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르셨으면 얘기를 하셔야죠."

"…."

"야. 장 팀장."

"어?! 어?! 막 어? 반말해? 회사 안인데!"

"뭐 하자는 거야. 하여간 너는 진짜."


뭐라 말은 해야겠어서 불렀는데 또 딱히 할 말은 없어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는 김 대리 괴롭히지 말라고 하고는 내 보냈다. 민 과장은 진짜 속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고는 나나 잘하라며 핀잔을 주고 팀장실을 나갔다. 

에이씨. 너는 맨날 그렇지. 문하민. 하여간 밉살맞은 놈. 똑똑하고 유능하고, 적당히 정이 있어서 인망도 높고. 알고 있었다. 사실은 낙하산이라 초고속 승진 중인 내가 아니라…. 


"아냐. 아냐. 우울한 생각 하지 말자…."


입사 시기도 일이년 차이로 동기에 가깝지만 우리가 가까우면서 먼 사이가 된 까닭은 이러한 내 열등감에 있었다. 회사와 팀을 위해서는 정말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생각'.  후. 릴렉스-


"일이나 하자. 일."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 블라인드 사이로 김 대리와 민 과장을 훔쳐보았다. 어?! 어? 또 막 자기네들끼리 눈 마주치고? 어!? 막 손짓하고?! 신성한 직장에서 지금…. 이씨. 뭐람. 정말. 그래도 둘 다 소중한 내 동료들이니까. 속이 상하지만…. 

덮고 넘어가야겠지? 내가 무슨 치정극을 벌일 것도 아니고…. 우리 김 대리. 유능하고 잘나신 민 과장이 잘 챙겨 주겠지. 아 배가 아픈 것 같아. 율무차가 상했나. 




"팀장님 뭐 하세요?"

"아. 나 대리. 어어. 와. 어."

"오늘도 한결같이 이상하시네…. 스트레칭 하시는 거예요?"

"네. 김 대리는 어디 갔어요?"

"김 대리…? 정훈 대리요? 아님 순대요?"

"순정 대리요."

"문 과장님이랑 클라이언트 미팅 갔는데요?"

"아. 글쿠나."


오늘따라 김 대리의 동그란 뒤통수와 포니테일이 안 보인다 했더니만 민 과장과 외근을 나간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간다고 민 과장이 왔던 것 같기도 하고…. 대충 다녀오라고 손을 휘저었는데 그게 김 대리와 함께였구나. 어쩐지 거기서 바로 퇴근한다던 발걸음이 퍽 가벼워 보였다. 


"나 대리이."

"왜요? 팀장님."

"오늘 회식 할래요?"

"싫어요! 저 오늘 데이트 약속 있단 말이에요."

"너무해…."


너무해. 우리 팀은 회식도 진짜 안 하는데 내가 하자고 하면 맨날 이런 반응이다. 민 과장이 없어서 이 정도지 민 과장이라도 있었으면 선진회사 문화가 어쩌고 하며 눈총까지 줬을 게 뻔했다. 내가 회식하자고 하면 늘 눈을 빛내는 건 역시 우리 김 대리들밖에 없었다. 정훈 대리야 알미새라 그렇다 쳐도 우리 김 대리는 참 착했다. 




"우리 민아 씨도 왔으니까 환영회 하면 어때요?"

"그러세요. 팀장님 좋아하시는 찜닭집으로 예약할까요?"

"와. 좋아요! 김 대리 센스 굿."

"찜닭 좋네~"

"오? 회식? 2차는 팀장님 개카로 쏘시나요?"

"어? 어. 뭐…. 그럼 그 회사 앞에 새로 생긴 이자카야 가볼까요!?"

"에에. 거기 별로 맛 없어요!"

"맞아. 별로더라. 그치. 팀장님 좋아하시는 그 포차 가요."


나는 그 이자카야 안 가봤는데. 나 빼고 간 거예요? 혹시 나 왕따 시키는 거예요? 나는 의심스러웠지만 코만 훌쩍이고는 살짝 침울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 대리는 그런 나를 보더니 살짝 다가왔다. 훅 하고 풍기는 좋은 냄새에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니 김 대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서 귓가에 대고 말했다.


"팀장님. 거기 너무 비싸서 팀장님 개카로 가면 미안해서 저러는 거예요. 서운해 마세요."

"아, 아! 나 돈 많은데…."

"아껴 쓰세요. 나중에 정 가고 싶음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김 대리가요? 나랑 김 대리랑 둘이요?"

"아."


아 그때도. 김 대리는 지나가면서 비싼 술 시켜도 되냐며 시비를 털고 가는 민 과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 과장님도 같이 가도 되고요." 망할. 그때도 연애 중이었냐. 너네. 내 설렘 돌려내. 

'설렘?'

설렜지. 그래. 김 대리는 늘 눈치 없지만 눈치 보는 나를 챙겨 줬으니까. 나이도 세 살이나 어린데 일도 잘하고 야무지고. 상사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홍 부장이 수틀리면 개길 애라며 뽑지 말자며 고개를 젓고 민 과장도 뽑아도 안 뽑아도 그만이라며 자긴 학연이 얽혔으니까 노 코멘트한다며 나 몰라라 할 때, 뽑자고 강경하게 주장한 보람이 있었다. 우씨. 그러고 보니 지는 면접 때 그래 놓고서 홀라당 잡아먹었다. 민 과장 이 나쁜 놈. 

여하간 그때 회식에 가서 권커니 잣거니 하다보니 주량을 넘겨 버렸고, 한동안 변기를 붙들고 씨름을 했다. 별로 취하지 않는 대신 (늘 취한 것처럼 하이텐션을 유지해서 그런가?) 토부터 하는 게 내 주사라면 주사였다. 어쨌거나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라서 가글까지 치카푸카 하고서는 가게로 돌아왔더니만 시체더미 속에서 김 대리가 벌건 얼굴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시체들에서 나는 진한 주취에 다시 속이 울렁거리긴 했지만 나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갔다. 


"우엑. 속 안 좋아."

"팀장님. 멀쩡하세요?"

"아뇨. 토했어요. 우웩."

"억.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난 토하면 숙취는 없거든요! 와. 근데 토하고 오는 사이에 개판 났네. 민 과장은요?"

"몰라요. 먼저 가셨나 봐요."


토꼈구만 이 자식. 그래도 상사라고 먼저 가셨다고 말하는 김 대리가 훌륭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썸이든 사귀든 해서 그랬나. 아무튼 마음 같아서는 그냥 김 대리랑 숙취해소제 하나 나눠 마시고 3차를…. 가기엔 내 위나 김 대리 얼굴이나 좀 힘들었고, 수다나 떨며 술 좀 깨고 집에 보내고 싶었는데.

발 아래에 채이는 김 대리와 민아 씨, 소연 씨 등등의 얼굴에 밤에 꿈에 나올 것 같았다. 결국 김 대리가 사원들 신상을 잘 알고 있어서 겨우겨우 꾸역꾸역 집어넣어 택시를 태워 보냈다. 속이 메슥거리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난 그 시간이 좋았다. 




5.


'요새 김 대리가 뭔가 컨디션이 안 좋은 거 같은데….'

민 과장이랑 싸우기라도 했나? 마주치면 어색할까 봐 오늘도 팀장실에 처박혀서는 블라인드 틈새로 김 대리를 훔쳐 보았다. 평소면 투덜투덜거리며 타이핑을 투다다다 하고는 탕비실 가서 커피 타올 시간인데, 턱을 괴고 앉아서 휠만 내리고 있었다. 


[나: 민 과장]

[나: 똑바로 안 해요??]

[문하민(마켓팅 2팀): 뭔 소리예요]

[문하민(마켓팅 2팀): 영문 모를 소릴 하고 앉았어]

[문하민(마켓팅 2팀): 시안은 보셨어요?]

[나: ㅇㅇ. B가 낫던데요]

[문하민(마켓팅 2팀): ㅇㅋ. 결재 올릴게요]


그러든지 말든지. 에이씨. 괜히 민 과장에게 화풀이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아니. 여자친구 관리를 똑바로 해야지. 저렇게 사람이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고개를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는 김 대리에 나는 한숨을 쉬고서는 민아 씨에게 분위기 처지니까 커피 한 잔씩 마시자며 카드를 받으러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사올까 싶다가도 또 괜히 불편해할까 봐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훌쩍. 그래. 김 대리가 내가 어색해져서 관두면 안 돼…. 모르는 척. 모르는 척하자. 동아리 단톡방에 술 마실 사람 찾는 톡 올려야지. 회식은 또 다들 안 해 줄 거니까. 




오늘도 컨디션이 멜롱해 보이는 김 대리를 보며 팀장실에 갇혀 꼼짝 없이 일만 했다. 적당히 페이스 맞춰가며 할 때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새 CM에 대한 평이나 외국 신문을 적당히 뒤적거리다가 퇴근 시간이 됐다. 퇴근해서는 또 뭐 한담. 친구들도 이제 안 놀아 줄 거고. <사랑할 결심>도 어제 다 봤는데. 나도 초밥이나 포장해서 먹을까. 느릿느릿 운전을 해서 집에 왔는데, 뜻밖의 인물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민 과장?"

- 팀장님. 뭐 하세요?

"대뜸? 주차 중인데요."

- 아니 뭔 또 퇴근을 이렇게 빨리 했어.

"뭔데요. 시빈가. 그러는 민 과장은 어딘데요?"

- 집이요.


어이없네. 뭐냐고 짜증을 내려는데 민 과장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 오늘 김 대리 봤어요?

"보긴 봤죠. 결근 안 했잖아요."

- 아 그거 말고. 애 집중 못 해 갖고 지금 야근해요.

"아, 그래요? 야근?"


아니. 요새는 많이 바쁠 철도 아닌데. 얼마 전에 이벤트 때문에 무지 바빴는데, 집에서 쉬지 왜? 불타는 금요일에 민 과장이랑 데이트도 안 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 볼까 싶어 안전벨트를 다시 찰칵 맸다. 밥은 먹었나? 뭐 좋아하려나. 초밥 괜찮나?


- 걱정 되네요. 걔 밥도 잘 안 챙겨 먹는데.

"그래요? 나 바쁘니까 끊을래요?"

- 팀장님이 좀.


아이씨. 내가 하려고 했다고. 내가 챙기려고 했는데. 왜. 왜 스윗하고 다정하게 지 여친을….


- 챙겨 주세요.

"네?!"

- 저는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부탁합니다. 끊어요.


뭐야. 내가 챙기려고 했다고. 니 여친 챙기는 거에 내가 왜 동참해야 해. 억울해. 진짜 나쁘다. 민 과장. 문제 있어. 다시 문 과장이라고 해야 하나. 문제아 과장. 에이씨. 진짜 짜증나. 

사실 민 과장에게 짜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김 대리가 컨디션이 안 좋단 건 알았어도 야근하는 건 몰랐던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그리고 지금 짜증이 나는 이유를 아예 모르지 않아 더 짜증이 났다.


"나 또 니랑 비교당하고 경쟁하기 싫다고……."


망할 민 과장. 멜로는 좋지만 NTR은 싫고 치정극은 더 싫은데. 왜 하필 김 대리야. 너 좋다는 사람 엄청 많잖아. 저번에 무슨 인터뷰 딴 미인 변호사인지 뭔지 하는 우리 학교 후배도 너 좋아서 막 하트가 뿅뿅이더만. 왜 사내연애를 하냐고. 왜! 

흥칫뿡이다. 이씨. 네가 챙겨 주라고 해서가 아니라 내가 챙겨 주고 싶어서 가는 거야. 내가. 내가 김 대리 좋아하니까. 아이씨. 속이 다 시원하네. 그래. 나 김 대리 좋아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아마 안 움직일 것 같지만. 여러 모로 심란했지만 그래도 배고플 김 대리를 위해 나는 악셀을 꽉 밟았다.




"맛있다."


역시 김 대리가 타 주는 율무차는 특별했다. 이상하게 맛있었다. 왜일까. 영문을 모르겠어서 김 대리의 얼굴을 보았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귀여웠다. 맞다. 김 대리는 늘 한결같이 좀 귀여운 면이 있었다. 물론 뽑을 때부터 야무지고 참하고 귀엽게 생겼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내면도. 




김 대리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던 날, 워크숍보다도 더 전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나는 여전히 탕비실에서 쪼코하임과 초코우유를 꺼내 먹으려 신나서 가고 있는데 김 대리가 탕비실에 있었다. 


"오! 김 대리."

"안녕하세요. 팀장님."

"뭐 먹으러 왔어요? 내 추천은 초코유유랑 냉동실에 얼린 쪼코하임!"

"안 추우세요? 오늘 뭐 공사한다고 히터도 비실비실한데."

"아 그래도 난 달다구리한 게 좋아서요."

"민지 씨한테 얘기해서 유자차나 핫초코 가루를 사놓든가 해야겠네요."

"좋은 생각이에요! 김 대리는 뭐 마실 거예요?"

"저요? 저는… 오랜만에 율무차 마실까 싶네요."

"오? 우리 탕비실에 율무차가 있었어요?"

"네. 팀장님이 저보다 오래 계셨으면서…."


먹는 것만 먹어서 몰랐다고 하자 김 대리는 피식 웃으며 하긴 그렇다며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팀장님도 율무차 드실래요? 달달하니 가끔 먹음 괜찮아요."

"오~? 그럴까요?"

"네. 제가 타 드릴게요."

"고마워요!!"


진중하게 물을 따르고 큼지막한 율무차 봉투를 털어넣고, 그걸론 모자랐는지 손끝으로 우아하게 탁탁 남은 가루까지 모조리 떨어내는 모습이 프로페셔널했다. 와와 하면서 보고 있자니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 잘 녹인,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찐-한 율무차가 내 앞에 놓였다. 후후 불고서는 호로록 입에 넣었다. 


"맛있다!!"

"그래요? 다행이에요. 입맛에 맞으셔서."

"진짜 맛있어요. 김 대리 진짜 짱이다."

"추켜 세우시기는…. 아. 따끈하다."


핀잔을 주고서는 다행이라는 듯 자신의 율무차를 마시더니 빙그레 미소를 짓는 김 대리. 편안해 보이는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맨날 무표정하게 돌아다니거나, 시발시발 하면서 자판을 두드리거나 관자놀이 꾹꾹이 하는 것밖에 못 봤는데. 김 대리는 편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귀엽다. 


"김 대리 웃으니까 예쁘네요!"

"네, 네?! 뭐라고요?"

"아. 미안. 그냥 생각난 대로 입밖에 냈어요."

"뇌 빼고 말하지 마세요. 크흠. 감, 감사해요. 칭찬은."

"네."


빨개지니까 더 귀여웠다. 삶은 문어…. 아니. 이제 그냥 예뻐해야지. 사과 같았다. 사과.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아까 색을 하도 바꿔대서 색약인가 의심될 정도였는데, 초밥이 입맛에 잘 맞는지 김 대리는 야무지게 꼭꼭 씹어먹었다. 왠지 나도 식욕이 더 돌아서 후토마끼를 입에 넣고 냠냠 씹었다. 


"마시께 머꼬 이써요?"

"네? 뭐라고요?"


앗. 발음이 안 좋았나. 나는 꿀꺽 음식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맛있게 먹고 있어요?"

"아. 네. 여기 맛있네요. 비싸 보이지만."


히히. 다행이다. 여기 조금 가격이 있기는 해도 엄청 맛있는데, 김 대리도 좋아할 줄 알았다. 민 과장이랑 갔던 곳보다 맛있기를 빌면서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사랑할 결심> 이야기를 꺼내자 김 대리가 영화 이야기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화제는 영화로 이어졌다. 


"멜로 영화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 나는 영화가 좋았다. 얼마나 좋았냐고 하면은 대학을 S대 인문대학으로 선택한 거 자체가 영화를 제대로 배워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국문과에서 드라마 비평을 배울지, 미학과에서 영상미학을 배울지 고민하다가 결국 사철계열로 선택했었다. 외숙모는 정말 못해도 1000번쯤 백방대 경영대 가라고 하셨지만, 결국 내 똥고집을 꺾지 못하셨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가보니 나는 그저 영화를 보고 감상하는 것을 사랑했을 뿐 미학에 통 재능이 없었다. 물론 공부는 곧잘해서 학점이 엉망진창인 건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교수님을 보면서 이 길이 내 길이 아님을 일찌기 직감했다. 

그래서 찍는 쪽으로 가볼까도 생각해서 영화 동아리에도 들어갔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촬영, 연출, 연기 모두에 나는 형편없었다. 창조적인 작업에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진로 상담 해 주시는 상담사 아주머니가 말해 주셨을 때 나는 와앙 울어 버렸다. 

쓰디쓴 패배와 포기의 기억이었다. 그래도 영화는 좋았다. 업무에서, 동료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교열위에 있더라도 내가 회사와 동료들을 사랑했듯. 

비록 민 과장에게 사랑에서도 졌어도, 김 대리를 좋아하듯 말이다. 찍고 싶다. 죽여 주는 멜로 영화. 김 대리랑 나 정도면, 꽤 괜찮은 그림을 뽑아낼 수 있을 텐데. 현실은 잘해 봐야 치정극이겠지만. 끙. 포기해야 할 마음인데 참 쉽지가 않네!


"으. 밤 되니 좀 쌀쌀하네요."

"그러게요."


으흑. 그래도 헤어지기는 싫었다. 김 대리랑 같이 있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양심에 찔렸다. 민 과장이 이렇게까지 하라고 안 했는데. 자기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개수작(한 개도 안 먹히는 것 같지만) 부리라고 얘기한 게 아닐 텐데. 그래도 욕심이 양심을 앞섰다. 분명 김 대리네 집은 화곡동 인근이었다. 택시 타면 금방인데 대중교통은 불편하고 사람도 너무 많다며 짜증을 냈던 기억이 생생했다. 우리 집은 여기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지만……. 


"데려다 줄까요?"


개수작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왜 이러세요 팀장님, 신고할 거예요. 그러면 어떡하지? 그냥 선의인 척했어야 하는데 표정이 느끼하진 않았겠지? 아이씨. 괜히 말했나 봐. 


"네. 좋아요."


아싸!!! 김 대리 최고!!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애써 내색 않고 크흠흠 헛기침을 하며 만약 김 대리가 부담스럽다고 했을 때 회피책으로 던졌을 회심의 농담을 투척했다. 


"그래요. 요앞 지하철 타는 데까지 데려다줄게요."

"네?"


엄마야. 김 대리한테 농담 두 번 했다간 뒈지겠어. 그래도 화 내는 것도 좀 귀엽네. 나 진짜 맛탱이 갔다. 귀여우면 끝이랬는데. 외숙모도 외삼촌 귀여워서 만났댔는데. 아. 아아. 으아아아. 


"…농담이에요. 타요."


어떻게든 수습하고 차에 태웠다. 멋지게 후진하면서 차를 빼는데 (사실 탑뷰라서 뒤를 보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김 대리는 내 운전은 안 보고 자기 볼만 찰딱찰딱 주무르고 있었다. 뭐 하는 거람. 사람 귀여워서 환장하게 만들려고 작정했나. 

안 그래도 순하니 동그란 얼굴을 수제비 반죽처럼 주무르고 있자니 참…. 이상하고 희한하고 귀여웠다. 이상하고 신비한 김 대리의 귀여운 포인트를 하나씩 읊고 있자니 김 대리가 영 기분이 별로였는지 조용하라고 했다. 



6.


'아 시간 너무 빠르다'

벌써 강서구에 들어왔는지 지나가는 가게 이름들에 강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 왔는데. 내려주기 싫은데. 어떡하지. 뭐라도 핑계댈 게 없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핑크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 바스킨 로빈스."


결국 반쯤 억지로 납치하듯 김 대리를 데리고 아이스크림을 먹게 됐다. 가게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종업원의 유니폼이 귀여워서 김 대리가 입었을 때 얼마나 귀여웠을까 싶어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그리고 또 다시 김 대리랑 시덥잖은 대화를 나눴다. 아. 재밌다. 내가 원래 말하고 듣는 거 다 좋아하긴 하지만 김 대리랑 얘기하는 건 왜 이렇게 재밌는지. 물론 김 대리는 재밌어하는 건지 잘 모르겠긴 했지만, 그래도 제때 딴죽을 걸어 주는 걸 보니 우리 대화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맞다. 김 대리는 착하고 눈치도 빠르니까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전에도 이랬던 거 같은데 김 대리랑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아. 그 회식이었지?


"우리 예전에 회식 때도 같이 아이스크림 먹었는데. 기억 나요?"




속이 아직도 메슥거린다는 내 말에 고맙게도 김 대리가 술 좀 깰 겸 좀 걷다가 대리를 부르라고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걸었다. 그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또 김 대리에게 감탄했다. 

걱정된다니. 대박. 나는 부하직원들 안위보단 택시비만 생각했는데 (물론 걱정 안 한 건 아니지만…. 인사불성까지는 아닌 것 같았으니), 도착 후 안내 메시지를 떠올리는 김 대리의 착한 마음씨가 대견했다. 사려 깊다는 게 이런 거구나. 역시 일잘러는 몇 수를 내다 본다더니. 


"착하네요. 김 대리."

"별로 그렇지도……"


그때 김 대리가 날랐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부웅. 슬로우모션처럼 날아오른 김 대리가 무릎으로 착지하는 것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떡해?! 아니. 빨개 보였는데 술 깰 겸 걷잘 게 아니라 그냥 택시 태워 보냈어야 했나 봐!!! 내가 얼레벌레 얼 타고있으니 김 대리는 아파 죽겠다는 얼굴로 물이라도 사오라고 했다. 

어디서 소독은 알코올이 최고라고 했던 걸 들은 기억이 나서 소주병을 주워 담고 밴드며 처치 용품을 담았다. 그리고는 새빨간 피와 함께 퍼렇게 올라오던 멍을 떠올리고 쭈쭈바까지 담았다. 

'속상해…….'

김 대리의 가느다란 다리에 새빨간 상처와 얼룩덜룩한 멍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아마 내가 그때도 좀 좋아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내가 서툴게 냉찜질하는 탓에 김 대리가 고통을 좀 겪긴 했지만 안 해 준 것보다는 나은 상태로 소요 사태가 진정되었다. 

원래 계획과는 달랐지만 술이 단번에 깨긴 했다. 그렇지만 왠지 바로 일어나기는 좀 아쉬운 감이 있어서 대리를 부르는 시늉만 하고 김 대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스로에게 제시한 핑계도 좋았다. 김 대리 지금 바로 걷지도 못하니까. 


"아. 술 마시지 말걸."

"왜요? 토하기 싫으셔서요?"

"네? 아니. 뭐 그것도 그건데."


술 안 마셨으면 태워다 줄 텐데. 아무리 내가 철면피라고 해도 대리기사님께 수원에서 부산찍고 서울 가자는 것 같은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택시 태워 보낼 생각하니 왠지 아쉬운 맘이 들었다. 돈이 아까운 건가? 그땐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얘기하는 게 기분 좋고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팀장님은 숙취 없으시다니 부럽네요."

"그래요? 김 대리 숙취 나 줘요. 난 내일 놀거든요."

"저는 그럼 토요일에 출근하라는 말씀이세요?"

"아?! 아니요? 말이 이상했네요."

"농담이에요. 히히."

"낙하산이지만 갑질상사는 아니라구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김 대리는 전혀 웃지를 않았다. 아. 김 대리 이직하기 전 회사에서 안 좋은 일 있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필 갑질을. 아오. 이 망할 주둥아리. 으아악. 속으로 절규하고 있는 와중에 김 대리가 꺼낸 말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왜 자꾸 자기한테 낙하산이라고 그러세요?"

"네?"

"승진이 빠르셨던 건 맞지만. 전 팀장님이 팀장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그래요?"

"네. 팀원들도 잘 챙기고. 적당히 일도 잘 따오고. 윗선에 얘기도 잘 통하고. 분위기도 잘 띄우고."

"잘 통하고 자시고, 엄마랑 외숙모니까…."

"뭐가 됐든 간에요. 팀 사람들도 낙하산이라고 말론 놀려도 팀장님이 팀장님이라 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그니까 스스로 낙하산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런 생각 자체를 마세요.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논리정연하고 차분한 말투로 나를 긍정해 주는 사람은 김 대리가 처음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 '낙하산치고는 제법'이라고 했고 못 하면 '역시 낙하산'이라고만 했는데. 내가 없는 재능 쥐어짜서 노력하면,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봐 주는구나. 

김 대리같이 일도 잘하고 싹싹하고 인간관계도 좋은, 나말고 민 과장 같은 사람이더라도. 나를 좋게 봐 주기도 하는구나. 나는 세 살이나 어린, 그때는 아직 서른도 안 된 김 대리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김 대리가 한층 더 나에게 특별해진 게. 




7.


과거 생각을 하니 더더욱 김 대리를 보내 주기 싫었다. 오늘 집앞까지 데려다준 건 나지만, 김 대리가 집에 들아거서 통화할 사람은 민 과장이겠지. 오늘은 민 과장이 바빠서 나에게 이런 황금 같은 기회가 왔지만…. 


"……."


김 대리는 역시 내가 아니라 민 과장이 왔으면 더 좋아했겠지. 거대한 무력감과 죄책감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 얘기해 주는 게 맞겠지. 김 대리 애인이 얼마나 김 대리를 걱정했는지. 내가 이렇게 멋진 척 바래다 주었어도, 다 민 과장이 시켜서 그런걸. 나는 민 과장 대역인걸. 

정말 말하기 싫었다. 나도 챙겨 주고 싶었는데 그저 몰랐을 뿐인데. 하지만 부탁을 들은 이상 나는 부탁 때문에 여기까지 온 사람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어차피 내가 말 안 해도 민 과장이 얘기할 거고. 그러면 김 대리는…….


"그, 김 대리가 혼자 야근해서 밥도 못 먹었을 거라고. 자기는 바쁘니까. 챙겨 주라고. 그니까 이게 다 나만 잘한 건 아니고. 민 과장이. 근데 나도 마음이…. 그니까."


아. 이제 와서 말해서 화가 난 걸까? 김 대리가 고개를 푹 떨궜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결국 속이지 못하는 진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진짜, 나 둘… 사이. 모르는 게 아닌데. 진짜 내가……. 욕심이 나서. 그냥 같이 있으면 너무 재밌고 좋으니까. 김 대리가 민 과장 좋아하는 거 알지만. 둘 사이에, 치정극…. 진짜 미안해요. 그래도……. 많이 좋아하는데…. 한번만 나도 가능성 생각해 주면 안 돼요?"


어떡해. 허접한 고백을 털어놓고도 뭐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때. 김 대리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마음을 뚫고 지나갈 그 말을. 


"팀장님 미워요. 진짜 싫어요."


내가 밉고 싫어요?


"눈치 없고…. 맨날 진짜. 무슨. 진짜 싫어."


진짜 싫은 정도야…? 맞아. 김 대리가 싫어하는 거. 눈새였지. 왜 나한테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정말 눈치가 없는데. 


"사과하지 마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들어가세요."


나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김 대리가 떠난 자리를 한참을 지켜보았다. 망했다. 결국 내 주제에 맞지 않은 욕심이 모든 것을 망쳐 놓고야 말았다. 




"기집애야! 왜 이래?! 뭘 잘못 먹었어?!"

"엄마 나 회사 안 갈래애."

"미쳤니? 서른셋씩이나 먹고. 무슨 애 같은 소리야?"

"으어어어엉. 으엉. 사장니임. 나 부서 옮길래애."

"아니. 얘가 진짜 왜 이래?"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부서이동은 정기 인사 시즌이 아니라면 아무리 너라도 용납해 줄 수 없다면서 원칙은 원칙이니 잘 알아 두라며 팩폭을 날렸다. 나는 끅끅거리면서 낙하산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결국 퉁퉁 부은 눈으로 30분쯤 늦게 출근했더니 사무실에서 나를 보자마자 수근거렸다. 어디서 맞으신 거냐며 아니면 무슨 경영권 분쟁이라도 있었냐며 걱정을 건네 주는 팀원들에게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고 김 대리와 마주치지 않게 쏜살같이 팀장실로 파고들려 했다. 


"아. 팀장님! 오늘 순 대리 아파서 못 온답니다. 병가 낸다니까 승인해 주세요."

"네? 김 대리 아파요? 어디가? 마음이?"

"마음이요…? 그건 모르겠고 발가락이 박살났다던데요?"

"네. 정형외과 갔대요. 오후에 올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그래서 문 과장님이 오전 기자 미팅 대신 나가셨어요."

"허………. 발가락이요?!"


나는 그 소식에 싱숭생숭해져서는 팀장실로 돌아왔다. 슬픔도 잠시 걱정이 앞섰다. 아니 왜 발가락이. 무릎도 그렇고 왜 그렇게 다리를 잘 다치는 거야. 김 대리. 이게 무슨 일이야. 

패닉에 휩싸여서는 수치가 잘못 올라온 문서를 하마터면 결재 해 줄 뻔했다. 간만에 실수한 민아 씨에게 조심하라고 한 마디 하고 다시 돌아와 딸깍딸깍 마우스 클릭만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김 대리뿐이었다. 내 까인 고백과 민 과장. 발가락. 무슨 관계지……?


똑똑

"네. 들어오세요…. 꺄악! 민 팀장!"

"뭐, 뭐예요? 귀신 본 사람처럼. 미팅 다녀왔는데 보고 드릴 사안이 있어서요."

"뭐, 뭐죠? 김 대리 관련……?"

"아."


민 과장은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보고는 미간을 구기더니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말 잘했습니다. 뭐예요? 진짜 답답해서 원. 순대도 그뒤로 연락도 없고. 팀장님도 연락 없고."

"김, 김 대리가 민 과장한테도 연락 없어요?"

"네. 뭐 먹었냐고 물어봤는데 계속 읽씹이던데요. 미팅 관련해서 물어보니까 그제야 대답하고."

"허어어."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을 하며 울적해하고 있자니 민 과장이 코웃음을 치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 고백이라도 하셨어요? 표정이 왜 그래."

"……!!!"

"엥."

"나, 나가요. 그. 뭐야. 안건은 문 차장! 문 차장이랑 상의하시고요. 나는…. 나는 조퇴할래요."

"왜 이러세요?! 아니. 진짜?"

"아 가라고.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으니까…. 가라고."

"야. 장수현. 너 진짜 고백했어?!"

"여기 회사고 나 문하민 과장 상사예요!?"


갑질 논란을 감수하고 직급으로 윽박 질렀지만 얄미운 민 과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쓸어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오히려 성을 냈다.


"와. 이렇게 입을 딱 씻는다 이거지. 순대…."

"영문 모를 소리 하지 말고 나가라고요……."

"내가 나가기는 왜…. 어? 야. 장팀장. 장팀장님. 우세요? 아니. 왜 울어요?"

"몰라요. 이씨. 다 가진 사람은 모르겠죠."

"팀장이 차장도 아니고 과장한테 할 소리예요. 그게? 아니 왜 울어요? 기쁨의 눈물인가?"


평소에는 눈치도 무지 빠른 주제에 민 과장은 오늘따라 눈치도 없이 지 여자친구한테 고백했다가 대차게 차이고 밉고 싫다는 소리까지 들은 내 곁을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여러 의미로 진짜 보기 싫은데 깐족거리면서 왜 안 나가는 거야. 정말. 진짜. 에이씨. 주말 사이에 쌓인 슬픔과, 몇 년을 쌓인 울분과, 최근 무지 심했던 질투를 끌어담아 나는 단전에서부터 소리를 빼액 질렀다.


"나 차였으니까 나가라고요!!"


팀장실을 넘어 사무실까지 다 들릴 정도로 지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정말 긴급상황이라며 부서이동 신청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민 과장을 보며 씩씩 분을 이기면서 나는 빨리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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