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프레티의 고자, 아니 성불구자 선언 이후로 우리는 샤를로트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정확히는 라프레티와 샤를로트가 마력 계약을 맺고 내가 신에게 입증하는 신녀 역할을 했다. 계약 내용은 서로 배신하지 않기. 기한은 샤를로트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 배반시 마력 완전 증발. 이 세계의 인간은 신력은 없어도 마력은 손톱만큼이라도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 마력 완전 증발은 쉽게 말하면 죽는단 소리다.


'신이라.'


다시 라프레티와 나란히 꽂은 머리핀이 신경쓰였다.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이 안에 있을 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을 지 모르겠지만 류카는 자신이 신이라고 했다. 이런 판타지 세계관은 신도 여럿이라 어느 정도의 신인지는 몰라도 영혼에 관여를 할 정도면 약한 신은 아닐 것이다.


'라프레티에게 말 해야 할까?'


류카는 라프레티의 셀 수 없을 만큼의 배드 엔딩을 보다 못해 관여를 했다고 했다. 그 배드 엔딩을 말하는 게 맞을까? 그것도 당사자에게? 당사자의 연인인 내가?


'나는 못해.'


그래, 신녀가 신을 만날 수도 있지. 나는 라프레티에게 류카를 만난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가 고민을 하는 사이 휴게실의 장식장에 꽂혀있던 꽤 두꺼운 귀족 명부를 꺼내 온 샤를로트가 앞 쪽의 페이지를 펼쳤다. 샤를로트의 손등에 막 생긴 마력 계약의 인장이 손등에서 새파랗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가장 먼저 끌어들이거나, 없애 버려야 할 쪽은 칼락스 공작가야."


샤를로트의 손가락이 황금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 인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라프레티의 손가락은 검을 문 은색의 늑대 인장으로 향했다. 칼락스 공작가와 휘데른 공작가. 대대로 재상인 가문과 황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자체적으로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다.


"휘데른이 아니라? 거긴 제국의 검이잖아."
"휘데른은 그야말로 제국의 검이지 황실의 검이 아니니까. 그곳도 얼마전에 가주가 사고로 죽는 바람에 가주가 바뀌어서 혼란스러운 모양이야. 딸만 둘인데 둘째는 양녀고 첫째가 올해로 열 여덟이라나."


오오, 게임 오타쿠에게는 귀중한 배경 스토리가 술술 풀려 나왔다. 공작가가 당연히 칼락스 하나만 있는 건 아니고 세 가문이 있다. 제국의 검 휘데른, 황금의 칼락스, 마법의 프뤼덴스. 칼락스의 소공자는 메인 공략 캐릭터 중 하나인 아론이고. 프뤼덴스의 젊은 공작은 황실 쪽 루트를 타면 배경 등장인물로 여러번 나오는데 마법사 치고는 꽤 건장한 남자였다.

귀족 명부를 쭉 읽는데 고급스러운 벽시계를 본 샤를로트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귀족 명부의 표지를 보았지만 샤를로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계획은 나중에 세우자. 슬슬 황제가 연회장에 올 거야."
"루이는 어떡하죠?"


나의 물음에 라프레티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안돼, 예쁜 얼굴에 주름 생겨. 손가락으로 미간을 살살 문질러주자 라프레티는 베시시 웃으며 나를 끌어 안았다. 샤를로트가 한심한 걸 보는 눈빛으로 우릴 보며 말했다.


"용사와 신녀를 겁탈 하려다가 기절한 게 뭘 자랑거리라고 떠들겠어. 가자."


하긴. 우리는 샤를로트의 뒤를 따라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마침 아무개 황제 폐하 납시오! 하고 문지기가 입장 콜을 하고 있었다. 황제이니만큼 이름도 엄청 긴데 저 문지기 아저씨 외우느라 고생 꽤나 했겠다 싶었다. 아무리 신녀라도 황제 쯤 되면 대우는 해줘야겠지 싶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일 상석에 앉은 황제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라."


그래도 정무를 보느라 고생을 한 건지 금발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황제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황제의 시선이 라프레티로 향했다가 그 다음 나에게로 향했다. 사파이어 궁에 걸린 초상화에 미화가 없다면 원판이 좋았으니 곱게 늙긴 했는데 루이의 아버지라고 하니 곱게 안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루이가 보이질 않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용사 라프레티여, 인류를 위해 큰 일을 해주었다. 제국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네."
"감사합니다."


삐딱하게 루이의 구슬을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다. 마왕 토벌의 보상은 그거다. 드래곤 하트. 심장이라고 쓰고 마력 동력원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기묘한 물건. 동양에선 여의주라고도 불리는 물건이다. 마력 뻥튀기의 비약이지만 이미 마력이 999인 라프레티에겐 쓸모 없는 물건이었다.


"감사의 뜻으로 드래곤 하트를 하사하겠노라."
"감사합니다 폐하."


고개를 꾸벅 숙인 라프레티는 시종에게서 고급스러운 상자를 받았다. 일단 받아두는 걸까. 또 "금화 3천 개 하사한다." 같은 걸 끝으로 잠시 멈췄던 연회가 재개되었다. 춤을 못춰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모두 우아한 춤을 추기 시작 했을 때 춤이라고는 10년 전 견습 신녀 때 배운 신녀의 춤, 신무(神舞)가 전부인 나는 서둘러 테라스로 향했다. 라프레티가 내 뒤를 따랐다. 라프레티가 유리 문을 닫자마자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엄살을 부렸다.


"하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언니는 저런 분위기 싫어할 것 같긴 했어요."


과장되게 한숨을 쉬는 나에게 라프레티는 웃으며 황제가 하사한 물건들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테라스에 놓인 의자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잠시 바람을 쐬었다. 다시 한 번 내 몸을 더듬거리며 내가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한 라프레티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루이한테서 어떻게 도망친건가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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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휘데른의 두 자매 글을 보신 분이 있다면 그것도 제가 쓴 겁니다 (몇 편 안썼고 지금은 지웠지만.)

그 둘은 리부트를 해서 언젠가 다시 쓰고 싶은데... 지금은 라프레티와 마리아의 글로만도 벅차네요 @_@
태풍 조심하시고 평온한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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