 문제만은 아니었던가. “세미"의 기호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혹시 세상 밖으로 내보여지는 것이 싫은 거라면. 우시지마는 처음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맞아? 날 찍으러 온 거야?”
“…그래. 난 널 찍으러 왔어.”
“날 찍어서 뭐하게?”
“전시회를 할 생각이었다.”
“전시회라면 사진을 전시하는 건가? 그럼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거 아냐?”
“네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왜?”
“….”
“왜 나야?”
“…그건.”
“내가 신기해서? 희귀해서? 아무나 쉽게 찍을 수 없는 그런 존재라 잘 팔릴 것 같아서?”


세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갔다. 우시지마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그가 말한 이유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어서. 어지러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말들 중 그 어떤 것도 고르지 못했다. 세미는 대답 없는 우시지마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재촉하듯 꼬리를 들어 수면을 철퍽 내리쳤다. 작지 않은 힘에 주변으로 크게 물보라가 일었다. 잔잔하던 바다 위로 둥글게 파동이 번졌다. 그러는 중에도 우시지마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지금 네 사연 같은 거 물어본 거 아니거든?”
“여기 오기 전, 네 사진을 봤어.”
“….”
“연구소에서 찍은, 네 말대로 그 손바닥보다도 작은 카메라로 어설프게 찍은 그 사진이, 내겐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작정 널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못 찍게 되어도 사실 상관없었어. 어차피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다만.”
“다만?”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아까 널 처음 봤을 때. 아주 오랜만에 셔터를 누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맨 처음 내가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와 흡사한, 그런 기분이었지. 그러니까.”
“….”
“네가, 그리고 이곳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찍고 싶었어. 그뿐이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점점 물밑으로 가라앉던 몸이 마침내 눈만 남아 한참을 깜박거렸다. 수면 위로 빼꼼히 비치는 귀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말을 마친 우시지마는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만 괜히 만지작댔다. 그런 와중에도 덤덤한 시선은 한곳으로 고정된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결국, 오랜 침묵과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지 못한 세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물고기처럼 입만 뻥긋거리다 몇 번이고 다시 다물기를 반복한 다음에야 힘겹게 말을 꺼낸 것이었지만.


“너는, 정말 부끄러움이라곤 조금도 모르는 거야?”
“무슨 말이지.”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아름답다느니 뭐니….”
“거리낄 이유라도 있는 건가? 나는 네가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넌 정말 내가 널 경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3일이면 각오한 것보단 덜하다고 생각한다.”
“…됐어. 그만 말해. 너랑 말하는 거 너무, 너무 기분 이상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던 세미는 급기야 등을 돌리고 말았다. 난 이제 갈거니까, 너도 들어가. 멍청하게 계속 밖에 있지 말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매끄러운 어깨가 잘게 빛이 났다. 밝은 머리칼은 어느덧 하늘을 가득 메운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머리끝도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대로 풍경에 녹아들 것 같다. 카메라를 쥔 손이 자꾸만 아우성을 쳤다. 무얼 망설이냐고. 그 두 눈에만 담기엔 아쉽지 않느냐고. 어서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누르라고.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춤추듯 너울져 멀어지는 모습을 우시지마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카메라를 가방에 밀어 넣고 연구소로 향하며 우시지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각오하고 온 일이었지만, 정말로 찍지 못한다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 머무는 곳






그로부터 딱 3일째였다. 그날은 연구소에 들어오자마자 하루를 꼬박 정신없이 잠만 잤다. 바다 내음을 풍기며 돌아와선 시체처럼 죽은 듯이 잠을 자다 깨어나서 시계를 본 우시지마는 한참을 멍하니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시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7시 30분. 방에 붙어 있는 연구소 시설 이용 안내문에 따르면, 구내 식당 저녁 마감 시간이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갑자기 밀려드는 허기에 적당히 얼굴만 씻고 내려가자, 혼자 밥을 먹고 있던 스가와라가 우시지마를 발견하곤 아는 척을 했다.


“살아계시네요?”
“…네.”


내드린 방에 3일 만에 들어가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말하는 스가와라의 표정은 전혀 놀란 사람 같지 않게 평온했다. 마감이 채 10분도 채 남지 않은 탓에 식당 안은 거의 텅 비어있었는데, 굳이 수저를 내려놓고 분주히 앞에 널린 서류들을 갈무리하는 손길에 우시지마는 얕게 고개를 숙이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우시지마가 수저를 들자 그제야 다시 수저를 드는 손가락이 잠시 반짝였다.


“반지, 를 끼고 계시네요.”
“아, 오늘은 실험이 없어서요. 평소에는 목걸이로 하고 다녀요.”


예쁘죠? 손등을 내어 보이며 개구지게 웃는다. 세미가 찾아줬다는 반지가 저걸까.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예뻐 보여 우시지마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 반지는, 바닷물에 오래 있어도 멀쩡합니까.”
“아, 이거요? 금만큼은 아니지만 백금이라, 괜찮을 거예요.”
“백금이군요.”
“네. 반지 선물하시게요?”
“…아뇨. 말씀하신대로 예뻐서 물어봤습니다.”


단호히 대답하고는 다시 수저를 들자 그런가요, 웃으며 대답한 스가와라 역시 다시 수저를 든다. 그나마 대화할 만한 거리가 차단되자 둘 사이엔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묵는 방은 편하신가요. 불편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와 같은, 관리인과 손님, 딱 그만큼의 거리만을 유지하는 대화만이 간간히 오갈뿐이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스가와라였다. 애초에 우시지마와 마주쳤을 때 그는 이미 식사를 거의 마친 상태였던 터였다. 식기를 먼저 퇴식구에 반납하고 돌아온 스가와라는 옆에 적당히 쌓아두었던 서류들을 갈무리해 들고는 우시지마에게 먼저 들어 가겠다 꾸벅 인사를 했다. 거기서 끝일 줄 알았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에 우시지마는 입에 있던 걸 전부 뱉을 뻔 했다.


“세미는 그런 거 귀찮아해요. 선물하기 전에 물어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
“그럼, 수고하세요.”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는 얼굴이 한없이 상쾌했다. 반면 우시지마의 미간은 잔뜩 구겨졌다. 선물이고 뭐고,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데. 게다가 이곳에서 나가면, 정말 끝일 텐데. 마음만 앞서나가는 것도 모자라 보는 사람이 쉽게 알아챌 정도로 티를 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결국 수저를 내려놓은 채 한숨을 내쉰 우시지마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 시간을 각오하고 왔는데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이 도리어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이러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혹은 원점보다도 더 뒤로 물러나 버리게 된다면, 몸보다 마음이 버티기 힘들 것 같아서.




*




그 모든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장비를 챙겨 나간 자리에 세미는 보란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밤공기를 머금은 피부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둥글게 말린 꼬리 끝은 검푸른 빛이다. 달빛을 받아 반들반들 반짝이는 비늘 끝으로 이어진 지느러미가 실크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어 보이며 웃는 얼굴이 천진하기 짝이 없어 우시지마는 숨죽인 채 그의 얼굴만 넋 놓고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나 어디 이상한가?”
“…다시는, 못 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응?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나랑 말하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으니까.”
“아 물론 이상하긴 한데 나쁜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흠…. 뭐, 그런 것보다 있지.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
“첫째, 내가 안 된다고 했을 땐 안 돼. 둘째, 나랑 얘기하고 있을 때에도 안 돼. 셋째, 전시는 괜찮지만 아무에게도 팔지 말고. 넷째, 여길 모르는 사람이 어디서 찍었냐고 물으면 대답해주지 말고.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나한테는 보여주지 마.”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열심히 말하는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반면 어딘가 많이 생략된 이야기에 잠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던 우시지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말뜻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정도면 너한테도 꽤 괜찮은 조건이지? 내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데. 여기서 더는 안봐줄 거야. 끝없이 조잘거리며 내뱉는 말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눈앞이 흐려진다. 우시지마가 아무런 반응이 없이 굳어있자 결국 심통이 난 세미가 몸을 물 위로 쭉 빼고는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안 듣고 있는 거면 나 그냥 갈래!”


정말로 홱 하니 돌아서는 몸을 낚아챈 건 본능에 가까웠다. 강하게 품으로 당기는 손길을 예상치도 못한 탓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우시지마의 몸에 기대게 된 세미의 상체가 파르르 떨렸다. 머리카락 끝에서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껏 갈아입고 온 말끔한 흰 셔츠는 온통 축축이 젖어들었다. 몸에 닿는 모든 것이 곧바로 입술이 새파래질 정도로 차가운데도 품에서 놓고 싶지가 않았다. 제대로 듣고 있으니까, 가지마. 낮은 목소리에 바르작거리던 세미의 움직임이 곧 잦아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봤지만 빛을 등진 우시지마의 얼굴은 까맣게 그늘이 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응. 안갈게. 속삭이듯 내뱉은 작은 대답을 듣고서야 팔에 힘이 빠진다. 우시지마와 맞닿았던 피부가 햇빛에 오래 달궈진 것처럼 뜨거워, 세미는 빠르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가지 않겠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만 빼꼼히 내민 채로.




*




이후로는 순조로웠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겠다는 불확실한 말 대신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아닌 척 하더니 너 바라는 거 엄청 많잖아! 볼을 부풀리며 투덜댔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대신 시간을 정하진 않았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중 언제 올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와도 오래 머무를 지 잠깐 얼굴만 비추고 돌아설 지조차 세미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약속한 날이면 우시지마는 자정부터 자리를 지켰다. 6시간에 한번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기 위해 연구소를 잠깐씩 오가는 것을 제외하고. 촬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세미를 기다렸다.


새벽녘 어슴푸레한 때에 나타나는 적도 있었다. 해가 쨍쨍한 낮에 오기도 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지친 얼굴로 나타날 때도 있었다. 연구소와의 정기적인 만남이 있은 후에는 보통 축 처진 모양을 하고선 힘없는 목소리로 오늘은 찍지 말아 달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 날엔 우시지마도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사실은 멀리서 헤엄쳐오는 모습만으로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날엔 신기하게도 찍고 싶단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



사진은 제법 많이 쌓였다. 우시지마는 스가와라에게 요청해 암실을 하나 빌렸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필름을 써요?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스가와라는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작은 연구실을 찾아 기꺼이 내어주었다. 다행히도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 우시지마는 세미와 만나지 않는 날이면 암실에 틀어박혔다. 디지털 작업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날마다 다른 카메라를 썼다. 어느 날은 취미용 세컨 카메라로 찍기도 했다. 이젠 더 이상 전시가 목적이 아닌 것처럼.




“오늘은 가방 안가지고 왔네?”


눈에만 한가득 담는 날도 있었다. 이제는 곧잘 눈앞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기도 했다. 우시지마는 턱을 괸 채로 유려한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세미가 오히려 안 찍느냐고 물어오면 고개를 저었다. 너 그러다 사진 모자라면 어떡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건네는 말에 우시지마는 손을 뻗어 젖은 머리칼을 헝클였다. 그러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넌 정말, 내가 묻는 거엔 대답도 제대로 안하고. 작게 꿍얼대는 목소리에도 우시지마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미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중에 무엇을 전시해야 할지 몇 장만 고르기가 어려울 만치 모든 사진이 아름답기 때문에 결코 모자랄 일은 없을 거라고 솔직히 전하면, 또다시 가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세미는 아름답다는 말에 약했다. 누구나 한번만 봐도 그렇게 생각할 텐데. 이런 말 처음 듣는 거냐고 붙잡고 물어보자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며 갑자기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들었어. 다들 날 볼 때마다 그 말을 했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지겹도록 많이 들었어. 당연하잖아!”
“그런데 왜, 내가 말하면 이상하다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그건, 그건….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너한테 들으면 정말로 기분 이상해. 막….”
“…막?”
“막 간질거리고…. 하여튼 이상해. 이상하니까 하지 마. 알겠어?”


자꾸 그런 말 하면 다시는 안 올 거니까. 단호하게 외치는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결국 그 말은 나오면 안 될 금지어가 되어버렸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몇 번이나 집어삼켰는지 모른다. 표현을 돌려서라도 해보려했지만 그때마다 안 그래도 올라간 눈꼬리를 사납게 치켜뜨는 바람에 포기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보다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대신 암실 가득 늘어선 사진들을 홀로 서서 바라볼 때마다 생각했다. 조명 하나 켜지 않은 이 컴컴한 곳에서조차 눈부시게 느껴질 정도로, 영원히 곁에 두고 떠나보내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고.




*




“가질 수 없는 걸 갖고 싶다 생각하는 건 욕심이겠죠.”
“…글쎄요. 왜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하시죠?”
“이곳을 떠날 수 없지 않습니까.”
“본인이 계속 머물 생각은 없으신가 보네요.”
“마음만으론 뭔들 못할까요.”
“…흠.”


선문답 같은 대화 속엔 주어도 목적어도 없다. 스가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욕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의중을 모르겠는데 선뜻 정보를 주기엔 심술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두기에는 정해진 날이 다가온다는 걸 자각시켜줄 때마다 시무룩해지는 모양이 퍽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이젠 좀 마음 열고 사는 것 같은데, 열어도 적당히 열지 왜 그렇게 활짝 열어선.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습관처럼 매만지던 스가와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상머리에서 한숨 쉬는 게 예의가 아닌 거 알지만, 한숨부터 쉬지 않고선 도저히 말을 꺼낼 수 없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어요.”
“…정말입니까.”
“뭐, 바로 걷고 이러는 거야 힘들겠지만. 가능해요. 본인이 원한다면.”
“걷는다는 말은, 다리가, 생긴다는 건가요?”
“네. 그런데 선택의 문제라서…. 일생에 단 한번이라고 들었어요.”


인어들은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자란다. 그러나 일생에 단 한번, 본인이 원하는 때에 인간의 형상을 할 수 있다. 기간은 딱 한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그 한달이 지나면 반드시 인간으로서의 삶과 인어로서의 삶 중 선택을 해야하고, 이때 한 선택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어는 다시 인어의 삶으로 돌아가길 택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인어들이 인간의 세계에 적응하기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다.


“세미는 다른 인어들보다도 영리한 축이니까, 인간으로 살아도 무리는 없을 거라 생각해요, 솔직히. 하지만 지금껏, 인간이 되고 싶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했었거든요.”
“….”
“지금은 모르겠네요.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마음이 바뀐다고 하잖아요.”




*




세미는 종종 어딘가에 생채기를 달고 나타났다. 이번엔 팔꿈치 뒤쪽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괜찮다며 달아나려는 세미의 팔을 움켜쥐고,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능숙하게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 스가와라로부터 받은 방수연고였다. 세미를 만났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우시지마가 자리를 잡은 곳은 연구소의 사각지대다. 눈치가 빠른 스가와라는 우시지마의 규칙적인 움직임과 아무리 씻어도 이곳에 있는 이상 지울 수 없는 바다 내음으로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반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없이 여러 가지를 가져다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구급상자였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연고를 바르자 세미는 눈을 찡그렸다. 이런 거 안 발라도 괜찮다니까. 짜증스러운 목소리에도 놔주질 않자 또 볼을 부풀린다. 넌 너무 걱정이 많아. 바다에 살면 이런 건 부지기수야. 안 다치는 게 더 이상하단 말이야.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바다에 존재하는 암초 같은 것들만이 그를 다치게 하는 요인은 아니었다. 사실 세미의 몸에 번지는 멍들 중 절반 이상은 칸막이가 원인이었다. 겉보기엔 바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방이 투명한 판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결코 세미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연스러운 모습을 조성한답시고 판을 투명하게 짠 것이 도리어 세미에겐 더 위협적이었다. 이쯤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보이지 않으니 자꾸만 부딪힌다고 했다. 연구소에서 점검 차 다녀가기라도 하면 그나마 구분하기 쉽게 만들어주던 해초들조차 전부 정리해버려서 움직이기가 더 힘들다했다. 피를 뽑고, 약을 먹이고, 각종 기기들로 종일 검사를 하고. 그런 게 지치게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잘해준다고 한 것들이 더 힘들게 만드는 셈이었다.


“너는, 여기가 마음에 드나.”
“싫진 않아. 예전만큼 자유롭진 못해도 그만큼 안전하기도 하고, 매번 챙겨주는 부분도 있으니까.”
“나가고 싶단 생각은, 해본 적이 없겠군.”
“아주 없진 않지. 요즘은 궁금해진 것도 많아서. 아예 나가는 건 아니더라도 가끔은, 나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할 때도 있어. 어렵겠지만 말이야.”
“그렇군.”
“그러는 넌 어때? 여기 남고 싶단 생각은 안 들어?”
“마음만으로는 남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돌아가야겠지.”
“그래…. 그건 그렇겠네.”
“어딘가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다. 그러고 싶단 생각도 해본 적 없고.”
“그래? 인간은 보통 안정을 추구한다고 들었는데.”
“내겐 한곳에 머무른다는 것이 안정을 주진 못했어. 다만.”
“…다만?”
“나 역시 요즘은, 한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고개를 들자 우시지마의 시선이 진득하게 닿았다. 한참이나 마주한 시선엔 너무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불안함, 간절함, 아쉬움이 혼재된 눈빛을 이기지 못한 세미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갑자기 피부로 와 닿았다. 어느덧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세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시지마의 시선은 이제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뭐 할 거야?”
“일정이 다 잡혔으니, 전시회 준비를 해야겠지.”
“그거 다 끝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끝난다면, 글쎄. 아직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구나.”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면 좋았을까. 너무 빠르게 급류처럼 흘러간 시간이 아팠다. 언제까지고 한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거대한 수조에 갇혀 사는 자신과 달리, 우시지마는 수족관 바깥의 사람이다. 퇴장해서 나가면 그만인. 세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경계를 풀어버렸을까. 금방 사라질 인연이라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 이제 갈게.”
“그래. 다음이 마지막이 되겠군.”
“…미안하지만, 다음은 없어.”
“…뭐?”
“너 이제 사진도 다 찍었잖아.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할 거고.”
“하지만.”
“갈게. 너도, 잘 가.”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당장에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우시지마는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세미는 저만치 멀어져 닿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듯 서서히 멀어져 가는 걸 잡을 도리가 없다. 이렇게 기약 없이 헤어지는 건 생각해본 적 없다. 불확실한 미래라도 다음을 약속하고 싶었다. 잘 가. 짧은 인사와 함께 흰 물보라만 남긴 채로 뭐라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물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우시지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지금까지 있던 일이 모조리 꿈인 것처럼 사라졌다. 한없이 요동치던 잔물결마저 잠잠해지자, 우시지마는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머무르고 싶다는 말 대신, 좀 더 분명하게 말을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 갈 곳은 정하지 않았지만, 어디든 함께이고 싶다고. 이기적이란 건 알지만, 옆에 있어주면 안되겠느냐고. 너를, 갖고 싶다고.











4. 아마도 녹슬지 않을






“와카토시군. 식사는 챙기면서 하는 게 어때?”


손에 들고 온 5단짜리 찬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텐도가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우시지마는 손을 들어보일 뿐,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시간이 촉박한 건 알지만, 밥은 먹어가면서 해. 시라부가 도시락까지 챙겨줬다고.


그제야 고개를 드는 얼굴이 푸석푸석하다. 텐도는 때를 놓칠 새라 잽싸게 찬합을 열어 잔뜩 늘어놓고는 젓가락까지 꺼내 비척비척 다가오는 우시지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꼴을 시라부에게 들키는 날엔 잔소리가 쏟아질 것이었다. 안 그래도 더 느긋하게 쉬다 올 수 있었던 걸 괜히 일정부터 잡아서 저런 얼굴로 돌아오게 만들었냐며 난리였었다. 텐도도 후회하고 있었다. 전시할만한 사진은 얼추 다 찍은 것 같다는 말에 신나서 날짜를 잡고 대관계약을 완료한 뒤 통보할 때까지만 해도 별말이 없어 괜찮은 줄 알았는데. 돌아오기 한 달 전 쯤 걸려왔던 전화부터 신경 쓰였었다. 조금 일정을 미룰 수는 없냐는 내용이었다. 그가 말하는 조금이 오차범위 내가 아니었던 지라 힘들지 않을까? 라고 반문하자 한숨을 내쉬더니 알았다, 단답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었다. 그때부터 뭔가 불안했는데, 마중하러 나갔던 날 텐도는 우시지마를 보자마자 입을 헙 다물었다. 가기 전보다 날이 선 분위기가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분명 그 전까지만 해도 조금 유해진 느낌을 받았던 터였다.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둥글둥글하고 어쩐지 붕 떠있어서, 와카토시군, 거기서 연애라도 하는 거야? 라는 물어볼 뻔한 걸 참기도 했었다. 연애, 랑 아무 관계가 없는 건 아닌 것 같긴 한데. 아직 내려놓지 않은 작은 쇼핑백의 끈을 만지작거리던 텐도는 테이블에 앉아만 있을 뿐 도통 젓가락을 놀릴 생각을 하지 않는 우시지마에게 팔을 뻗었다.


“여기, 부탁한 것도 찾아 왔어.”
“아 그래, 고맙군.”


역시나 당장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쇼핑백의 내용물부터 확인한다. 텐도는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작은 주머니의 끈을 풀자 붉은빛이 감도는 벨벳으로 이루어진 상자가 튀어나왔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상자를 열자 까만 천과 대조되는 은빛의, 사이즈가 다른 반지 두개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시지마는 그중 좀 더 큰 반지를 꺼냈다. 링 내부에 새겨진 각인을 확인하고, 손가락에 끼웠다. 뼈가 튀어나와 약간 빠듯한 느낌의 두 번째 마디를 지나 왼손 약지 끝에 안착한 반지는 조금 헐렁해져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텐도는 우시지마가 남은 반지를 갈무리 해 넣는 것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와카토시군이 그렇게 마른 걸 보면 반지의 주인도 속상해하지 않을까? 일정 잡은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좀 쉬어가면서 했으면 좋겠어.”
“괜찮다. 어차피 전시회 끝나면 쉴 수 있을 테니.”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사는 건 그만둬주지 않을래?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시는 이렇게 일정 잡지 않을 테니까. 아니면, 끝나고 다시 거기로 보내주면 되는 거야? 이번엔 내가 컨택 할게. 아주 아주 길게 있을 거라고. 응? 제발, 와카토시군. 부탁이니까.”


이제 거의 애원조가 된 텐도의 말에 우시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가도 소용없을 거라는 걸 안다. 그렇게 떠나갔는데, 되돌아간다고 맞아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 누구보다 잘 아는데.


우시지마는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우습게도 안정감을 준다. 이제 전해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오자마자 스가와라가 알려준 곳으로 반지부터 맞추러 간 자신이 미련스럽다 생각했는데. 이젠 진작 맞출걸 그랬단 후회마저 들었다. 차라리 시간을 내어 헤어지기 전 네 손에 끼워주었다면, 그랬더라면.




*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마지막 날이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복귀 전시회란 타이틀 자체만으로도 술렁였는데, 테마가 절벽 위의 수족관이라는 것까지 공개되자 사람들의 관심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시간당 입장 인원수 제한을 둬야할 정도로 매일같이 북적이는 탓에 초대한 사람들조차 부러 연락하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시지마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건넸다. 그 덕에 매일같이 전시회장에 있는 게 녹초가 될만큼 힘들었지만 우시지마는 전시회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이들이 다녀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기다리는 건 단한사람이었다. 수족관 관장이자 연구소 소장인,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초대장을 보내자 한창 바쁜 시즌이라 날짜를 확답하진 못하겠지만 가능하면 가겠다는 내용의 답장이 왔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 또다시 연락이 왔다. 오늘 갈 건데 많이 늦을 것 같다. 혹시 시간이 지나도 입장이 가능하겠냐는 게 요지였다. 기다리겠다고 답장을 보내자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답장이 왔다. 우시지마는 곧바로 텐도에게 연락을 넣어 전시회 마지막 날로 예정된 뒤풀이를 취소했다. 그냥 자신은 일이 있어 빠지겠다는 말이었으나 주인공이 없는 뒤풀이가 무슨 의미냐며 텐도가 취소해버린 것이었다.



전시 입장마감은 7시였다. 우시지마는 6시부터 데스크에서 대기하려 했으나, 시라부가 만류했다. 안 그래도 마지막 날 마지막 타임은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데, 그렇게 옆에서 긴장하고 있으면 괜히 신경 쓰이니 안에 들어가 있으라는 거였다.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우시지마를 발견한 텐도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시라부가 어련히 알아서 해줄까. 안에 들어가서 방 뺄 준비나 하자고, 와카토시군.



당연하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여기저기 두서없이 놓인 물건들을 챙겨 넣던 와중, 서랍에 넣어두었던 반지를 손에 쥐는 순간부터는 아예 반쯤 넋이 나가있었다. 텐도는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리저리 널브러진 선물들 정리했다. 그때였다.


-지금 손님이 오셨는데요. 기다리시던 분 같아요. 초대장 가져오셨어요. 절벽 위의 수족관이요.
“그래,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해줘.”
-네. 안 그래도 곧 오실 거라고 천천히 둘러보시라고 했습니다.
“잘했어. 고맙다, 시라부.”
-예에. 근데. 제가 아까 듣기론 밝은 회색머리라고 들었는데, 조금 다르네요. 염색하셨나? 머리색이 좀 독특하시던데,
“…뭐?”
-어, 그러니까…. 밝은 색은 맞아요. 맞는데, 조명 탓인지 끝이 까맸던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리고 휠체어, 휠체어 타고 계셨어요. 다리가 안 좋으신가 봐요.




*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정신이 없어 그대로 들고 온 반지케이스를 꽉 쥐는 우시지마의 마음은 한없이 급했다. 바로 옆인데, 그렇게 멀 수가 없어서. 데스크 앞에서 시라부가 뭐라 말하려 하는 것도 듣지 않고 그대로 스쳐지나갔다.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루어진 전시회장에 남은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있었다면 전부 밀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우시지마의 걸음은 이제 걷는 게 아니라 뛰는 것에 가까웠다. 이 끝에, 네가 있다. 이 길만 지나면, 이 벽만 지난다면 그곳에, 네가.


“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내가 바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세미.”
“응. 오랜만이야, 와카토시.”


가장 큰 사진 앞이었다. 타고 왔다는 휠체어는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마치 날아오르듯 아름다운 꼬리를 반짝이며 비상하는 뒷모습이 새겨진 사진 앞에서, 세미는 보란듯이 두 다리로 서 있었다. 햇살을 닮은 조명 아래에서, 자연에선 색을 알 수 없던 머리칼이 크림색으로 부드럽게 반짝였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 악수하려 내미는 손을 잡아당겨 그대로 품안으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서 바짝 굳었던 몸이 이내 천천히 등을 마주 안아온다. 가느다란 목덜미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자, 미처 가시지 않은 익숙하고 그리운 바다 내음이 났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다.”
“또 그런 말을 하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진, 보여주지 말라고 했잖아.”
“한 번 보면 계속 신경 쓰일 것 같아서….”
“그리고 네가, 다음은 없다고 했으니까.”
“그건 네가 다음이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금세 시무룩해져선 고개를 숙인다. 먼저 나 다시는 안볼 것처럼 얘기한 건 너였잖아. 나는 계속 너랑 만나고 싶었는데.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다 못해 입을 꾹 다물어버린 세미가 그대로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내가 이렇게 찾아올 때까지 넌 연락도 안하고.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너 진짜 예의 없어, 알아?


“그건, 내가 잘못했다.”
“나 진짜 여기 힘들게 왔단 말이야. 지금도 서있기 힘들어.”
“…다리는 언제부터, 생겼어.”
“보름 전쯤? 이제 이것도 보름 남았네….”
“돌아갈 건가, 다시 바다로?”
“음….”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에 세미는 고개를 들었다. 힘들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대어오는 몸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것과는 달리 우시지마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장난스런 얼굴로 웃으며 대답하자 단박에 미간이 일그러진다. 참 표정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솔직할 수가 없어서, 세미는 풋 웃어버렸다.


“그러면, 네게 줄 것이 있다.”
“응?”


순식간에 다시 차분해진 눈동자에 의아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우시지마는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잠시 손을 뗀 우시지마가 상자 속 내용물을 꺼내더니 제 어깨를 잡은 세미의 왼손을 잡아끈다. 약지에 끼워지는 반지를 확인한 세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더 일찍 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것이 너의 선택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어도 괜찮아.”
“와카토시….”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너보다 아름다운 존재는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거다.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
“그래줄 수 있겠나.”


대답 대신 팔이 훌쩍 목에 감겨들었다. 우시지마는 그대로 허리를 마주 안았다. 처음으로 맞물린 입술은 차갑고 뜨겁고, 짰다. 짧게 훑고 떨어진 입술에 세미가 소금 맛이 나, 작게 중얼거렸다. 바다 냄새 난다, 그치? 웃으며 고개를 들자 다시 다급하게 삼키듯 입술을 물어온다. 아, 이제 단 맛도 좀 나는 것 같아. 실시간으로 내뱉는 감상에 아까보다 조금 느려진 입술 새로 웃음이 엉켰다. 마주 잡은 각자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


찢님과의 수족관 2인 교류회에 낸 회지 원고입니다. 주제는 놀랍게도 수족관이었습니다.

마감을 5일 남기고 플롯을 엎어버리는 바람에 퇴고조차 하지 못해 놀랍게도 문장이 엉망입니다.

남은 책을 그대로 배포할 예정이었으나 도저히 양심이 아파서 수정하지 않고는 안될 것 같습니다.

7월 중순경 '너의 목소리가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숨' 두 권의 통판이 있을 건데요. 그 때 이 책도 함께 배포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양은 동일하지만 오타, 비문, 내지 편집 등을 수정해서 소량만 재제작할 예정입니다. 관련 내용은 나중에 다시 공지할게요!


쓰면서 즐거웠던 한편 너무 급하게 써야했는데다가 분량에 제한이 있어서 많이 아쉬웠던 글입니다. 그래도 전 얘네를 좋아하고... 그래서 더 잘쓰고 싶었습니다. 흑흑. 근데 이제 인어 소재는 안쓸 것 같아요 ㅋㅋㅋㅋ 넘 많이 썼다 ㅋㅋㅋㅋ...










RE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