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누나 제발 같이 해요."

"싫다니까."

"제발..."



좀 전까지 조용했던 과방에 난데없이 불청객이 들어섰다. 굳게 닫힌 여닫이문이 덜컥 열리고 보인 건 다름 아닌 정성찬. 그러니까 나를 볼 때마다 같은 동아리에 들자며 일주일 내내 떼를 쓰고 있는, 과동기이자 나보다 한 살 어린 정성찬이다.





분명 지금이라면 우리 과 애들은 전필을 들으며 불꽃필기를 하고도 남을 바쁜 시간이었다. 내가 수강신청에 실패해 빼도 박도 못하게 계절학기를 듣게 생긴 바로 그 과목의 수업.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부러 과방으로 왔는데, 얘는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와서 또 되지도 않는 애교를 떨고 있냐 이거지.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건데?"



몸통을 돌려 저를 쳐다보니 그제야 의자 빼고 옆자리에 앉는다. 정성찬이 입고 있던 체크남방 소매를 매만지며 내 눈치를 살폈다. 큰 눈동자 좌우로 굴리며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다. 이는 정성찬이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과도 같은 행위였다. 



"인준이형이 누나 여기 있다고..."

"진짜 황인준...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아 누나 인준이형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제가 엄청 알려달라고 그랬어요."



곧 휘어지는 눈매. 저 웃는 게 예쁜 건 또 어떻게 알고 잘생긴 얼굴로 생글생글 잘도 웃는다. 나는 정성찬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자주 말을 까먹곤 한다. 분명 방금까진 얘를 매몰차게 내쫓을 생각이었는데도 결국엔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 말이다. 


정성찬이 제 패딩 주머니 양쪽에서 흰우유를 두 개 꺼내 내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누나 여기 우유요."

"... 주니까 먹긴 하는데."

"그런데요?"

"그래도 동아리는 안 해."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정성찬을 피해 다니고, 정성찬은 그런 나를 쫓아다니는 거. 쫓아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 같은 동아리에 들자는 거였다. 내가 아니면 누구와도 같이 하지 않겠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나는 2주 내내 정성찬의 공세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하래도 그럼 같이 하는 의미가 없다며 칭얼댔다. 


내가 좋아하는 흰 우유를 사받치는 건 그 만의 뇌물이다. 언젠가 바나나 우유를 먹는 정성찬에게 그런 건 대체 무슨 맛으로 먹냐고 했다가 들켜버린 우유 취향이었다. 그날 이후로 무슨 대학까지 와서 우유급식 신청한 사람처럼 매일 한 팩씩 우유를 얻어먹고 있으니 말이다.


팩으로 된 멸균우유의 빨때를 꽂으려다 계속 방향이 헛나가는 걸 본 정성찬이 자연스레 가져가 푹, 빨대를 꽂아주며 말했다. 



"알겠어요. 누나가 그렇게 싫으면 안 해도 돼요."

"...?"



빨대에 입을 대려다 말고 멈칫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동아리를 안 한다고 했을 때 눈망울 반짝이며 양손 합장한 채 제 입술 위로 가져다 대고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면 안되냐고 하는 게 맞았다. 



"싫은 거 억지로 못하는 성격인 거 너무 잘 알겠어요."

"뭐야? 갑자기 이렇게나 쉽게 날 포기한다고?"



막상 원했던 말을 이렇게 쉽게 들으니 약간 김이 샜다. 2주 내내 쫓아다녔으면서, 그리고 2주 내내 거절 당했으면서 대체 오늘은 왜 갑자기 안 해도 된다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방금 그 말은 어쩐지 오늘 나를 찾아 온 건 애초부터 동아리 때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다.



"왜요. 더 하면 같이 해주려 했어요?"

"그건 아니고."

"근데 누나."

"응?"

"전 누나를 포기한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정성찬이 책상 위로 턱을 괴고 나를 쳐다봤다. 처음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가 이런 얼굴과 눈빛으로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턱을 괸 손목 끝으로 가지런히 접힌 소매가 눈에 들어온다. 제 반듯하고 모난 데 없는 성정을 드러내는 듯 깔끔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정성찬은 잘 웃었고, 바르고, 상냥했다. 또래보다 한 살 많아 신입생 오티 때 늘 뒤로 빠져 그저 동기들의 모습만 관망하던 내게, 긴 다리 휘적이며 걸어와 먼저 누나, 누나 하며 말을 걸어주던 게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잘생겼는데 성격도 좋은 정성찬은 처음부터 인기가 많았고, 여기저기서 그를 찾는 이가 많았지만 다 제치고 꼭 내게 붙어 있었다. 나랑 눈을 한 번 맞추려면 그 앤 허리를 반쯤 접었어야 했지만 대화할 땐 한 번도 나를 내려다보는 일 없이 눈을 맞춰왔다.


그리고 나도 그런 정성찬이 싫지 않았다. 매일같이 귀찮게 구는데 얼굴 보이면 반가운 걸 보면 오히려 좋은 거 같기도 했다. 키가 커서 어디 섞여 있어도 남들보다 튀어나와 있는 통에 언제 어디서든 쉽게 발견하곤 했는데, 가끔은 그의 둥그런 머리통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으니까.


멀리서 내가 조금만 손짓하거나 스치듯 눈을 맞추기만 해도 정성찬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늘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엔 꾸벅거렸는데 내가 동기끼리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다고 한 다음날부터는 신나게 손을 흔들어댔다. 아예 말을 놓으려 하길래 그건 싫댔더니 존댓말은 꼬박꼬박 잘 쓴다. 멀대같은 게 귀엽긴 되게 귀엽단 말이지.


근데 그 귀엽던 정성찬이 지금은 좀 달리 보인다. 왠지 모르게 낯설고 새롭다.



"허락 해주면 안 돼요?"

"...뭘?"

"동아리 핑계 아니라도 누나 쫓아다니게 해줘요."



언제나 사슴 같은 눈동자 반짝이며 애교를 부리던 정성찬은 오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사뭇 진지한 모습만이 남았다. 우리를 감도는 공기가 좀 전보다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동아리 같이 해달라고 안 할 테니까 이제 나 그만 피해요."

"..."

"보고 싶은 얼굴 맘대로 못 보니까 너무 힘들어."



얘가 대체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쳐다보니, 그런 내 표정을 읽은 정성찬이 입매를 씩 늘이며 웃어온다.



"사실 누나,"

"...응"

"그 영화동아리도 매주 2인 1조로 영화 보고 나누는 거라 해서 누나랑 하려고 한 거거든요. 누나랑 둘이 영화 보고 싶어서."

"..."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냥 누나 따라다니면서 같이 영화 한 편 보자고 조르는 게 더 낫겠어."



그리고 제 휴대폰을 잠깐 꿈지럭 대더니 폰 화면을 내 앞으로 내민다. 띄워진 화면은 H 13, 14 가 적혀진 2인 모바일 영화예매표.



"누나 오늘 오후 수업 없잖아요."



정성찬이 내 손에 들린 아이패드와 펜슬을 자연스레 케이스에 넣어 정리하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정성찬도 등 뒤로 가방을 매고 있다. 



"나 누나랑 영화 보고 싶어서 수업도 땡땡이 쳤는데."

"야,"



대충 들어도 패스인 채플을 결석 한 번 안 한 애가, 출석만 대충 때워도 되는 교양선택 과목에 지각 한 번을 안 한 애가 나랑 영화를 보겠다고 전공수업을 빼먹으셨단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멀뚱히 앉아 그런 정성찬을 지켜보고만 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내 에코백 안으로 다른 짐들까지 가지런히 넣어 자연스레 제 어깨에 맨다. 



"가요, 누나."

".. 진짜로?"

"내가 싫은 거 아니면요."

"..."

"아, 근데 저는 누나가 좋아요."



이를 어떡하지. 내게로 바짝 붙어 입고 있던 코트의 깃을 판판하게 정리해준 정성찬이 나가자며 제 손바닥을 내밀며 손짓한다. 갑자기 쏟아부어진 진심에 나는 또 할 말을 잃었다. 별 감정 없이 자주 잡아본 손이었지만 막상 잡으려니 망설여졌다. 내가 이 손을 잡으면, 정말이지.



"같이 가줄 거죠?"



허공에 손을 두고 어찌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정성찬이 먼저 큰 손으로 내 손을 덮듯이 잡아 온다.



"뭘 고민해요. 쉬워요."

"..."

"이제부터 누나는 받기만 해요.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 손을 잡고 그대로 과방을 나섰다. 금방 놓게 될 줄 알았던 손을 잡고 인문대를 지나쳐, 학관을 지나쳐, 정문까지 이르렀다. 언제 놓을 거냐는 듯 손을 보이며 올려다봐도 정성찬은 씩 웃으며 손을 더 꽉 잡아 올 뿐 놓을 생각을 않는다.


문제는 이런 네가 싫지 않다는 거. 신호등이 바뀌기 전까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서서 내게 찬바람이 오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도, 눈을 마주칠 때마다 빙그레 웃어주는 것도, 꼭 먼저 본인이 차도 쪽으로 방향을 옮겨 걷는 것도, 그리고 언제나처럼 허리를 반쯤 접어 눈을 맞추며 내 말을 들어주는 것도.


어쩌면 여태까지의 내 거절은 바다 가까이 모래 위에 쓴 글자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정성찬의 훅과 같은 파도 한 번이면 금방 녹아버렸을 효력 없는 거절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너는 불청객. 나의 무채색 일상에 들어온 난데없는 무지개. 겪어 본 적 없는 상냥함. 처음 듣는 멜로디. 



사랑스런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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