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수영 전력 60분 2주차 참여작(약 8600자)

*레인버스 AU

*TM님 리퀘

*다음 전력 주제 올라올 때까지만 공개 예정

 

 

 

 

 

 

 

 

 

“……허시 부인은 광택이 나는 대구 척추골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호지아 허시는 장부를 최고급 상어 가죽으로 장정했다. 그 집에서는 우유에서도 생선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느 날 아침 해변에서 어부들의 보트 사이를 거닐다가…….”

 

 

상아는 책을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육성으로 읽어내렸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해온 책이었다.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책이었지만 워낙에 문체가 장대하고 분량이 두꺼운 탓에 ‘시간이 나면 읽어야지’하고 미뤄두던 것을 이제야 집어 든 것이다. 책의 초반부는 너무 장황하고 지루했지만 조금씩 이야기가 전개되자 명작다운 중후함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상아는 그 책을 끝까지 읽을 자신이 생겼다. 하지만 상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야기에 집중하는 만큼 상대방의 기척에도 신경 쓰고 있던 상아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상대가 지루해하고 있음을 금세 눈치챘다. 상대는 늘 그렇듯 아무 말도 하지 않으나 비를 타고 전해져오는 옅은 숨소리나 기척 등에서 그 사실을 잡아낼 수 있었다. 물론 보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상대의 아주 작은 기색만으로 감정을 읽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아가 그 어려운 일을 쉽게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경험이었다. 누구라도 10년 이상을 같은 일에 투자한다면 능숙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재미없어요?”

[……]

“음, 그럼 다른 걸 읽어볼까요.”

[……]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다 읽기엔 너무 두꺼운 책이었으니까, 이참에 좀 더 짧은 소설로 바꿔보죠. 어디 보자…….”

 

 

상아는 책을 덮었다. 나중에 비가 오지 않는 날에 혼자 읽어도 괜찮겠지. 다른 책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잘못 그려진 점선처럼 짧은 궤적을 점점이 그린 빗방울들은 굴러떨어지고, 새로운 궤적을 그리고, 다시 굴러떨어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상아는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고요했다. 고요한 와중에 상아의 숨소리와 보이지 않는 상대의 작은 기척만이 선명했다.

 

상아는 우천성 청각장애, 혹은 레이니-데프(rainy-deaf)라고 불리는 질환을 앓고 있었다. 비가 오는 동안 상아는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 자신의 목소리와 특정 상대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이건 저번에 읽었던 거고…, 잠시만요.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요?”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계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 누군가는 그 침묵의 세계를 채워주는 상대를 고마워했고, 누군가는 원하지도 않는데 자신의 모든 목소리가 전달되고 알지도 못하는 상대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혐오했다. 개개인의 감정이야 어쨌든 세간에서 그 ‘특정 상대’를 부르는 정식 명칭은 ‘소울메이트’였다. 그리고 상아의 소울메이트는 굉장히 과묵한 사람이었다.

 

처음 우천성 청각장애가 찾아왔던 날, 상아는 처음 느껴보는 완전한 침묵에 겁을 먹었다.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한 상대방과 그 두려움을 공유하며 공포를 달래려던 상아는 상대방이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는 것에 실망했다. 들리는 거 다 알고 있으니 뭐라 말 좀 해보라고 애원도 하고 불평도 해봤지만 상대는 철저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런데도 상아가 비 오는 날마다 꿋꿋이 혼자 떠들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것도 없는 정적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라도 듣는 게 나았다.

 

그렇게 고독하면서도 꿋꿋한 일방통행의 대화를 이어나가던 날, 상아는 문득 어떤 가설을 떠올렸다. 상대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 목소리 따위 듣기 싫다’라는 거부의 의사조차 나타내지 않았다. 상아는 상대를 향한 자신의 관점을 조금 바꿔보았고, 그리고 그 관점을 평가하기 위해 침묵을 고집하는 상대의 기색을 온 힘을 다해 살폈다. 그러자 알 수 있었다. 상대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 늘 상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단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날부터 상아는 책을 펼쳤다. 대답은 없지만 제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는 상대와 그렇게라도 침묵을 견디고 싶은 자신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아.”

 

 

상대에게 읽어줄 만한 괜찮은 책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상아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상아는 그 생각을 대답만 없을 뿐 그 누구보다 훌륭한 청자인, 그래서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 상대에게 전달했다.

 

 

“혹시 장르소설 같은 것도 괜찮아요? 어, 그러니까 판타지 소설이요.”

[……]

“얼마 전에 친구 추천으로 읽게 된 소설이 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원래 그런 소설은 잘 안 읽었는데 편견이었나 봐요.”

[……]

“그 소설은 너무 장편이라 지금 읽기는 좀 그렇고요. 대신 그 작가가 잠시 휴식기를 갖는 동안 자기 개인 연재란에 짧은 단편을 올렸는데 그것도 재미있더라고요.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 읽기에 분위기도 딱 맞고.”

[……]

 

 

잠시 기색을 살핀 상아는 상대가 자신의 제안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노트북 전원을 켜고 소설 연재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올라온 글을 클릭했다. 약 5만 자 분량의 단편. 상아가 침대에 몸을 뉘기까지 시간은 아직 3시간 정도 남아있었고, 일기예보는 오늘 밤새 비가 온다고 했다. 넉넉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상아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글을 읽어나갔다. 늘 페이지를 넘기며 낭독하던 상아였기에 마우스 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글자를 발음하는 기분은 조금 색다른 기분이었다.

 

며칠 후, 상아는 작가의 개인 연재란에 새 글이 올라와 있음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글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본다는 설렘과 다음번 비가 오는 날에 상대에게 읽어줄 새 글을 찾았다는 반가움이 곧장 그 글을 클릭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비가 오던 날에도 상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아가 낭독을 멈췄을 때 유독 아쉬워하는 티가 났다. 그런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상아는 상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런 사소한 취향이나마 알게 됐다는 사실이 상아를 즐겁게 했다.

 

그런데 작가의 신작은 의외로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다. 그건 어느 여자의 일상을 다룬 글이었다. 세상의 멸망도 없었고 비현실적인 초능력도 나오지 않는, 마치 일기 같은 담담한 일상. 그 어떤 극적인 요소가 없었음에도 상아는 글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단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의미가 그 안에 담겨있었으므로.

 

그것은 선천적인 청각장애와 우천성 청각장애를 동시에 앓고 있어 비가 오는 날에만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조금 더 첨언하자면, 비가 올 때마다 그 주인공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울메이트가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 내가 농아(聾啞)라는 거에 놀라지 않았어?

 

 

화면에 떠오른 말을 읽은 상아는 고개를 젓고 수화를 시작했다.

 

 

- 사실은, 어느 정도 예상했어요. 제 목소리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대답은 하지 않는 이유를 혼자 생각해봤거든요.

 

 

상아와의 대화를 즐기면서도 대답이 없는 이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상아의 대답에 상대는 납득했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는 마침내 만나게 된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다시 한번 관찰했다. 작고 마른 체구,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검은 단발. 누군가에게 그녀의 외모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을 것 같은 눈물점. 여자일까, 남자일까, 나이는 몇 살일까, 뭐 하는 사람일까…… 수없이 상상했던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들어와 처음 마주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더라도, 또 한 번 감회가 새로웠다. 상아는 빙긋 웃었다.

 

 

- 놀란 건 당신이 내가 읽던 소설의 작가라는 거에 놀랐죠.

 

 

작가의 신작이 자신과 상아의 이야기를 다룬 자서전임을, 즉 내가 바로 너의 소울메이트라고 상아에게 보내는 신호임을 깨달은 순간 상아는 곧장 그녀에게 쪽지를 보냈다. 상대 역시 금방 답장을 해왔다. 만나자는 이야기와 함께.

 

상아의 수화에 상대는 조금 짓궂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우천성 청각장애인 상아도 배운 수화를 상대가 모르지는 않을 테고, 아무래도 자판을 치는 게 더 편한 모양이었다. 노트북으로 작업할 일이 많은 작가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 나도 네가 갑자기 내 소설을 읽기 시작해서 놀랐어.

 

 

곧이어 한 문장이 더 추가됐다.

 

 

- 내가 쓰는 소설은 네가 읽어주던 책들이랑은 분위기가 좀 다르니까.

- 하지만 정말 재미있었어요. 저 당신 소설 좋아해요.

 

 

상아의 진심 가득한 칭찬에 상대는 조금 멋쩍어했다. 상아는 그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조금 어색해하던 상대가 다시 화면에 문장을 띄웠다.

 

 

- 괜찮다면, 내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상아는 늘 상대의 이야기가 궁금했으므로. 상아가 승낙하자 상대는 묵묵히, 그러나 신중하게 키보드 위에서 손을 놀렸다.

 

 

- 내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된 건 7살 때야. 그전에도 잘 듣진 못했지만, 아주 못 듣는 건 아니었지. 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어설프게나마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던 건 그 때문이었어. 태어날 때부터 아무 소리도 못 들었었다면, 네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하나도 못 알아들었겠지. 불행 중 다행이랄까. 물론… 처음 네 목소리가 들렸을 때, 반 이상은 못 알아들었어. 뭘 듣는다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거기까지 쓴 상대는 조금 뜸을 들이며 흘끗 상아를 쳐다보았다. 상아는 상대가 할 말을 끝마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짧은 문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 그래도 기뻤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아는 길어야 며칠일 뿐인,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 것이 확실한 정적에도 무섭고 고독해서 끊임없이 소울메이트를 갈구했다.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소리를 그렇게나마 다시 찾았을 때 상대의 기쁨이 얼마나 거대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그리고 좀 무서워졌어. 기껏 이어진 소울메이트가 농아여서, 뭘 말해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데다가 말도 멍청하게 더듬거리고 어눌하다고 네가 실망할까 봐.

 

 

상아는 실망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상아가 손을 움직이기도 전에 상대가 여태껏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단편적인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몇 개는 아예 알아듣기 어려웠고, 몇 개는 알아들을 수는 있었으나 꼭 외국어처럼 어색했다. 더듬더듬 몇 마디를 더 뱉던 상대는 결국 힘없이 웃었다.

 

 

- 보시다시피 이 모양이거든.

 

 

상아는 무어라 수어를 건네보려다가 포기했다. 섣부른 위로와 독선적인 조언 그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 좋은 말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아의 표정을 본 상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다시금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 너 붙잡고 내 삶을 한탄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장애인이란 사실에 실망할 사람이 아니란 것도 이젠 알아. 그냥 내가 겁이 많았던 거야. 내가 용기를 냈다면, 아마 너는 내가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비가 올 때마다 도와줬겠지. 그걸 알게 된 이후에도 나는 너한테 그런 목소리를 들려주기 싫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다 밝혀지고 얼굴까지 보여준 지금도 좀 싫어.

- 싫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손을 움직이자, 상대는 상아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육성 대신 문자를 이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너한테 말을 거는 것도 겁이 났지만, 네가 나한테 말을 거는 일을 포기하는 것도 두려웠어. 좀 철없지? 그래도 어렸으니까 이해해주라.

 

 

그 간절한 두려움을 어떻게 철없다는 한마디로 매도할 수 있을까. 상아는 이해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네가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을 땐 정말 행복했지. 네가 날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걸 알았거든. 너에겐 비 오는 날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날이겠지만, 나에겐 비 오는 날이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었으니까……. 덩달아 책도 좋아졌어. 작가가 된 건 그런 이유가 커. 비록 네가 자주 읽어주곤 하는 그런 책을 쓰는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결국 네가 내 책을 재미있게 읽고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나름 성공했다고 해도 되겠지. 나 돈도 잘 번다고.

 

 

상대는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익살맞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대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아는 상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금부터임을 알았다.

 

 

- 이렇게 너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꼭 너를 만나보고 싶었어. 너를 만나서 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상아 역시 만나서 참 좋다는 뜻의 수화를 짧게 만들어 보인 후, 계속하라는 의미로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그렇게 운을 띄운 후 상대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상아는 상대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상대는 결연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작성했다.

 

 

- 네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

 

 

상아는 조금 당황했다. 상대의 요구가 뜸 들인 시간에 비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표정이 조금만 덜 진지했더라면 이름 정도로 이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물었을 것이다.

 

 

- 이름 알려줄래?

 

 

기꺼이 대답하려던 상아는 잠시 멈칫했다. 상대가 건넨 두 마디의 문장에서, ‘알다’와 ‘부르다’의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제 어색한 발음과 목소리가 싫어 상아의 목소리가 끊길까 무서워하면서도 10년 이상을 아무 말 못 하고 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아는’ 것을 넘어 ‘불러보고 싶다’라고 했다. 상아는 조금 뒤늦게 상대의 비장한 표정을 이해했다.

 

상아는 지문자(指文字)로 천천히 제 이름 자모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유’의 ㅇ부터 ‘아’의 ㅏ까지. 상대는 그 느릿한 손동작 하나를 뇌 깊숙한 곳까지 새겨 넣으려는 듯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상아의 수어가 끝나자마자 입을 뗐다. 우, 유, 스, 아…… 상대는 굉장히 노력을 들이고 있었으나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인지 자신이 내는 소리에 확신이 없어 보였고, 거의 사용해본 적 없을 육성은 세 글자를 재현하는 일도 힘겨워했다. 안타까워진 상아는 저도 모르게 ‘유상아’하고, 제 이름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상대는 눈을 크게 떴다.

 

 

- 왜 그래요?

- 네 목소리가 들려.

 

 

상아는 그제야 사위가 대단히 고요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상대에게 신경 쓰느라 놓치고 있던, 비정상적인 정적. 상아는 이 정적을 알고 있었다. 상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급하게 뛰어가는 남자, 우산을 펼치는 중년 여성, 지면을 두드리며 웅덩이를 만드는 빗방울들. 상아는 손을 움직이는 대신 입을 열었다.

 

 

“소나기네요.”

 

 

상아가 이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맑았고, 일기예보에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으니 소나기일 터였다. 아주 반가운 비였다.

 

 

“타이밍이 좋아요. 그렇죠?”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타자를 두드렸다.

 

 

- 말을 하는 네 모습을 눈으로 보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제 말에 대답하는 당신은 이런 느낌이구요.”

- 네 이름, 말해줄래?

 

 

직전의 경험 덕분에 상아는 ‘알려줄래’에서 ‘말해줄래’로 바뀐 요청의 의도를 바로 잡아내었다. 그래서 지문자를 썼던 것처럼 천천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유상아. 유상아라고 해요.”

 

 

상대는 곧바로 그 음성을 흉내 냈다. 아직도 조금 부족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목소리가 그럭저럭 ‘유상아’와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훨씬 나아졌다는 의미로 위아래로 고갯짓을 한 상아는, 이번에는 본인 쪽에서 질문했다.

 

 

“당신 이름은요?”

- 한수영.

“한수영…….”

- 그렇게 발음하는구나.

 

 

이후 상아는 수영의 요청에 따라 ‘유상아’라는 발음을 교정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냈지만 오늘 처음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소나기가 그쳤을 때 끝이 났다. 두 사람 다 헤어짐을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제 비가 오지 않아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단이 있었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는 순간, 수영이 상아를 잡았다. 상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영이 자신을 올려다보며 붙잡은 손을 놨다. 그리고 그 양손이 턱과 가슴께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으로, 수영의 손은 키보드를 치는 대신 수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아주 오래전부터.

 

 

수영은 오른손바닥을 가슴 중앙에 댔다.

 

 

- 내 세계에는.

 

 

상아는 그 오른손이 제 쪽을 가리키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 네 목소리밖에 없었어.

 

 

그러더니 손끝을 밖으로 향하게 한 오른손으로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게 편 왼손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그것은 수화를 익힌다면 누구든지 첫날에 배우곤 하는 단어 중 하나였고, 그리고 그만큼 많이 쓰이는 단어였다. 상아는 웃으며 저도요, 하는 의미의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수영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손을 움직였다.

 

굳게 말아쥔 오른 주먹이 코앞에서 두어 번 흔들렸다. 조금 쑥스러워하던 수영은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느꼈는지 엄지를 위로 오게 하여 세운 왼쪽 주먹 위에 오른쪽 손바닥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툭 떨궜다. 괜스레 바닥의 돌멩이만 툭 차고선 대답도 보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한다.

 

첫 번째 수화와 마찬가지로, 뒤의 두 수화 역시 수화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알고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단어였다. 하지만 그 사용빈도는 첫 번째 수화에 비해 현저히 적다. 첫 번째 수어가 자주 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면, 뒤의 두 수어는 자주 쓰이진 않지만 그 뜻이 중요하여 일찍 배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그런 수어를 받게 되었는데도 상아는 놀라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고 한 의도를 깨달은 순간부터, 수영의 인생에서 자신이 가지는 의미를 어렴풋이 눈치챘으므로.

 

그 멀어지는 뒷모습,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붉은 귀를 발견한 상아는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제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만히 숨죽이던 사람다운 수줍은 고백이었다.

 

 

 

 

 

 

 

 

 

 

 

 

 

 

분량 조절 대실패! 두둥 ㅠㅠ 플롯이랑 틀을 거의 하루 꼬박 짰네요.. 이쯤되면 혼자 60분 전력이 아니라 24시간 전력을 하고 있는 듯..

 

글의 첫머리에 나온 소설은 <모비딕>의 한 구절입니다. 대학생 시절 1/3쯤 읽었다가 포기한 소설인데, 이 글을 쓰느라 다시 도서관에 들러 대출했네요... 이참에 한번 다시 도전해볼 생각..

 

리퀘박스에 들어온 TM님 리퀘... 상아나 수영이 둘 중 하나가 신체 일부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보고 싶다는 리퀘에서 살짝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 리퀘 받은지가 몇 달 전이라 리퀘해주신 분은 까먹으셨을거 같지만요.... (머쓱

 

수화로 대화 나누는 부분은.. 다들 아시겠지만 저렇게 말투까지 살리기 어렵습니다. 일종의 소설적 허용이라 생각해주세요.

 

수영이가 말이 없는 부분에선 일부러 서술을 늘리고 수영이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부분은 최대한 서술을 줄여보았는데 눈치채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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