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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일

졸려



+-김독자(로 추정되는 존재)는 금방 유중혁을 땅에 내려다주었다. 비록 유중혁이 열심히 기어올라온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행위였지만 유중혁은 화가 나진 않았다. 일단 이것의 협조를 얻어내면 언제든 나갈 수 있어 보였고 (확실히, 그것은 '바깥'에서 들어온 것 같았다) 당장은 상태가 신경쓰였다. 비스트 테이머의 재능은 보통 신유승에게 있었기에 유중혁은 그쪽으로 스킬을 찍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스킬 같은 것이 없어도 유중혁은 바로 김독자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괴상하게 생겼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가끔씩 물이 끓듯 검은 늪과 같은 피부에서 거품 한두방울이 올라와 부풀었다 터지기를 반복하는데, 눈들은 초점을 잃고 흐리멍텅했고 눈꺼풀은 제대로 바짝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간 그것이 올 때마다 보인 모양새와 비교해보자면 훨씬 축 처져 있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생명체가ㅡ비록 그것이 처음 접하는 미지의 종족이라 해도ㅡ건강과 관련하여 보이는 신체 반응이 거의 비슷하다는 전제 하에 확실히, 아파 보였다.





애완인간일지 (4)



■월 ■일

졸려



유중혁은 몇 번 손가락으로 김독자(?)의 피부를 쿡쿡 찔러 귀찮게 했지만 반응은 별로 없었다. 아까 유중혁을 바닥에 친절하게 내려준, 혀와 비슷한 촉수는 이제 쑥 들어가서 동공에 살짝 걸쳐 있었는데, 흉측함만 제하고 보자면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빼문 혀가 살짝 나와 있는 개랑 비슷했다. 제대로 갈무리도 못하는 게 확실히 티가 났다. 그럴 정신이 없어보였다. 유중혁은 이렇게 거대하고 괴상망측한 존재에도 보통의 존재처럼 상태를 알아볼 지표가 있다는 게 내심 신기했다. 스스로 돌이켜 보니 어쩌면 강아지나 다른 동물로 인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수많은 괴수를 잡아죽이면서, 죽기 직전의 괴수들이 보이는 반응과 비슷했기 때문에 알아본 게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도 체온이 상당히 따뜻했다. 강아지와 비슷했다.

일반적인 강아지들의 체온은 사람보다 조금 높다. 그러니까 지금 김독자는 꽤 따뜻한 상태이다. 그게 문제였다. 유중혁이 기억하기에 김독자는 사람의 상태일때도 항상 냉한 몸을 갖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체온증을 의심할 정도의 온도가 지금 딱 사람이 만지기에 기분 좋게 따뜻하다는 것은, 이 종족 기준으로는 거의 푹 익기 직전으로 봐도 될 것이다. 


의외로 유중혁은 의료에 일가견이 있었다. 동료들이 다쳤을 때 치료를 전담하는 것도 이설화가 없다는 전제 하에 유중혁이었다. 이설화는 종종 십악이 되어 유중혁의 파티에 합류하지 못하는 일도 잦았으니, 그런 부분을 감안하여 유중혁은 늘, 자신이 파티 유일의 힐러가 될 것을 생각하고 스킬을 찍었다. 스킬을 찍지 않더라도 이전 회차에서 이미 습득한 의료 지식도 상당했다. 당연했다. 유중혁은 여러 번 죽었고 그 죽는 과정에서 가해진 몸의 변형은 피험체가 자신일 뿐인 인체실험에 가까웠다. 사람이 어디가 부러지면 어떻게 아픈지도 알고 어떻게 해야 다시 잘 나을지도 알았다. 빨리 나으면서 고통스러운 방법과 덜 아프게, 느리게 낫는 방법도 알았다. 의료 아이템은 항상 넉넉하게 구비해 두었다. 없다면 재료는 근처에 있는 약초들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치료가 가능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닌 이종족의 치료라도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손익과 난이도였다. 유중혁은 이 안에서 가진 것이 별로 많지 않았다. 아직 낮은 확률로 김독자의 죽음이 이 공간을 깨부수는 조건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김독자의 정체를 알게 된 지금 시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스타스트림에서 겉모습은 전부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흉측한 외형을 한 것들이 도움이 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유중혁이 기억하기에 끔찍한 모습을 가진 것들이 사람과 잘 지낸 기억은 가짜 낙원이 유일했다. 그마저도 진짜로 잘 지낸 것도 아니었다. 유중혁은 이젠 리아스식 해안선처럼 보일만큼 불규칙하게 꿈틀꿈틀 퍼진 김독자의 신체를 보며 예쁜 구석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진정으로 보기에 예쁜 구석이 없었다.

못생겼군.

보통은 끔찍하다는 단어를 고른다는 점만 빼곤 군더더기 없는 요약이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이 못생긴 것이 죽으면 또 어떤 여파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점을 상기했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유일하게 유중혁에게 호의적인 존재는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유중혁은 약으로 쓸 만한 것들이 있는지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치료를 행하려 했다. 그리고 곧바로 장벽에 부딪혔다.

...뭘 해야 하지?

그러니까 유중혁의 진지한 고민은 이것이었다. 대충 약을 바르기엔 김독자의 몸체는 너무 끝없이 넓었고 제대로 뭐가 발리는 형태도 아니었다. 현재 그의 상태는 엄밀히 따지자면 기화하기 전의 된 액체와 비슷해 보였다. 이를테면 사람이 체했으면, 등이라도 두드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중혁의 눈으로는 어디가 그의 등이고 어디가 목이고 어디가 배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차라리 혈자리처럼 보이는 곳에 침이라도 꽂아 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김독자가 공격으로 인식하고 유중혁에 대해 감정이 상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치료효과보단 공격효과가 나올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중혁은 성실히 해야 할 것을 했다. 열을 낮추기 위해 나름 서늘한 물에 담근 물수건-동물가죽-도 갖다 올려놓고 (그래봤자 거대한 김독자의 몸 위에 올려놓은 새끼손톱 같았지만), 나름 몸에 좋다는 것도 일단 김독자의 위에 올려놓았(?)다. 도통 어디로 뭘 먹여야하는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몸에 얹어 놓으니 어느샌가 흡수된 것처럼 사라져 있어서 대충 먹었겠거니 했다.

그러기를 며칠.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유중혁이 김독자를 신경쓰면 쓸수록 김독자의 상태는 나빠져만 갔다. 나날이 체온이 오르고 간신히 떠있던 눈은 감겼다. 시꺼멓던 표면은 푸석하게 갈라지고 부서지더니 죽어가는 사람의 거무죽죽한 살빛을 연상시키게 색이 밝아져서 오히려 보기 싫어졌다. 차라리 검은 용암 같았던 시절이 보기엔 나았는데 색이 밝아지니까 표면의 오돌도톨한 돌기들과 주름이 더 잘 보여서 징그러웠다. 사람의 껍데기를 벗겨놓으면 비슷할까. 어쩌면 그 밝아지는 피부가 창백하게 혈색을 잃어가는 얼굴빛과도 같아 유중혁은 불안해졌다. 단순히 불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약초를 발라줘도 죽을 떠먹여도 아무런 변화 없이 죽어가는 괴물을 하루종일 내려보고 있노라면 가끔 다음과 같은 미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물을...바쳐야 하나?

김독자가 단 한 번도 제물을 받는다는 얘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의 편견은 익숙한 쪽으로 작동하기 마련이었다. 일단 평범한 가축 고기는 먹지 않고 대부분의 약도 듣지 않으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유중혁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으며 스타스트림에 구현된 수많은 설화를 고민하여 김독자의 존재를 추측했다. 그리고 급기야 생각은 종교적인 쪽으로 미쳤다.

...기도를 해야 하나?

흔히 게임에서는 기도메타라고 불리는 해법이다. 원래 (특히 TCG 같은 분야의) 게이머들은 전통적(?)으로, 상황이 풀리지 않을 때 다음 패의 드로우나 다음 패턴 피하기를 신에게 온전히 맡기고 기도하는 방법을 취한다. 물론 유중혁은 살면서 게임 내 상황이 자력으로 안 풀린 적이 없어서 그런 적은 별로 없었지만...김독자란 존재는 어쩐지 종교나 신앙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생긴 게 좀 오컬트적으로 생겼다. 게다가 설화를 갖고 유명해질수록 성좌들은 강해지지 않는가. 김독자도 비슷할 수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억지 밥을 먹일 때마다 억지 기도도 같이 시도했다. 종교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대충 지금까지 봤던 십악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사이비 종교 빌런과 성좌들과 성운을 흉내냈다. 쌓인 데이터베이스는 많았으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던가? 알던 것들 중 뭘 골라서 해야할지 몰랐던 유중혁은 성호를 거꾸로 그으며 주기도문과 불경을 이어서 외우는 희대의 종교대통합을 해냈고, 효과는 전혀 없었다. 며칠을 그렇게 했지만 김독자는 여전히 입(입인가?)을 헤벌리고 유중혁이 하는 꼴을 힘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역시 종교랑은 관계가 없었을까? 사실 너무 많이 틀려서 중간이 숭숭 빈 기도문과 경전이라 어디가 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역시 조금 더 고대의 방식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기도는 사실 문명화된 방식의 주문이고, 조금 더 원시적인 방식이라면 단연 제물이렷다.

여기서 유중혁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제사라도 지내야 하나 싶었는데, 쓰러진 김독자 옆에서 소와 돼지를 잡아 바치겠다고 번제를 해봤더니 사실상...고깃집이었다. 잘 쌓아진 장작 위에서 불길은 타닥타닥 잘 타가고 그 위에서 매달린 돼지와 소고기가 기름기가 쏙 빠져가며 맛있는 냄새를 냈다. 나름 김독자를 위한답시고 몇 개체 남지도 않은 것들을 큰맘 먹고 잡은 건데, 이 정도면 그냥 아픈 사람(?) 옆에서 바베큐 구워먹으며 약올리는 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쯤 김독자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은 미디움 레어로 잘 구워진 고기를 씹어먹으면서 김독자란 존재의 죽음을 생각했다. 유중혁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가 죽어도 큰 상관은 없다.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적어도 다시 한 번 그 사람 모습으로 이야기는 해보고 싶었다. 문득 머리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사람 고기를 먹여야 하나?

이건 꽤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비록 지금껏 김독자는 유중혁을 먹으려 든 적은 없었지만 달려든 적은 있었고, 솔직히 지금 김독자의 생김새라면 사람을 먹어야 딱 어울리게 생겼다. 지나친 편견이라하면 할 말은 없었지만 김독자가 다른 종류의 영양분을 섭취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남은 건 사람뿐이었다.

아주 어려운 도전은 아니었다. 딱 상태가 나아질 정도만. 이 정도 크기를 먹이려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변화라도 보이면 확신할 수 있다. 유중혁은 짧은 단도를 꺼내들었다. 어느 쪽을 그어야 피가 적당히 나오고 빠르게 지혈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당분간 왼팔에 힘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유중혁은 맹세코 괴물 하나 살리겠다고 빈혈이 올 때까지 피를 먹일 생각은 없었다. 만일 효과가 있다면 얕보이지 않기 위해 피를 담보로 협박해야겠단 섣부른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김독자는 그 몇 방울밖에 안 되는 양으로도 빠르게 나아졌다. 칼로 팔을 째서 뚝뚝 흐르는 피를 먹일 때의 불쾌감도 잠시, 갑자기 화색(이것을 화색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시 빠르게 꺼매졌다)을 띠고 눈을 껌벅이는 것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피맛을 보자마자 김독자의 상태는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혈색(이것을 혈색이라 불러야 할지 정말 모르겠지만)도 나아지고, 눈에는 총기가 돌아왔으며 비쩍 말랐던 표면은 다시 체액이 축축해졌다. 순조롭게 다시 나날이 징그러워지는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은 좋아해야할지 싫어해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아지는 상태를 보며 유중혁은 갑작스런 부정적인 추측에 빠졌다.

원래 사람을 먹어야 하는데... 날 안 먹고 참았나?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독자가 유중혁을 이런 곳에 가둬두는 이유는 사육 내지는 사냥감 보관 정도밖에 없었다. 사람 고기 전부를 먹는지 아니면 사람 피만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중혁이 포획된 먹이 역할이었음은 자명해 보였다. 그 점이 상당히 유중혁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유중혁이 독안에 든 쥐라는 점이야 이미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니 딱히 절망적일 것도 없었고, 잡힌 입장에서 포식자를 살려주고 있다는 아이러니야 유중혁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괜찮았다. 그러나 김독자가 인간을 먹어야 하는 존재인데 유중혁을 굳이 먹지 않고 살려두고 참았다는 건 유중혁의 심정을 좀 복잡하게 만들었다. 괴물에게도 인간의 감정이 있는가? 아니면 애착이란 관념이 존재하는가? 그간 만났던 온전한 인간의 탈을 쓴 것들도 애착을 표하면서 유중혁을 여러 의미로 잡아먹으려 들었는데? 비록 그 애착이 애초에 혈액을 얻기 위해 발휘된 거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의 상념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니까, 김독자를 생각할 때에 그의 머릿속을 구성하는 것은 간략화하면 한 글자 정도였다. 왜?

유중혁의 기분이 착잡하게 가라앉으나 마나,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김독자는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 힘없이 길게 퍼진 면적이 조금 도톰하게 줄어들고 모이면서 이제 김독자는 하나의 거대 슬라임처럼 뭉쳐졌다. 잠시 늘어졌던 몸을 수복하는 것인지 다소 반구처럼 모인 신체는 끝없이 꾸물댔다. 그 와중에도 눈알 하나를 통해 촉수를(혀인지 손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내밀어 유중혁에게 마치 인사하듯, 또는 악수하듯 한 번 흔드는 건 잊지 않았다. 돌봐줘서 고맙다는 나름의 인사인 모양이었다. 비록 인사하고 나서 연못에 손을 여러 번 씻어야 했지만... 그 접촉 직후로 유중혁의 기분은 잠시 나아졌다.

그 다음 날, 기분이 좋아진 유중혁을 비웃듯이 김독자의 상태는 다시 나빠졌다. 좀 들뜬 기분으로 아침을 먹고 돌아오자마자 축 처진 김독자를 본 유중혁은 당황했다. 약간 어지러울 때까지 피를 먹이고 나서 그날은 하루종일 쉬어야 했다.

그 다음날부터는 거의 숨바꼭질 같았다. 유중혁이 좀 희망을 갖고 들여다보면, 김독자는 다시 빌빌대고 있었다. 유중혁이 김독자를 걱정하며 들여다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나아진 김독자가 다시 꿀렁이며 촉수로 반가움을 표했다. 유중혁의 감정과 김독자의 몸상태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된 그래프를 그리며 위아래로 교차했다. 유중혁이 좀 힘들다 싶을때쯤엔 김독자는 귀신같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그걸 일어났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검은 덩어리가 좀 더 도톰하고 높게 모였다), 유중혁이 좀 희망을 가질라치면 김독자는 다시 또 뻗어 있었다. 그렇게 일 주일 정도를 반복하자 유중혁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아무리 유중혁이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 하더라도 더 피를 째는 것도 무리였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자. 그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저조하고 탈진한 상태로 유중혁은 이를 악물고 김독자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죽든 말든. 죽든가. 저 놈은 완벽히 나을 수 없다. 아주 불치병에 걸린 모양이다. 그렇게 이를 악문 유중혁이었다.

그날 밤, 퀭한 눈으로 나무에 기대 앉아있던 유중혁 앞에 다시 꿀렁대는 김독자(슬라임 상태, 즐겁게 역동함)가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완전히 회복된 모습이었다. 유중혁은 성질이 뻗쳐 뭐라도 던지려고 했지만, 이내 찾아온 빈혈에 머리가 핑 돌아 다시 팔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데 뭔가 축축한 것이 안기듯이 품에 들어왔고 거대한 덩어리가 어깨와 상체 왼쪽 반신을 완전히 감쌌다. 유중혁의 기분이 착잡했다. 어쩐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아먹든가... 그러나 그날 밤에 김독자는 유중혁을 잡아먹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 날부터 유중혁은 돌아다닐 때마다 즐겁게 불규칙적인 박자로 흔들거리는 거대 촉수 덩어리를 달고 다녀야 했다.

처음에 유중혁은 몇 대 때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얄밉게도 김독자 덩어리는 일종의 고양이와 비슷해서, 유중혁이 한 대 칠라치면 몸을 꿀-하며 기막힌 웨이브로 유중혁의 공격을 잘도 피해냈다. 어찌나 열받게도 잘 피하는지 나중에는 애써 긍정적인 사고를 발휘한 유중혁이, 저놈을 시간단층에 들어갈 때 훈련용 샌드백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를 지경이었다. 그 외에 고양이랑 비슷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 컸고, 못생겼고, 흉측했으며, 곁에 있는 인간(유중혁)을 아주 졸졸졸 따라다녔다. 크기는 많이 줄어들어서 옆에서 따라다녀도 제법... 작은 동산 하나가 따라다니는 정도라 무시할 만은 했다. 처음 크기의 김독자가 그대로 따라다녔다면 큰 뒷산이 유중혁을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유중혁이 며칠간 그간의 빈혈상태에서 회복되는 동안 김독자도 꾸준히 곁에 붙어서 회복을 했다. 더는 피를 주지 않아도 자가수복할 능력이 될만큼 괜찮은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꾸준히 고기를 잡아먹었고, 철분과 비타민이 가득한 식물들을 구워먹었다. 김독자는 그 옆에서 계속 돌아다니면서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뭘 했다. 하루하루 모양새가 달라지는 걸 보면 분명히 회복에 필요한 행동은 맞았다. 정말로 회복한 건지 나날이 커지는 김독자의 몸 표면에 가끔 인간의 팔이나, 발톱이나, 손가락들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유중혁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사지 끝만 나왔다가, 어느새 보면 그 형태가 팔꿈치나 무릎까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김독자가 인간의 몸을 다져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이젠 숨길 필요도 없다 이건가. 유중혁은 큰 인내심을 발휘하여 김독자가 얼굴을, 특히 말할 수 있는 입과 들을 수 있는 귀를 다 만들어낼때까지 기다렸다. 가증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참아야 했다. 기껏 살려놨는데 다시 죽이기엔 아깝다.

여섯째 날 결국 거대한 촉수덩어리는 어느새 압축되어 형체가 흐릿한 알몸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한참을 바닥에 엎드러져 경련하듯 몸을 떨던 그는, 잠시 후 다시 익숙해졌는지 간신히 비틀거리는 자세로 일어날 수 있었다. 흐물거리며 형태가 잡히지 않는 얼굴을 제 양 손으로 누르고 만지작거려 조금 또렷하게 이목구비를 잡았다. 그런 후엔 제 손가락을 자기 입 속에 넣어 한참동안이나 혀를 만지작거렸다. 아, 어, 으어, 하고 연달아 소리를 내면서 혀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쪽 손으론 입 주변을 문질렀다. 몇 번 입 주변이나 턱관절을 눌렀다 폈다 하며 한참 소리를 내고서야 그것은 겨우 예전의 발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유...줆....줌...중....중협. 중혁.

김독자가 이름을 불렀기에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드디어 한 대를 후려치는 데 성공했다. 소리가 나며 김독자의 뒤통수가 눈에 띄게 움푹 패였다. 약하게 때렸는데. 유중혁은 순간 놀랄 뻔했으나 김독자가 다시 제 손으로 조물조물 동그란 뒤통수를 빚어내는 것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혁명적인 성형 기술이 개발되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뒤를 못 보고 만든 거라 그런지 전보다 머리통이 살짝 찌그러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볼만했다. 김독자는 기분이 좋은지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었으나 유중혁은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김독자를 자리에 앉히고 1:1 면담에 들어갔다. 긴급상황이었다.

아팠나?

아팠, 어? 팟? 음, 병마가 있엇어.

맞군. 왜 아팠지?

음...

김독자가 답을 주저했다. 이럴 때는 보통 답하기 싫거나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적 양식 안에서 설명이 불가능하게 복잡한 경우였다. 표정을 봐서는 전자보다는 후자 같았다. 유중혁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인간의 피를 먹으면 낫나?

아니.

이번 대답은 굉장히 즉각적이었다. 혹시나 해서 유중혁은 비슷한 질문을 한 번 더 했다.

인간의 피를 먹고 사나?

아니. 전혀 그럴 필요 없어.

거짓말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럼 피 말고 너를 낫게 하는 방법이 또 있나?

김독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유중혁이 끈기 있게 대답을 기다리자, 잠시 후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나를 때려.

마뜩잖은 대답이었다. 알몸으로 쭈그려앉은 남성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유중혁을 바라보며 나를 때리거나...라고 말하며 대답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다시금 머리가 아파졌다. 조롱하거나, 욕하거나...하면 내가좀 괜찮아져. 지금 이 새끼가 자기의 어떠한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라는 대답중인 건 아니겠지? 약간 불순한 의심이 들었지만 유중혁은 참았다. 어쨌든 어떤 특징을 가진 종족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김독자가 말하는 게 유중혁의 추측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대체 무슨 메커니즘인진 도무지 모르겠지만. 유중혁은 다시 주제를 바꿨다. 김독자를 돌보는 내내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혹시, 나를 돌보느라 아픈 건가?

나를 잡아먹지 않아서, 또는 나를 해치지 않아서라는 표현을 돌려 말하려다보니 애매한 문장만 나왔다. 유중혁이 다른 표현으로 다시 말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김독자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는 어감을 통해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몰라서, 표현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단 정말 회피성 침묵에 가까워 보였다.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안 맞추는 걸 보면 꼭 그렇다. 유중혁은 김독자와 자신 양쪽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질문, 아니 제안을 해본다.

그럴 거면 나를 돌보지 않고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나?

그때쯤 유중혁이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는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만약 유중혁을 이 곳에서 오래 머물게 하여 뭔가를 얻는다면 김독자는 거절할 것이다. 과자집에 갇혀 살찌워진 아이들은 마녀의 좋은 양식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기엔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밥 주는 것이 서툴렀다. 딱히 도움을 주지도 않고 있다. 유중혁이 살이 찐다거나 뭔가를 한다거나 하고 있지도 않다. 김독자가 유중혁을 잡아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언젠가 먹어치울 상대치곤 오히려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 애초에 잡아먹을 계획이 없다면 이 이야기는 집을 갉아먹히는 마녀 손해다. 무언가를 데리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돈과 품이 든다. 다른 종족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김독자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을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겨우 한 마디를 했다.

...네가 크면,

뭐?

크면 보내줄게.

유중혁은 기가 차서 코웃음을 쳤다. 난 이미 너보다 크다, 라고 말하려던 유중혁은 문득, 김독자가 '크다'의 단어를 어디까지 어떤 의미로 쓰고 있을지 불안해졌다. 나이? 크기? 설마 그 크기? 유중혁은 김독자가 본래 모습일 때의 크기를 기억해내며 자신이 그 어떤 스킬을 쓰더라도 그 정도 크기는 되지 않을 거라는 점을 알았다. 거신화가 허용되면 가능하려나, 그래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을 정도. 혹시 너무 젊다는 소리이고 나이를 먹어야 보내주겠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유중혁은 이미 인간 기준에서 충분히 커버린 성인이었지만, 종족에 따라 나이를 쳐주는 기준은 다를 테니까. 그러고보니 김독자가 아팠던 것도 수명이 다해서가 아닌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유중혁은 불쑥 물었다.

그러고보니 김독자, 몇 살이지?

유중혁은 김독자의 인간 모습의 나이는 대략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이십 대 중반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괴물의 나이로 따지면 한 열 배쯤 쳐서 이백 오십 살 정도 아닐까.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진 대답에서 유중혁은 자신이 배포가 작았음을 깨달았다.

오천...육천 살?

......

바라건대 유중혁은 김독자의 시간 개념이 그 나이만큼 느릿하진 않길 소원했다. 더는 이 괴물의 한없는 시간개념에 맞춰 여기 머물러줄 수가 없었다.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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