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응.”

유하는 눈짓으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인형처럼 예쁜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아서 귀티가 흘렀다.

“얘는 네 소꼽친구라고 해야 하나. 그냥 아는 애야. 우리 학교에 친구가 있어서 잠깐 놀러 왔어.”

“안녕하세요. 윤세아라고 해요.”

세아가 활짝 웃으면서 인사했다.

“아…안녕. 난 한결이 선배 김유하야.”

유하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한결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티가 흘렀다. 물론 한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세아는 좀 달랐다. 한결과 비슷한 분위기가 났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했다. 유하는 살짝 초라함을 느꼈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예쁘다. 그 이상이 있는 얘야. 한결이처럼. 두 사람 묘하게 잘 어울린다.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뺐다.

세아가 한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눈에 장난기가 흘렀다.

“한결아, 너 어릴 때 내가 30살까지 여친 없으면 장가오라고 한 거 기억나?”

“미친. 그걸 왜 지금 말해. 그건 거절했잖아. 우린 친구야. 그 이상 말하면 죽는다.”

한결이 질색이라는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 말에 유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이 같다. 저 여자애 왠지 비슷한 느낌이야.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상류계층.

“크큭. 여전히 질색이네. 너네 할머니 최 회장님이 얼마 전에 그 말을 또 꺼내시잖아. 그래서 궁금해서 또 한 번 찔러 본 거야.”

세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키득거리며 혼자 웃었다.

유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티 내지 않을려고 했지만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결은 유하의 눈치를 살피며 세아의 등을 떠밀었다.

“너 이제 가. 학교에 나 찾아오지 마. 사람들이 너랑 나 엮는 거 아주 질색이거든.”

“왜? S그룹이랑 K그룹이랑 잘 어울리잖아. 같은 재벌끼리. 원래 끼리끼리 어울려야 하거든.”

유하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S그룹 무남독녀 윤세아. 언젠가 TV뉴스에서 본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이었다.

“그럼 다른 재벌이나 알아봐. 난 싫거든.”

한결이 유하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고 놀라서 세아의 등을 떠밀어서 보냈다.

유하는 그 모습을 잠시 빤히 쳐다보다가 서둘러 시계를 확인하고 강의실로 갔다.

한결이 자신이 부르는 소리가 희미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심경이 복잡했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고 세아 혼자 한결에게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래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두 사람.

유하는 속이 상했다. 그런 자신이 또 한심했다.

한결이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아니라면…. 저렇게 멋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텐데….

한결이 좋았다. 지금 아주 좋았다. 이런 좋은 감정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몰랐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했다. 그 유통기한이 얼마나 될지 몰랐지만.

유하는 뭐라고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답답한 심경에 한숨만 나왔다.

 

*

 

한결은 밤에 컴퓨터로 리포터를 작성하다가 문득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곧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창문이 들썩거렸다.

우르르쾅쾅

게다가 천둥 번개까지 쳤다.

방 안이 어두웠다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한결은 두통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서랍을 열어서 약 봉투를 열어보았다. 약이 하나도 없었다.

“하아. 내 정신 좀 봐.”

한결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유하랑 연애하는 데 푹 빠져서 약이 없는 것도 몰랐다. 얼마나 유하에게 중독된 건지 한결도 알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약이 떨어지는 날은 없었다.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사고가 나던 날씨도 오늘과 같았다. 한결은 어머니와 함께 차 뒷자석에 타고 있었고 사고가 났을 때 어머니가 온몸으로 감싸 안아서 무사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부모님 두 분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사고 트라우마로 몇 년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많이 좋아졌지만 이런 날씨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마다 미리 타둔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떨렸다. 시야도 흐릿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약이 없으니 술이라도 마시고 자자. 와인 한 잔이면 어쩌면 진정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결은 와인을 마시러 1층 주방으로 갔다.

그러다 문득 유하의 방문이 보였다.

와인 보다 좋은 건…. 어쩌면.

한결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울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무리 깐깐한 유하라고 해도 오늘만은 봐줄 것 같았다. 특히나 한결이 불쌍해 보일 때 언제가장 마음이 약한 유하였다.

 

 

유하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서 스케치북에 재미 삼아 낙서를 그리며 멍하니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뭘 그릴지 고민하며 연필을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우르르쾅쾅

천둥 번개가 쳐서 일순간 방이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유하는 자연 현상의 신비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천둥은 언제 들어도 신기했다. 한꺼번에 수 만볼트가 전기가 시원하게 팡 터지는 기분이었다.

와우, 짜…짜릿해.

문 앞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하는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발소리에 집중했다.

하…한결인 건가.

똑똑.

“선배, 저 좀 들어가도 돼요?”

“응. 왜? 나 지금 막 자려고 눈감았는데….”

당황한 유하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유하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한결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베개를 꼭 안고서.

한결의 베개를 보자 유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지? 이렇게 천둥이 치는 날에. 미친 건 아니겠지. 설마….

유하는 너무 당황해서 들고 있던 연필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 데굴데굴 굴렀다.

두근두근.

뭐야, 이 녀석 이 밤중에 베개를 왜 들고 나온 거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빨개졌다.

“야, 뭔데? 나 이제 잘 건데. 할 말 있으면 거기서 해.”

유하가 침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양손으로 엑스자로 만들어서 몸을 감싸 안으면서 말했다.

한결은 시무룩하니 유하를 쳐다보았다. 눈빛에 욕망이 아닌 슬픔이 깃들어있었다.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깐. 걱정하지 마요.”

뭐야, 그럼 그게 아니고 뭔데? 침대로 오지 말고 문 앞에서 얘기 하라니깐 역시 내 말은 안 듣는구나. 하아.

유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 근데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 늘 자기 전에 꼼꼼하게 확인하는데 저 녀석 어떻게 들어온 거야. 손잡이가 고장 난 건가….

한결은 유하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안색이 좀 안 좋은데.”

유하는 한결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도 없고 정상인 것 같았다.

“아픈 거 같지 않은데.”

“아파요.”

한결이 유하의 말에 우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유하의 손목을 잡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마음이.”

촉촉이 젖은 눈빛에 유하는 갑자기 마음이 찡하니 아팠다.

뭐지? 왜? 내 마음도 아픈 걸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한나 누나랑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한결은 유하 옆에 나란히 베개를 두고 자연스럽게 누웠다.

“어…. 근데 여기서 자려는 거 아니지? 갑자기 왜 이래? 어?”

당황한 유하가 등골에서 땀이 흘러나왔다.

이상해. 오늘 너무 이상해. 아니 한결이는 원래 이상했어.

한결은 유하를 힐끔 보더니 수줍게 말했다. 얼굴을 살짝 붉혔다.

“우리 애인 사이 맞죠?”

“응. 그…그렇지. 아직 공식이 아니라 비공식이긴 하지만.”

유하가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알면서 뭘 물어.

유하는 아직도 한결과 사귀는 사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잠에서 깨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한결이 유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후우.”

한숨을 진하게 쉬었다.

방안에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다시 한번 천둥 번개가 쳤다.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이런 날은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우울증 약을 먹고 자요. 안 그러면 잠을 잘 수가 없거든요.”

“아….”

유하는 한결이 애써 슬픔을 참으며 하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미…미안. 나는 또.

유하는 형으로서 부끄러웠다. 한결이 같이 자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결이 유하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선배랑 연애한다고 너무 푹 빠졌나 봐요. 약이 다 떨어진 걸 몰랐거든요. 술이라도 마실까 했는데……. 그렇다고 우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우울함을 누르고 덮는 것 뿐이지.”

한결의 눈동자가 더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부…불쌍해.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을까…. 흑.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하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결은 그 사이에 편안하게 자세를 잡고 침대에 누웠다.

너무…자연스러워. 뻔뻔하다. 마치 준비한 것 같다.

유하의 팔을 툭툭 치며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누우라고 눈으로 말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유하는 한결 옆에 누웠다.

유하는 한결과 나란히 누워 있다는 사실에 조금 설렜다. 사귀고 나서 이렇게 나란히 한 침대 누운 건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물론 연인 사이라서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다.

으…. 근데…. 한결은 너무 빨라.

유하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너무 한꺼번에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한결이 유하를 불쌍한 표정으로 쓱 쳐다보았다.

“위로해줘요.”

“…….”

연인이라면 위로해 줘야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유하는 말 없이 한결을 뒤에서 꼭 안아줬다. 한결의 달콤한 바디 샴푸 냄새와 체향이 함께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도.

“좋아요. 엄마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해요. 오늘은 약 없이도 푹 잘 수 있을 거 같아요. 힛.”

한결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눈을 스르륵 감았다.

두근두근.

한결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유하는 한결이 눈을 감자 안심이 되었다.

어휴…. 깜짝 놀랐네. 그건 아닌가 보다. 난 왜 이렇게 요즘 야한 생각만 하는 거지.

유하는 너무 한쪽으로만 한결을 생각한 것 같아서 괜히 미안했다.

한결의 넓은 등판이 새삼 든든했다. 잠옷 아래로 한결의 탄탄한 근육과 탄력적인 피부가 느껴졌다.

흐음…. 역시 조금 야하긴 했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등을 퍽퍽 때리며 쫓아내기도 그랬다.  쉽게 수긍하며 갈 한결도 아니었다. 이렇게 우울한데…뭔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유하도 잠이 와서 하품을 크게 했다. 한결을 꼭 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 자면서 편안한 기분을 느낀 건 성인이 되고 나서는 한결이 처음이었다.

어휴…. 이런 걸 보면 나도 이 녀석 많이 좋아하나 봐.

유하는 새삼 그 사실을 깨닫자 얼굴이 빨개졌다. 가슴이 설렜다.

오늘 잠은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한결이 휙 돌아서서 유하와 마주 보며 누웠다. 눈빛이 번뜩였다.

“잠이 올 것 같았는데 역시……. 하고 싶어서 안 되겠어요.”

슈크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